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예능의 판타지와 현실을 모두 담아내다

비행기를 타고 또 배를 타고 그것도 모자라 버스를 타고 들어간 거문도. 실로 걷던 이를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운 거문도 등대에서 바라보는 풍광. 그 풍광 아래서 한바탕 포복절도의 복불복을 하는 멤버들. 아마도 이 카메라 앞에서의 장면만을 보여주었다면 그들의 '1박2일'이 어쩌면 일반인들을 꿈꾸게 만드는 판타지로 다가왔을 지도 모른다. "저렇게 놀면서 돈 벌면 참 좋겠다." 혹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지도 모른다. "저희들끼리 웃고 떠드는 걸 왜 우리가 보고 있어야 하지?"

하지만 적어도 '1박2일-거문도 등대'편을 본 시청자라면 적어도 이런 얘기는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차가 들어가지 않는 거문도 등대에서의 촬영을 위해 8톤이 넘는 짐을 손수 이고 지고 나르는 그 장면이 카메라 앞의 판타지에 숨겨진 뒤편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광경에서 '예능고도'라는 자막은 꽤 적절하다. '차마고도'의 이국적인 그 풍광들 뒤에는 그 아름다운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 때론 목숨을 거는 제작진들의 지독한 현실이 있다.

"이건 말도 안돼." 그들이 무거운 짐을 낑낑 짊어지고 가면서 쏟아내는 이 말이 아마도 대부분의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현실일 것이다. 이것은 '1박2일'처럼 야생을 표방하며 전면에 생고생을 내세우거나 '무한도전'처럼 매번 힘겨운 도전에 직면해야 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물론이고, '패밀리가 떴다'처럼 가족적이고 즐거운 여행을 표방하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대부분의 현장으로 나가는 리얼 예능 프로그램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렇게 생고생을 하는 걸까. 그들이 하는 이른바 미션이라고 하는 것들은 물론 실제적인 것도 있지만, 때로는 허무맹랑한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1박2일'이 오지로 여행을 떠나고 그 곳의 풍광을 소개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심지어 끼니를 거르거나 하룻밤 노숙을 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복불복은 그 자체가 어떤 실제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재미다.

과거적인 노동의 가치관이라면 이 재미와 즐거움에 목숨을 거는 프로그램이 이해가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1박2일'이 보여주는 세계는 이른바 '드림 소사이어티'의 징후를 그대로 그려낸다. 우리는 무형적인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기본적으로 즐거움과 웃음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갖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이다. 그 앞에서는 웃음이 넘치지만 그 뒤편을 보면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

하지만 그 괴리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종종 우리는 앞면이 전부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특히 '리얼'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기 때문에, 앞면 그 자체만이 실제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앞면의 즐거움은 때론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논란의 심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1박2일-거문도 등대'편이 의미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예능의 뒤편을 프로그램 속으로 잘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복불복이라는 예능적인 재미와 그 재미의 결과로서 그 즐거움을 만들어내기 위한 "말도 안되는" 제작진들의 노고를 직접 체험하게 한 점은 그래서 실로 절묘하다 할 수 있다.

'1박2일'이 리얼 예능으로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리얼 예능이란, 리얼이 갖는 고통과 예능이 갖는 즐거움이 모두 공존하는 형식이다. 리얼 없는 예능은 진정성의 비판을 받기 마련이고, 예능 없는 리얼은 재미라는 예능의 근본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게 마련이다. '1박2일'은 바로 이 리얼과 예능, 즉 예능의 앞면과 뒷면의 모든 모습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1인자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은 지금 서민들의 영웅을 원한다

영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선덕여왕'은 대부분의 사극이 그러하듯이 수많은 영웅들의 탄생과 성장을 그려냈다. 그 중 덕만(이요원)과 미실(고현정)은 난무하는 칼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세 치 혀만으로도 충분한 정치적 지도력을 선보이며 여성 영웅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여성성의 시대, 이 여성 영웅들의 리더십은 꿈꾸지 않는 작금의 현실 정치가 희구하는 것으로, 대중들은 그 강력한 판타지 속으로 빠져들었다.

덕만과 미실이 그 시대의 정점에 서서 그 통치를 통해 현실을 개척해나가는 영웅이라면, '아이리스'의 현준(이병헌)은 시대가 꺾어버린 개인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시대를 바꿔버리는 그런 영웅이다. 그 시대란 다름 아닌 남북분단의 상황이고, 현준은 그것을 고착화시키려는 아이리스와 홀로 대결하는 영웅이다. 남북이라는 소재 때문에 현준은 구태의연한 냉전시대의 영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리스'가 현준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남북의 대결이 아니라 집단과 개인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히어로'의 도혁(이준기)은 서민들의 영웅이다. 삼류잡지사 기자였다가 잡지가 폐간되자 전직 조폭이었던 용덕(백윤식)과 용덕일보를 창간하는 도혁이 싸우고 있는 것은 대세일보라는 거대 언론이다. 물론 도혁은 장총찬 같은 주먹도 아니고, 그렇다고 필력이 뛰어난 기자도 아니지만 그를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대세일보로 상징되는 정의가 사라져버린 시대에 사라진 영웅을 거꾸로 말해준다. 도혁은 정의 하나를 쥐고 있는 인물로서 이 시대의 영웅이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대세일보 같은 언론사들의 정치적 행보들은 도혁 같은 맨주먹의 정의로운 행동을 대중들이 희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대중들의 영웅에 대한 희구는 안방극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고전 속의 영웅을 현대로 불러들인다. 홍길동의 후손들이 살아남아 아직도 홍길동이 하던 '대도의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홍길동의 후예'가 그렇고, 설화 속의 인물이 현대에 깨어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전우치'가 그렇다. 이것은 홍길동과 전우치 같은 이야기가 당대 서민들의 억압을 풀어주는 시대의 영웅으로서 탄생한 것과 맥락이 같다. 이들은 현 시대의 억압 속에 답답해하는 대중들의 마음 한 구석에서 탄생한다.

'홍길동의 후예'는 이른바 '좋은 도둑과 나쁜 도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겉으로 보기엔 착한 일을 하는 것 같은 경제인 이정민(김수로)은 사실은 대중들의 피를 빠는 이 시대의 탐관오리 즉 나쁜 도둑이고, 홍길동의 후예인 홍무혁(이범수)은 그의 금고를 털어 사회에 기증하는 좋은 도둑이다. 이 영화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 사이에서 취하고 있는 자세는 흥미롭다. 이정민은 피규어 매니아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예를 들면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이나 재패니메이션의 로봇들을 수집하는데, 그의 캐릭터는 종종 이 슈퍼히어로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니 홍무혁이 이정민과 벌이는 대결은 한편으로 보면 이들 할리우드와 일본의 영웅들과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이 벌이는 대결로도 보여진다.

이러한 영웅의 서민적인 면모는 우리네 영웅상의 한 특징이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이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들은 지구적인 고민보다는 당장 서민들이 갖고 있는 고민들을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서민이 삭제된 정치이기도 하고(선덕여왕), 집단이 꺾어버린 개인(아이리스)이기도 하며, 정의가 사라진 사회(히어로)이기도 하고, 나쁜 도둑들이 판을 치는 세상(홍길동의 후예)이기도 하다. 이 영웅들의 서민친화적인 모습은 그 권위적인 모습을 던져버리는 것에서부터 아예 코믹한 영웅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진다.

특히 우리네 영웅을 다루는 영화들이 대부분 액션과 함께 코미디를 장르적 특성으로 갖고 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네 영웅은 볼거리라기보다는 시대적 공감에서부터 탄생하고 있다는 징후일 것이다. 이러한 서민적 영웅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날라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날카롭게 숨겨진 풍자의 칼날이 이 시대의 억압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 속에서 영웅들이 쏟아져 나오는 양상은 이 시대가 가진 억압들을 말해주기도 한다. 대중들은 지금 영웅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서민적인 영웅을.

'아이리스', 드라마와 영화사이 길을 찾다

'아이리스'의 대중적 인기는 이례적이다. HD나 대형화 되어가는 TV로 인해 안방극장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드라마는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간 시도되었던 일련의 블록버스터 드라마들, 예를 들면 '로비스트'나 '태양을 삼켜라' 같은 드라마들이 실패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실패는 영화적인 볼거리를 드라마적인 스토리가 따라가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아이리스'의 선택은 볼거리가 아닌 스토리였을까. 그렇지 않다.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새롭지 않다. 우리는 이 드라마 속에서 수많은 영화들과 드라마들에서 보았던 익숙한 설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아이리스'의 대중적인 성공을 가져왔던 것일까.

'아이리스'의 성공은 장르적인 공식에 충실한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해낸 연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그런 점에서 세련된 장르 영화에 가깝다. 이미 반복되어 하나의 형식이 굳어져 있지만, 색다른 연출을 통해 여전히 보는 이에게 쾌감을 주는 장르 영화. '태양을 삼켜라' 같은 블록버스터 드라마 역시 장르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태양을 삼켜라'의 스토리나 연출은 영화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드라마적이다. 영화 같은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볼거리가 그렇다는 것이지, 영화처럼 장면이 주는 심리적인 효과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스토리 또한 영화처럼 압축되어 있지 않고 상당히 느슨하게 풀어져 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태양을 삼켜라'와는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장면 하나하나가 영화적인 볼거리를 주면서도 그 감각적인 영상이 주는 심리적 효과를 영화적인 차원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현장성을 부각하기 위해 끝없이 흔들리는 카메라나, 짧게 압축적으로 보여지는 장면들의 연결, 인물의 심리를 포착해내는 섬세한 카메라 앵글 등은 '아이리스'가 그간 보아왔던 블록버스터 드라마들의 영상과 확실히 차별되는 지점이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스토리 또한 대단히 압축적이다. 첫 회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벌어지는 김현준(이병헌)의 암살과 탈출의 장면들은 4회에서 반복되는데, 이 1회에서 4회 사이의 거리는 대단히 좁다. 그리고 4회에서 5회까지 이어지는 헝가리 시퀀스 역시 그 속도감은 여전하다.

이 속도감 위에 현준과 승희(김태희)가 아키타현으로 여행을 떠나서 보여준 멜로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휴식처처럼 존재하는 이완감으로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매력적인 멜로구도는 이어지는 속도의 액션 위에 인물들이 감정을 싣게 해주는 힘이 된다. 이미 공식화된 장르적인 스토리는 오히려 이 감정과 아드레날린의 속도 위로 달려 나가는 쾌감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너무 복잡한 스토리의 영화보다 단순한 스토리 위에 현란한 장면들로 펼쳐지는 영화가 보다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과 같다.

이처럼 '아이리스'는 드라마라는 틀로 들어오면서 장르 영화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초반부 폭발적인 몰입을 이끌어내면서 대중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드라마는 영화와는 달리, 몇 시간 내에 끝이 나는 결과물이 아니다. 따라서 속도감 넘치는 장면들이 주는 몰입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둔감해지기 마련이고, 그 때는 이제 점점 새로울 것 없는 스토리가 드러나게 된다. 즉 새로운 스토리의 부재는 이제 이 몰입감을 더 이상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게다가 초반부 이 드라마는 영화적인 연출에 몰두하면서 중요한 시퀀스 하나를 버리는 실수를 했다. 그것은 현준과 선화(김소연) 사이에 벌어지게 되는 멜로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편집해 버린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멜로는 끝없는 긴장감 속에 이완감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현준과 승희가 서로를 죽은 것으로 생각하며 갈라져 있는 시간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현준과 선화의 멜로가 잘 연결되지 않는 것은 실로 아쉬운 부분이다.

'아이리스'가 후반부로 가면서 점차 액션의 반복이 지루한 감을 주는 것은 여기에 얹어지는 적절한 새로운 스토리가 보이지 않는데다가, 그 속도를 어느 정도 제어해줄 수 있는 장치(이를테면 멜로나 코믹적인 인물 같은) 또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적 선택을 하면서 드라마적 고려를 잘 하지 못한 이 작품의 모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병헌 같은 배우들의 호연이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액션 속에서도 이병헌의 감정 연기는 이 복잡하고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드라마를 중장년층 여성들마저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아이리스'는 드라마와 영화 사이에서 길을 모색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모색이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행착오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어쨌든 앞으로 매체적인 변화는 드라마와 영화 사이의 거리를 상당부분 좁혀놓을 것이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거두고 있는 일련의 성과들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지붕 뚫고...’, 시트콤으로 드라마의 한계를 넘다

도대체 이게 시트콤이 맞아? 우리는 아마도 시트콤을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했었나 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을 보다보면 이것이 웬만한 드라마보다 훨씬 재미있고 또 감동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저 웃기기만 하는 것이 시트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시트콤은 웃음 위에 진한 페이소스를 얹어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통념을 깨뜨린다. 게다가 이 가볍기만 할 것 같은 시트콤은, 그 경쾌함 위에 실로 진중한 무게가 느껴지는 의미를 전혀 어색하지 않게 척척 붙여낸다. 자극을 걷어내고 진실된 웃음과 의미를 붙여, 보는 이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이 시트콤이 보여주는 자세가, 때론 막장으로 치닫는 작금의 드라마들에게 전하는 말은 그래서 결코 작지 않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가장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인간을 마치 인형처럼 마구 다룬다는 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자극적인 상황 속에 인물을 몰아넣고 마치 그 불행을 즐기듯 들여다보는 그 태도는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불쾌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인물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겨지는 순간, 어이없게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은 실로 시청자의 마음을 마음껏 갖고 놀겠다는 작가의 만행에 가깝다. 이 캐릭터에 대한 태도는 바로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와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시청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에둘러 말해준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다른 점은 바로 이 인물들에 대한 작가와 연출자의 시선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이순재는 칠순의 나이에도 낯간지러운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지만(그래서 때론 엄청난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그것이 주책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나이에도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 연애감정에 시청자들은 응원의 마음을 갖게 된다. 세경과 신애의 상황은 어찌 보면 지나친 신파적인 설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단지 눈물샘 자극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혐의를 벗어난다. 우리는 꿋꿋이 살아가는 그들을 도와주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대인들의 바쁜 삶 속에 잊고 살아온 인간애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얻는다. 고개 숙인 아버지, 아들 앞에서는 그래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하는 아버지 정보석과, 그렇지만 힘없는 아버지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는 아들 준혁(윤시윤) 사이에는 끈끈한 부자 간의 정이 느껴진다.

이러한 인물에 대한 애정은 “빵꾸똥꾸”를 연발하던 해리(진지희)에게서 극적으로 보여진다. 해리는 자기 물건에 손을 댔다며 신애의 뺨을 올려부치는 그 순간에 이 시트콤에서 가장 자극적인 캐릭터로 주목되었다. ‘아내의 유혹’의 패러디로 해리가 민소희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어린 아이가 가진 캐릭터가 그만큼 독한 악역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이 해리가 점차 어쩐지 불쌍한 아이라는 느낌을 주기 시작하고, 때로는 역시 ‘아이는 아이’라는 확신을 주기 시작한다. 신애가 쓰는 동화를 읽기 위해 갖은 일을 대신하면서 빨리 동화를 쓰라고 욕을 해대는 모습이나, 신애가 놀러간 하룻밤 내내 그 허전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만나는 순간 신애에게 달려가는 그 모습은 이 아이가 겉으로는 욕을 해대도 마음은 늘 애정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캐릭터에 대한 애정은 이 시트콤의 멜로 라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시트콤은 드러내놓고 애정을 과시하는 이순재-김자옥을 빼고는 아직 아무런 멜로 라인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세경과 지훈(최다니엘), 세경과 준혁(윤시윤), 그리고 지훈과 정음, 준혁과 정음의 멜로 라인을 기대하게 된다. 지훈은 따뜻하게 세경의 어려운 점을 몸소 행동으로 챙겨주고, 준혁 역시 세경을 위해 보이지 않게 그녀를 도와준다. 반면 지훈과 정음, 준혁과 정음은 서로 툭탁 거리며 보기만 하면 으르렁대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어떤 애정라인이 생겨날 것 같은 기대를 준다.

그런데 실제로 멜로 라인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기대감만 부풀뿐이다. 이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이들은 멜로의 기대감을 높이는 관계들이 중첩되어 있지만, 사실은 다만 멜로만을 얘기하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누가 누구를 도와주든 그 바탕에 남녀관계를 넘어선 인간 대 인간 간의 따뜻한 애정이 깔려 있다. 이 휴머니즘 속에서 이들의 멜로 관계는 단순 사랑 타령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실로 막장드라마들이 쉽게 애정에 몰두하고, 그 애정의 반역과 불륜의 파탄을 자극으로 몰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인 양상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이미 단순한 시트콤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것은 이 시트콤이 우리에게 주는 웃음의 다양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시트콤은 정통 시트콤이 주는 폭소를 터뜨리게 하면서도, 크진 않아도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러니 폭소에서 미소까지, 풍자가 주는 서늘함에서 인간애를 통해 보여주는 감동까지 주는 이 작품을 어찌 그저 시트콤이라는 수식어로 한정할 수 있을까. 시트콤이라는 장르가 오히려 드라마 바깥에 위치해 있어, 드라마가 가진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 그 곳이 이 시트콤이 서 있는 자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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