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프로그램, 카더라 통신을 프로그램화하다

‘해피투게더’에는 사우나에 모여 수다를 떠는 동네 아줌마들이란 설정으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설정토크, ‘웃지마 사우나’라는 코너가 있다. 절대로 웃으면 안되며 웃으면 물총 세례를 맞는 몸 개그가 주 컨셉트이지만, 실상 재미의 요소는 그 설정 자체에 있다. 설정이라는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 출연진들의 이야기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를 얻는다. 그 안에서 진담은 농담처럼 이야기되고, 반대로 농담 역시 진담처럼 이야기된다. 이른바 ‘-카더라’통신의 이야기조차 이 안에서는 용인되고 회자된다. 단 마지막에 가서 “콩트는 콩트일 뿐 오해하지 말자~ ”는 구호만 외치면 깔끔하게 한바탕 웃고 넘기는 토크로 정리되는 것이다.

카더라 통신과 가상TV의 닮은 점
이 설정 상황 속에서 가지는 토크의 강점은 ‘카더라 통신’이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지는 그 이유와 맞닿아 있다. 그 속에서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무엇이든’ 속에 시청자들의 욕망이 꿈틀댄다. 연예인 누구와 누가 연결되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 이런 상황이라면 연예인은 어떤 반응을 할까 같은 상상의 욕구이다. 그리고 때론 진짜 사실이 이 욕망 속에 포함되기도 한다. 어떤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이나, 혹은 이미 ‘카더라 통신’으로 회자된 이야기 속 주인공이 등장했을 때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은 욕구이다. 이 설정 속에서는 바로 그 화제의 주인공이라도 편안하게 얘기를 할 수 있다. 상황 자체가 진위를 떠난 설정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시작한 ‘신동엽, 신봉선의 샴페인’의 ‘허락해주세요’라는 코너 역시 가상의 설정이 등장한다. 그 설정은 신봉선네 집에 사윗감을 데려와 허락을 얻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동엽은 아버지로, 조형기와 이수근은 삼촌으로, 노사연은 고모로, 티파니는 막내동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코너의 특징은 현실의 토크쇼와 가상의 설정 콩트가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동엽은 각각의 출연진들에게 어떤 사안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가, 가상의 콩트 상황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설정의 강점은 여느 사윗감이 첫 방문을 하는 집안에서 그러하듯이 매주 다른 사윗감으로 출연하는 연예인에 대한 다양한 궁금증을 설정(허락을 구하는 사위의 설정) 속에서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 코너에 출연했던 지현우는 자신의 실제 옛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사윗감이 장인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콩트로 얘기한다. 중요한 것은 신봉선이란 캐릭터의 역할이다. 콩트적 설정으로 용인되는, 자기 딸을 줘야 하는 아버지의 격한 질문들 속에서 신봉선은 여자친구라는 설정으로서 적당한 방패막이가 되어주거나, 때로는 푼수 같은 처신으로 남자친구를 당황하게 만드는 균형자 역할을 한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게스트에게 하는 신봉선의 뽀뽀는 이 상황이 가상, 즉 콩트였다는 것을 오히려 드러낸다. 입맞춤을 하게 된 MC몽의 과장된 반응은(이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이 가상이었다는 걸 말해주는 셈이다. 신봉선의 입맞춤은 ‘웃지마 사우나’의 “콩트는 콩트일 뿐 오해하지 말자~ ”와 같은 역할을 해낸다.

가상TV는 콩트다, 하지만
최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우리 결혼했어요’코너는 그 설정을 결혼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이 가상TV 프로그램들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토크보다는 실제 영상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또한 MC들의 간여를 배제해 리얼리티적 요소를 더 강화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가상 결혼이라는 설정 속에서 커플들로 등장한 연예인들은, 매번 다른 특정 상황을 미션으로 삼아 진심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반응들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콩트적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커플들이 가진 일관된 캐릭터에서 드러난다.

귀차니스트 정형돈의 일관된 모습이나 자상한 알렉스의 모습은 극명한 대비효과를 보일 만큼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다. 진짜 현실에서의 사람의 성격은 드라마나 콩트처럼 극대화된 일관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상황에 따른 서로 다른 반응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편집의 결과일 수도 있다. 실제 반응은 다양하게 보였을 지도 모르지만, 편집이 일관되게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 불분명해지는 진위가 바로 설정의 힘이다.

가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위에서, 아니면 말고
설정 혹은 가상의 상황을 토크쇼나 버라이어티 쇼에 부여하는 것은 가상보다는 리얼리티를 더욱 요구하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TV가 꺼내든 일종의 묘안이다. 리얼리티를 끄집어내면서도 어떤 안전판을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것은 그토록 연예인들을 원치 않는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카더라 통신’을 프로그램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폭로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해명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이 자체가 ‘카더라’ 즉 콩트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간의 토크와 상황을 가상과 현실의 중간지대로 돌려놓는다.

프로그램들이 이처럼 진위와는 상관없이 설정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자극적인 연출의 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가상과 현실에 대한 이분법적 구도가 점차 희미해지는 요즘의 환경 속에서 시청자들이 이를 무리 없이 수용하고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게임은 가상이지만 게임을 할 때의 감정적 반응은 현실이다. 그러니 가상 속에서 말해지는 많은 이야기들은 그 속에 있을 때는 현실적인 모습으로 어떤 잠재된 욕구를 건드리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로 느끼던 가상상황 속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것이 가상이었다는 것만을 알면 그뿐이라는 말이다. 만일 여기에 대해 “순 거짓말 아니냐”는 시대에 뒤떨어진 비판을 한다면 ‘카더라 통신’에서 흔히 보았던 반응이 나올 것이 뻔하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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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연예인과 대중을 싸잡아 비하하나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 쇠고기 수입에 대해 연예인들이 자신의 의견을 블로그나 카페에 올린 것을 가지고 언론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유는 연예인들의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적인 대응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몇몇 언론들은 이 연예인들이 대부분 최근 활동이 뜸하다는 점을 들면서, 연예인들의 이런 대응을 마케팅의 일환으로까지 몰고 가는 형세다.

물론 어느 정도 그런 면은 없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연예인이라면 이러한 민감한 사안에 대해 거침없는 의견을 내보이는 것으로 시선을 끌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식으로만 보아야 할까. 달라진 미디어 환경 속에서 연예인들이 자신의 삶과 관련된 이 사안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중요한 것은 이 자체가 설혹 마케팅의 요소가 끼여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대중과의 공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예인의 발언은 그것이 인기발언이든 아니면 진심이든 모두 대중의 정서를 따라서 한 것이다. 즉 언론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영향력 있는 몇몇 연예인(이들의 논리로 보면 활동도 뜸했기에 영향력도 별로 없다)의 힘으로 대중 정서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대중정서와 함께 연예인이 동참한 것뿐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들 연예인들의 발언에 대한 몇몇 언론들의 불쾌한 심사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이들 언론들은 ‘연예인-블로그-인터넷’을 어떤 비슷한 수준으로 몰아대는 경향이 있다. 즉 ‘가볍고 천박한 그 무엇’으로 치부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인터넷의 영향력을 보는 눈에는 스타로서의 연예인을 보는 눈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낮게 보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기관이나 언론들이 대중을 보는 눈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권위와 신뢰’를 운운하면서 언론이나 정부기관들은 아직도 자칭 어른으로서 아이 같은 이 가벼운 존재들에게 회초리를 꺼내들기 일쑤다. 맞다. 이들은 참 아이 같다. 그래서 어른들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나오기 일쑤며, 품위 있고 정제된 논리 정연한 글보다는 과격하게만 보이는 비문 가득한 글들을 쏟아낸다. 함부로 글들을 긁어다가 여기 저기 도배를 해놓는 건 일상이고, 그걸 가지고 대단히 창조적인 방법으로 괴담에 가까운 확대재생산을 해내기도 한다. 기득권을 가진 자가 스스로를 어른이라 자처하며 그 눈으로 삐딱하게 보면 대중들은 통제하기 어려운 불량아가 된다.

그러니 어른이라 자처한 자들은 이 아이 같은 대중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강제만을 통한 독단의 길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소고기 수입에 대한 갑작스런 결정은 아무런 설득도, 사전 이해도 구하지 않은 채, 마치 불도저식으로 저지르고 보는 개발시대의 그것을 닮아있다. ‘정했으니 따라 오라’는 것이 그 때의 논리였다. 그 때 연예인들은 어떤 역할을 했던가. 불행히도 그 때의 역할이란 오락과 재미로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 연예인들의 행동은 굉장한 진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그 시대를 경험했고 아직도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착각하는 기득권층들에게 연예인들의 정치적 성격을 띨 수도 있는 이러한 발언이 얼마나 위험하게 비춰질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도 그들에게 정치란 생활이 아닌 국회에서 하는 일이고, 몇몇 엘리트들에 의해 결정되고 대중들은 따라오는 것이라 믿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연예인은 연예나 하라’는 말처럼 들리는 일부 언론들의 반응은 또한 ‘대중들은 1%의 기득권 엘리트들이 한 결정을 따르라’는 뉘앙스로도 읽힌다. 연예인도 TV가 아닌 자기 삶의 문제로 돌아오면 언제나 대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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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의 형식실험으로 얻은 긴박감, 의미, 재미

‘무한도전’과 스릴러가 만나면 어떤 형태가 될까. ‘무한도전-경주보물찾기’편이 그 형식으로 가져온 것은 최근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주목되고 있는 스릴러라는 장르다. 그것은 마치 인기 미국드라마 ‘24’나 ‘추격자’같은 쫓고 쫓기는 긴박한 스릴러를 연상시킨다. 아침에 경주에서 일어난 ‘무한도전’ 출연진들이 영문도 모를 게임에 빠져들고 하루 동안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문제를 풀어나가는 형식이 그렇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긴박감을 부여하면서 ‘무한도전’이 얻은 가장 큰 것은 속도감이다. ‘24’같은 리얼타임 액션을 보고 있다보면 그네들이 흘리는 땀과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처럼, 비가 오는 상황 속에서 달리고 달리는 ‘무한도전’ 출연진들의 모습 또한 시청자들에게 그 긴박감을 전해주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최고의 자리에서 느슨해질 수도 있는 고삐를 바로 이 스릴러라는 형식을 끌어옴으로써 바짝 조일 수 있었다.

‘무한도전-경주보물찾기’편은 또한 퀴즈 프로그램의 진화된 형태로도 읽을 수 있다. 퀴즈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대개 떠오르는 것은 스튜디오에 출연진들이 모여 문제를 맞추는 폐쇄적인 형태. 하지만 ‘무한도전-경주보물찾기’편은 그 퀴즈 형식이 마치 게임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은 현장성을 보여주었다.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던져지는 문제를 풀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그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문제집 속에 박제화된 퀴즈를 살아있는 형식으로 바꿔주는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퀴즈의 내용이 또한 중요하다. 기존 퀴즈 프로그램들이 내보냈던 그저 문제 맞추기를 위한 공감 없는 문제는 왜 그 문제를 풀어야 하나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즉 그것은 퀴즈의 과정(문제를 푸는 의미)보다는 결과(점수)에만 치중하는 퀴즈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한도전-경주보물찾기’편은 그 의미를 부각시킨다. 잘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우리의 문화유산으로서의 경주의 보물들을 알아간다는 취지는 퀴즈의 과정 자체를 그저 몸 개그를 위한 것이 아닌 의미 있는 작업으로 만들어낸다.

또한 문제를 풀어 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지역주민들과의 교류는 그 의미를 더욱 확장시킨다. 문제를 잘 풀어내는 일부 엘리트 지식인들만의 경연장으로서만 기능했던 퀴즈 프로그램은 이런 형태와 만나면 보통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진짜 호기심을 끄집어낸다. 조금 어리숙하고 배운 건 적어도 알고 싶은 욕구는 그 배움의 많고 적음을 떠나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 아닌가. 이 부분은 분명 작금의 달라진 지식사회 속에서 누구나 참여시킬 수 있는 형태로서의 새로운 퀴즈 형식을 예감하게 만든다.

이러한 형식은 또한 여행 프로그램의 새로운 접근방식으로도 볼 수 있다. 예능과 여행의 만남으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1박2일’이 야생에 대한 도전이라면, ‘무한도전-경주보물찾기’편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같은 지식여행에 대한 갈증이다. 답답한 일상탈출과 함께, 체험이 가져다주는 살아있는 지식의 경험은 바로 다름 아닌 여행 속에서 우리가 흔히 추구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도전-경주보물찾기’편은 따라서 예능에 스릴러, 퀴즈, 그리고 여행 형식을 접목시키는 실험을 통해, 프로그램의 긴박감(스릴러의 속도감)과, 재미(퀴즈형식의 호기심과 의미), 그리고 실제적인 지식(여행)을 전하는데 성공적이었다. 이것은 TV 프로그램으로서 과감한 형식 실험이면서, 예능의 최강자로서 그만한 힘을 가진 ‘무한도전’만이 가능한 도전임이 분명하다. ‘무한도전-경주보물찾기’편은 그 힘이, 청와대 같은 높은 곳으로 가는 것보다 저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보물들 속으로 내려가는 것에서 더욱 빛난다는 걸 보여준 시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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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 포위된 청춘들, 혹은 우리들의 자화상

술이 잔뜩 취해 비틀대며 들어온 호스트 승우(윤계상)는 화장실 변기에 대고 토악질을 해댄다. 한 번, 두 번.... 구역질이 끄집어올린 욕망의 덩어리들이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 날 그가 마신 술은, 과거 별 볼일 없었으나 상전벽해한 부동산으로 대한민국 1%가 된 옛친구들이 준 불평부당함이 독처럼 퍼진 술이었다. 왜 누구는 갑자기 부자가 되고 왜 누구는 갑자기 날선 세상에 던져져 몸뚱어리 하나를 파는 대가로 욕망의 언저리만 핥으며 살아가야 하나. 이 구토의 장면이 ‘비스티 보이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승우가 가진 불평부당함과 조우하는 어떤 구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자본주의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들을 세밀하게 보여줌으로써 구역질을 나게 만드는 영화다. 따라서 이 영화를 잘 생기고 멋진 호스트들이 벌이는 욕망의 질주와 그 끝장 정도로 본다면 치정극으로 치닫는 후반부의 스토리라인이 맥없어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그렇게 쿨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니며 어찌 보면 오히려 그 쿨함의 이면에 숨겨진 좀스러움을 드러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호스티스와 호스트들이 벌이는 관계의 뒤섞임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자본주의라는 상황 속으로 넣어지면 상식이 된다. 이 비논리적인 관계는 이렇다. 자본의 주인에게서 자신의 욕망을 얻어내기 위해 봉사하는 호스티스 혹은 호스트들은 자신이 욕망을 얻는 순간(자본을 얻는 순간), 자본의 주인이 되고싶어 한다. 호스트들이 우르르 호스티스들이 있는 룸살롱에 몰려가 질펀한 술판을 벌이고, 호스티스들이 호스트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 욕망의 유희를 즐기는 이 반복된 상황 속에서 자본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순환된다.

그 속에서 이들의 모습이 하나의 소모되는 육체로 보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장면 속에서 그들은 끝없이 담배를 태우고 술을 마시며 섹스를 팔거나 사면서 육체를 소비한다. 그러니까 이 세계 속에 들어온 이들은 자본이라는 장작불을 계속 지피기 위해 소비되어야 하는 장작들이다. 관계는 오로지 자본의 논리 속에서만 세워진다. 승우의 누나인 한별(이승민)과 함께 살아가는 재현(하정우), 그리고 재현의 소개로 호스트일을 시작한 승우 이 둘의 관계는 재현의 표현처럼 ‘가족’이 되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는 ‘마이킹(선불금)’이나, ‘공사(돈을 갈취하는 것)’같은 불순한 단어들이 떠다니면서 언제든 관계를 자본 위에 세울 틈을 노리기 때문이다.

이 돈의 역할 놀이는 인간을 중심으로 두고 보자면 역겨운 것이 분명하지만, 돈이 권력이 되는 자본주의 상황 속에서는 절실한 현실이 된다. 그러니 그렇게 쿨하고 멋져 보이던 승우가 지원(윤진서)에게 “왜 그렇게 칫솔이 많아?”하고 반복해서 물을 때, 터져 나온 웃음 속에는 분명 자본의 사회 속에서 쿨하게 살길 강요받으며 살아왔던 관객들의 허허로운 마음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언제든 사람이 아닌 돈을 선택하는 재현이 이 자본의 사회 속에서 무한히 방전되는 장작으로 이미 굳어진 인물이라면, 이제 딱히 좋지만은 않은 호스트의 진짜 삶에 뛰어든 승우는 그 과정 위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 무한히 서로가 서로를 소비시키는 관계 속에서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사실은 자본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체계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승우의 칼이 시스템이 아닌(예를 들면 호스트바나 룸살롱의 자본주들) 엉뚱한 곳을 향하는 것은 이 시스템의 정교함을 거꾸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쉬운 점은 영화가 그 시스템으로 표상될만한 인물을 세워놓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네온사인이 가득한 도시풍경과 여기저기 복잡하게 얽혀있는 도심의 길들을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점처럼 존재하는 인물들을 포위하고 있는 자본의 냄새를 풍길 뿐이다.

그러니 그 포위된 공간 속에서 승우가 변기를 붙잡고 토해낸 것은 단지 술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꾸역꾸역 삼켜 넣은(혹은 누군가 삼키게 한) 욕망의 덩어리들이다. 그리고 몸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그 욕망의 덩어리들을 토해내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어디 승우만의 것이랴. 사실상 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느 누구든 깊은 밤 술 취해 돌아가는 길에 어느 전봇대 옆에서 그런 경험을 안 해본 이가 있을까. ‘비스티 보이즈’는 그러니까 슬프게도 이 자본의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니 욕망의 대상으로서 ‘비스티 보이즈’를 보기를 원했던 관객이라면 끝에서 발견한 이 찝찝함의 정체에 난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찝찝함으로의 방향수정은 어쩌면 감독의 의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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