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간 그저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아내의 유혹’의 낚시질 영상에 걸려든 적이 있다. 그 장면에서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 누군가의 눈빛은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매번 챙겨보는 드라마가 아닌지라(이걸 왜 챙겨봐야 하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 상황의 내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의 풍경이 전하는 ‘이거 뭔가 벌어졌구나’하는 느낌이다. 때마침 흘러나오는 긴박한 효과음은 그 느낌이 맞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면서 그 벌어진 뭔가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대부분 드는 생각은 ‘왜 내가 이걸 보고 있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에 이끌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 싸움을 벌이고 있다면 십중팔구 지나던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을 하려 들것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점이나, 그들이 왜 싸우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던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틈입으로 들어온 싸움이라는 풍경이 주는 날선 느낌이다. 그 풍경을 보면서 혹자는 일상 속에 침묵해왔던 내면의 억압을 대리해보기도 할 것이며, 혹자는 백주대낮에 웬 쌈질이라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내용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일단 사람들은 모였다. 질은 사라지고 양만 남는 것, 이른바 막장의 본색이다.

그 질이란 것을 살펴보면(그걸 살펴본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런 일이긴 하지만), 한 마디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의 연속이다. 자신의 친구이자 남편의 내연녀인 애리(김서형)가 남편과 함께 은재(장서희)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죽으면 이야기가 끝나므로 절대 죽을 수는 없다) 은재가 살아 돌아와 민여사(정애리)의 딸 민소희로 살아가며 남편 교빈(변우민)과 애리에게 복수를 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복수구도이기에 좀 어설프기는 해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볼만하다.

그런데 더 이상 구경시킬 싸움이 없었던 지 갑자기 죽은 줄로 알았던 민소희가 살아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은재를 몰아붙인다. 한편 애리의 아들 니노(정윤석)의 출생의 비밀이 갑자기 불거져 나오면서 은재의 오빠 강재(최준용)는 혼란에 빠진다... 끝없는 관계의 반복 혹은 돌출. 이 드라마의 키를 쥐고 있는 악역 애리가 은재의 친구이자, 강재의 애인이자, 은재남편 교빈의 내연녀란 사실은 이 드라마가 캐릭터 하나를 두고 얼마나 많은 걸 빼먹고 있는 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익숙한 코드의 반복이 주는 식상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이 드라마가 내세운 것은 속도다. 이른바 ‘빠른 전개’.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의 나열은 느린 속도로 전개될 때는 그만큼 욕먹을 소지도 많다. 하지만 빠르게 진행시키면 말이 달라진다. 기대효과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서 나온다. 말도 안 되는 과정의 빠른 진행은 충분히 자극적인 결과(대립 상황, 싸움풍경)로 보상받는다. 과정이 무시되고 결과에만 집착하는 형국. 막장의 또 다른 본색이다.

그러나 속도에 편승하면서 뭉개져 보이지 않던 그 과정의 풍경은 속도에 익숙해지거나, 그 종착역에 다다르면서 속도가 느려질 때가 되면 이제 그 진면목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드라마의 말미에 다다르자 ‘왜 내가 저걸 보고 있지’하는 그 마음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물론 그 중독적인 속도에서 하차하기란 쉽지 않지만 적어도 비판적인 시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시청률이란 양적 잣대가 존재의 이유가 되는 이 드라마에서 요동치기 시작하는 시청률은 드라마를 더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만든다.

질적인 것보다 양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 그리고 과정보다는 결과에 몰두하는 것은 우리가 개발의 시대에 이미 익숙하게 겪어왔던 것들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작금의 정치경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막장의 본색은 그 드라마를 파탄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드라마 한 편의 파탄이 아니라는 점이다. 질적 실패와 양적 성공, 과정의 실패와 결과의 성공이 주는 추상적인 성공 방정식은 어쩌면 전염병처럼 번질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불황이라는 호명은 때로는 이 모든 것들에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드라마, 예능, 음반에 드리워진 88만원 세대의 그림자

그들은 오로지 대학만이 모든 것을 이뤄줄 것이란 이야기를 들어가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도 낭만이란 말은 뒤로 접어둔 채, 일찌감치 취업준비로만 전전해왔다. 그리고 사회에 버려지자마자 바늘구멍 뚫기만큼 힘들다는 취업전선에서 다시 경쟁해야 했고, 그렇게 가까스로 기회를 잡은 그들도 그러나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몇 개월 간의 치열한 노동의 경쟁 속으로 다시 뛰어들어야 했다. 정당한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전긍긍해야 하는 그들. 한때 사회현상처럼 대중문화에서 조명되었던 백수세대는 이제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무대 위에 오르고 있다.

‘내조의 여왕’, 온달수의 인턴시대
‘내조의 여왕’의 온달수는 나이도 있고 결혼도 했으며 아이까지 있지만 그가 처한 상황은 88만원 세대의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굴지의 대기업인 퀸즈푸드에 입사하려는 온달수는 면접에서부터 인사부장을 친척으로 두고 있는 상대와의 경쟁에서 혈연으로 밀린다. 우여곡절 끝에 입사가 허락되지만 반쪽 짜리. 인턴 3개월을 거쳐야 하는 입장이다. 조직은 실력과는 상관없이 연줄과 권력(돈)의 힘으로 굴러가고 그 앞에 선 온달수가 가진 것은 열정과 내조를 위해 친구 앞에서도 무릎을 꿇는 아내뿐이다.

이 온달수가 처한 상황은 아내와 관련된 부분만 떼 놓고 보면 사회 초년생으로 첫발을 내딛는 88만원 세대들이 겪는 것과 꼭 같다. 이미 굳건하게 저들만의 리그가 결정되어 있는 사회 시스템 앞에서 누구나 무릎을 꿇고 처세를 해야 하지만, 온달수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은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 드라마는 88만원 세대가 처한 현실을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주부들 눈높이로 맞춰놓은 것만 같다. 이 드라마가 노골적으로 여성층을 겨냥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남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내조의 여왕’, 그 여왕이 내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88만원 세대가 처한 현실이다.

‘분장실의 강 선생님’, 행복한 줄 알아 이것들아!
‘개그콘서트’의 새 아이콘으로 떠오른 ‘분장실의 강 선생님’. 이 코너는 개그맨 사회를 분장실로 축소해 그 모습을 통해 우리네 조직문화를 풍자한다. 여기서 강 선생님은 최고참인 강유미지만 이 코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중간고참인 안영미다. 안영미는 강유미 앞에서는 굽실대면서, 신참들인 정경미, 김경아 위에는 군림하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웃음을 준다. 안영미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신참들을 괴롭히면서도 습관적으로 “행복한 줄 알아 이것들아!”하고 외친다.

여기서 ‘행복한 줄 알아야 하는 이것들’에 해당되는 정경미와 김경아는 바로 88만원 세대의 분신이다. 그들은 감기에 걸려도 허락 받고 걸려야 하는 처지. 하지만 맥락을 좀더 넓혀보면 88만원 세대는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모두 여성으로서는 수치스러울 수 있는 분장을 하고 있고, 그것은 웃겨야 살 수 있다는 처절한 현실을 반영한다. 안영미가 신참들을 괴롭히고 고참에 아부하면서도 그것이 밉상이 아닌 것은 그녀가 가장 독한 골룸 분장을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 코너는 88만원 세대의 개그맨 버전이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임금조차 없이 꿈 하나만으로 버텨오던 그들이지만, 막상 무대가 생겨도(코너를 잡아도)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들은 온 몸의 분장으로 보여준다.

‘싸구려 커피’마시며, ‘별 일 없이 산다’ 왜?
작년 말부터 올해까지 가요계에 벌어진 큰 사건 중 하나는 장기하라는 감성의 발견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싸구려 커피’를 들고 나오는 순간, ‘88만원 세대’의 정서는 음악이 되어 대중들의 축 처진 어깨를 두드렸다. 그 노래에는 장기불황에 직면해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 마냥 그냥 썩어 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는’ 청춘들의 정서가 녹아있다. 거기에는 좌절과 포기를 넘어서 마치 자기 일이 아닌 것 마냥 그 자체를 희화화시킬 정도로 둔감해진 고통이 숨겨져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패배의식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규1집의 타이틀이기도 한 ‘별 일 없이 산다’에서는 바로 이 일이 없어 별 일 없이 사는 그들이, 거꾸로 그래서 ‘별 일(고민) 없이 산다’는 역설을 끌어낸다. 이것은 승자독식 구조의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며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을 그 누구에게 ‘깜짝 놀랄 만한 얘기’면서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로 변모한다. 그런데 이 장기하 감성이라고 해도 좋을 정서는 청춘들뿐만 아니라 중ㆍ장년층에게도 그대로 어필된다. 그네들 역시 시스템 속에 앉아있지만 마치 저 안영미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 처절한 조직의 삶에 마찬가지로 지쳐있기 때문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지금 대중문화 속에는 88만원 세대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것은 현재 우리네 청년들이 처한 슬프고도 암담하며 답답한 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포착하는 88만원 세대의 정서는 청년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한 때의 망각을 꿈꾸는 주부의 감성 속에도 묻어나고, 개그맨의 처절한 현실을 보며 통쾌한 웃음으로 잠시 자신의 현실을 잊으려는 사람들에게도 피어나며, 노래 한 자락에 위안을 삼아보려는 중ㆍ장년들의 정서 속에서도 피어난다. 이것은 어쩌면 ‘88만원 세대’를 낳은 시스템의 문제가 우리네 사회 전체가 처한 현실의 문제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꽃남’, 그 광고 같은 세상의 마력

‘꽃보다 남자’는 극단적인 빈부 격차를 바탕으로 드라마가 구성되어 있다. 초부유층인 구준표(이민호)는 하녀와 집사까지 있는 궁전 같은 집에서 살지만, 서민층 금잔디(구혜선)는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옥탑방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집 없이 거리를 떠도는 처지로 살아간다. 구준표는 스포츠카에 전용비행기까지 있어 원하면 전용 섬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만큼 여가의 삶을 즐기지만, 금잔디는 자전거를 끌고 새벽 우유 신문 배달에, 아르바이트에 대부분의 시간을 생계로 써야한다. 하지만 이 비교체험 극과 극 같은 구준표와 금잔디에게도 똑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같은 기종의 핸드폰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구준표와 금잔디의 핸드폰이 말해주는 것
물론 이것은 PPL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광고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초부유층이나 서민층이나 완전히 다른 물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핸드폰만은 같다는 이 사실, 즉 핸드폰에 주어진 특권적인 평등의식(?)은 이 드라마 출연자들을 두고 왜 핸드폰 업체들 간의 각축전이 벌어졌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아무리 가난해도 구준표폰을 쓸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드라마가 끝나거나 시작되기 직전에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광고가 어째서 드라마와 그렇게 잘 어울리는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 판타지로서의 초부유층과 현실로서의 서민층의 접점에 등장하는 핸드폰이 주는 뉘앙스는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의 원천을 살짝 드러내준다. 그것은 광고의 세계가 그렇듯이 판타지로 그려지는 물질적 욕망의 세계를 (드라마를 통해) 누구나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이다.

‘꽃보다 남자’는 광고식 표현으로 얘기한다면 “생각대로 하면 되는” ‘비비디바비디부’ 세상이다. 그 세상의 주인은 F4로 불리는 네 명의 미소년들이고, 그들은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입시경쟁제로의 신화그룹 재단 학교를 다닌다. 이 생각대로 뭐든 되는 이들을 보통사람들은 선망하며 숭배한다. 이것은 흔히 TV를 볼 때 광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와 유사하다. 판타지의 세계가 있고 그 판타지는 상품들과 연결되어 있다. 광고가 말하는 것은 손을 뻗어 그 상품을 구매하는 순간, 당신도 그 판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속삭임이다.

그러니 그 광고 같은 세상 속으로 들어간 서민 금잔디는, 광고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대변자가 되어 그 판타지 세상을 대리 경험해준다. 광고 속에서 익히 보아왔던 뉴칼레도니아 같은 섬으로 광고 속 미소년들의 분신인 F4와 함께 여행하는 짜릿한 경험을 제공하고, 궁전 같은 집에서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받고, 미소년의 품에서 잠이 든다. 백화점을 통째로 빌려 쇼핑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하녀-주인님 놀이를 한다.

이 광고 같은 세상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주는 것은 금잔디 앞에 중간 중간 도래하는 잔인한 현실들이다. 신화고등학교 학생들의 집단 왕따나, 구준표와의 관계 사이에 끼여드는 반대자들(강회장이나 하재경 같은)은 금잔디의 판타지를 깨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 뿐, 광고 같은 세상에서 날아온 백마 탄 미소년들은 금잔디를 다시 그 세상으로 데려감으로써 판타지는 계속된다.

‘꽃남’이 연출한 광고 속 상품의 마력
판타지는 어찌 보면 드라마의 기본 전제일 수 있다. 따라서 판타지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드라마는 현실에서 풀어지지 않는 욕망들을 자신의 세계를 통해 때론 판타지로 잊게 해주고, 때론 그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현실을 사는 이들에게 어떤 자각을 주기도 한다. ‘꽃보다 남자’가 보여주는 판타지와 거기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 역시 그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불온한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드라마가 가진 지나친 상품의 냄새다.

이 드라마의 시퀀스들을 보면 스토리의 진행보다도 광고적인 장면들의 나열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가는 설명적인 대사들이 나온 후에는 여지없이 멋진 장면들, 예를 들면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웃고 떠들며 음식을 즐기는 장면 같은 것들이 대사 없이 보여지고 그 위로 OST가 흘러나온다. 만일 이 한 장면에 특정 상품 하나를 올려놓기만 해도 이것은 하나의 광고가 될 수 있을 정도다(물론 영상은 그다지 뛰어나진 않지만). 요는 이 드라마가 이야기의 구성보다는 광고 같은 팬시한 장면들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여기 등장하는 캐릭터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물론 ‘숨겨진 착한 구석’이라는 통상적인 매력이 있지만, 구준표라는 캐릭터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물질적인 것들이다. 보는 이들의 갖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팬시한 물질의 세계는 엄청난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구준표는 그 돈을 쥐고 있는 캐릭터다. 그는 그 돈을 스스로 번 것도 아니고 그저 태생적으로 얻은 것이므로, 그의 캐릭터는 생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데서 나온다. 물론 이 팬시한 캐릭터를 더욱 팬시하게 하는 것은 이민호의 수려한 외모다. 이민호가 이 드라마를 통해 벼락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구준표라는 캐릭터가 내면적인 매력(마음, 연기를 통해 보여지는 것)보다는 외면적인 매력(외모, 돈, 캐릭터 자체로부터 얻어지는 것)에 편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준표를 비롯한 F4 같은 물질적 세계 속에 살아가는 광고적(상품적) 존재들은 금잔디라는 한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한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대본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출이 대단한 것도 아닌 ‘꽃보다 남자’가 가진 불가사의한 힘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저 광고가 가진 상품 판타지의 힘과 유사하다. 갖고 싶은 것들이 즐비한 그 세계 속에서 뭐든 그걸 이뤄주는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판타지. 그 ‘비비디바비디부’의 세계가 우리를 사로잡았던 실체가 아닐까. 중독적으로 빠져들었던 드라마의 끝에서, 볼 때는 그 욕망에 끌려 바라보다가 끝나고 나면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순간적인 허전함에 빠지는 광고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밤 12시 TV 풍경을 바꾼 음악 프로그램들

하루의 노동 끝에 눈도 뻑뻑하고 어깨도 결리는 몸이 침대 위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자정. 그 고요한 밤의 품속에서 오롯이 깨어있는 것, 바로 귀다. 시각보다는 청각이 열려있기 마련인 이 시간대, TV는 언제부턴가 음악 프로그램들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 편성은 낯설었다. 한참 잠을 청할 시간에 노래라니! 그것은 또한 중심 시간대에서 밀려버린 음악 프로그램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우후죽순 생겨났던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은 시청률 몰락으로 점차 프라임 타임 대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중심에서 밀려난 음악 프로그램과, 소음에서 자유로워진 자정 시간대라는 이 두 지점이 만나자, 음악 프로그램들은 오히려 제대로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프라임 타임대에 주로 보여지는 시각 중심의 음악 프로그램들은 자정으로 옮겨오면서 청각 쪽을 더 치중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음악 중심에서 활동하는 실력 있는 가수들(시각 중심 음악 프로그램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이 무대로 나오게 되었다. 주류와 비주류는 이 음악을 중심으로 세우는 무대 위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과 기획형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가 같은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것이 하등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풍경이 되었다.

이렇게 달라진 자정의 풍경의 중심에 서 있는 ‘이하나의 페퍼민트(KBS 금 12시 15분)’는 ‘이소라의 프로포즈’와 ‘윤도현의 러브레터’의 계보 위에 서 있는 음악 프로그램이다.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음악을 중심에 세우는 프로그램을 말 그대로 프로포즈했다면, ‘윤도현의 러브레터’는 좀더 도발적으로 음지에 있는 음악인들(예를 들면 힙합이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밴드들)을 무대 위로 끌어들였다. ‘이하나의 페퍼민트’는 이 토양 위에서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편견 자체를 지워버린 상태에서 귀가 즐거운 음악의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진행자가 가수에서 배우로 바뀐 것은 상징적이다. 그만큼 말하는 입보다는 듣는 귀가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초콜릿(SBS 수 12시 30분)’ 역시 ‘이하나의 페퍼민트’와 마찬가지의 선상에 서 있다. 음악성을 중심으로 초대되는 가수들, 소극장 같은 작은 무대가 주는 집중력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하나의 페퍼민트’가 이하나가 가진 엉뚱하면서도 풋풋한 매력을 프로그램의 개성으로 세웠다면, ‘김정은의 초콜릿’은 김정은이 가진 ‘만인의 연인’이미지를 세웠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마치 연인들이 서로 이벤트를 해주는 것 같은 컨셉트가 부가되어 있다. 물론 자정의 듣는 귀를 열어주는 프로그램이지만, 가끔 시각적인 이벤트(라틴 댄스를 춘다거나, 연주를 하는 것 같은)가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여행 라라라(MBC 수 12시 35분)’는 더 극단적으로 듣는 귀를 중심에 세운다. 먼저 눈길을 끌어 모으는 무대를 없앴고, 반응을 유도하는 객석도 없앴다. 심지어 초기에 프로그램에 세워두었던 ‘라디오스타’ 4인방도 불필요해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듣는 노래가 저 녹음실에서 녹음되어 음반으로 만들어져 라디오나 TV의 전파를 타고 우리의 귀까지 들어오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면, 이 프로그램은 그 과정을 녹음실에서 바로 TV로 압축시켰다. 그만큼 생생해졌고 음악은 직접적으로 귀로 파고들었다. TV가 기본적으로 시각을 저버릴 수 없는 매체라고 할 때, ‘음악여행 라라라’가 보여주는 영상은 ‘귀로 보는’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스페이스 공감(EBS 월화 12시 10분)’은 작은 공간 속에 뮤지션과 관객을 밀착시킴으로써 그 상호반응을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프로그램 제목처럼 공간으로써 공감을 증폭시키는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공간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연주자들의 연주다. 손가락이 줄을 당기고 뜯는 그 미세한 소리마저 바로 앞에 있는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그것은 고스란히 TV를 타고 시청자 앞으로 날아온다. 작아서 집중되는 이 효과는 소극장 음악들의 장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또 재즈 같은 악기 연주가 중심이 되는 음악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만든다.

늦은 시간대로 옮겨 간 음악 프로그램들은 그 시간이 갖는 독특한 힘과, 오히려 편성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그 자유로움이 만나 우리의 자정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피곤하고 지친 영혼이 홀로 자신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이 시간, 우리의 귀는 이제 때론 감미롭고, 때론 마음을 뻥 뚫어줄 정도로 시원하며, 때론 잊고 있던 느낌을 깨어내는 듯한 그 음악 소리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이 시간의 무대 위에는 주류와 비주류, 혹은 장르로 구분되던 수직적인 음악들의 위계는 사라지고, 장르와 대중성과 실험성이 모두 어우러지는 수평적인 음악의 향연이 펼쳐진다. 귀로 보는 음악 시대가 열렸고, 그것은 우리의 자정풍경을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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