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보는 방송3사 예능 색깔

1년 전만 해도 방송사의 얼굴은 드라마였다. 잘 만든 드라마 한 편은 그 방송국의 이미지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요즘 이 역할은 예능과 분담되고 있는 추세. 주중 한밤중의 토크쇼 전쟁, 주말의 리얼 버라이어티쇼 경쟁은 드라마 경쟁만큼이나 치열해졌다. 재미있는 것은 드라마에 있어서 방송3사가 저마다 색깔을 달리하는 것처럼 예능에 있어서도 그 색깔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MBC 예능, ‘연애’에 빠지다
‘무한도전’이 주춤하는 사이, 새롭게 강자로 부각된 ‘우리 결혼했어요’. 짝짓기 프로그램과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접목된 이 프로그램은 최근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남자들끼리, 혹은 여자들끼리만 출연했던 각종 리얼 버라이어티쇼들이 저마다 남녀를 출연시켜 짝짓기 프로그램을 그 안에 넣으려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영향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무한도전’이 ‘무한걸스’와 미팅을 했고, ‘1박2일’이 백두산으로 가는 여정에 승무원들과 짝짓기 게임을 했으며, ‘패밀리가 떴다’에서는 여자 출연자들이 출연해 남자 출연자들이 묘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고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살아봅시다’는 ‘우리 결혼했어요’가 가진 결혼의 환타지를 현실 버전으로 바꾸었다. 최근 MBC에서 주목받고 있는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는 MBC의 예능에 짝짓기 프로그램이 새로운 메인 아이템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SBS 예능, ‘가족’에 빠지다
SBS 예능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다. ‘라인업’에서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고배를 마신 SBS가 야심차게 꺼내놓은 카드가 ‘패밀리가 떴다’라는 점은 가족을 유달리 강조하는 방송사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패밀리가 떴다’는 물론 그 프로그램 포맷에 있어서 ‘1박2일’과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상당부분 유사한 점들이 있지만, 다른 점은 바로 출연진들이 유사가족을 형성하고, 전국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도 유사가족을 꿈꾼다는 점이다.

SBS의 ‘가족’ 편향은 ‘스타킹’의 출연진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보통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발견되고, 몰래카메라의 새로운 버전인 ‘체인지’의 주류를 이루는 가족을 찾아가는 에피소드들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폐지가 결정된 ‘사돈 처음뵙겠습니다’는 물론이고,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우리 결혼했어요’와 유사한 ‘살아봅시다’가 좀더 가족들과의 대면에 집중하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SBS의 다른 예능들 예를 들면 ‘인터뷰 게임’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역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아이템들이 주를 이루는 것도 그 특징의 하나가 될 것이다.

KBS 예능, ‘노래’에 빠지다
‘전국노래자랑’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오락관’같은 장수하는 코너에는 늘 노래가 있어서 일까. KBS는 좀더 예능의 본질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노래로 대변되는 일상 생활의 즐거움이다. KBS 예능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1박2일’은 물론 여행이란 아이템이 그 첫 번째 성공비결이 된 것이지만, 거기에서도 노래를 빼놓을 수는 없다. ‘1박2일’이 가장 파괴력을 보인 것은 ‘전국노래자랑’과의 만남이나, ‘충주대 게릴라 콘서트’같은 노래 아이템과의 만남에서였다.

이것은 물론 구성원들이 가수란 점도 작용을 한 것이겠지만, 노래 자체가 갖는 예능에서의 기본적인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대결 노래가 좋다’나 ‘도전주부가요스타’같은 본격적인 노래 대결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열린 음악회’나 ‘윤도현의 러브레터’같은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은 바로 노래 자체가 갖는 이 같은 힘이 극대화된 것들이다. 이처럼 ‘불후의 명곡’이나 ‘해피투게더’의 ‘쟁반노래방’의 새로운 버전으로 읽히는 ‘도전 암기송’ 같이 KBS는 줄곧 노래가 주는 즐거움을 프로그램 속으로 끌어오는 경향이 있다.

방송3사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비슷해 보이면서도 이처럼 다른 양상을 띄는 것은 그것이 각 방송사의 사풍이나 프로그램 정책, 또는 한때를 풍미했던 프로그램의 경험 같은 것들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방송3사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은 그때 그때의 트렌드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각기 다른 색깔을 극대화하는 부분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예능인의 맨 얼굴, 김C

‘1박2일’의 ‘백두산 특집’에서 배로 19시간, 버스로 23시간을 이동한 출연진들. 아무리 리얼 버라이어티쇼지만 눈을 뜬 강호동은 먼저 눈곱부터 닦아내고, 가까이 놓여있는 카메라에 얼굴 크게 잡힌다고 투덜댄다. 이승기는 늘 그래왔듯이 그 와중에도 생수를 조금 따라서 세수를 한다. 만인에게 얼굴이 노출되는 연예인이라면 습관적으로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그 때 불쑥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방송을 위해 안 씻을래.”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C. 그 이유는 “우리의 여정이 힘들다는 걸 그냥 표현”하기 위해서란다.

‘1박2일’에서 김C는 사실 다른 멤버들과 비교해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는 캐릭터는 아니다. 복불복 게임의 벌칙으로 고추냉이가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게 된다면 아마도 예능에 익숙한 이들은 그것이 실제 맵건 맵지 않건 ‘확실하게 맵다는 리액션’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김C는 다르다. 그저 먹고는 그저 그렇다는 표정을 지을 뿐 과장된 리액션은 보이지 않는다. 김C의 존재가 부각됐던 번지점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승기와 은지원이 못한 번지점프를 하는데 있어서 김C는 예능인들 특유의 과장된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뛰어내린 후, “이런 거라도 해야한다”고 담담히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과장되지 않은 모습은 ‘1박2일’에서는 사실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명한PD가 밝힌 대로 리얼 버라이어티의 진가는 ‘꾸미지 않는 것’에서 자연스러울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호동이 표현한 대로 “눈만 감으면 시체”가 되는 김C의 얼굴은 이미지로 메이크업된 것이 아닌, ‘예능인 본래의 맨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서 백두산까지의 여정에서 다른 팀원들이 힘겨운 표정을 지으며 고생을 역설하는 것보다, 버스 맨바닥에서 자고 일어난 김C가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다”고 하는 말 하나가 더 실감을 준다.

지금까지 김C가 ‘1박2일’에서 보여준, 아니 연예인으로 활동하면서 보여준 행보들도 거의 자신의 맨 얼굴에 가깝다. 김C가 소설가 이외수씨의 집을 추천해 찾아간 것은 ‘1박2일’에서 기획된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김C와 이외수씨의 관계가 그렇듯 돈독하다. 김C가 쓴 책에 이외수씨가 삽화를 그려준 것이 계기가 되어 만난 그들은, 이외수씨가 김C의 콘서트에서 퍼포먼스를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한다. 춘천에서 오래 생활했고, 사실상 거지처럼 살았던 적이 있으며, 예쁜 색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 이외에도 그들은 삶 자체가 꾸며지지 않은 맨 얼굴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뜨거운 감자’의 보컬로서 ‘봄바람 따라간 여인’을 부르는 김C의 음악 또한 치장되지 않은 느낌을 준다. 시류를 타는 이른바 히트곡들과 비교해 조금은 덜 세련된 면이 있지만 바로 그것이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감칠맛 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어쩌면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의 음악을 고집하는 음악인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마련인 독특한 그들만의 매력일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찾아가 김C가 ‘서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리는데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가 노래를 할 때나 예능을 할 때나 혹은 라디오를 하거나 내레이션을 할 때나 늘 솔직한 진지함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 선 예능인들이 늘 웃고 밝은 얼굴을 보이려 할 때, 막상 그 카메라를 메고 들고뛰는 제작진들의 힘겨운 얼굴처럼, 김C는 그 카메라 이면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보여주는 힘이 있다. 어쩌면 김C의 꾸미지 않는 얼굴은, 앞으로는 늘 웃고 있지만 때로는 찡그리고, 눈물도 나고, 힘겨워 하기도 하는 모든 예능인들의 맨 얼굴을 표상 하는 것이 아닐까.


‘스포트라이트’, 왜 미완의 아이템이 되었나

MBC 수목 드라마 ‘스포트라이트’에서 사회부 기자, 서우진(손예진)은 갑자기 울어버린 앵커로 인한 방송사고를 막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생방송으로 시간을 끌기도 하고,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짝퉁 명품을 파는 현장을 탐사보도하기 위해 잠입했다가 곤욕을 치를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심지어 특종에 대한 강박으로 장진규라는 희대의 살인마에게 접근해 목숨을 내건 인터뷰를 강행하기까지 한다. ‘스포트라이트’의 초반 장진규 에피소드까지의 숨가쁜 이야기는 사회부 기자라는 직업이 보여줄 수 있는 절정을 보여주었다.

‘스포트라이트’, 왜 좋은 아이템을 살리지 못했나
이처럼 애초에 ‘스포트라이트’가 꿈꾸었던 드라마는 적당히 전문직을 차려입은 멜로 드라마가 아니었다. 물론 손예진과 지진희가 가진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어떤 멜로의 예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잠입 취재를 하기 위해 다방 여 종업원으로 위장하고, 희대의 살인마와 격투를 벌이다 머리에 피가 철철 흐르는 맹렬 여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손예진과, 따뜻함보다는 냉철함을 연기하며 ‘킬!’을 외쳐대는 캡 지진희는 그런 예감을 없애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 초반부에 너무 하이라이트를 집중시키다보니 다음 진행에 큰 부담이 생겼다. 앵커 경합이나, 사회에 전 재산을 기부한 할머니의 사연 같은 에피소드가 그 자체로는 약한 것이 아니지만, 장진규 에피소드 뒤로 붙으면서 상대적으로 맥이 풀리게 된 것. 장진규 에피소드에 환호하던 시청자들은 그 이후의 상대적으로 맥빠지는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스포트라이트’는 장진규 이후 종영했다”는 과격한 표현을 하기도 했다.

‘스포트라이트’는 이후에도 여러 번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뉴시티 분양과 관련하여 벌어진 영환건설의 비리를 캐내려는 서우진 기자가 총체적인 위기 국면에 접어들면서다. 기자로서의 신뢰도도 땅에 떨어지고, 가족들마저 피해를 입게되는 극단적 상황으로 몰리면서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하지만 결국 그 뿐,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된다. 그리고 이어진 에피소드는 다시 심층리포트의 진행자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서우진과 채명은(조윤희)과의 대결이다.

이후 마지막 에피소드로서 경제특구비리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지만 이 역시 결말에 있어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했다. 그동안 고압적으로만 보였던 국정원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이나, 영환건설측이 순순히 방송출연을 자청한다는 것, 그리고 방송 도중 서로의 비리를 폭로하게 되는 내용은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상당 부분 떨어뜨렸던 것이 분명하다.

‘스포트라이트’, 왜 미완의 아이템이 되었나
전체적으로 보면 ‘스포트라이트’는 늘 일을 잘 벌여놓은 상태에서 뒤처리가 잘 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기자로서 서우진이 잡아내는 아이템들은 실제 현실 사회에서 보았던 유사한 비리사건들을 연상시키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것이 다루어지는 방식은 주로 정치적인 해결에 의지했다. 사회부에서 시작한 에피소드가 정치부에서 끝나는 것은 실제로 보면 현실적일지 모르지만, 드라마 속에서 시청자들이 보고싶은 결말은 아니다.

‘스포트라이트’는 또한 서우진과 오태석(지진희)의 멜로 구도에 있어서도 망설이기만 할 뿐 어떤 진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꼭 멜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 중반부터 오태석의 캐릭터가 캡에서 연인으로 바뀔 조짐을 보였던 것은 드라마의 일관성에 독이 되었다. 차라리 멜로의 조짐 자체를 빼고 하드보일드하게 진행하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멜로를 바탕에 깔고 가던가 ‘스포트라이트’는 미리 결정을 했어야 한다. 직접적인 멜로 라인은 아니지만 저 ‘X파일’의 스칼리와 멀더 같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스포트라이트’는 여러모로 미완의 성격이 강한 드라마가 되었다. ‘스포트라이트’가 ‘킬’해야 했던 것은 너무 초반부에 만들어버린 하이라이트에 이어진 전체 흐름과 아무 상관없는 소소한 경합아이템들이다. 또한 애초에 멜로를 예상하기 어렵게 어필되었던 오태석의 캐릭터가 중반부터 흔들린 것도 ‘킬’되었어야 하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에피소드들 하나 하나를 두고 보면 관심을 끌만한 좋은 아이템들이었지만, 이 아이템들을 꿰뚫는 하나의 주제나 큰 흐름을 잡지 못했기에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상승곡선을 이루지 못했다.

이로서 ‘스포트라이트’는 드라마 속에서의 뉴스프로그램과 유사한 성격을 띄게 되었다. 각각의 뉴스들은 흥미진진하지만, 어떤 일관된 심층리포트 같은 집요함이나 끈질김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된 것은 이 좋은 가능성을 가진 아이템 자체를 아쉽게도 ‘킬’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B급 농담 질펀한 섹시한 폭력, ‘플래닛 테러’

어린 시절 했던 놀이 중에는 이른바 ‘엉망진창 놀이’라는 게 있었다. 진흙탕에서 뒹굴거나, 케이크를 잔뜩 얼굴에 바르거나 사방으로 던지고, 때로는 손바닥 가득 물감을 칠하고는 커다란 도화지 위에 아무렇게나 막 칠하는 그런 놀이. 엉망진창 놀이의 묘미는 처음 손이나 몸을 더럽힐 때만 조금 꺼려지지 아예 포기하고 나면 묘한 자유의 쾌감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튀며 머리가 호박처럼 쪼개지는 ‘플래닛 테러’는 바로 그 엉망진창 놀이를 닮았다. 일단 마음의 저항감을 없애고 그 피칠갑의 영상에 몸을 맡기게 되면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는 점이 그렇다.

엉망진창 놀이에 잘 꾸며진 영상이 대수일까. 일부러 B급 영상을 표현하기 위해 고의로 화면에 스크래치를 하고, 어딘지 엉성한 화면 연출과 대사까지 의도적으로 흘려보내며, 심지어 중요한(?) 베드신 장면에서는 필름이 소실된 듯한 영상을 꾸미면서 ‘필름이 분실되어 죄송합니다’라는 자막까지 끼워 넣는다. 이 엉성하고 느슨한 연출은 그 위에 얹어질 좀비들과의 피 튀기는 일대격전을 한바탕 놀이로 만들어버린다. 그 속에서는 조금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어색한 화면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그 엉성함이 깔아주는 편안함 속에서 마치 카타르시스처럼 잘라지고 터지는 몸뚱어리와 피의 제전이며, 그 기저에 깔려진 끝없는 블랙유머다.

하지만 엉망진창으로 꾸며졌다고 해서 이 영화가 실제로 엉망진창이라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 곳곳에 치밀한 계산이 되어 있는 면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가 클럽에서 고고댄스를 추는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의 도발적인 춤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그 유혹적인 춤동작들이 후반부에 여전사의 모습으로 전화될 것을 예고한다. 이 에로티시즘이나 식욕 같은 욕망을 폭력으로 연결시키는 독특한 발상은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스의 걸쭉한 영상 농담으로 구현된다. 영화 속 짝패를 이루는 체리 달링과 엘 레이(프레디 로드리게스)는 남녀의 성적 욕망을 폭력으로 구현된 캐릭터들이다. 좀비들에게 다리가 거세된 체리 달링은 엘 레이를 만나고 그가 나무 막대기를 다리에 박아주면서 여전사로 우뚝 선다.

체리 달링을 겁탈하려 하는 강간범(타란티노)을 때려눕히면서, 바로 그 나무다리는 부러지지만 엘 레이는 거기에 좀더 강력한 기관총 다리를 무기로 박아 넣는다. 이 성적인 묘사들은 두 사람의 사랑의 징표인 반지에 새겨진 ‘둘이 함께 세상에 맞서며’라는 문구와 잘 어울린다. 거기에는 사랑과 폭력이 함께 공존한다. 이러한 욕망과 폭력의 연결은 식욕과 피를 연결시키는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소시지 소스의 비밀을 찾고 있는 JT(제프 파헤이)가 피에서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나, 죽은 듯 쓰러진 척 하는 JT의 배 위에 내장처럼 올려진 소시지를 엘 레이가 씹어 먹으며 “죽이는 맛이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렇다. 사실 사람을 뜯는다는 좀비들에 대한 상상 자체가 바로 이 식욕과 폭력의 혼합물이다.

‘플래닛 테러’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영화다. 그것은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대한 찬양이지만 로드리게스 특유의 농담은 그 B급 취향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힘이 있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면서 괜스레 진지해질 필요는 없다. 그저 그 엉망진창 놀이가 주는 조금은 느슨한 즐거움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그 안에서 우리는 피를 뒤집어쓴 수많은 농담을 발견해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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