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으로 간 한국대중음악상, 왜?

결국 대중음악은 소극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한국대중음악상’을 말하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갑작스런 지원중단 발표 후, 시상식을 연기해온 ‘한국대중음악상’은 애초에 건국대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학전 소극장으로 축소 개최되게 되었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한국의 그래미’, ‘한국의 빌보드’를 만들고 ‘대중음악전용관’을 짓겠다며 대중음악을 키우기 위해 무려 1275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애초에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키우겠다던 대중음악은 ‘한국대중음악상’이 말하는 그 대중음악이 아니었던 것일까.

혹자들은 ‘한국대중음악상’에 인디밴드들과 같은 상대적으로 낯선 음악인들이 대거 수상자 명단에 들어있는 점을 두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음악들이 그 명단에 들어있지 않고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음악인들이 거기에 있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혹자들은 그 점을 들어 ‘한국대중음악상’이 아니라 ‘인디음악상’이냐는 비아냥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껏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들만이 대중음악이라고 불려진 것에 대한 ‘한국대중음악상’의 도발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대중음악은 물론 상업적일 수 있지만 그 전에 대중의 정서를 음악적으로 잘 표현한 음악에서 먼저 찾아져야 하는 것이다.

올해로 6회를 맞이하는 ‘한국대중음악상’이 생기게 된 것은 방송사와 대형 기획사 저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린 국내의 음악 시상식이 갖는 한계를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대중들까지 인식하게 되면서부터다. 대중음악이 갖는 상업적 성격은 몇몇 대형 기획사들의 승자독식구조를 지속시켰고,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방송사의 시상식은 그네들의 홍보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무엇보다도 문제였던 것은 그네들에 의해 대중음악이라 호명되는 몇몇 음악들이 대중들의 다양한 기호를 묵살하고 획일화시킨다는데 있다.

이렇게 보면 문화체육관광부가 키워내겠다고 한 ‘대중음악’과 ‘한국대중음악상’이 말하는 ‘대중음악’ 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그래미 운운하면서 1275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말할 때부터 그 대중음악의 성격 속에는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상업성에 경도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 지원중단은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또한 자생적인 대중음악의 발전을 지원한다기보다는, 국가 통제 하에 대중음악의 틀을 두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중음악에 대한 상반된 접근이 1275억을 투자하겠다고 하면서도 고작 몇 천만 원에 불과한 지원비를 굳이 중단하겠다고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작년 한 해, TV 음악 프로그램에 일대 변혁을 불러온 인디 밴드들(‘장기하 밴드'나 ‘갤럭시 익스프레스' 같은)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한국대중음악상’이 이제 변화해가는 대중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기호를 제대로 선점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윤도현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장르 구분을 넘나드는 음악의 소개가 그 전조를 보였다면, 그 바통을 이어받은 작금의 ‘이하나의 페퍼민트’, ‘음악여행 라라라’, ‘스페이스 공감’같은 프로그램들로 그 다양성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이것은 TV의 음악 프로그램들이 과거와 같은 몇몇 상업적으로 성공한 음악에만 편향된 형식만으로는 대중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상 규모가 작아진 금번 ‘한국대중음악상’에는 김동률, 토이, 원더걸스, 다이나믹듀오, 태양, 윤하, 양방언 등이 불참해 아쉬움을 남겼다. 진행자인 윤도현과 이하나는 “우리 권위 있는 거 맞죠?”하는 농담까지 했으니 그 썰렁한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금번 ‘한국대중음악상’에서 단연 화제는 ‘싸구려 커피’로 3관왕의 영예를 안은 ‘장기하와 얼굴들’이다. 천편일률적으로 흐르는 작금의 대중음악에 인디의 정신을 살리며 참신함을 불어 넣어준 음악으로 당연히 받을 걸 받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싸구려 커피의 정서를 노래로 부른 ‘싸구려 커피’라는 음악이 싸구려가 아니듯, ‘싸구려 커피’에 영예를 준 ‘한국대중음악상’이, 화려하지 못한 협소한 공간에서 조촐히 벌어진 싸구려(?) 음악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건 싸구려 커피의 그 달달함과 속쓰림 역시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의 화려함이 장악한 것처럼 보이는 현재, 우리네 대중들의 정서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이러한 대중들의 다양성에 대한 요구를 이해해야 한다. 소극장으로 내려간 ‘한국대중음악상’은 마치 이제 막 바깥 세상을 향해 나오려고 하던 다양성을 지평으로 하는 대중음악들이 다시 저 좁은 공간으로 내려보내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배우 소지섭과 한지민, 그 눈빛이 말해주는 것

연기하는 배우의 눈빛은 때론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카인과 아벨’에서 이초인과 오영지 역할을 각각 하고있는 소지섭과 한지민은 그걸 알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 김서연(채정안) 앞에서는 천진난만함으로 그 행복을 드러내던 이초인의 눈빛은, 중국의 사막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 절박함에 광기로 돌변하고, 기억상실을 겪게되면서 반쯤 풀린 눈빛이 된다. 한편 탈북해 국내로 들어온 오영지의 눈빛은 자신이 중국에서 가이드했던 이초인이 자신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떨리고, 한 줌의 재로 돌아온 오빠를 보며 풀렸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초인이 자신 앞에 서자 경악과 반가움과 슬픔 같은 복잡한 감정으로 떨린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눈은 실로 대사보다 더 깊은 감정을 드러낸다.

오영지와 이초인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면서 그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조금씩 전한다. 기억을 찾아 헤매는 이초인의 눈은 마구 자란 머리카락 속에 감춰지거나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말을 건네고, 익숙한 병원 풍경 앞에서 그리고 우연히 보게된 김서연 앞에서는 그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집을 나간 이초인을 기다리다 지친 오영지의 눈은 화를 내며 운다. “당신 찾아다니다 피 말라죽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라는 대사와 어우러지는 눈빛이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배는 안 고픕니까?”라는 따뜻한 질문에서 그 눈빛은 뾰로통해진다.

소지섭과 한지민의 연기가 물이 올랐다고 말하는 데는 바로 이 연기 속에 살아있는 눈빛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눈빛들을 우리는 톱스타에서 배우로 인정받은 연기자들에게서 발견한 적이 있다. ‘마이걸’과 ‘왕의 남자’로 예쁜 남자 신드롬을 일으키며 말 그대로 벼락스타가 된 이준기는 ‘개와 늑대의 시간’과 ‘일지매’에서 광기 어린 눈빛으로 꽃미남의 이미지를 넘어섰다. 국민여동생이란 이미지에 갇혀 성장을 멈췄던 문근영은 ‘바람의 화원’을 통해 슬픔과 회한이 가득한 눈빛을 보여주며 배우 문근영으로서 새로이 자리매김했다. 꽃미남이라는 수식어에 가려져 왔던 현빈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의 눈빛이 꽤 깊고 다양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트콤에서 코믹연기로 묻혀져 있던 김범의 눈빛은 ‘에덴의 동쪽’을 통해 살아났다.

톱스타로서 가지는 눈빛이 단순한 것이라면 배우로서 가지는 그들의 눈빛은 복합적이고 미묘하게 벼려져 있다. 많은 톱스타들이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단지 대사를 잘 읊고 지문대로 행동을 보여준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보다 행동보다 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주는 눈빛으로 연기할 수 없을 때 캐릭터와 배우는 겉돌게 되고,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는 매개해주는 배우로 인해 캐릭터에 오히려 몰입할 수 없게 된다. 배우를 캐릭터와 시청자가 매개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로 볼 때, 캐릭터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톱스타의 눈빛을 고수하는 자는 배우가 아니다.

한지민이 ‘이산’에서보다 ‘카인과 아벨’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 북한 사투리를 써야하고 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으면서도 늘 밝은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오영지라는 배역자체가 그녀의 배우로서의 눈빛을 더 많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톱스타가 배우가 되는 데는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배역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벼락스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가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인기는 배우 이민호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캐릭터 구준표에서 온 것이 맞다. 따라서 갑자기 톱스타가 된 이민호가 배우로서 자리하기 위해서는 그걸 뛰어넘은 수많은 연기자들의 그 살아있는 눈빛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톱스타의 눈빛은 단순하고 배우의 눈빛은 깊다. 생명력에 있어서 톱스타는 짧고 배우는 길다는 면에서, ‘톱스타보다 배우’의 눈빛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기를.

퓨전사극 ‘돌아온 일지매’의 실험성과 한계

“빅뉴스입니다. 빅뉴스!” ‘돌아온 일지매’에서 소문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배선달(강남길)에게 차돌이(이현우)가 달려와 이렇게 외쳤을 때, 순간적으로 이 퓨전사극은 현대극과 사극 사이의 경계를 넘어섰다. 하긴 시작부터 도심 속의 일지매를 보여주었으니, 이 조선시대에 등장한 영어는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가 넘어서는 경계는 단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사극이라고 지칭하기가 애매해진) 장르적으로는 액션과 멜로의 경계를 허물고 있고, 시청 소구층으로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고 있으며, 매체적으로는 만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퓨전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돌아온 일지매’. 그 실험성과 한계를 되짚어보자.

만화 혹은 드라마, 액션 혹은 멜로
드라마 읽어주는 캐릭터로서 책녀가 등장했을 때, 그것은 굉장히 낯설어 보였다. 보통의 사극이라면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극의 진행이 전개되는데 반해, 책녀의 존재는 사실상 ‘책녀 마음대로’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녀가 청나라로 가자고 하면 청나라로 가고, 일본으로 가라고 하면 일본으로 가는 식의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진행은 지금껏 드라마 속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고우영 화백이 만화의 칸 밖에 깨알같은 글자로 집어넣었던 화백 특유의 목소리의 드라마화였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드라마가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 얼마나 충실하려 하는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는 만화책을 넘기듯 등장인물들의 소개 장면에서 시작하여, “일지매여 비상하라!”같은 만화적 문구로 끝을 맺게 되었다. 만화를 영상으로 그대로 가져오는 연출은 영화라면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드라마라면 꽤 참신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실험적 연출 위에서 사극과 현대극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되었다. 만화적 공간 위에는 시간적 조건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만화적 조건 위에 서 있는 주인공 일지매(정일우)는 중성적이다. 일단 외모부터가 그렇다. 산 속에서 그를 처음 본 달이(윤진서)는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자식. 너 예쁘게 생겼다. 계집애 같애...” 그래서인지 일지매는 극중에서 여러 번 여장을 한 채 등장한다. 생긴 것뿐만이 아니라 하는 짓도 그렇다. 일지매의 상징으로 매화 가지를 남기는 것은 미적이며 여성적인 취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여성적인 자태를 가진 일지매는 천하무적의 무공을 연마한 살인무기이기도 하다. 조선의 무술과 청나라의 무술 그리고 일본의 닌자술까지 배운 그는 한 명의 무술인으로서 국적의 경계 또한 허물고 있다. 따라서 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갖춘 중성적인 일지매는 그 두 가지 모습을 드라마 속에서 드러내게 된다. 그 하나가 양반들과 벌이게 되는 액션이며, 다른 하나가 월희와 벌이는 멜로다. 구자명이 도적들을 좇으면서 동시에 백매(정혜영)를 좇는 것도 이 드라마가 서 있는 액션과 멜로의 중간지점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돌아온 일지매’, 그 퓨전의 실험성과 한계
‘돌아온 일지매’는 이처럼 경계를 해체하고 그 중간 어느 지점에 서 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극과 현대극의 중간지점이며, 만화와 드라마의 중간지점이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중간지점이자, 액션과 멜로의 중간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퓨전은 그 실험적인 시도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있는 실험성이 드라마의 성공을 가져왔는가 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다.

사극의 전통적인 문법이라 할 수 있는 대결구도를 이 드라마는 좀체 세워두지 않는다. 대신 조금은 지루할 정도로 일지매의 탄생과정을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드라마는 조명해 보여준다.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버려졌으며 청국을 돌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그 지리한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병렬적이다. 사건과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고 그 사건에서 대척점에 있는 적이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그런 전형적인 과정은 이 속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일지매가 그토록 먼 길을 돌아 세 나라의 무술을 익혔음에도 그다지 초절정의 무공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 무예를 익히는 과정의 지난함이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병렬적 연결에 일조한 것은 바로 전지적 작가 시점을 갖게 만든 책녀다. 사극과 현대극, 만화와 드라마를 공존시킨 책녀의 존재가 드라마의 극적인 전개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편 일지매가 가진 중성적 느낌 역시 그 남성성과 여성성이 긴밀히 연관되지 못함으로 해서 오히려 드라마를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돌아온 일지매’의 멜로적 상황과 액션은 대체로 병렬적으로 흘러왔다. 일지매는 밖으로 나가서 액션상황을 연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멜로상황을 만들어냈을 뿐, 이 안팎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달이의 죽음이 체제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에 따른 리액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어떤 슬픈 정조로 어른거리는 것은 새로운 슈퍼히어로라는 일지매의 캐릭터를 자꾸만 맥빠지게 만든다.

‘돌아온 일지매’는 여러 모로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꽤 많은 실험적인 시도들이 덜컥대지 않고 하나로 묶여져 있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어느 정도의 성취를 했다고까지 보여진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실험성이 대중들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이 드라마의 한계로 지적된다. 낯설음을 재미로 변모시키는 것은 실험성 속에서도 대중적인 정서(익숙함 같은)를 의식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친절한 컨셉트, 사투리 앞세운 ‘상상플러스’

‘상상플러스’가 새 단장을 했다. 초창기 포스트잇이 잔뜩 붙은 댓글방으로 화제가 되었고, 노현정 아나운서를 중심에 세우고 탁재훈과 신정환 콤비의 활약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올드 앤 뉴’ 이후에 ‘상상플러스’는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책 읽어주기’, ‘놀이의 탄생’, ‘상상 우리말 더하기’같은 코너들을 새롭게 선보였지만 그다지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금번 ‘상상플러스’가 들고 나온 것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친절한 4형제’와 ‘전국 사투리 자랑’. 이 두 코너는 어떤 강점을 갖고 있는 것일까.

‘친절한 4형제’, 친절한 컨셉트로도 웃길 수 있다?
‘친절한 4형제’는 기존 ‘대박대담’의 변형 코너다. ‘대박대담’이 MC의 질문과 진행을 통해 대박이냐 쪽박이냐를 가리는 구성으로, 게스트의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쪽으로 접근했다면, ‘친절한 4형제’는 일단 ‘친절한 토크’를 표방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불친절한 느낌을 받았을 때 게스트가 버튼을 눌러 MC를 제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정환이 소녀시대의 수영에게 농담으로 던진 “혹성탈출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은 당사자는 물론 시청자까지 불쾌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곧 이어 그에게 가해지는 벌칙으로 인해 이러한 불쾌감은 상당부분 상쇄될 수 있다.

굳이 ‘친절함’을 컨셉트로 삼은 것은 저 ‘박중훈쇼’가 말하는 작금의 ‘불친절한’ 토크쇼를 떠올리게 한다. 상대방을 몰아세우고, 누군가의 비밀을 공개하게 만드는 식으로 이어지는 작금의 토크쇼들에게 불친절함은 하나의 대세이기도 하다. 이것은 게스트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보다 시청자들의 알고 싶은 욕구를 더 우선시하는 토크쇼의 리얼리티 경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박중훈쇼’가 말하듯 ‘친절함’이 곧 ‘재미없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친절한 4형제’는 친절하면서도 재밌는 토크쇼를 상상하는 것 같다. 따라서 게스트를 공격하기보다는 스스로 무너지는 선택을 하는 ‘친절한 4형제’의 컨셉트를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은 박재정이다. 그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어색함을 내세워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그것으로 웃음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국 사투리 자랑’, 사투리 그 자체로만도 충분하다?
‘전국 사투리 자랑’은 ‘전국 노래 자랑’의 형식에 사투리라는 강력한 웃음폭탄을 장착하고 있다. 이지애 아나운서는 ‘전국 노래 자랑’의 트레이드 마크인 실로폰 소리로 코너를 시작한다. 워밍업으로 하는 퀴즈에서는 특정한 상황을 전국 사투리 버전으로 보여준다. 특징적인 것은 그것이 대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리얼한 현지 주민들의 목소리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은 이 코너에 리얼 버라이어티적인 재미를 부가시킨다. 그저 사투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상황에, 촌철살인의 순발력 넘치는 말들은 퀴즈 형식으로 엮어져 더욱 폭발력을 갖게 된다.

특정한 사투리의 의미를 맞추는 코너는 저 ‘올드 앤 뉴’에서부터 지금껏 변함 없이 내려온 ‘상상플러스’의 전통이 되었다. 다만 소재적으로 사투리를 선택했다는 점이 이전에 ‘상상 우리말 더하기’에서 외래어 선택보다는 더 친화적이라는 점이 이번 코너의 특징이 된다. 표준어에 경도된 우리네 언어습관보다 좀더 다양한 사투리들을 발굴함으로써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겠다는 기획의도 역시 의미와 재미를 찾겠다는 이 코너의 취지를 잘 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상상플러스’는 인터넷 매체 등의 변화 속에서 급변하는 우리말을 민감하게 프로그램 속으로 끌어들인 몇 안 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새롭게 구성된 코너들이 옛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애초의 기획의도에 가까워지려는 노력만큼은 쉽게 읽어낼 수 있으며 그것이 전망을 밝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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