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 멜로, 적과 아군이 없는 ‘대왕 세종’

이제 종영을 앞두고 있는 ‘대왕 세종’은 독특한 사극이다. 사극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던 흥행요소들이 빠져있는 사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시청률이 아마도 10% 초반대에서 종영하는 KBS 사극은 ‘대왕 세종’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시간대와 채널 이동이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그 근간에는 ‘대왕 세종’만이 가진 이 같은 도전이 깔려있다.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는 ‘대왕 세종’의 행보, 그것은 무엇이었고, 또 어떤 의미가 있나.

볼거리가 없다? 스펙타클보다는 심리사극으로
‘대왕 세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난점은 여타의 사극들에 비해 볼거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볼거리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그간 대하사극하면 기대하게 하던 전쟁, 전투신의 그 스펙타클한 영상이 ‘대왕 세종’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어린 충녕대군이 대왕 세종이 되어가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부각되는 것은 정치다. 즉 칼의 싸움이 아닌 말의 싸움이 사극의 중심에 서게 된다.

스펙타클한 영상을 기대한 시청자라면 인물들의 심리에 천착하는 ‘대왕 세종’의 이런 면모는 낯선 것이 아닐 수 없다. 눈과 귀를 열어두기만 하면 쉽게 상황이 파악되면서 역사적 인물들이 그 속에 살아 움직였던 과거의 사극들에 비해, ‘대왕 세종’은 자세하게 인물들의 대사를 읽어나가야 하는 곤혹스러움이 있다. 대사 또한 정치적 언변이 그러하듯이 직설적이라기보다는 중의적이고 다의적이다. 만일 그 대사가 주는 특별한 재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대왕 세종’은 자칫 ‘말만 번지르르한 사극’으로 비칠 수 있었다.

적도 아군도 없다? 독특한 대결구도
정치 사극을 지향하는 ‘대왕 세종’에는 전투나 전쟁이 중심이 되는 사극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적과 아군의 선명한 대비가 없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는 이 정치판에서 때론 강력한 대립자였던 양녕대군(박상민)과 황희(김갑수)는 후에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이것은 권력에의 욕망을 드러내며 사사건건 세종과 대립하던 박은(박영지)도 마찬가지다. 또한 초기 세종의 지원자였던 최만리(이성민)는 뒤로 가면 원칙주의자로서 세종의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강력한 적이 된다.

이것은 사실 사극에서 이제껏 잘 보여주지 않던 독특한 대결구도이다. 선명한 대결구도가 갖는 복수극의 구조는 사극이 가진 흥행의 핵심요소. ‘대왕 세종’은 그 비현실적인 대결구도를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복마전의 세계로 끄집어낸다. 이것은 또한 세종의 정치철학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오히려 가장 강력한 대립자인 조말생(정동환)을 가장 측근에 두면서 자신이 엇나가지 않도록 균형자 역할을 하게 만든다. 즉 정치란 상명하복의 과정이 아니라 다른 생각들의 부딪침을 통해 보다 나은 것으로의 타협의 과정이라는 것을 ‘대왕 세종’은 보여준다.

멜로가 없다? 인간애를 다루다
대결구도나 전쟁신 같은 스펙타클을 버리고 나면 사극에서 흥행요소로 남는 것은 멜로이다. 현대극이 식상한 것으로 그리는 운명적인 사랑은 아직도 사극 속에서는 유효한 코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왕 세종’에는 그 흔하디 흔한 멜로가 없다. 초반부에 후궁으로 들어와 세종과 사랑을 나누며 후일 신빈 김씨가 되는 역할을 맡았던 이정현은 성대결절을 이유로 하차하자 그나마 있던 이렇다할 멜로 구도는 사라져버렸다.

대신 ‘대왕 세종’이 천착하는 것은 세종의 무한한 백성들에 대한 사랑, 즉 인간애이다. 조선 백성들의 삶을 위해 조선의 역법과 천문을 연구하고, 한글 창제를 해나가는 그 과정은 한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는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독특한 것은 그 과정에서 ‘대왕 세종’만의 재미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발명의 과정과 그 발명을 제지하려는 세력 간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두뇌 싸움이다. 물론 이 재미 역시 보통의 사극을 기대하던 시청자들에게는 낯선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대왕 세종’은 결과적으로 이 사극의 세 가지 흥행코드를 버림으로써 시청률에서 실패한 사극이 되었다. 주말 밤, 아직까지는 도전적인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이 통한다는 반증인 셈이다. 그렇지만 ‘대왕 세종’이 그린 그 독특한 세계 자체가 시청률이라는 양적 판단에 재단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낯선 사극의 구조는 훗날 어쩌면 새로운 대중적인 사극의 구조 속으로 편입될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도 하지 않지만 해야하는 길을 걸어갔다는 점에서 ‘대왕 세종’은 그 드라마의 주인공을 닮았다.

서민들의 자화상 그려낸 ‘베토벤 바이러스’

‘베토벤 바이러스’는 클래식이라는 우리네 드라마와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소재를 다룬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그 속에서 타인의 얼굴이 아닌 우리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딘지 우리와는 다를 것만 같은 클래식이란 소재였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서민들의 자화상을 그 속에 담고 있었다.

정희연, 우리 시대 주부의 자화상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늘 뒷전이고 오로지 가족들이 우선인 삶을 살다가 뒤늦게 첼리스트로서의 꿈을 찾아낸 정희연(송옥숙)은 바로 우리네 주부들의 초상이다. 가족들 속에서는 늘 밥 차려라, 수험생 뒷바라지해라는 말에 마치 그것만이 그녀의 인생이라도 되는 양, 못 챙기는 걸 미안해하는 그녀는 바로 그 틀을 벗어나 강마에(김명민)를 만나면서 삶이 변화한다. 그녀를 변하게 한 한 마디는 다름 아닌 강마에의 “똥 덩어리”. 아픈 말이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똥 덩어리 취급하며 살아온 그녀를 자신과 맞서게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서조차 남편의 눈길을 의식하는 그녀는 그래도 늘 가족의 틀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이 시대 주부들의 초상이다.

박혁권, 이 시대 가장의 자화상
콘트라베이스로서의 꿈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박혁권(정석용)은 가장으로서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 하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같다. 당장 아기의 분유 값이 급하고, 살아가야 할 집을 구하는 것이 급급한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밟히는 것은 가족이다. 그런데 때론 이것은 핑계가 된다. 너무나 멀리 있어 보이는 꿈을 저 스스로 포기하려는 핑계. 직장에서 후배에게 밟히면서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그를 오히려 바꾸는 것은 가족이다. 조심스럽게 내미는 그의 꿈으로의 발걸음이 남다르게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강건우, 이 시대 청년의 자화상
강건우(장근석)는 절대음감을 가진 천재로 등장하지만 그 면면은 이 시대 청년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왜 즐거우면 안돼요”하는 그의 질문은 이 시대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직업이든, 학업이든 늘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기성세대들에게 강건우가 던지는 질문은 무언가 깊이 없어 보이는 아이의 그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즐기는 자를 노력하는 자가 이기지 못하는 시대, 강건우의 질문은 오히려 성공하고 나서도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것이 아닐까.

김갑용, 이 시대 실버의 자화상
시향 단원으로 활동했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연주할 자리를 얻지 못하고 주로 길거리에서 연주하게 되는 김갑용(이순재)은 이 시대 실버들의 자화상이다. 한 시대의 중심이었고 그들로 인해 지금의 삶이 가능하게 됐지만 점점 중심에서 벗어나 지금은 잊혀져버린. 친자식보다 하이든(쥬니)에게 더 자식 같은 정을 받고 말년의 기억을 갖게된 김갑용은 이 아이러니한 현실의 대변자다. 치매는 어쩌면 그에게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하고픈 것만 기억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이든. 이 시대 청소년들이 자화상
하이든은 교육열 속에 부자인 아이들은 더 좋은 대학에 가고, 가난한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 시대 청소년들의 자화상이다. 누구는 매달 몇 백만 원씩 레슨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누구는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대물림되는 시대. 빈곤은 또한 문화까지도 특정한 사람들만의 향유물로 바꾸어 버리는 세태. 하이든의 절망과 까칠함은 바로 그런 세상과 맞서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배용기, 이 시대 마이너리티의 자화상
제대로 배운 게 없어 밤무대에서 활동하지만 오케스트라가 꿈인 배용기는 이 시대 마이너리티의 자화상이다. 캬바레라 비아냥대는 말들에 “캬바레 무시하지마”하고 말하는 그의 말에는 진정성이 들어있다. 세상에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메이저와 마이너가 따로 있을까. 꿈이 있는 한 말이다.

강마에, 이 시대 멘토의 자화상
저마다 사연 한 가지씩들을 갖고 이 시대의 대변자들로서 등장한 이들 모두를 조련해 어느 경지에까지 끌고 가 꿈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강마에는 이 시대 멘토의 자화상이다. 그네들의 착한 마음을 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강력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그들 앞에 스스로 벽이 될 수밖에 없는 멘토. 냉혹한 현실 앞에 약해질까봐 혹 상처를 입을까봐 괜한 부드러움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이 시대의 멘토.

‘베토벤 바이러스’가 그려낸 캐릭터들은 모두 이 시대의 자화상들이었다. 거기에는 현실이 힘겹기만 한 서민들의 얼굴들이 있었다. 무모하리 만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클래식이 낯설어도 우리는 모두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강마에가 그 중심에 섰던 이유는 바로 이 서민들의 꿈을 이끌어주는 리더십으로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베토벤 바이러스’의 이 작은 오케스트라는 지금 현재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현실은 답답하지만 꿈은 포기할 수 없는.

환타지 시대극 ‘에덴의 동쪽’, 역사왜곡보다 위험하다

‘에덴의 동쪽’의 기획의도에는 아무런 시대극에 대한 표지가 나타나질 않는다. 거기에는 대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마음과 사랑, 심지어 영혼(정말?)까지를 되찾는 휴머니즘의 이야기라는 애매모호한 문구들이 들어가 있다. 물론 드라마가 어떤 현실에 부재한 것을 채워 넣으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환타지가 어떤 시대를 그릴 때는 신중해져야 한다. 드라마로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은 무한히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 재해석이 시대정신 자체까지 변형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60년대 사북 탄광촌에서부터 시작된 두 가족의 애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 역사는 탄광업주인 신태환(조민기)과 노조위원장인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신태환의 사주로 이기철이 죽게되면서 양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의 아들이 뒤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복수극의 틀을 가지고 있는 이 드라마의 한 동력이 신태환의 이기철 살해에서 비롯된다면, 그 복수극과 동시에 진행되는 화해극은 이미 시청자들이 이 철천지 원수들의 두 아들이 바뀐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지점 복수와 화해가 교차하는 그 운명의 쌍곡선은 이 드라마에 극적인 힘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기획의도에도 없는 시대극에 대한 징후들이 이 두 가족의 역사 속에 무차별로 끼여든다는 점이다. 탄광촌의 노사분규와 건설회사와 철거민들의 이야기, 학생운동과 고문통치, 전투기 도입과 로비스트 이야기 등등. 그것은 풍경만으로도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무작위로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시대풍경의 꼭지점 위에는 신태환 혹은 신명훈(박해진)이 한 축을, 그리고 나머지 꼭지점 위에는 이동욱의 아들 이동철(송승헌)과 이동욱(연정훈)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대립은 마치 그 시대에 벌어졌던 대립을 표징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이 밑그림 위에 얹어진 인물들의 관계가 심상치가 않다. 먼저 이 뒤바뀌어진 아들들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는 그것이 지속되고 강해질수록 더 강력한 파국(즉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회한)을 예고하게 만든다. 이미 그 엇갈린 운명을 알고 있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대립은 안타까운 운명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등장인물들의 대립이 결국은 오해로 인한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식의 이런 스토리 구조는 그 밑그림에 깔려있는 시대의 문제 또한 너무나 간단하게 화해의 장으로 끌어내게 만든다. 거기에는 시대의 아픔을 양산했던 자들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혹은 법적인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처벌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가족적인 핏줄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 두 가족의 문제만이 아니다. 유난히 많은 이 드라마 속 원수지간의 사랑은 이동욱과 언론재벌 대한일보 민회장의 딸인 혜린으로 이어지고, 신명훈에게 겁탈 당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그와 결혼하는 지현(한지혜)으로도 이어진다. 심지어 이동철의 여동생인 기순(전소민)은 자신을 납치한 왕건(김형민)을 오히려 살려주고 점점 가까워진다. 이들에게도 보이는 것은 원수가 저지른 사회적인 문제들(범법행위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그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사랑으로 그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연 이 드라마가 연거푸 외쳐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호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일까.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 혹은 상투적인 종교적 문제로 바꾸어버리는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이상한 휴머니즘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이동철의 아버지 이기철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품을 수 있어야 사나이”라고 남긴 그 애매한 말에서부터 드러난 바 있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자식이나 아버지라도 응당 그 벌을 받아야하는 것이 사회 정의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마치 그 지점에서 “그래도 핏줄인데...”하고 우리네 혈연 중심적 사고방식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신태환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한다”는 그 논리는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생존인 것처럼 위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에덴의 동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시대의 아픔을 조장하고도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심정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때론 역사왜곡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그들을 보면 세상이 보인다

개그가 공감을 바탕으로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세상의 모습이 들어있기 마련. 지금 ‘개그콘서트’가 담고 있는 세상은 어떨까.

어려운 경기? 한민관이 주목받는 이유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체적으로 경기 침체에 따른 힘겨움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대포동 예술극단’은 북한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거꾸로 남한 상황을 패러디 하는 코너. ‘파리의 연인’을 패러디한 ‘공복의 연인’에서 박지선이 꼬르륵하는 소리를 내자, 남자친구로 등장하는 비쩍 마른 한민관이 “배고프면 배고프다 왜 말을 못하네?”하고 호통을 친다. 그러자 박지선이 한민관의 얼굴을 가리키며 하는 말. “어떻게 말을 합니까? 이따구 얼굴 앞에서.” 왜 북한 상황을 굳이 설정하는가 하는데는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좀더 절실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어려운 경제상황을 제대로 다루는 코너는 단연 새롭게 등장한 ‘로열 패밀리’다. ‘엄마가 뿔났다’의 고은아(장미희)를 패러디한 듯한 이 코너는 모두 교양 있고 어딘지 귀티가 나는 듯 행동하지만 실상은 거지인 가족을 그려내며 큰 웃음을 준다. 구걸을 하다 들어온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수박껍데기를 주며 “알맹이가 많이 붙었더라”고 하거나, 아들이 돌아와 “이제 사천식당하고는 거래를 끊어야겠습니다. 개를 키운다고 합니다”하자 아버지가 “개도 안 먹는 음식이 있을거야”라고 되받는 식이다.

이밖에도 구두닦이들의 일상적인 대화를 담은 “그려 안 그려”, 그리고 ‘베토벤 바이러스’를 패러디한 ‘악성 바이러스’에서 강마에를 흉내낸 싼마에(김준호)가 프랑스 혁명당시 국민들의 배고픔을 표현한 곡이라며 연주 끝에 갑자기 “밥 주세요!”로 마무리하는 대목 역시 간접적으로 경기상황을 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가장 배고픔을 느낄 개그맨들이 그것을 소재로 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특기할만한 점은 이 상황에서 한민관 같은 부실한 몸의 개그맨이 이 코너들(대포동 예술극단, 로열 패밀리)에 집중 배치되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허위의식 가득한 세상, 황현희가 주목받는 이유
‘개그콘서트’가 보여주는 또 하나는 허위의식이 가득한 세상이다. 물론 ‘달인’의 김병만은 일찍이 이 허위의식 가득한 세상을 몸으로 직접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주목받는 코너는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이다. 물론 여기서 황현희 PD가 딴지 거는 것들은 사실 얼토당토않은 것들이지만, 그 형식 자체는 실제로 과장광고가 판을 치는 세태를 정면에서 꼬집는 것이다. “아무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하지만 전화하자 이름부터 물어보는 이 어처구니없는...” 황현희 PD의 황당한 진술 속에는 그러나 “실제로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묻어난다.

상조전문CF를 패러디한 ‘도움상회’는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의 한 분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 방향성이 다르다. 그것은 ‘소비자 고발’이 광고 문구 그 자체를 시비 걸고 있는 반면, ‘도움상회’는 사회의 잘못된 환부를 이 패러디된 상조CF 속으로 끌어들여 보내버리는(?) 것이 주요 컨셉트이기 때문이다. 학력위조자를 보여준 후, 등장한 박성호, 김대범은 “학력 위조하시느라 정신 없으시죠? 큰 학교 가서 별 다시는 일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부실공사를 한 사람을 보여준 후, “편안하게 때려주겠습니다. 맞은 자국 푸르게 푸르게. 집단 구타 서비스. 아무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후려 쳐드립니다.”라고 하는 식이다.

이밖에도 ‘개그콘서트’의 개그가 보여주는 현실은 소통부재로 파편화된 관계다. ‘대화가 필요해’는 대화부재의 가족을, ‘할매가 뿔났다’에서는 약자로서의 노인들이 겪는 소통부재의 상황을, ‘춘배야’와 ‘박대박’에서는 말은 많지만 소통은 되지 않는 현실을 개그로 담아낸다. ‘개그콘서트’에 유난히 패러디가 많은 것은 그만큼 세태 풍자를 이 프로그램이 많이 다루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세태는 어려운 경제상황, 허위의식 가득한 세상, 그리고 소통부재의 사회다. 이 답답한 세상을 ‘개그콘서트’처럼 진짜 한 바탕 웃음으로 날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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