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를 뉘앙스로 전하는 방식이 가진 힘

'무한도전-여드름 브레이크'라는 추격전의 시작은 박명수의 등에 그려진 7개의 그림에서부터 시작된다. 거기에는 남대문-산삼-시계-민들레-아령-파리-트럭이 차례로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이 뜻하는 것은 그 첫 글자를 따서 '남산시민아파트'로 가라는 것. 이 첫 장면은 '무한도전-여드름 브레이크'를 읽는 하나의 독법을 제시한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연결시키면 의미를 형성하는 단어들처럼, 앞으로 벌어질 일련의 사건들이 주는 키워드가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할 거라는 것이다.

'무한도전-여드름 브레이크'의 배경이 된 시민아파트, 연예인아파트, 오쇠동 철거지는 모두 철거 혹은 재개발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한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서울의 공간들이 낯설게도 허름하고 낡은 아파트들이라는 점, 그리고 비행기가 내릴 때 찍혀진 오쇠동의 철거 전 사진은 건물들이 사라진 현재와 오버랩되면서 이 키워드를 공고하게 한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김태호 PD는 자막을 통해 키워드를 박아 넣는다. '몸싸움'이니 '철거'니 하는 단어들이 그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는 자막이 보여주는 단어 하나하나가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을 보는 독법은 처음에 제시되었고, 그 다음에는 차례로 그 배경을 제시했으며, 그 위에 구체적인 단어들을 보여주었다. 시청자들이 이들이 찾기 위해 달리고 달리는 그 3백만 원이 오쇠동 세입자들의 이주보상비 액수였다는 것을 찾아내고, 또 2부에 등장한 소래 생태공원과 만석부두에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의 의미를 읽어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왜 하필이면 마지막에 탈주범들이 타고 도주한 배의 이름이 '황천길호'였을까. 길로 대변되는 빡빡이들은 이 철거 혹은 재개발이라는 의미 속에서 어떤 존재들을 패러디한 것일까. 마지막에 결국 이들이 도망쳤을 때 나온 '해경에게 맡긴다'는 자막은 또 어떤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의미 부여에 대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청자들은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이 그 의미 찾기에 골몰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무한도전-여드름 브레이크'는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철거와 재개발 문제를 거론한 것이 없다. 이것은 '프리즌 브레이크'의 패러디로서 쫒는 자와 쫒기는 자를 세워 리얼 타임 액션이 주는 재미를 리얼 버라이어티 속에 녹여냈을 뿐이다. 실제로 '무한도전-여드름 브레이크'를 통해 우리가 갖는 재미의 본질은 그 흥미진진한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상황전개에 있다. 즉 재미와 의미의 요소들은 하나로 엮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떨어져 있었던 셈이다.

이것은 '무한도전'이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김태호 PD만의 독특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의 본질은 그 첫째가 웃음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웃음 속에 어떤 사회적 메시지가 요구될 때, 때론 그것은 부담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무한도전'이 취하는 방식은 의미를 숨겨놓는 것이다. 그것은 숨겨져 있기에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 그 의미는 직접적인 전달보다 더 무게감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숨겨진 의미는 늘 열혈 시청자들의 눈에 의해 발견되고 조명된다. 즉 이 방식은 일방적인 제시가 아니라 쌍방적인 소통에 의해 메시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메시지를 뉘앙스로 전하는 '무한도전'의 방식이 가지는 진정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로 가는 '트랜스포머', 시골로 가는 우리영화

'트랜스포머-패자의 역습'의 바람몰이가 심상치 않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집계에 따르면 개봉 첫날 '트랜스포머2'는 53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를 접해보면 그 이유를 실감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빠져보았을 변신로봇에 대한 로망은, 주인공의 말 잘 듣는 오토봇들의 휘리릭 뚝딱 변신 CG가 주는 짜릿함으로 우리의 시선을 압도해버린다. 게다가 1탄에 비해 2탄은 그 시공간의 스케일이 더 커졌다. 원시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시간과, 미국의 한 동네에서 전지구로 확장되고 거기서 또 우주까지 펼쳐지는 공간은 마치 지구라는 별을 하나의 장난감 놀이하는 공간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영화의 압도적인 스케일이 가져온 결과다.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화가 주는 감각적인 만족감이다. 거의 두 시간 반 동안을 쉬지 않고 달리는 그 속도감은 거기에 편승한 관객들을 짜릿한 롤러코스터의 세계로 인도한다. 달려 나가는 자동차들,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현란할 정도로 빠른 변신, 끊임없이 뛰고 또 뛰는 주인공들, 출격하는 전투기들, 탱크들, 긴박한 국방성의 움직임까지, 그 속도 있는 전개는 스토리의 앞뒤 맥락과 상관없이 어딘가 거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그걸 막기 위해서는 무조건 달려야 한다는 강박을 가져온다. 스토리가 주는 맥락의 재미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엔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효과로서의 영화가 자리한다. 이것은 사실 블록버스터가 추구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 엄청난 물량이 투입된 판타지의 극점이며, 시각과 음향으로서의 영화 효과가 가져다주는 롤러코스터적인 감각적 만족감의 정점을 달리는 '트랜스포머2' 앞에 우리네 영화가 가진 면면은 언뜻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 우리 영화는 이제 이 거대한 블록버스터 앞에서 여름 영화 시장을 온전히 내주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영화가 이 거대 블록버스터에 대처하는 자세가 꽤 의미 있고 효과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거북이 달린다'는 충청도를 배경으로 한 시골형사의 탈주범 추적기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 시골형사와 탈주범이 취하고 있는 대결구도의 뉘앙스는 이 영화가 블록버스터와 취하고 있는 그것과 유사하게 보인다. 즉 탈주범은 혼자 몇 명의 형사들을 상대할 정도로 싸움에 능하고 두뇌회전도 빠르며 대담한 반면, 시골형사는 거북이처럼 굼뜨기 그지없고 싸움도 잘 못한다. 그런 그가 탈주범을 추격하고 결국에는 잡을 수 있는 것은 돌봐야할 가족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조금은 황당해 보일 수 있는 이 설정은 그러나 장르적 문법 속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독특한 가족중심주의와 맞아 떨어지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새로 개봉할 영화, '킹콩을 들다' 역시 이야기는 중심이 아닌 시골 변두리로 향한다. 88올림픽 동메달리스트였지만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시골여중으로 내려간 역도부 코치와 역도선수로 커나가는 시골소녀들의 눈물겨운 한 판 들어올리기가 그 주 내용이다. '거북이 달린다'가 지칭하는 거북이가 토끼를 상정하는 것처럼, '킹콩을 들다'의 킹콩은 이 자그마한 시골소녀를 상정하게 한다. 즉 '거북이 달린다'의 대결구도가 마치 블록버스터와의 대결구도로 그려지는 것처럼 '킹콩을 들다'의 킹콩 역시 이 영화가 영화관에서 대적해야할 블록버스트의 뉘앙스를 풍긴다.

'트랜스포머'가 우주로 날아갈 때, 우리 영화는 시골로 내려간다. '트랜스포머'가 전 지구적인 이야기를 건넬 때, 우리 영화는 우리 이야기로 승부를 건다. '트랜스포머'가 감각적인 영화 효과에 기댈 때, 우리 영화는 감성적인 영화의 스토리와 영상에 기댄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떨까. 거북이는 토끼와 대적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이 순박하기 그지없는 시골소녀는 킹콩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인가. 화려한 '트랜스포머'의 멋진 변신 앞에서 이들이 그 성공을 쉽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대처하는 자세만큼은 상당히 다부진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찬란한 유산'의 고은성, '시티홀'의 신미래

‘바보’의 사전적 의미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 본래 ‘밥+보’에서 나온 이 말은 ‘밥만 먹고 하릴없이 노는 사람’을 경멸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경제적인 가치가 최우선 가치로 치부되던 개발 시대를 넘어, 이제는 그 부의 올바른 획득이나 올바른 사용이 새로운 가치로 부각되는 현재에 이르러, 이 ‘바보’라는 용어는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나치게 경제논리에만 입각해 살아오다보니 우리가 잊고 또 잃고 있었던 가치들을 여전히 지키고 굽히지 않는 이들. 지금 시대의 ‘바보’는 바로 그런 의미를 부가하고 있다.

드라마 속 바보들, 그들의 지극히 상식적인 삶
SBS 주말드라마 ‘찬란한 유산’의 은성(한효주)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바보다. 그녀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소식(물론 그 아버지는 실제로는 살아있다)과 함께 계모인 백성희(김미숙)에게 유산을 모두 빼앗긴다. 길바닥으로 장애아인 동생과 함께 내동댕이쳐져 심지어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바로 그 동생 때문에 곧 털고 일어났던 그녀는 그토록 소중한 동생마저 잃어버린다. 자기 자신 돌보기도 힘겨운 이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하지만 그녀는 바로 자신이 그토록 많은 것을 잃고 아파해했던 그 경험으로 인해, 그 누군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기억마저 잃고 길바닥에 쓰러진 장숙자(반효정) 여사를 집으로 데려와 지극정성 보살피는 것. 흔히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 서로 돕는다”는 말은 여기에 해당되는 말이다. 버려진 경험이 있는 그녀는 자신에게 혹처럼 달라붙은 장숙자 여사를 힘겨워하면서도 절대로 버리지 못한다. 후에 장숙자 여사가 사실은 굴지의 기업 대표임을 알게 되고 그녀가 모든 유산을 자신에게 남겨주겠다는 말을 하는데도 은성은 사심을 갖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유산보다는 장숙자 여사와의 관계가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종영한 드라마, ‘그바보(그저 바라보다가)’에서 구동백(황정민)이라는 우체국 직원은 한지수(김아중)라는 톱스타를 만나 사랑을 이룬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모든 것이 상업적인 잣대로 구획된 세계 속에 살아가는 한지수는 거꾸로 구동백이라는 제목 그대로의 ‘그바보’를 만나 자신의 잘못된 삶을 되돌리게 된다. 이것은 ‘시티홀’에서 10급 공무원인 신미래(김선아)를 허수아비 시장으로 세워 인주시를 장악하려 했던 조국(차승원)이 거꾸로 그녀의 순수한 정치적 행보에 감화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바보들’의 행보는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현실 앞에서는 지극히 어려운 일들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거꾸로 상식을 지키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바보들이 전하는 진심, 서민들의 꿈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상식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먼저 ‘찬란한 유산’의 은성이 말해주는 것은 유산이 비단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언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유산이라면 흔히 변호사가 대동되고 공증된 유서가 읽혀지는 그런 재산의 의미로 읽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또한 물려진다는 의미에서 핏줄과 혈연의식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하지만 ‘찬란한 유산’에서 은성이라는 바보를 통해 말하는 유산이란,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유산을 말한다. 부모가 가르쳐준 정직이나 신뢰, 부지런함 같은 것들이 그런 핏줄과 혈연으로 연장되는 물질적 유산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말이다.

‘그바보’의 구동백이 말하는 가치 역시 이 물질화된 사회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가치를 연봉 얼마로 수치화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돈이면 다 되는 것 같은 태도의 예의 없는 세상 속에서 구동백은 진정한 관계와 소통을 전하는 예의바른 인물이다. 구동백이라는 서민이 거꾸로 한지수라는 물질화된 사회의 표상으로서 그려지는 톱스타를 감화시키는 내용이 감동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시티홀’은 드라마가 정치를 다루기 때문에 현 우리네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빗나간 가치들을 신미래라는 바보를 통해 보여준다. 그녀는 정치는 신념이 아니라 돈으로 해나간다는 현실 속에서, ‘정치란 못 사는 사람 좀 더 잘 살게, 또 잘 사는 사람 좀 더 베풀게’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물론 현실에서라면 공허한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 말은 그러나 드라마라는 판타지적 공간 속에서나마 어떤 희망을 발견하고픈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이 시대의 바보들은 흔히 서민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곤 한다. 이것은 이들 드라마들이 전하는 가치들이 고단하게 바보처럼 살아가는 서민들이 꾸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바보들이 전하는 진심의 소리가 큰 울림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이들을 통해 때론 슬프고 때론 웃기며 때론 그동안 잊고 있던 어떤 희망이나 꿈을 찾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진심이 우리에게도 남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선덕여왕'의 전쟁신이 MBC사극에 위치하는 곳

사극에서 전쟁이라는 스펙터클이 가지는 힘은 자못 크다. 다른 내용을 차치하고라도 그 장면 자체가 대단한 볼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KBS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김명민)이 치르는 일련의 해전들은 마치 스포츠 중계처럼 방영됐다. 예고편에서도 마치 한일전이라도 치르듯 '이번엔 어디서 벌어진 무슨 해전이다'하고 자막이 붙었고, 실제로 사극을 시청하는 입장에서도 그 관점으로 스펙터클한 전쟁의 흥미진진함을 만끽했다.

'태조 왕건', '대조영' 같은 일련의 KBS 대하사극이 주말의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능수능란한 전쟁과 전투신의 연출이었다. MBC와 SBS에서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그 노하우를 단번에 체득하기는 어려웠기에 사극 하면 KBS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것은 고구려 사극에 와서 정점을 이뤘다. 물론 '주몽'이 특유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늘 아킬레스건처럼 따라오는 건 '소소한 전쟁 신'이 가진 왜소함이었다. SBS는 '연개소문'의 단 2회 동안의 전쟁 신을 찍기 위해 몇 개월 동안 어마어마한 물량을 쏟아 붓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KBS는 '대조영'의 안시성 전투를 통해 역시 지존의 면모를 과시했다.

전쟁사극이 요령부득인 MBC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허준', '상도' 같은 전쟁이 아니라도 인물들 간의 미션들이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구축하는 그런 사극들이 MBC사극에 자리했다. MBC 사극에 어떤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태왕사신기'부터였다. 엄청난 제작비도 제작비지만 완성도에 공을 들인 결과, '태왕사신기'는 CG와 전쟁 장면의 연출에 있어서 한 단계 높은 성과를 보여줬다. 그리고 '선덕여왕'에 와서 이제 MBC사극은 아킬레스건으로 지목되던 전쟁사극의 한계를 한 발 넘어서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선덕여왕'의 신라와 백제 간에 벌어진 전쟁 에피소드가 남달랐던 것은 스펙터클에 충실하면서도 디테일을 잊지 않는 연출 덕분이었다. 김서현(정성모)이 이끄는 신라군이 아막성을 얻기 위해 벌이는 공성전에서는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상황에 성벽을 뛰어오르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 떨어지는 등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덕만(이요원)과 동료들이 처음 전쟁을 접하며 느끼는 두려움과 이를 차츰 적응해가는 과정을 놓치지 않는다.

고립되어 백제군에게 포위된 덕만과 화랑들이 원진을 짜고 대항해가는 장면 역시 인물의 감정을 살림으로써 왜소해 보이는 전투를 극적 긴장감으로 이끌었다. 여기에 설원랑(전노민)이 백제군을 속이기 위해 벌이는 고육지책은 전쟁 스펙타클의 또 한 요소인 전술적인 묘미를 안겨주었다. 백제군을 물리치고, 동시에 정적이랄 수 있는 김서현과 김유신(엄태웅)을 사지로 몰아넣는 일거양득을 취하는 모습은 전쟁과 정치가 맞물리는 재미를 선사한다.

사실 '선덕여왕'의 이러한 전쟁 장면들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은 그 비교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만일 저 '적벽대전' 같은 작품과 비교한다면 '선덕여왕'의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전투에도 못 미치는 장면으로 치부될 수 있다. 또 일련의 명장면이라 일컬어지는(예를 들면 '불멸의 이순신'의 해전들이나 '대조영'의 안시성 전투 같은) 장면들과 비교해도 여전히 소소한 느낌을 벗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스펙터클의 완성도는 노하우도 노하우지만 기본적으로 제작여건과 함수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선덕여왕'이 보여준 전쟁 신의 가치를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최근 들어 사극에서의 전쟁 스펙터클은 디테일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어느 나라와 어느 나라가 싸우고 누가 전쟁을 이끌었고 어떻게 이겼는가 하는 그 교과서적인 내용의 전달보다는, 전쟁 속에서의 인물들의 실감나는 심리나 그 관계들이 엮어가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거대한 전쟁과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시청자들을 방관자로 세워놓던 스펙터클에서, 이제는 그 속에서 같이 뛰는 스펙터클을 대중들이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덕만과 그 일행을 앞세운 '선덕여왕'의 전쟁 신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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