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드로 장르화 된 소재, 캐릭터 신선미 떨어뜨려

국내 의학드라마의 효시인 ‘종합병원’의 적통을 잇는다는 기대를 한데 모으고 방영된 ‘종합병원2’의 첫인상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14년의 공백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의학드라마들이 계보를 이루어왔고, 그렇기에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의드에 ‘종합병원2’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그 제목이 주는 화려한 외투에 비해 첫 단추를 풀어 보인 ‘종합병원2’의 속살은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이었다.

의드에 이런 캐릭터 꼭 있다
‘종합병원2’의 캐릭터들은 여러모로 ‘그레이 아나토미’의 캐릭터들을 벤치마킹한 혐의가 짙다. 주인공인 좌충우돌의 정하윤(김정은)은 메리디스 그레이를, 어딘지 어수룩하지만 인간적인 최진상(차태현)은 조지 오말리를, 상사이면서도 따뜻한 심장을 가진 김도훈(이재룡)은 데릭 셰퍼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거의 대개의 국내 의학드라마들이 가졌던 캐릭터 구조다.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과의 과장이 있고, 이제 막 병원생활을 시작하는 신출내기 레지던트들이 있으며 그 레지던트들 사이에는 우정인지 사랑인지 애매한 관계의 남녀가 있다. 대체로 주인공은 그 레지던트들 중 여성이며, 그 여성은 외과의 과장 혹은 동료와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그 대략의 구조다. 이 틀은 이미 ‘뉴하트’에서도 똑같은 구조로 제시된 바 있다. ‘외과의사 봉달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지없이 빠지지 않는 캐릭터는 레지던트들을 깨는 호랑이 선배 레지던트다. ‘종합병원’에서 오욱철이 했던 그것을 ‘종합병원2’에서는 류승수가 맡아 하고 있다. 이것은 ‘뉴하트’에서는 뒤질랜드로 유명한 배대로(박철민)라는 캐릭터로 보여진 바 있다. 이들 캐릭터들은 아마도 ‘종합병원’이 최초로 방영되었던 1994년이라면 획기적이고 신선한 캐릭터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이 캐릭터들이 전형화되어 버린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들
총상을 맞고 응급실에 실려온 유괴범과 그가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밝히지 않아 위험에 처하게된 유괴된 아이를 두고 벌어지는, 이른바 ‘범법자와 환자’코드의 에피소드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유괴범을 범법자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환자로 봐야 하는가 하는 의사들의 원초적인 질문을 하는 이 에피소드는 이미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소개된 것들이다. 살인범을 살려주었더니 그 자가 오히려 봉달희를 칼로 찌르는 이 이야기는 의사라는 직업과 인간이라는 본질 사이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의사들의 상황을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다.

‘종합병원2’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정하윤과 최진상이 서로 환자를 살리기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교차시키면서 이 메시지를 잘 영상화해냈다. 즉 정하윤이 살리려는 유괴범이나 최진상이 살리려는 유괴된 아이 모두 의사에게는 살려야만 할 등가의 환자라는 걸 영상이 분할화면으로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에게는 그 유괴범도 하나의 환자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 에피소드는 이미 여러 번 의학드라마에서 반복되어 이제 그 신선미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이제 단 2회가 지난 것으로 아직까지 이 드라마의 전체 그림을 예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종합병원2’의 모습은 어떤 새로운 의드의 도전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익숙한 의드의 코드들을 활용하는 장르에 기대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것이 좀더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으리라 판단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국내 의학드라마의 첫 단추를 열었던 ‘종합병원’의 연장선이라면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 ‘종합병원2’가 자칫 ‘종합병원’의 향수에 기대는 드라마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종합병원2’, 의학드라마의 또 다른 진화가 되려면

새롭게 시작하는 ‘종합병원2’는 의학드라마의 계보를 잇는 드라마다. 본격적인 의학드라마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종합병원(1994)’의 적통이기 때문이다. ‘종합병원’은 최완규 작가가 현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병원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의 디테일을 살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실로 이 드라마는 전문성이 부족했던 당대 드라마환경에서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시청률은 물론 작품성에서도 호평을 기록한 ‘종합병원’의 성공은 다른 의학드라마의 탄생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의가형제(1997)’, ‘해바라기(1998)’, ‘메디컬센터(2000)’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중 ‘의가형제’와 ‘해바라기’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종합병원’만큼의 전문성을 갖지는 못했다.

트렌디 드라마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드라마는 전문성보다는 멜로에 집착했고, 그러자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라는 말이 등장했다. 전문성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이른바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요구가 커지자 본격적인 의학드라마는 부활을 예고했다. ‘하얀거탑’과 ‘외과의사 봉달희’가 본격 의학드라마의 계보를 이으며 등장해 호평을 받았다.

이 두 드라마는 모두 의학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었지만 그 결이 달랐다. ‘하얀거탑’이 멜로 라인 없이 한 인간의 욕망에의 질주를 그려냈다면, ‘외과의사 봉달희’는 전문직으로서의 의사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의사를 그리며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의학드라마의 계보를 이은 것은 ‘뉴하트’로 이 드라마는 ‘외과의사 봉달희’와 ‘하얀거탑’의 요소들을 모두 아우르고, 의학드라마를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켰다.

이제 그 계보 위에 세워질 ‘종합병원2’는 어떨까. 2008년에 만들어지는 ‘종합병원2’는 단순히 1994년작 ‘종합병원’의 연장선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간 이어진 계보의 연장선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커진 것은 기대감과 함께 부담감이다. 의학드라마의 효시를 등에 업고 있고, 또한 일련의 진화된 계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다르거나 혹은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오히려 기대감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종합병원2’의 차별점으로 일단 제시된 것들은 인물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과 이전보다 더 디테일한 장면 묘사에 공을 들였다는 것 정도다. 이건 사실 정확히 말하면 차별점이 아니다. 세대교체야 당연한 것이며, 디테일한 장면 묘사는 ‘하얀거탑’ 이후 일련의 의학드라마들이 추구해온 방향이다. 또 휴머니즘을 바탕에 깔 것이고, 또 멜로 라인도 필수적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점은 이미 ‘외과의사 봉달희’나 ‘뉴하트’를 통해 반복되었던 것들이다. 이것은 이제 의학드라마라고 하면 하나의 장르의 요소로서 굳어진 것들이다.

흔히들 의학드라마를 보며 “이런 장면 꼭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의학드라마가 이제 장르가 가진 먹히는 요소들의 유혹을 받는다는 반증이다. 같은 내용에 인물이 조금 바뀌고 장면들이 좀더 세련되게 구사한다고 해서 이제는 더 이상 차별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짜 차별화가 이루어지려면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스토리의 발굴이 필수적이다. 완전히 장르를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큰 틀에서 몇 가지는 ‘종합병원2’가 장르의 유혹을 벗어나 그것만의 차별점을 찾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의학드라마의 계보 위에서 ‘종합병원2’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일이다.

‘미인도’의 남장여자, ‘바람의 화원’과 뭐가 다른가

신윤복 열풍이다. 이정명 작가의 팩션 ‘바람의 화원’이 이 불황기에도 연일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고,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매회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지난 달 열렸던 간송미술관 개관 70주년 행사에는 때아닌 관객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었다. 다름 아닌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영화 ‘미인도’가 개봉함으로써 신윤복 신드롬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전망. 왜 신윤복은 갑자기 이 시대에 등장했을까. 그것도 남장여자로.

드라마 ‘바람의 화원’, 예술가의 초상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설정된 것은 별로 남아있지 않은 사료가 만든 상상력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그나마 남아있는 그림들의 필치가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흔하게 알려진 ‘단오풍정’같은 그림을 두고 봐도 세세한 붓 터치와 인물묘사, 게다가 철저히 계산된 듯한 구도와 색감까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호방함이 느껴지는 김홍도의 남성적인 필치와는 대조적이다. 이정명 필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설정된 것은 바로 그 그림이 전해주는 여성성의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신윤복과 김홍도가 그림의 배경을 가지고 논쟁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새 그림은 신윤복이 당대 조선사회에서 얼마나 억압적인 체제 속에 자유를 갈구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배경은 없고 중심인물만 가지고도 충분히 그 사람의 심정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은 새를 그려놓고 “이 새는 배경이 없을 때는 그저 새일 뿐”이지만, 배경으로 새장을 그려 넣으면 “새장 밖으로 날아가고픈 심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림의 소재나 화풍이 이미 정해져 있어 그 틀을 벗어나면 이단이 되어버리던 당대 사회에서 신윤복이 가졌던 ‘배경에의 의식’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창조하려는 그 여성성의 마음을 가졌지만 체제에 순응해야 하는 남성성의 사회 속에서 겪었을 억압.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남장여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남자로서 살아가야 하고, 대신 자신 속의 여성을 숨겨야 하는 신윤복이 자신이 채우지 못하는 여성의 욕구를 그림을 통해 표출한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드라마 속, 신윤복의 작품, <미인도>가 가지는 의미는 그저 그것이 신윤복의 자화상이라는 표면적인 설정에만 있지 않다. 거기에는 남장여자로서 억압된 미적 욕구를 채우려는 욕망이 꿈틀댄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가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영화 ‘미인도’, 성이라는 자유
하지만 영화 ‘미인도’로 오면 이 남장여자라는 껍질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담는다. 각종 성행위를 묘사한 그림들에 대해 조정대신들이 음란하다고 꾸짖을 때, 신윤복은 자신의 손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 그림 속의 남녀는 자연스럽게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서로에게 이끌리는 모습들이며 그 인간적인 부족함은 자신에게는 오히려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신윤복은 말한다.

영화 ‘미인도’에도 새장과 새의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예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의미로 읽힌다. 스승 김홍도가 그 그림이 가진 체제반항을 운운할 때, 신윤복은 자신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저 보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싶은 대상을 그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미인도’는 어린 시절 자신 때문에 오빠가 자살을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남자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다 어느 날 당당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지점에 남장여자의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극중 신윤복이 껍질로서의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오로지 한 남자에게 안겨 있는 모습이 가장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는 분명 지나치게 멜로와 성적 묘사에 집착한 면이 있다. 따라서 남장여자 설정이 가진 본래의 이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그 속에 묻혀 버린다. ‘센세이션 조선 멜로’라는 문구는 자칫 신윤복이라는 천재를 상업적으로 활용한 혐의를 갖게 만든다.

그 성과가 무엇이든 간에 신윤복이라는 인물이 남장여자로 이 시대에 탄생한 것은 아마도 지금 시대가 지향하는 여성성의 사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던 과거에서 이제는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나누어지는 시대, 남장여자는 어쩌면 바로 이 중성적인 시대를 담는 아이콘인지도 모른다.
(본 원고는 청강문화산업대학 사보 100도씨(100C)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과장 없는 방송가 이야기, 그들 아닌 우리 세상

전문직 드라마라는 용어 속에는 그 전문직에 대한 막연한 동경 혹은 호기심이 숨어 있다. 특히 그 전문직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방송일 것이다. TV의 앞쪽에 앉아 TV 저편, ‘그들이 사는 세상’이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 매일 방영되는 드라마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촬영되며, 그걸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것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이미 방영되었던 ‘온에어’는 바로 그 대중들의 방송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드라마로 포착했다. 연예계의 뒷얘기, 즉 카메라를 벗어난 연예인, 혹은 방송관계자들의 삶이라고는 하지만 ‘온에어’를 통해 비춰진 것은 여전히 그들이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온에어’가 보여준 것은 우리와는 다른,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드라마 바깥의 그들 모습을 담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환타지를 자극하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이 보여주는 것은 그 다를 것만 같은 세상이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내겐 너무도 버거운 순정’편에서 주준영(송혜교)은 “우리 드라마를 한 마디로 한다면 그것은 ‘순정에의 강요’”라고 말하면서 2,30대에 만나서 순정에 목숨거는 한국드라마를 비꼰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드라마의 얘기만이 아니다. “순정은 개뿔!”이라던 주준영 자신 혹은 지금의 쿨한 세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는 결국 드라마 촬영 중간에 잠깐 시간을 내서 사랑하는 정지오(현빈)에게 달려가면서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단 한번도 순정적이지 못한 내가 싫었다. 이렇게 달려오면 되는데...’

‘산다’편에서는 배우 윤영(배종옥)의 어머니가 죽는 에피소드를 바탕에 두고 그 위에 수많은 삶의 풍경들을 중첩시켜놓는다. 술에 취해 평소에 쌓인 걸 풀기라도 하겠다는 듯 으르렁대며 “죽인다”고 싸워대는 손규호(엄기준)와 양수경(최다니엘), 아무리 엄마라도 빈집에 친구들과 들어와 밤새 도박과 술을 마신 걸 보고 “사는 게 싫어진다”는 주준영, 드라마를 찍느라 상가집에도 가지 못하는 처지를 “무슨 놈의 팔자가 인간도리도 못하고 살아”하며 한탄하는 중견배우들, 태연한 척 버티다 “극악스러워도 엄마가 있어 좋았다”며 결국에는 오열하고 마는 윤영까지. 그들 틈바구니 속에서 유독 삶의 행복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주준영과 정지오 커플의 모습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드라마를 만드는 자들의 힘겨운 삶과 현실과 때론 타협해야하는 고뇌, 그리고 순간 순간 빛나는 행복감을 그리면서 TV 저편에 사는 그들이 사실은 우리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그러니 그들이 사는 세상을 무언가 특별하고 드라마틱한 삶으로 요란하게 치장했던 방송국을 다룬 기존 드라마들에 비하면 심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덕목은 과장 없는 진정성을 갖고 포착하는 삶의 이야기다. 그것이 드라마라는 직업 속에서 느껴지는 단상들과 연결되기도 하고 때론 직업 상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매번 다른 부제를 갖고 스무 가지의 삶의 양태를 보여줄 20부작 ‘그들이 사는 세상’은 자극적인 자신들의 현실(자극적이고 경쟁적인 드라마 환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좋은 드라마가 살기 힘든 세상이다. 드라마를 통해 보여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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