‘내일’, 뻔한 사이다 대신 사연을 들어주는 걸 선택한 이유

내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을 막는 ‘위기관리팀’. 실제 현실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은 팀이지만 사실 이런 팀은 불가능하다. 일일이 그런 위기 앞에 놓인 인물들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미리 찾아내 예방할 것인가. 그래서 MBC 금토드라마 <내일>은 망자를 인도하는 저승사자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런 선택을 막는 역할을 부여한 판타지로서 풀어낸다. 

 

그래서 <전설의 고향>에서나 보던 옥황(김해숙)은 저승독점기업 주마등의 회장으로 등장하고 저승사자들은 ‘인도관리팀’, ‘위기관리팀’ 같은 직장의 팀으로 그려진다. 위기관리를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기에 처한 이들의 과거나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심지어 남은 자를 지켜달라는 망자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한다. 모두 판타지지만, 이런 판타지를 구성한 이유는 거기 담긴 현실의 문제들과 그 현실로 인해 무너지는 삶에 드라마가 손을 내밀어주기 위함이다. 

 

다시 가해자를 맞닥뜨린 학교폭력 피해자, 번번이 시험에서 떨어지는 장수 공시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자책하다 망자를 따라가려는 가난한 싱어 송 라이터의 에피소드를 순차적으로 소개하면서 <내일>은 그들이 왜 그런 위기에 몰렸는가 하는 이야기를 판타지 방식으로 들어준다. 즉 기억 속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과거로 타임리프를 하고, 망자를 통해 그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 식이다. 

 

즉 <내일>은 위기관리를 하는 해결의 이야기만큼, 왜 이들이 이런 위기에 처하게 됐는가에 대한 사연이 전편에 깔려 있다. 이것은 마치 이런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일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라는 작가의 관점이 담겨있다. 위기관리팀의 팀장 구련(김희선)과 대리 임륭구(윤지온) 그리고 어쩌다 한시적으로 이 일에 합류하게 된 최준웅(로운)은 그래서 각자의 방식으로 위기에 처한 이들의 사연을 듣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캐릭터가 제각각인 이 위기관리팀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앞둔 이들을 대하는 방식 또한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구련은 웃음 자체가 없는 냉정한 모습을 일관되게 보인다. 물론 이면에는 그 누구보다 저들을 구하기 위한 마음이 숨겨져 있지만, 결코 감성적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는다. 구련은 이런 이들을 감싸주기보다는 질타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던 학교폭력의 피해자에게 구련은 오히려 날선 이야기를 쏟아낸다. “극복하려고 노력을 해 안되면 더 해 이겨낼 생각을 하긴 했어 네가 너무 나약해 빠져서 싸울 용기도 의지도 없지?” 

 

하지만 최준웅은 구련과는 다르다. 그렇게 말하는 구련의 매몰찬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신 그런 아픔에 처한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래서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껴안아주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를 잃고 절망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우진(강승윤)을 망자가 된 나영(이노아)이 어떻게든 구하려고 접근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어준 것도 최준웅이었다. 

 

물론 이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공감해주고 구해내려는 그 마음은 동일하다. 다만 이렇게 냉정한 구련과 따듯한 최준웅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이들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방식을 드라마가 의도한 건 이런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냉정함과 따듯함이 모두 필요하다는 걸 에둘러 보여주기 위함일 게다. 

 

이러한 캐릭터 구성에서도 엿보이는 <내일>의 서사는 단순한 사이다 해결이 아닌 저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사이다 해결이 현실적인 도움이 될 수는 없다는 작가의 관점이 투영된 것이다. 더 이상 내일을 기다릴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연을 들어주고 그 이유를 알게 해주는 것. 

 

사고로 먼저 간 아내 때문에 절망에 빠진 채 아내를 따라가려는 우진을 멈춰 세운 건, 우진이 그 사고에서 살아남게 된 이유가 바로 아내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다. 즉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남편을 살리기 위해 핸들을 돌렸다는 사실을 구련이 들려준 것. 그 이야기에 우진은 살아야할 이유를 찾아낸다. 

 

“남겨진 사람만 슬픈 게 아니야. 떠난 자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이승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게 내일을 살아갈 자들의 의무라고 생각해.” 구련이 준웅에게 해주는 이 말에는 가까운 이를 잃은 사람들이 그 죽을 것 같은 절망감 속에서도 왜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담겨있다. 그리고 이건 다름 아닌 먼저 떠나보낸 이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남은 이들에게 전하는 이 드라마의 위로이기도 하다.(사진:MBC)

‘나의 해방일지’, 흰자의 삶에 대한 박해영표 위로

나의 해방일지

“넌 그냥 딱 촌스러운 인간이고, 난 그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는 경계선 상의 인간이고. 걔가 경기도를 보고 뭐라는 줄 아냐?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창희(이민기)는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이유로 경기도에 살아가는 자기 삶의 환경을 이야기한다. 서울과 경기도를 계란 노른자와 흰자로 비유해 말하는 대목이 웃음을 준다. 그런데 그 뒤에 어딘가 짠한 페이소스 같은 게 남는다. 이건 대체 뭐지?

 

<나의 해방일지>는 경기도 남쪽 수원 근처 산포(가상의 지명이다)라는 곳에 살아가는 창희, 미정(김지원), 기정(이엘) 남매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사실 어느 정도는 과장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고 어떤 건 너무나 공감가는 대목도 있지만, 서울의 변방에 살아가는 이들이 처한 상황들을 <나의 해방일지>는 빵빵 터지는 코미디로 먼저 채워 넣는다.

 

출퇴근만 했을 뿐인데 하루가 다 가는 이 흰자의 삶 때문에, 미정은 회사에서 지원하는 동호회 하나 들지 못하고 회식에 가서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이유는 하나. 집이 너무 멀어서다. 기정은 출퇴근 하다 인생이 끝장날 것 같은 답답한 삶을 토로한다. 만나자는 남자가 약속장소를 삼청동으로 잡는 것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정을 힘들게 한다. 경기도민이 주말에 서울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냐며 그런 인간을 소개시켜준 이를 질타한다. 

 

창희가 다른 남자가 생긴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꺼내놓은 감정을 들여다보면 그 흰자의 삶이 준 고충이 담겨있다. 강북에 사는 여자친구 때문에 헤어지고 집에 가는데 매일 1시간 반이 걸렸다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그러면서 갑자기 서울과 경기도, 도시와 촌스러움으로 나뉘는 노른자와 흰자의 삶이 애인과 남친이라는 지칭의 차이로까지 등장해 감정을 건드린다. 결국 창희는 “그 놈은 서울 사람이냐?”는 자격지심 가득한 말까지 터트린다. 

 

박해영 작가가 돌아왔다. 우리에게는 <또 오해영>과 <나의 아저씨>로 기억되는 작가. 그런데 박해영 작가가 코미디도 이렇게 잘 썼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해방일지>는 빵빵 터지는 웃음으로 채워진다. 그 웃음은 도시인들에게는 로망으로까지 여겨지는 전원생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가져온 데서 비롯한 것들이다. 

 

서울에서 양복 챙겨 입고 멀쩡하게 일하던 이 삼남매가 택시비를 아끼려고 강남역에서 만나 같이 택시를 타는 광경이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당 한 편에 있는 수돗가에서 웃통을 벗어던지고 물을 끼얹는 창희의 모습이 그렇다. 주말에 전원생활을 즐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하는 파 농사로 땀에 절어 일을 하는 모습은 또 어떻고. 박해영 작가는 코미디도 잘 쓴다. 

 

그런데 이러한 흰자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건 단지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경기도민이라는 지역이 가진 소외감이나 고충을 드러내기 위함만이 아니다. 그건 어떤 걸 중심으로 세워두고 그것이 마치 바람직한 인생인 양 내세워지는 세상에서 그 바깥에 놓여진 이들이 겪는 소외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그 소외 속에서 답답하고 그렇게 살다 인생을 다 보낼 것 같은 불안감에 빠져 있다. 

 

그런 소외는 단지 지역적 차이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물론 우리나라는 지역이 그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회사 생활에서 동호회 같은 것에는 관심 없는 아웃사이더이거나 남녀관계에 있어서도 모두가 거치는 걸 자신만 빼놓고 지나는 일을 겪는 누군가에게서도 생기는 일들이다. 즉 창희, 미정, 기정은 본인들이 경기도민으로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소외를 겪고 있다 느끼지만, 그 집에서 일을 해주며 살아가는 구씨(손석구)는 이들보다 더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일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그는 할 일이 없을 때는 멍하니 깡소주를 까는 걸로 시간을 죽인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래서 이렇게 소외된 이들이 그 답답한 일상을 버티다 버티다 드디어 폭발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결국 모종의 무언가를 터트리는 이야기다. 2회의 마지막에 미정이 집으로 돌아가던 그 챗바퀴의 마지막 발길을 되돌려 갑자기 구씨(손석구)에게 다가가 “날 추앙해요”라고 어색한 단어까지 동원해 얼토당토한 제안을 하는 건 그래서 우스우면서도 짠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거나 심지어 관심 갖지 않는 것 같은 소외 속에서 미정은 자기보다 더 바깥에서 살아가는 구씨에게 명령하듯 그런 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웃음과 눈물, 희극과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나의 해방일지>는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빵빵 터지는 웃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점점 다가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이 왈칵 우리 앞에 쏟아진다. 과연 이 변방에서 흰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곳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해방은 과연 노른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진정한 해방은 어디서 찾아질 수 있는 걸까. 웃기지만 짠한 페이소스가 가득한 박해영표 희비극이 가진 매력이다.(사진:JTBC)

이정은과 차승원으로 연 ‘우리들의 블루스’, 무슨 이야기를 건네고 있나

우리들의 블루스

“성질 그 때 터프하고 어쩌다 웃을 때는 따뜻하고 밝고 뽀송뽀송 예뻤지개. 패기도 있고. 그 때 우리 다 그랬지개.” 깔깔 웃으며 바닷가에서 뛰놀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그 때 난 어떤 모습이었냐고 묻는 한수(차승원)에게 은희(이정은)는 그렇게 말한다. 은희의 그 말을 들으며 한수도 그 때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묻어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그치? 가끔 너무 가난히 싫어서 괜히 울컥하긴 했어도 그 때 나 니들하고 놀 때 곧잘 웃기도 했어 그치? 지금처럼 재미없고 퍽퍽한 모습은 아니었어. 그치?”

 

하지만 이제 40대 후반, 오십 줄을 앞두고 있는 한수는 삶이 재미없고 퍽퍽하다. 빚에 허덕인다. 아내와 딸을 골프 유학을 보낸 기러기 아빠. 프로골퍼로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딸이지만 성적이 뚝 떨어져 2부 리그에서 뛰는 딸도 또 그를 뒷바라지하는 아내도 이제 더 이상 유학을 포기하고 싶어 한다. 은행 지점장이지만 집도 퇴직금도 다 딸 유학비로 날아갔다. 포기해야 맞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처럼 보여 포기할 수도 없는 삶. 그의 삶은 발톱이 훌쩍 들려버려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는 속살 같다. 

 

잘 될 때는 수백 마리 이상 생선 대가리를 잘라가며 억척스럽게 일해 동생들 다 대학 보내고 장가 보내고 집도 사주며 살아온 은희. 그런 삶에 한수가 “대단하다”고 말하자 은희는 웃으며 자기 삶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한다. “이번 생은 가족들 다 뒤치다꺼리 하다가 나 인생 쫑나는 걸로.” 그의 삶은 생선 자르다 잘못 해 손에 달고 사는 상처를 닮았다. 그럼에도 대충 밴드를 붙이고는 계속 칼을 쥐고 생선 대가리를 치며 살아가는 삶. 

 

그런 은희의 상처에 한수가 밴드를 새로 붙여준다. 은희 역시 한수의 발톱이 빠진 걸 보고는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밴드도 붙여준다. 대놓고 “내 첫사랑!”하고 부르는 은희는 물론 한수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이미 결혼해 살아가는 한수와 우정의 선을 지키려 한다. 한수는 물론 은희를 친구로서 좋아하지만, 퍽퍽해진 삶에 건물 몇 채씩 갖고 있는 은희에게 접근해 당장 필요한 돈을 빌리고픈 욕망이 생겨난다. 별거 중이라 거짓말을 하고 두 사람이 첫 입맞춤을 했던 목포로 여행가자고 은희에게 제안한다. 

 

한수와 은희는 사는 모양이 너무나 다르지만 둘 다 그리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빚에 허덕이는 한수는 친구 은희에게 그런 나쁜 마음까지 먹게 된 자신의 처지에 더 절망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치기어린 학창시절 바다로 뛰어들었던 그 모습과, 이제 나이 들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느껴진다. 은희는 그 모습에서 한수의 절망을 슬쩍 알아차린다. 

 

돈도 잘 벌고 건물도 몇 채나 갖고 있지만 은희 역시 삶이 즐겁지는 않다. 그는 학창시절 목포에 수학여행을 가서 대뜸 한수에게 입맞춤 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마치 그 기억이 있어 매일 손을 베여가면서도 이 일을 버텨내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 그에게 보이는 한수의 절망은 자신에게도 아픔이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4명의 인물들의 대한 이야기를 한수와 은희로부터 시작했다. 살짝 살짝 소개된 14명이 현재 살아가는 삶은 모두가 만만찮아 보인다. 마치 제주 바다의 그 거친 격랑 속에서 살아가는 삶들처럼 보인다. 드라마는 첫 회부터 제주도 바닷가와 어시장 사람들은 물론이고 곳곳을 떠돌며 물건을 파는 이들까지 거칠지만 무감한 듯 버텨내는 삶들을 담아낸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거칠지만, 드라마는 그 복작대는 삶이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다. 

 

은희는 어머니가 밭에서 일을 하다 일사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시장 한 켠에서 좌판을 하는 어머니들, 옥동(김혜자)이나 춘희(고두심)를 마치 친엄마 대하듯이 챙긴다. 동석(이병헌)은 마트 하나 없는 곳에 차로 물건을 가져다주는 만물상이지만, 이런 저런 물건들을 갖다달라는 그 곳의 주민들에게 툴툴 대면서도 가까운 이웃처럼 대하는 사람이다. 해녀로 물질을 하고 저녁에는 술을 파는 영옥(한지민)은 동네남자들에게 헤프다는 이유로 다른 해녀들에게 욕을 먹지만 진지한 관계를 원치 않는다. 진지하게 다가오는 정준(김우빈)에게 “그러다 다친다”며 거리를 두는 영옥에게서도 무언가 드러나지 않은 인간적인 냄새가 묻어난다. 

 

제주바다는 아름답지만, 한 발 다가서면 무서울 정도로 거칠기도 하다. 그건 어쩌면 거친 풍파 속에서도 이를 맞으며 버텨낸 삶들이 녹아난 아름다움이 아닐까. 무섭게 목숨을 잡아먹기도 하지만, 해녀들에게 아낌없이 삶의 터전을 내주는 바다. 은희는 그래서 제주바다를 닮았다. 상처 가득한 손이 말해주는 그 거친 삶의 이면에는 자신을 희생해 가족들 챙긴 마음이 숨겨져 있어서다. 그 바다 속으로 절망적인 한수가 뛰어들고 있다. 과연 은희는 한수의 그 절망도 넉넉히 안아줄까. <우리들의 블루스>가 앞으로 그려나갈 14명의 삶이 마주한 바다와 그럼에도 살아나가는 그 삶이 전해줄 먹먹한 위로가 기대되는 지점이다. (사진:tvN)

‘파친코’가 담아내고 있는 한국인의 저력

파친코

“1910년 일본은 제국을 확장하며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 치하에서 많은 한국인이 생계를 잃고 고향을 뒤로하고 외국 땅으로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견뎠다. 가족들은 견뎠다. 여기 몇 세대에 걸쳐 견뎌낸 한 가족이 있다.” 

 

애플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한 가족이 4대에 걸쳐 버텨내고 견뎌낸 삶을 담겠다고 한다. 자못 비장한 자막이 흘러나온 후 드라마는 선자의 어머니 양진(정인지)의 결의에 찬 얼굴을 비춰준다. ‘몇 세대에 걸쳐 견뎌낸 한 가족’을 그리는 것이지만, 그 중심에 바로 여성이 있다는 걸 드라마는 그렇게 말한다. 

 

무당을 찾아온 양진은 어머니가 박복했고 자신까지 낳아 고생하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마음이 아파 술만 먹고 다녀 자신과 동생은 거지처럼 빌어먹고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을 언챙이라 장가를 못간 하숙집 아들과 혼인시키고, 그래서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 모두 죽었다는 것. 그가 무당을 찾아온 건 어떻게든 지금 또 가진 아이를 살리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양진은 딸 선자(전유나)를 낳는다. 

 

딸이 너무나 귀한 아버지는 선자에게 다짐하듯 말한다. “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내 뭔 짓을 해서라도 이 세상 드러운 것들이 니 건들지도 못하게 할 거라고. 아버지 그 약속 지킬기다.” 그런 아버지는 결국 병으로 돌아가신다. 그 앞에서 오열하는 어린 선자의 모습에 아버지가 남긴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옛날에는 내 팔자가 왜 이리 모진가 할 때가 있었다. 오만천지 다 행복해도 내랑은 평생 먼 얘긴지 싶었데이 그런데 니 엄마가 내게 오고 니도 생겼지. 그라고 보니께 팔자랑 상관이 없는 기라. 내가 니 부모될 자격을 얻어야 되는 거더라. 선자야. 아버지가 강해져갖고 세상 더러분 것들 싹다 쫓아버렸으니까 아인나 니도 금세 강해질 거다. 나중에는 니 얼라들도 생기겠지. 그 때 되면 니도 그럴 자격이 되야 된다. 선자 니는 할 수 있다. 나는 니를 믿는다.”  

 

<파친코> 첫 회에 담긴 선자네 가족의 이야기는 1915년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을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세상 더러운 것들이 건들지도 못하겠다 했던 아버지는 결국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그 모질고 힘든 세상 앞에 선자가 마주하게 되는 것. 그가 걸어갈 한 평생의 삶을 우리는 근현대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원폭 투하와 일본의 항복 선언 그리고 터진 한국전쟁 등등. 그 과정에서 선자는 일본으로 넘어가 파란만장한 삶을 버텨낸다. 김치를 리어커로 만들어 팔아가며 자식들을 부양해온 삶.

 

<파친코>는 선자네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파란만장한 한 세기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첫 회, 선자네 하숙집에서 술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아저씨들이 ‘뱃놀이’를 부르는 모습은 그 자체로 뭉클한 면이 있다. 어찌 보면 일제가 다 빼앗아가는 통에 더 가난하고 더 고단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이들의 노래에는 한과 더불어 흥이 가득하다. 가난하지만 나눠 먹는 상이 풍족하고, 일제의 폭력 앞에 짓밟히지만 당당하다. 

 

<파친코>가 그리는 선자네 가족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네 조상들의 모습은 그래서 그 자체로 뭉클한 면이 있다. 그것은 무수한 외세의 침탈을 받아온 한국인들이 끝까지 버텨내는 끈질긴 생명력과 더불어, 가난해도 정이 있고 또 당당한 삶의 면면들이 묻어나서다. 이런 모습은 선자라는 캐릭터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선자(김민하)가 갖지 말아야할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숙집에서 양진의 보살핌으로 죽다 살아난 이삭은 딴에는 도움이 되겠다며 선자에게 입양을 하면 어떻겠냐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선자는 단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세상이 다 무시하는 사람의 사랑 받으면서 컸어예. 우리 아부지. 이래가 아부지 생각하는 게 뭐 염치가 없지만서도 다들 우리 아부지 평생 장가도 못가고 자식도 없을 기라캤는데 지가 요래 있잖아예. 없어야 할 아가 요 있다 아입니까. 야도 있으면 안되는 아지만 요 배 속에 잘 있심니더. 야도 사랑받으면서 클기라예. 지가 밤낮으로 일해가 손톱이 다 부러지고 허리가 뽀사지고 배를 쫄쫄 굶는 한이 있어도 내 아는 부족한 거 하나 없이 키울 겁니더. 그래 약속했십니더. 지 아부지 지한테 약속하신 것처럼예. 안돼지예. 지 아는 못 버립니더.”

 

세상 더러운 일들이 삶을 업신여기고 힘들게 만들어도 끝끝내 버텨내는 힘이 만들어내는 끈질긴 생명력. 선자는 그렇게 부모의 간절함 속에서 태어났고, 선자 역시 그렇게 자신에게 온 아이를 키우려 한다. 그리고 그 삶의 무게는 이제 노년의 선자(윤여정)의 얼굴 주름 하나하나 속에 각인되어 있다. 

 

1989년의 선자와 1915년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온 선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절묘하게 교차되면서 전해지는 <파친코>에서 노년의 선자 역할을 하는 윤여정의 연기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옛 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흘려도 거기에 만만찮은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밤낮으로 일해 손톱이 다 부러지고 허리가 부서지고 배를 쫄쫄 굶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 아이만큼은 부족한 거 하나 없이 키우겠다는 다짐. 그것이 한국인의 저력이라고 선자의 패인 주름은 말하고 있다.(사진:애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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