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2' 그 전과 그 후

‘슈퍼스타K2'가 보여준 건 희망이었다. 단지 중졸 학력에 환풍기 수리공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노래를 놓지 않았던 허 각이라는 한 청년의 성공담 때문만은 아니다. ‘슈퍼스타K2'는 현 획일화의 길로만 걷고 있는 가요계에도 큰 희망을 주었다.

물론 아이돌 가수들의 활약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그들만이 우리네 가요의 전부인 양 비춰지고 조명되는 것은 큰 문제. 5분 내외의 짧은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현 가요 프로그램들의 성격상, 파격적인 비주얼에 가수들이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선정성 논란도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슈퍼스타K2'의 무대는 비주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진심이 담긴 노래를 통해 충분히 대중들을 열광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것은 기존 가요 프로그램들에는 없는, '슈퍼스타K2'만의 그 무엇이 대중들의 갈증을 풀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그 갈증은 무엇이었을까.

그 첫 번째는 다양한 음악이다. 현 가요 프로그램들의 음악들은 거의 젊은 아이돌 그룹에 집중되어 있고 그 음악도 트렌드를 따라가기 마련이라 다양성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슈퍼스타K2'는 비교적 다양한 음악들을 보여주었다. 댄스와 R&B는 물론이고 포크나 록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음악의 다채로움이 있었다.

장재인이 보여주는 독특한 창법에 얹어진 포크적인 감성은 심사위원 윤종신이 “떨어진다 해도 비주류 음악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그녀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 했다. 강승윤의 시원스런 록 보컬은 ‘본능적으로’라는 윤종신의 노래를 완전히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존 박은 자기 스타일로 ‘취중진담’을 다르게 해석했고, 허 각은 특유의 강렬하고도 매력적인 고음으로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를 노래했다.

이처럼 가수들이 저마다의 창법과 스타일로 해석해서 부르는 노래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노래의 다채로움 그 자체다. 늘 비슷비슷한 스타일들이 유행처럼 반복될 때,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가수 자신의 개성으로 재해석해내는 ‘슈퍼스타K2'의 면면은 참신하다. 트렌드에 가수가 꿰맞춰지는 무대보다, 가수가 가진 개성에 대해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수에 집중하는 형식으로서 가져온 음악과 스토리텔링의 조화는 우리가 기존 가요 프로그램에서 느끼던 두 번째 갈증이다. 무대에서 잠깐 동안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기존 가요 프로그램과는 달리, ‘슈퍼스타K2'는 리얼 버라이어티쇼 형식을 무대와 연동함으로써 노래 밑바탕에 스토리를 깔았다. 똑같은 노래를 해도 강승윤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허각이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에는 확실한 차이가 생긴다. 노래의 기교와 퍼포먼스만이 아니라, 그 노래가 담는 마음까지 들려주기 때문이다.

허각이 최종 우승자가 된 것은 단지 그의 뛰어난 가창력 때문만이 아니다. 냉철하게 스토리적으로 바라보면 허각이 가진 스토리가 존박이 가진 스토리보다 훨씬 더 극적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이미 20위권에 들었던 존박이 ‘슈퍼스타K2'에서 우승을 하는 장면보다, 생계를 위해 환풍기 수리공을 하면서 무대를 포기하지 않고 노래해왔던 허각이 우승하는 장면을 더 바란다.

현재 대중들은 노래와 가수만이 아니라 거기에 깔려있는 스토리도 원한다.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에서 마치 놀이처럼 만들어지고 불려진 노래가 음원 차트에 올라가는 것은 바로 이런 스토리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잘 말해준다. 하지만 작금의 가요 프로그램의 무대는 이러한 변화된 대중들의 욕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순위별로 가수들이 올라와 노래를 부르고 내려가는 오래된 형식의 반복이다.

주로 자정에 편성되는 라이브 무대 형식의 음악 프로그램들은 더 많은 스토리를 전해주지만 편성 자체가 밀려있는 데다가 그것 역시 옛 형식의 재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슈퍼스타K2'는 그런 점에서 대중들의 달라진 무대에 대한 요구를 어느 정도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전부 오디션 형식일 필요는 없다. 다양한 가수들의 스토리를 어떻게 하면 좀 더 드라마틱하게 보여줄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면 해답은 나오지 않을까.

‘슈퍼스타K2'는 끝났다. 이제 여기서 주목받은 허각이나 존박, 장재인, 강승윤, 김지수 같은 가수들은 본격적인 가요계 진입을 위해 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설 무대가 없거나(이미 지상파들은 이들의 출연을 허락하지 않는 눈치다), 선다 하더라도 그저 달라지지 않는 기존 무대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스타일과 색깔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언제까지 ‘슈퍼스타K3'만을 기다리며 지낼 것인가.

'심야의 FM'은 어떻게 수애의 껍질을 깼나

연기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연기력? 외모?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꼽는다. 신뢰성 있는 목소리는 연기와 외모에 어떤 아우라를 갖게 해준다. 수애는 그런 배우다. 그녀의 착 가라앉은 안정된 목소리는 믿음을 주며 심지어 대단히 분위기 있는 여성의 아우라를 덧씌워준다. 그런 목소리로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면 웬만한 사내들은 그걸로 넉다운이다. 수애는 목소리를 타고난 여배우다.

그런 그녀는 왜 자신의 소리를 부정하는 영화를 찍었을까. '심야의 FM'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스릴러를 장르로 삼고 있지만 소리로 시작해 소리로 끝나는 소리에 관한 영화다. 수애는 '심야의 FM'을 두 시간 동안 진행하는 DJ다. 이렇게 분위기 있는 목소리가 고요한 심야에 울려 퍼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수애의 신뢰가 가는 목소리는 앵커였다가 DJ가 된 선영이라는 캐릭터의 이력을 단박에 수긍하게 해준다. 게다가 그녀는 방송 멘트의 영역을 넘어서더라도 할 말은 하는 여자다.

문제는 바로 이 마성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빠져버려 현실감각조차 잃어버린 한동수라는 연쇄살인범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지나치게 현실로서 추종하며 그저 말일 뿐인 진술들을 실행으로까지 옮기는 연쇄살인범. 한동수를 라디오라는 미디어에 열광하는 대중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미디어, 특히 라디오가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히틀러가 대중들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 강력한 힘을 일찍이 보여주었던 라디오. 라디오로 대변되는 미디어의 힘.

하지만 연쇄살인범이 선영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그녀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신뢰감 가는 목소리는 차츰 떨리고 흔들리고 결국에는 방송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욕설까지 튀어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선영은 자신이 그동안 그토록 떠들어왔던 수많은 말들이 의심스러워진다. 이미 발화되는 순간 기억 속에서조차 지워버린 자신의 그 말들이 듣는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힘으로 작용해왔다는 것. 그녀의 신뢰감 있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댔을까.

이렇게 수많은 말을 쏟아내며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우며 살아온 그녀가 이제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연쇄살인범의 말을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겨야 된다는 것은 상황의 역전이다. 수 년 간 쏟아낸 말들의 보복을 두 시간 동안 압축해서 받아내며 그녀가 구해야할 존재가 아이러니하게도 말을 하지 못하는 딸이라는 것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분명히 해준다. 우리가 던지는 수많은 말들, 때론 감미로운 목소리로 때론 강압적임 목소리로 다른 사람을 움직인 그 말은 과연 얼마나 진심이었을까. 과연 그것은 진정한 소통에 이르렀을까. 라디오 같은 미디어는 과연 그 말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 속 모든 이야기는 다시 수애라는 목소리를 타고 난 여배우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늘 단아하고 분위기 있는 그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확실한 신뢰감을 주었지만, 그것이 과연 그녀가 가진 전부일까. 혹시 그녀의 더 많은 모습들은 목소리로 덮여져 보여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수애는 이 영화 속 선영이 겪은 껍질을 깨는 고통을 연기하면서 자신의 장점이자 한계로 지목된 그 목소리를 깨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앰블런스를 타고 가면서 그녀가 "저기요 라디오 좀 꺼주세요"라고 말할 때, 혹시 그것은 더 이상 늘 단아함과 분위기 있는 목소리로 규정되던 자신의 이미지를 꺼달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 "오늘이 여러분과의 마지막 밤이네요"라고 말할 때도.

"영웅은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 '택시 드라이버'의 한 대목이면서 이 영화 속에 반복되어 등장하는 이 대사는 그래서 수애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심야의 FM', 그 두 시간은 온전히 수애가 연기자로서 한 껍질을 벗어내는 시간이 되었다.

'성스'와 '대물', 그녀들이 대물이 된 사연

'남장여자'라는 존재는 그 자체가 남자를 상위에 놓는다. 즉 여자지만 남자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왜? 남자여야 세상에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성균관 스캔들(이하 '성스')'의 남장여자 윤희(박민영)도 마찬가지다. 뛰어난 문재를 가진 그녀는 세상에 나가 뜻을 펼치고 싶지만 세상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어떤 사내의 낙점을 받아 혼인해 살아가는 것뿐이다. 왜 그래야 하나. 윤희가 남장여자가 되어 금남의 지역인 성균관에 들어온 이유다.

'성스'가 조선 정조시대로 날아가 여자라는 존재가 갖는 한계를 남자들만 수학할 수 있는 성균관이라는 공간에서 풀어낸다면, '대물'은 지금 현재 여성이 마치 남자들의 세상인 양 치부되던 정치계에 입문하고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여자 대통령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물론 현재 이미 여성들의 정계 진출은 그다지 낯선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라고 하면 말이 달라진다. 안될 건 뭐냐고 말은 하지만 실제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성별에 대한 장벽은 남아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성스'의 조선시대나 '대물'의 현대나 성별에 대한 의식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한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두 드라마는 주목받는다. '성스'는 남장여자라는 점 때문에 드라마의 판타지가 만들어진다. '걸오앓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터프하면서도 부드러운 걸오문재신(유아인)과 어딘지 꽉 막힌 듯한 올곧은 선비였으나 윤희를 만나면서 탈선을 시작하는 선준(믹키유천), 그리고 늘 유쾌함을 주는 미소년 용하(송중기)는 여성들의 판타지다. 그 속에 남장여자인 윤희가 들어가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며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의 나날을 보낸다. 즉 '성스'는 조선시대의 여자가 갖는 한계를 뒤집어 판타지로 제공한다. 애초 남장여자를 하게 되는 과정은 조선시대의 현실(남자여야 가능한 삶)이지만, 바로 그 남장여자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판타지가 존재한다. 남자가 아닌 여자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

'대물' 역시 평범한 여자 아나운서로서 남편을 잃고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아줌마가 서혜림(고현정)이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정계는 그녀를 주목한다. 이미 노회할대로 노회한 정치꾼들만 득시글거리는 정치판에 현실의 고단함을 서민들의 입장에 서서 소신 있게 얘기하는 서혜림은 참신해 보인다. 게다가 서혜림이 남편의 죽음으로 겪은 고통은 오히려 정치인으로서의 '호감 가는 스토리'를 만들어준다. 정치인으로서 여자라는 점은 약점으로도 지목되지만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라는 다양한 긍정적인 스펙트럼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녀가 출마한 이유는 아이에게 팔뚝만한 물고기가 뛰어노는 강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여성은 모두 드라마 속에서 '대물'로 불린다. '대물'이라는 지칭은 '성스'가 보여주는 성적인 의미에서나, '대물'이 보여주는 '여자 대통령'이라는 권력적인 의미에서나 모두 남성적인 의미를 더 갖고 있다. 즉 '대물'로 불리는 이 두 여성들은 여성이 가진 한계점을 넘어서 남성들의 영역으로만 치부되던 세계로 편입되려는 강한 욕망을 상징하는 캐릭터들이다. 여성들의 한계 지점으로 보였던 세계를 뛰어넘는 바로 그 지점에 이 두 드라마가 가진 판타지의 힘이 존재한다. "여자면 왜 안돼?" 하고 도발적으로 질문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 그 때문이다.

'닥터 챔프', 공정한 기회의 세상을 꿈꾸다

그들이 원한 건 최소한 공정한 기회였다. 성공? 그건 일단 기회가 있는 사람이어야 꿈꿀 수 있는 거니까. 똑같이 6주 휴식을 요하는 부상을 입고도 어떤 이는 선수촌에서 쫓겨나고 어떤 이는 버젓이 훈련을 하는 상황. 의료과실을 보고 눈감아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다른 어떤 병원에도 발붙일 수 없게 된 상황. '닥터 챔프'가 그리는 세상은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돌아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선수촌이든 병원이든, 그들은 어떻게든 버텨내려 하지만 세상은 늘 이들을 쫓아내려고 한다. '닥터 챔프'라는 드라마 속의 갈등은 바로 이 기회조차 공정하지 않은 만만찮은 사회와 그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청춘들 사이의 대결에서 비롯된다.

스포츠 의학이라는 일반외과보다는 조금은 여유롭게(?) 느껴지는 의학 분야가 등장하면서도 이 드라마가 여전히 흥미진진한 이유는 태릉선수촌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메달의 꿈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연습을 하지만, 그렇다고 부상을 입게 되면 국가대표 선발에서 밀려나게 된다. 즉 일반외과를 다루는 의학드라마에서처럼 생사를 오가는 질환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릉선수촌의 의료실에서는 죽음보다 더 한 퇴촌 명령이나, 선수 생명이 끝나는 부상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적어도 이 선수들에게 대회에 못나가거나 운동을 더 이상 못하게 되는 일은 죽음만큼 고통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런데 이토록 생명처럼 여기는 선수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잣대가 공정하지 않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은 체급의 다른 선수를 찾기 위해 퇴촌의 명분을 찾는 감독이라면? 물론 이것은 극화된 것이지만, 작금의 우리네 청춘들이 겪는 '기회의 격차'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점점 태생의 조건에 의해 교육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사회로의 진입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고착화되어버린 사회 앞에서 청춘들이 느끼는 절망감 같은. 아무리 해도 이미 안 되는 것이 정해진 현실 앞에서 꿈이 더 이상 기회가 아니라 고통이 되는 세상. '닥터 챔프'의 지헌(정겨운)이 힘겨운 건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헌을 통해 차츰 선수들(청춘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연우(김소연)가 의료실장인 도욱(엄태웅)을 통해 배워가는 건 바로 이 공평함이다. 내부고발자인 연우를 선수촌 의료실의 의사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료과실을 알고 있는 연우를 해고시켜달라는 담당의에게 거꾸로 해고 통보를 내리며, 최고의 스타로 특별대우 받는 수영선수에게 다른 선수와 똑같이 대하는 도욱은 마치 공평함의 표본처럼 보인다. 그다지 남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던 연우가 차츰 타인들의 입장을 고려하기 시작하는 건 지헌이 보여주는 사랑과 도욱이 행하는 정의로움을 보기 때문이다. "이젠 포기하지?"라는 도욱의 말에 "포기하지 말란 말이죠?"하고 그것이 반어법임을 알아차리는 연우는 그래서 현실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지헌은 불공정하게 선수촌에서 쫓겨나고, 연우는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 선수를 치료해주는 것뿐이다. 이것이 냉정한 그들의 현실이다. 하지만 '닥터 챔프'가 꿈꾸는 세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쫓겨났지만 다시 선수촌으로 들어가겠다며 연우에게 치료를 구하는 지헌에게서, 그럼에도 꿈꾸기를 포기 않는 청춘의 건강함을 본다면 지나친 낙관일까. 그래도 도욱 같은 인물이 있어 '기회의 격차'를 줄여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드라마처럼 적어도 포기 않는 청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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