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지 관광, 노동마저 상품화되는 세상

인디언들은 사진에 찍히면 영혼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비합리적이라 생각될 수 있는 이 말은 그러나 지금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경상북도가 관광상품화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워낭소리’의 촬영지는 그 다큐멘터리 영화가 보여주었던 노동을 증발시키고, 전시되는 상품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노동마저 상품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워낭소리’가 대중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은 그 영화가 주목했던 이제는 실종되어버린 진정한 노동의 발견 때문이었다. 소를 부려 짓는 농사를 고집하는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와 함께 묵묵히 일생을 살아온 소는 그 노동을 증명해온 끊이지 않는 워낭소리만을 여운처럼 남긴 채 사라져 갔다. 그 워낭소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실종된 노동 속에서 소처럼 일하다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며 대중들의 가슴 속에도 울려 퍼졌다.

하지만 ‘워낭소리’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며 신드롬이 되는 순간(어쩌면 카메라에 담겨 그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으로 노출되는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 카메라가 포착한 공간의 아우라는 휘발되어 버렸다. 그 곳은 영화가 보여주었던 노동의 현장이기를 거부하고, 도시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대의 카메라는 저 인디언들이 터부시하며 말했던 것처럼, 확실히 그 대상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마법(?)을 발휘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워낭소리’의 사례는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한 산골소녀가 미디어에 노출되는 순간, 그 상업적 물결에 휩싸여 고통받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맨발의 기봉이’의 실제 인물인 기봉씨는 영화화된 후, 유명세로 고통받다가 결국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를 떠났고 그렇게 한참을 돌아서 이제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다. 카메라가 포착한 시골의 그 순수함들은, 바로 그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부터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 TV 속에서도 진행되는 현상이다. 시골이 가진 그 순박한 모습은 이제 도시인들의 향수의 공간이 되었고, TV는 이제 그 공간들을 안방으로 날라다 주고 있다. 흔히 여행 버라이어티 속에 잡혀진 시골들에서 그 본질적인 모습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 속에서 시골 노동의 현장은 그저 병풍처럼 배경이 되거나, 도시인들의 놀이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카메라가 도시에서 떠난 자들의 하룻밤을 포착하는 그 버라이어티쇼의 공간들은 그 순간부터 도시의 논리에 복속되기 시작한다.

촬영지의 상품화는 이제 문명화의 끝단에 서서 그 골동품적 취향으로 변질되어 도시화 되어가는 현 시골의 상황을 보여준다. 도시화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현재의 불균형한 경제조건 속에서 ‘워낭소리’ 촬영지의 관광상품화에 대해 동의해준 최 할아버지 가족들의 처지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그 마지막처럼 보이는 공간을 포착해 대중들의 마음을 울려준 그 영화가 거꾸로 그 공간을 잡아먹는 상황이 달갑게 보이지는 않는다.

‘1박2일’, ‘리얼’을 ‘실패’가 입증하다

누구나 소풍 전 날, “내일은 꼭 비가 오지 않게 해주세요”하고 빌었던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여행은 날씨에 민감하다. 또 변수도 많다. 갑작스런 폭설로 발이 묶이기도 하고, 우연한 사고(?)에 일정이 모두 바뀌기도 한다. 길에서 만난 사람과 생각지도 않은 경험을 하기도 하고, 그 경험을 통해 뜻밖의 재미를 얻기도 한다. 그것이 진짜 여행의 참 맛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여행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특별한 설정 없이도 그 낯선 장소로 떠나는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든 벌이지게 마련이다. 그걸 촘촘히 발견해내고 때론 캐릭터가 그 발견된 상황을 강화하면서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자연스럽게 그 리얼이 주는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

야생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는 ‘1박2일’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야생과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엮일 때다. 박찬호와 강호동이 대결하듯 한겨울 계곡 물에 들어가는 장면은 인물들 간에 형성된 미묘한 신경전과 함께, 마침 그 장소, 그 시간에 존재하는 얼음장같은 계곡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도 인위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본질적으로 ‘1박2일’은 버라이어티쇼라는 의식은 어떤 식으로든 웃음의 포인트를 현장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강호동은 출연진들을 때론 윽박지르고 때론 다독이면서 지나치는 연못에 뛰어들게 만들어, 그 연못을 승기 연못으로 만들어버린다.

제주도로 가기로 되어있던 상황에서 비행기 결항으로 계획이 무산되어 대신 가게된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그들은 웃음을 주기 위해 바닷물에 뒹구는 몸 개그를 위한(?) 게임을 해야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인위적인 부분은 그것이 여행 속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수긍하게 된다. 여행이라는 일탈 속에서는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이 리얼을 표방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이러한 리얼의 요소들은 묻혀져 버렸다. ‘무한도전’의 끝없는 도전은 이제 굳이 리얼이라고 붙이거나 붙이지 않거나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무한도전’이기 때문에 주목되는 것이지, 이제 더 이상 리얼 버라이어티이기 때문에 주목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무한도전’에서 시도했던 좀비 특집, ‘28년 후’는 그 실패를 통해 오히려 ‘무한도전’의 리얼 상황을 드러내주었다. 김태호 PD는 실패에 대해 연거푸 사과하며 시말서를 쓰고 있다는 얘기를 했지만, 바로 그 상황이 ‘무한도전’이 가진 실험정신과 리얼리티를 상기시켜 주었던 것.

이것은 ‘1박2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제주도에 촬영팀들을 전부 보내고, 자신들은 영종도에 발이 묶여 을왕리로 발길을 돌릴 때, 이 애초의 목적 실패는 이 프로그램이 진짜 리얼이라는 것을 거꾸로 드러내주었다. 이제 모두가 리얼이라 주장하는 시대에, 오히려 리얼이 드러나는 대목은 버라이어티쇼가 어떤 목적의 실패를 했을 때가 되었다.

청춘이 영원한 향수가 된 사연

지금 TV에 ‘꽃보다 남자’와 소녀시대는 마치 공기처럼 퍼져있다. 그것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거의 어김없이 패러디의 대상이 되고 있어,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그 영상들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패러디 영상들은 인터넷 속에 말 그대로 산재해 있고, 게다가 일반인들이 경쟁하듯 만들어낸 UCC는 시선의 골목들을 장악하고 있다. 라디오도 예외는 아니다. ‘꽃보다 남자’는 OST의 형태로 수없이 반복되어 노래 속에 영상을 환기시키고, ‘소녀시대’의 ‘gee’ 역시 그녀들의 풋풋한 춤동작을 보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반복적으로 라디오를 채우고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들에 쏟아지는 관심의 축이 젊은 층에서부터 중년층으로까지 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 이들이 각종 프로그램 속에서 중년 출연자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한 소녀시대의 윤아는 패밀리 남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데, 거기에는 유재석이나 윤종신, 김수로 같은 중년들의 열광적인 반응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밤만 재워 줘’에 출연한 ‘꽃보다 남자’의 김준은 아줌마들의 노골적인 사랑(?)을 받는 모습을 연출한다. ‘우리 결혼했어요’에 정형돈과 가상부부로 나오는 소녀시대의 태연은 그 털털한 모습으로 중년남성들을 사로잡고 있다.

과거 젊은 세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아이돌에 대한 팬덤 현상은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 세대의 벽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구매력 있는 중년 여성들이 드라마 등을 통해 젊은 스타들의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고, 이른바 걸 그룹들의 공연장에 삼삼오오 모여드는 아저씨 팬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되자 최근에는 아예 중년층을 그 소구대상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심심찮게 보여지고 있다. 이것은 주 시청층의 연령대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TV 프로그램들과 만나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중년들의 소녀들과 꽃미남들에 빠져드는 요인은 단지 달라지고 있는 팬덤 현상과 TV 환경으로만 설명되기에는 어딘지 부족하다. 이것은 작금의 불황 상황과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소녀들과 꽃미남들에 대한 열광 또한 불황이 가져온 복고 트렌드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의 어려움이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게 만드는 데서 복고가 탄생한다면, 소녀들과 꽃미남에 대한 추억은 청춘에 대한 추억과 다르지 않다. 그 발랄하고 탱탱했던 시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어려움으로 느끼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청춘이라는 영원한 샘물에 대한 갈증은, 지금 같은 시절에 더 간절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 청춘은 되돌려질 수 없다. 따라서 이 청춘을 판타지화하는 소녀들과 꽃미남들에 대한 반응은 더 열광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TV 드라마 같은 프로그램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는 중년 캐릭터들이 성공의 잣대 위에 그 판타지를 그려내던 것이 이 극심한 불황을 맞아 공감의 폭이 줄어든 것에서도 기인한다. 청춘은 성공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판타지가 된다. 소녀들과 꽃미남에 꽂힌 중년들. 그것은 거꾸로 어려운 현실의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의학, 멜로, 액션, 정치, 휴머니티까지 봉합하려는 ‘카인과 아벨’

장르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찾기 때문일까.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시도가 갖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백화점식 나열일까. 장르 드라마들은 한 가지 이상의 장르를 봉합하며 진화해 왔다. ‘하얀거탑’은 의학드라마에 법정드라마와 정치드라마를 칵테일했고, ‘외과의사 봉달희’는 의학드라마에 멜로드라마를 성공적으로 봉합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액션드라마에 가족드라마의 관계망을 접목해 한국형 느와르를 선보였다. 그렇다면 ‘카인과 아벨’은 어떨까. 놀랍게도 이 드라마는 이 모든 장르 드라마들의 디테일들을 하나로 끌어 모으고 있다.

‘카인과 아벨’에는 ‘하얀거탑’이 가진 권력대결구도가 있다. 그것은 이초인(소지섭)으로 대변되는 응급의학 센터와 이선우(신현준)로 대변되는 뇌의학 센터 건립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의 충돌이다. ‘하얀거탑’에서 긴장감 넘치게 그려졌던 투표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 한편 ‘카인과 아벨’은 의드로서 ‘외과의사 봉달희’가 가진 멜로드라마와 휴먼드라마의 요소도 숨겨져 있다. 형제의 한 여자를 두고 벌어지는 삼각관계와 새롭게 멜로의 축으로 들어올 오영지(한지민)가 멜로드라마의 구도를 이루고 있고, 한편으로는 인술을 향해 달려가는 이초인의 휴머니티가 기술에 편향된 이선우와 대결구도를 이룬다.

‘카인과 아벨’에는 또한 ‘개와 늑대의 시간’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이 드라마는 의드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권력 대결구도의 극한으로 끌어올려지면서 액션드라마와 복수극의 양상을 띄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기억의 문제를 끼워 넣었다는 것이다. 이초인의 탄생이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어머니로부터 꺼내지는 것이나, 자신을 아버지처럼 키워준 이종민 원장(장용)이 뇌사상태에 빠져있었던 것, 그리고 자신도 음모에 빠져 기억상실에 빠지는 것이 그렇다. 무엇보다 이 의학드라마에서 그 분야로 잡고 있는 것이 뇌 의학이라는 점은 이 드라마가 그만큼 기억에 천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개와 늑대의 시간’이 그려낸 기억의 문제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겠지만, 일정부분 모티브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카인과 아벨’은 이처럼 꽤 많은 장르 드라마들의 속성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그 봉합은 현재까지는 꽤 성공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판단된다. 화두로서 제시했듯, 이렇게 많은 장르적 요소들을 한 틀 안으로 끌어 모은 데는 이제는 장르적 재미에만 머무는 것만으로는 어딘지 부족하게 되어버린 현 드라마 소비층들의 높아진 안목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장르 드라마라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낯선 그 틀에 전통적인 드라마의 형식을 접목하면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모쪼록 그 장르 실험이 백화점식 나열에 그치거나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 시도가 작금의 정체된 장르 드라마들에 꽤 괜찮은 의미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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