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과 ‘전국노래자랑’의 만남, 까메오 이상인 이유

28년 된 ‘전국노래자랑’과 이제 1년이 채 안된 ‘1박2일’. 두 프로그램을 비교한다는 것은 마치 최고령 MC로서 지금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송해와, 현재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는 있지만 방송인의 내공으로 봐서는 한참 뒤에 서 있는 ‘1박2일’ 출연진들을 비교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경남 거창에서 벌어진 이 두 프로그램의 만남은 그 멀어만 보이는 거리를 단번에 좁혀버린 자리였다. 그 거리는 가장 최첨단의 길을 걷고 있는 프로그램과 가장 오래된 길을 걸어온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이며, 각각의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세대 간의 거리이기도 하다.

그 거리를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프로그램의 취지와 특성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왜 모든 문화의 중심지는 도시 혹은 서울이어야 하고 시골은 늘 문화의 변두리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바로 이 질문에 답을 하기라도 하듯 28년 전 등장한 프로그램이 ‘전국노래자랑’이 아닌가. 조금 촌스럽고 조악해 보이지만, 도시와 시골 사이의 거리를 메운다는 그 뜻 하나로 충분히 웃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전국노래자랑’만의 힘이었다. 이것은 ‘전국노래자랑’이 시작된 지 28년 후 등장한 ‘1박2일’의 취지와도 같다. ‘1박2일’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숨겨진 우리네 풍경을 찾아다니고 소개하고 홍보한다는 것이 그 기본취지다.

‘1박2일’멤버들이 시골의 비닐하우스에 마련된 연습장에서 ‘전국노래자랑’에 나갈 노래와 안무준비를 하고, 막상 무대에 나가기 전까지 시험을 앞둔 아이 마냥 긴장한 모습을 보이고, 무대 위에서는 말 그대로 ‘전국노래자랑’에 걸맞게 확실히 망가져 주고, 무대에서 내려와서는 초조하게 시상발표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전국노래자랑’에 대한 경의인 동시에, 거창 주민들에 대한 경의의 태도다. 직업이 가수인 은지원, 이승기, MC몽이 전혀 가수로서 부각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의 만남이 이처럼 껄끄럽지 않게 된 것이 어디 이런 취지의 공통분모 때문만일까. 여기에는 이 두 프로그램이 모두 갖고 있는 노래와 웃음이라는 코드가 또한 맞아 떨어졌던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전국노래자랑’의 재미요소는 ‘딩동댕’으로 대변되는 노래실력보다는 ‘땡’으로 대변되는 웃음에 있다.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토착적인 몸 개그가 작렬한다. 이것은 ‘아름답고 정겨운 전국 각지의 풍광들을 소개하겠다’는 ‘1박2일’의 취지를 전하는 방법이 웃음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취지와 특성이 잘 어우러진 ‘1박2일’과 ‘전국노래자랑’의 만남은 흔히 그저 까메오로 등장하는 이벤트 성격이 되곤 하는, 프로그램 간 이종결합 그 이상을 수행했다 평가할 만 하다. 거기에는 분명 두 프로그램의 목적인 웃음과 즐거움이 있었고, 그 취지인 시골 주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었다. 프로그램 사이의 이종결합은 그저 물리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물리적으로 연결했을 때는 어느 한 프로그램에 이득이 될지 몰라도 다른 프로그램에는 손해가 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화학적으로 연결해주는 것은 서로 다른 프로그램이 가진 ‘같은 취지’다. 뜻이 같다면 형식은 조금 달라도 무방해진다.


싱글맘, 아줌마 멜로드라마를 위한 차용?

MBC 주말드라마 ‘천하일색 박정금’의 박정금(배종옥)은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는 싱글맘이다. 드라마 제목에서부터 박정금이란 이름을 쓰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그녀의 처지, 즉 싱글맘이라는 상황이 드라마가 전하려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혼자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그것도 강력계 형사로서) 겪게 되는 아픔이나 고통 같은 것들은 그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가 된다.

게다가 박정금의 상황은 그저 싱글맘 하나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이마저 잃어버렸고 딴 집 살림을 차린 아버지로 인해 버림받은 어머니와 반쪽짜리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 정도면 그녀는 남자라는 존재가 지긋지긋 해지지 않았을까. 그러니 드라마는 이런 세상 속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과 그 여성의 시선으로 새로운 세계를 그려볼 법도 하다. 그녀가 직업으로서 만나게 되는 거리의 아이들(자신의 아들과 종종 동일시되는)을 그저 형사로서의 실적을 위해 잡아들이기보다는 엄마의 마음으로 보듬어주는 지점에서 그런 단편들을 발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줌마렐라(아줌마 신데렐라) 일색인 주말드라마의 영향 때문일까. ‘천하일색 박정금’은 싱글맘으로서 사회에 이런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 구조 속으로 퇴행하는 느낌이다. 한경수(김민종) 변호사와 정용준(손창민) 의사를 오가는 멜로는 싱글맘의 힘겨운 일상에서의 한 부분(위안)을 해결해줄 지는 모르지만, 사회적 맥락 속에서 싱글맘이란 존재가 가진 문제를 오히려 덮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녀의 불행의 근원이 되는 아버지(박근형)가 슬쩍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사공유라(한고은)와 사여사(이혜숙)가 대리전을 나서는 상황은 이 드라마가 전형적인 과거 싱글맘 멜로(비정한 아버지에 버려진 아이와 엄마의 악전고투를 다루던 신파에 가까운 드라마들)의 잔재를 벗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극단적인 악으로서 아버지가 아닌 사여사가 전면에 나서면서 싱글맘의 문제는 여자들끼리의 악다구니에 머물게 되었고, 결국 박정금은 위안해주는 남성들(한경수, 정용준 같은)의 세계 속에서 미완적인 해결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해결되는 것은 거의 없다. 이 드라마가 현재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들과 이것을 과장하는 극단적인 클로즈업, 그리고 음향효과에 기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애초에 구도했던 길에서 한참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멜로는 부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박정금은 좀더 독립적이고 당당한 삶을 모색해야 하며 그를 통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과정에서 멜로보다 중요한 것은 일종의 동지의식에서 비롯된 박정금에 대한 격려와 따뜻한 시선이다.

이런 문제는 단지 ‘천하일색 박정금’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싱글맘들을(싱글파파를 포함해서) 소재로 다루는 드라마들 대부분이 가진 문제이다. 아이를 가진 그녀들은 대부분 남편과 사별했고 모두 멜로를 꿈꾼다. 그 상황 자체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당당해 보이는 그녀들이 멜로를 꿈꾸는 부분에서는 주부들의 멜로에 대한 판타지를 엮기 위한 장치로서 싱글맘이 도용되고 있다는 혐의를 갖게 만든다. 사별이란 이런 판타지와 엮어지면 때론 피학적이지만 달콤한 환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싱글맘 드라마가 봇물이지만 사실상 진정한 싱글맘 드라마라 부를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상황이다(최근 새롭게 시작한 ‘아빠 셋 엄마 하나’는 그나마 편견 없는 시선을 추구하는 미덕이 있지만). 그리고 이런 상황은 아줌마 판타지를 추구하는 드라마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현실을 호도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싱글맘은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석이 분명 있지만 절대로 낭만적인 선택은 아니다.

‘이산’의 갈등, 익숙함의 반복 혹은 새로운 도전

정조의 삶과 정치세계를 조명하겠다던 ‘이산’의 야심 찬 계획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나서는 노론 벽파 세력들로 인해 뭐 하나 제대로 개혁을 진행하지 못하는 이산의 처지처럼 지지부진해지고 있다. ‘이산’이 노비개혁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선보이는 순간, 반발하는 장태우(이재용)와 노론 세력들처럼 곤두박질치는 시청률이 ‘이산’을 힘겹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산’은 점점 ‘대장금’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 같다. 거기에는 늘 대장금(이영애)이 지켜드리고픈 한 상궁(양미경)마마 같은 중전 효의왕후(박은혜)가 있고, 그녀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 성송연(한지민)은 어떻게든 그녀를 도우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왕은 늘 그렇듯 중립적이면서 판관의 역할을 한다.

그 소재들만 봐도 이것은 인물을 바꿔놓은 ‘대장금’으로 읽힌다. 가짜임신 사실을 숨기려는 원빈과 홍국영(한상진)이 탕약을 문제로 삼고 나오는 것이나, 갑자기 어의의 캐릭터가 중요해지는 점, 임신과 관련된 탕약에 대한 중전의 해박한 지식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틀에 박힌 구조 속에서 각자 캐릭터들이 하는 역할까지 ‘대장금’의 그것을 닮았다. 사실 원빈이 성송연을 불러들여 굳이 궁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는 설정은 후에 성송연에게 이 사건의 실마리를 던져주기 위한 억지스런 설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력다툼이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그저 인물들 간의 선악 대결 같은 단순한 게임에 불과하다. 갑자기 왜 ‘이산’은 노비개혁 같은 복잡한 정치이야기를 버리고 ‘대장금’식의 인물게임에 2회 분량을 소모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치이야기가 그저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구축된 캐릭터들과 정치이야기가 잘 맞아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산’의 캐릭터들은 이병훈 PD 특유의 선악구도 속에 들어가 있다. 분명한 선악구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주인공 편(선)이 처하게 되는 어려움과 그것을 뛰어넘는 이야기(따라서 선이 반드시 이기는)의 단순함이 이병훈표 사극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이병훈표 사극이 본격 정치이야기를 꺼려했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정치이야기는 선악구도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역학관계가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산이 정조로 등극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캐릭터들이 자신의 위치를(선악의 팽팽함)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현실정치를 대리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선을 대표하는 영조(이순재)와 악을 대표하는 정순왕후(김여진)의 대리전이다. 그 속에서 이산이나 성송연, 박대수는 상대적으로 현실정치의 복잡함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가 죽고, 정순왕후의 힘이 약화되며 정조가 등극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선으로 대변되던 정조의 캐릭터는 현실정치 앞에서 달라져야 한다. 홍국영의 캐릭터는 더 냉혹해질 수밖에 없다(실제 역사 속에서도 그러하듯이). 문제는 이들 주변에 있는 캐릭터들이다. 성송연은 여전히 정치와는 상관없는 인물이고, 박대수 역시 그렇다. 진짜 정치를 해야할 인물들, 이를테면 정약용(아직 누가 연기하게 될 지도 결정되지 않은)이나 박제가의 캐릭터는 극의 중심부로 오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이원화될 수밖에 없다. 현실정치의 정조와 홍국영의 이야기와, 나머지 캐릭터들의 정치 이외의(이를테면 궁내의 파워게임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억지로 한 사건에 이들을 끼워 넣으면 캐릭터가 흔들리게 되고, 그렇다고 한 사건을 포기하게 되면 아예 한쪽 캐릭터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대장금’류의 에피소드에 이끌리는 ‘이산’은 아직까지도 이 양자의 이야기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성장드라마와 정치드라마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병훈 PD의 상황이기도 하고, 시청률과 완성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네 사극의 상황이기도 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자유겠지만, 적어도 ‘이산’정도의 사극이 쉬운 결정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다른 ‘대장금’보다는 새로운 사극의 가능성을 ‘이산’에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왕이 되기까지’와 ‘왕이 된 후’

‘주몽’이 처음 고구려 사극의 포문을 연다고 발표됐을 때, 우리가 기대했던 건 막연하지만 민족의 시조이자 역사적 영웅인 주몽이 갈라져있는 민족들을 규합하고 한나라를 밀어내는 통치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본 ‘주몽’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거기에는 평범한 철부지 주몽이 있었고, 왕이 되기까지 가야할 길은 멀었다. 그러니까 드라마의 방향성도 정해진 셈이었다. ‘주몽’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던 한 사내가 사실은 신탁을 받은 인물이었고, 그로 인해 최정점인 왕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되었다. 왕이 된 이후는?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나라를 통치하는 문제는 ‘주몽’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 기대에 대한 배반은 ‘주몽’이 성공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산’의 긴장감이 떨어진 이유
겉으로 보기에 ‘이산’이나 ‘대왕 세종’같은 최근의 사극들은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산’은 이미 정조(이서진)의 등극까지 험난한 과정을 끝내고 이제 통치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집중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숨 가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달려오던 ‘이산’은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는 순간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30%에 육박하던 시청률이 거의 20%까지 추락했다. ‘이산’은 확실히 집중력이 떨어졌다. 과거에는 성송연(한지민)과의 멜로 라인과 이산-노론 벽파 간의 대결양상은 병렬적으로 굴러가지 않고 한 가지 고리로 엮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연결고리가 흐릿해지면서, 각각의 이야기로 흩어지고 있다. 정무에 힘겨운 정조가 성송연을 가끔 그리운 얼굴로 바라보는 것 이외에, 둘을 이어주는 사건의 고리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 시청률의 하락과 집중도의 저하가 단지 이런 드라마 내적인 이유 때문 만일까. 그것은 혹시 왕이 된 후의 통치과정보다, 되기까지의 성장드라마에 더 ‘몰입’되는 우리네 경향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통치란 좀더 복잡한 정치의 과정이기 때문에 실제로 재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고 시장이 되고 대통령이 됐는가 하는 과정까지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이지만, 정작 그렇게 대통령이 된 후의 정치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CF였던 ‘욕쟁이 할머니’편이 전략으로 삼았던 것도 바로 이런 지점이었다. ‘뭐 복잡한 건 다 싫으니까 경제 하나나 제대로 살려라’라는 게 그 주 메시지였다. 여기서 경제란 참 불투명하고 막연한 의미다. 수백 수천 가지의 복잡함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거기에 있다.

‘이산’이 막연히 ‘백성’이란 단어를 들고 나왔을 때는(주로 영조에 의해) 그 막연함이 시청자들의 마음에 꽂혔을 것이다. ‘복잡한 건 싫고’ 그저 성군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한 단어가 더 받아들이기 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왕이 된 이후의 정치는 다르다. 여기서는 막연한 ‘백성’이란 단어가 잘 먹히지 않는다. 현실정치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노비의 폐지’라는 정책 하나는 수많은 반대논리들을 이끌어내고 거기에서 대결양상을 만들어낸다. 그 논리 속으로 들어가면 진짜 정치가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은 ‘이산’ 제작진에게는 곤혹스러운 문제다. 제작진들은 시청자들이 바로 이 복잡한 정치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좀더 단순한 필터가 필요한 상황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노론벽파의 수장인 장태우(이재용)다. 정치적인 쟁점은 캐릭터가 세워짐으로 해서 선악 구도로 단순화된다.

이런 단순화 과정을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지금껏 연승가도를 달려온 이병훈 PD가 사극에서 모두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다루고 그 정점에서 끝을 맺었던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병훈 PD에게 ‘이산’은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게다가 왕이란 캐릭터는 더 복잡한 정치를 그것도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 이 부분을 대중들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대왕 세종’이 말해주는 정치사극의 어려움
거기에 대한 답은 오히려 ‘대왕 세종’이 말해주고 있다. ‘대왕 세종’은 이 두 가지 면모, 즉 주인공의 성장과정과 정치적 쟁점들이 모두 자세하게 다뤄지는 드라마다. 만일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대왕 세종’은 정치인이라는 전문직을 역사적으로 다루는 역사 전문직 드라마의 한 분파라 보여진다. 모든 주인공들의 대사들은 정치적 뉘앙스를 갖고 있으며 그 뉘앙스 하나로 어떤 인물들은 정치적 죽음을 맞기도 한다. 거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조차도 없으니, 이 하드보일드한 사극은 미드의 한국사극 버전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정한 시청률을(폭발적인 시청률이 아니다) 유지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이미 자리를 잡아버린 주말사극에 대한 관성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 쟁점과의 반대편 날개인 주인공의 성장과정 때문이다.

셋째인 충녕대군(김상경)이 이미 국본이 된 첫째 양녕대군(박상민)과 대결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이 익숙하게 보아왔고 또 보기를 원하는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대의를 앞세우는 양녕대군과 백성을 내세우는 충녕대군의 대결에서 그 결과는 이미 다 나와 있는 셈이다.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도 그랬을까마는, 어쨌든 드라마가 보여주는 ‘정치 대 백성’의 대결에 있어 시청자들은 복잡한 ‘정치’보다 막연하지만 마음을 뒤흔드는 ‘백성’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일까.

정치가 재미없다는 것은 정치에 대한 불신감에서부터 비롯된다. 내가 아무리 뭐라 해도 바뀌지 않는 정치의 세계, 그러니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가 되어버린 정치는 괜히 골치만 아픈 천덕꾸러기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은 조장된 바가 크다. 정치적인 선택(하다 못해 투표 하나라도)은 골치가 아픈 게 아니라, 바로 우리네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가 주는 환타지(주인공의 성장)에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것을 뭐라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동시에 다뤄지는 현실의 문제(전문직으로서의 현실성)를 외면하는 것은 자칫 드라마의 반쪽(중독적인 면)만 반복해서 보는 경향을 낳을 수 있다. 왕이 되기까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왕이 된 후의 통치과정이다. 이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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