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의 카메라는 어떻게 변해왔나

초창기 ‘몰래카메라’가 열렬한 호응을 얻었던 것은 당대 이른바 ‘신비주의 마케팅’으로 이미지라는 옷을 잔뜩 끼어 입은 스타들의 옷을 벗겨낸다는 쾌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좀체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 가끔씩 얼굴을 보이면서 강화해온 ‘신비한 이미지’는 연예계에 넘쳐났고, 따라서 이것은 ‘몰래카메라’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몰래카메라가 잡아낼 수 있는 신비화된 연예인들은 부지기수였고, 그 연예인들은 무너진 자신의 진솔한 얼굴을 시청자에게 여지없이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절, 우리에게 몰래카메라란 흥신소를 떠올리게 하는 도착적인 기구를 연상케 했다. 그것은 어두컴컴한 곳에 숨겨져 누군가를 훔쳐보기 위해 사용되는 음성적인 도구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후 다시 ‘몰래카메라’가 부활했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달라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황은 정반대였다. 연예인들은 신비로운 존재라기보다는 바로 옆집 아저씨 같은 편안하고 친숙한 존재로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즉 진솔한 얼굴조차 상업화된 것이다. 몰래카메라의 자리를 셀프카메라가 차지할 정도로 카메라에 대한 사생활 노출은 일상화되었다.

스타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맨 얼굴을 포착해왔던 ‘몰래카메라’는 오히려 상업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진솔한 얼굴(역시 기획된 이미지이다)을 잡아내는 카메라로 변질된다. 이 시기 유난히 조작설이 많았던 것은 실제로 그랬다기보다는, 이렇게 변화된 상황 속에서 몰래카메라(속 스타들)를 대하는 시청자들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숨어서 훔쳐보는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는 몰래카메라의 폐지는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그렇다고 몰래카메라가 사라졌을까. ‘무한도전’과 ‘1박2일’의 카메라는 어떻게 출연진들의 리얼한 얼굴들을 포착하고 있을까.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와서 몰래카메라는 좀더 공공연한 방식으로 사생활을 찍기 시작한다. 몰래카메라는 이제 더 이상 숨겨져서 누군가를 찍는 구태의연한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대신 수없이 많은 카메라를 동원함으로써 대상으로 하여금 도대체 어떤 카메라가 자신을 찍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엄청나게 많은 카메라들을 동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상이 카메라를 의식하는 순간, 리얼리티는 깨지고 가식적인 얼굴이 고개를 내밀게 된다. 여기서 카메라가 잡아내는 리얼리티는 순간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이다. 당황하는 스타들의 독특한 반응을 순간적으로 포착해낸 영상은 적당한 자막(해설)과 함께 반복적으로 편집되어 시청자들에게 과장되게 보여진다.

이 수없이 많은 카메라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생활 노출이 극단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건물에서나 지하철에서나 회사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우리는 어디서건 카메라 속에 포착된다. 초창기 몰래카메라는 그것이 음성적으로 숨겨져 있었기에 오히려 도드라져 보였지만, 현재의 몰래카메라들은 양성적으로 보편화되면서 오히려 숨겨진다. 그리고 이 생활 속으로 파고든 카메라의 침입은 이제 누구나 몰래카메라를 찍을 수 있는 휴대폰 시대를 맞으면서 일상이 되어버린다.

이런 시대를 맞아 몰래카메라를 시작했던 ‘일요일 일요일밤에’에서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코너를 방영하게 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것은 분명 가상으로 설정된 부부의 삶을 엿보는 몰래카메라의 형식이 분명하지만, 카메라는 과거처럼 강조되지 않는다. 이제는 모든 카메라들이 몰래카메라와 같은 일상을 찍어대기 시작했기 때문에 굳이 몰래카메라를 강조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게다가 이 엿보기 상황은 과거와는 다르다. 과거는 진짜 상황이 주어지고 거기서 나오는 리얼한 반응을 보았다면, 가상버라이어티를 주창하는 이 코너는 가짜 상황 속에서의 리얼한 반응을 보여준다. 정형돈과 사오리는 가상의 부부로 설정되지만 그 안에서 부부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다. 게임(가상)이지만 그 안에서는 실제로 접촉(현실)이 일어나는 이 코너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이 시대의 영상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이제 시청자들이 가상이든 현실이든 엿보는 카메라 안에 포착되는 영상의 게임에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예능 프로그램이 가진 오락성에 전도된 카메라를 예로 들었지만, 어찌 보면 누군가를 엿보는 이러한 행위는 카메라가 가진 본성인지도 모른다. 시청자들은 TV 앞에 가만히 앉아서 카메라가 가져올 저 편 세상의 현실을 기다린다. TV의 창이 투명해져서 자신이 TV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될 수 있도록 시청자들은 TV가 리얼해지기를 기대한다. 리얼리티가 강조되는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 생기곤 있지만, 조금만 신경 써서 보면 그 리얼리티란 사실은 대부분 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리얼’이라는 단어를 기꺼이 붙여주는 이유는 무얼까. 혹 변한 것은 카메라와 TV가 아니라 좀더 리얼한 상황에 몰입하고픈 시청자들이 스스로 인식을 바꾼 것은 아닐까.

풍덩 칠드런 송, 도전 암기송, 불후의 명곡, 그리고 예능의 가수들

KBS의 예능 프로그램이 노래와 바람이 났다. ‘쟁반 노래방’시즌2의 성격을 띈 ‘상상플러스’시즌2(풍덩 칠드런 송)가 시작되면서 KBS의 예능은 거의 일주일 내내 ‘노래에 도전하는 연예인들’을 보여주게 된 셈이다. 주중에 포진된 ‘해피투게더’의 ‘도전 암기송’이 그렇고, 주말 ‘해피선데이’의 ‘불후의 명곡’이 그렇다. 노래방으로 대변되는 우리네 노래문화가 특이하다고 해도 이런 프로그램들의 편향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법하다.

먼저 노래라는 소재가 가진 장점은 KBS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구석이 있다. KBS라는 방송사의 성격상 전통적인 시청자를 아우르면서 젊은 세대까지 끌어 모으는 방식으로서 노래는 대단히 효과적인 장치다. 이들 예능 프로그램들이 내세우는 노래는 ‘현재’가 아닌 ‘과거’의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성세대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옛 노래를 가지고 지금의 연예인들이 도전을 한다는 설정은 일거양득의 힘을 가진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래로 편향된 KBS의 예능 프로그램들에서는 어떤 일련의 계보가 중첩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그 시작은 ‘전국노래자랑’의 ‘땡’에서부터 비롯된 것 같다. 노래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가진 음치, 몸치의 재미는 ‘딩동댕’과 ‘땡’과 만나면서 우리에게 하나의 포맷을 만들어냈다. ‘쟁반 노래방’은 바로 이 ‘땡’을 쟁반이라는 물리적인 장치로 변형시켜 예능 프로그램의 ‘벌칙’의 개념으로 바꿔놓았다. ‘상상플러스’시즌2는 쟁반 대신 다른 장치로 그것을 변형시켰을 뿐이고, ‘도전 암기송’과 ‘불후의 명곡’은 전통적인 ‘땡’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포맷뿐만 아니라 MC들의 계보까지도 만들어낸다. ‘해피투게더’의 ‘쟁반노래방’ 코너에서 MC를 맡았던 이효리는 ‘상상플러스’시즌2로 복귀해 ‘쟁반노래방’시즌2 성격의 ‘풍덩 칠드런 송’을 하고 있고, 유재석은 ‘해피투게더’에서 새롭게 포맷을 만든 ‘도전 암기송’에 남아 있다. ‘불후의 명곡’의 탁재훈, 신정환 콤비는 예능 프로그램에 그들을 확고히 안착시켜준 ‘상상플러스’에서 그 계보를 이어받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프로그램 포맷들이 서로 서로 조금씩 중첩되면서 변형되어왔고 그 안의 MC들 또한 반복적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KBS 예능 프로그램들이 가진 가수들에 대한 열렬한 환호다. 이효리, 탁재훈, 신정환 같은 가수들은 ‘노래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메인 MC로 자리잡았다. 이것은 최근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1박2일’의 구성원들의 면면을 봐도 드러난다. 그들은 강호동을 빼고는 모두 노래와 관련이 있다. 은지원, 이승기, MC몽, 김C는 가수이며, 이수근은 개그맨이지만 ‘노래와 관련된(예를 들면 고음불가 같은)’ 노래개그로 뜬 개그맨이다.

가수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메인이나 고정 출연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네 가요계가 변화된 상황을 에둘러 말해주는 현상이다. ‘노래를 잘한다’는 가수의 이미지는 이들 프로그램에 오면 거꾸로 ‘서투르게 노래하는’ 이미지로 바뀌면서 일종의 권위의 파괴에서 오는 쾌감을 준다. 이것은 ‘노래 잘하는 가수’보다는 ‘재미있는 가수’가 더 주목받는 작금의 음반계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자기 노래를 한번이라도 불러서 홍보를 해야 하며, 때론 평범한 이미지를 통한 친숙함을 만들어내야 하는 가수들 입장에서도 나쁜 것이 아니다.

KBS가 노래와 바람이 난 이유는 전통적으로 성공해왔던 노래 예능 프로그램들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확실히 노래는 그 자체로 이런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일주일 내내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노래방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도전보다는 익숙한 프로그램의 (그것도 너무 드러나는)샘플링이 되어 가는 것으로는 현재의 민감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지나친 마케팅과 향수의 만남은 고만고만한 프로그램들의 양적 팽창으로 이어지면서 자칫 동시에 가라앉는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투자를 하더라도 분산투자를 해야 위험이 적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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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에어’ 의 다중창 전략, 어떻게 쓰였나

과거 드라마라는 은막의 창은 늘 이편이 아닌 저편에서 신비로운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TV라는 창은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높아졌고, TV 이외에 다른 창들이 수시로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한다. 드라마에 몰입하고픈 시청자들은 따라서 좀더 창이 투명해져서 거기에 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질 정도로 드라마가 리얼하기를 원한다. 창에 리얼함을 깨는 먼지 한 톨에 대해서도 시청자들은 인터넷으로 달려가 그 먼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드라마는 퓨전이니 환타지니 하는 수식어가 붙은 사극들처럼 아예 투명함을 포기하거나, 전문직 장르 드라마처럼 투명해지거나 해야 한다. 적당한 멜로는 금세 탄로 난다. ‘온에어’는 이런 상황에서 좀 독특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것은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창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중창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현실인지 가상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전략이다. 이 드라마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그러니 믿으라고 시청자들에게 강변하지 않는다. 대신 드라마 속에 다른 창을 하나 띄워놓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시청자들을 믿게 만든다.

첫 번째 창, 드라마의 앞모습을 잡는 창
‘온에어’는 드라마에 대한 드라마.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중의 창을 가지고 있다. ‘온에어’는 먼저 우리가 믿지 않는 드라마(혹은 연예계)에 대한 창을 먼저 보여준다. 그것은 첫 회에 등장한 시상식 에피소드다. 그 시상식은 우리가 TV를 통해 불신감을 갖고 보아왔던 바로 그것이다. 조작가능성, 나눠 먹기식 시상이 우리가 시상식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온에어’는 먼저 그 시상식을 통해 드라마의 앞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뒤집어 말해 시상식의 뒷모습에 우리가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시상식에서 수상거부를 하는 오승아(김하늘)가 제일 먼저 드라마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온에어’의 네 인물인 오승아, 이경민(박용하), 장기준(이범수), 서영은(송윤아) 중 시청자들에게 TV 화면으로 친숙한 인물은 배우인 오승아다. 나머지는 모두 TV 뒤편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인물들이다. 그러니 TV의 앞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승아를 주목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오승아에 대한 주목, 즉 시청자들이 믿지 않는 TV의 내용에 대한 장면들은 그것을 깨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이제 시청자들은 오승아라는 배우의 진짜 모습, 그리고 TV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었다. 시상식에서 오승아를 찍는 카메라에서 한 걸음 뒤로 빠져나오면 그 카메라를 잡는 새로운 시선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제 그 새로운 시선은 자유롭게 배우와 PD, 작가, 매니저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방송계와 연예계의 뒷모습을 포착한다. 바로 이 시선이 이 드라마의 두 번째 창인 셈이다.

두 번째 창, 드라마의 뒷모습을 잡는 창
이렇게 시점이 첫 번째 창에서 두 번째 창으로 넘어오면서 시청자들은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온에어’라는 드라마를 조금씩 믿게 된다. 그것은 진짜로 알고 싶었던 드라마의 뒷모습이 펼쳐지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보고싶은 걸 믿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시종일관 툭탁거리며 말다툼을 해대는 작가와 배우 간의 줄다리기가 있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엮어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PD와 매니저가 있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끊임없이 현재의 드라마들에 대한 논쟁적인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배우들은 연기 못해도 CF 많이 찍으면 스타인 줄 알지만, 미국 배우들은 쓰지도 않는 제품 홍보하는 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작가 서영은이나, 여기에 맞받아 “그러는 작가님은 왜 작품마다 PPL로 도배를 하죠?”라 말하는 오승아가 그렇다. 또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작품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서작가 작품에는 명대사만 많을 뿐 진정성이 없다.”고 말하는 이경민 PD의 말도 그렇다. 이렇게 드라마에 대한 논쟁이 오고갈 때, 시청자들에게 묘한 착각이 생겨난다. 그것은 자신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바깥에 서 있다는 착각이다.

이것은 믿지 못할 드라마를 믿게 만드는 이 드라마의 트릭이다. 재미있는 건 이경민 PD가 서영은 작가에게 “왜 작가가 배우에게 그렇게 의존하려고 하죠”하고 말할 때, 그렇게 말하는 이경민 PD는 실상 박용하라는 배우라는 점이다. 배우가 배우를 비판하는 순간, 거기에 배우라는 박용하는 사라지고 PD로서의 이경민이 생생히 부각된다. 이것은 이 드라마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이 드라마가 드라마를 비판하면서 비로소 존재감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 번째 창, 카메오라는 현실의 창
그런데 이 두 번째 창은 진짜 현실이 아니다. 그것 역시 드라마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점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은 카메오라는 현실의 틈입이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온에어’에서 카메오라는 장치는 그저 이벤트적인 속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이중의 창으로 혼동되는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적당한 현실감각을 시청자에게 부여해주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온에어’ 자체에 현실감을 강화해주기도 한다.

즉 이서진이 등장해 “이번 일이 끝나면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곧 결혼 예정인 그의 현실상황을 끌어들였을 때, 그것은 ‘온에어’가 진짜 같다는 리얼리티를 부여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게 진짜 현실”이라는 자각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이서진이라는 카메오를 극중의 인물로서 활용하지 않고 현실의 이서진을 상황 속에 끼워 넣는 장면은 그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연예뉴스’와 다를 것이 없다. 실로 이 드라마에서 카메오는 이러한 현실 개입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창을 활용하는 ‘온에어’의 트릭은 드라마를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작금의 시청자들에게 대단히 효과적이다. 시청률이 오르는 것은 단지 등장인물들의 대립이나 서서히 생겨나고 있는 멜로 라인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현실감이 있는 것처럼 연출된 장면들이 좀더 시청자들을 드라마에 몰입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트릭 어떻게 쓰이고 있나
중요한 것은 이 트릭들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드라마를 비판하는 드라마’로서 새로운 드라마의 대안을 제시하는데 쓰여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쉽게도 ‘온에어’는 그 이상은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몰입된 상태에서의 재미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지만 여전히 트렌디한 드라마로 굴러가면서 ‘드라마를 비판하는 드라마’로서의 자가당착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 트릭들은 이 드라마의 마케팅에 더 잘 활용되고 있다. PPL 문제를 비판하면서 그 장소 자체를 PPL하고, 해외로케를 비판하면서 한 회 분량을 온전히 대만관광 홍보로 꾸밀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트릭에서 비롯된다. 이런 장면들은 마치 이 드라마 자체도 포함해 자기비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트릭을 통해 논란을 피해나가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혐의가 짙다.

이것은 드라마라는 장치가 가진 한계인지도 모른다. 드라마의 허구성을 깨는 그 순간, 드라마는 드라마이기를 포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시 상업적인 드라마는 현실 자체보다는 판타지에, 자각보다는 몰입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해준다. 어쨌든 이 ‘온에어’가 취하는 다중창의 전략은 작금의 상황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멀티미디어 사회, 디지털 사회 속에서 하나의 창으로서의 드라마가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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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C 시대의 사랑, ‘사랑해’

번호 몇 개만 누르면 손쉽게 누구에게나 연결될 수 있는 세상, 그래서 당신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가. 혹 당신은 그 쉽게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 두려운 것은 아닌가. 그 쉬운 연결에서 ‘사랑’보다는 ‘사건’을 떠올리지는 않는가. 디지털 시대, 사랑은 아날로그를 꿈꾼다. 허영만 원작의 100% 사전제작드라마 ‘사랑해’가 꿈꾸는 세상이다. 그 곳에는 사건을 사랑으로 만드는 남녀가 있다. 사랑을 미친 짓이라 말하는 남자, 석철수(안재욱)와 사랑은 신이 준 가장 큰 선물이라 말하는 여자, 나영희(서지혜)가 그들이다.

그들의 만남은 UCC 시대의 ‘사건’으로 시작한다. 지하철 치한으로 몰려 누군가에 의해 찍힌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면서 곤경에 처한 석철수.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그녀를 찾는 그에게 인터넷은 섬뜩하리 만치 연결되어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 누군가가(아마도 같은 회사 라이벌인 듯한 여자) 그녀의 동영상을 찍어 올려주고, 그녀의 회사가 어디인지는 물론이고 개인정보까지 알려준다. 그리고 그 ‘사건’이 될 수도 있을 법한 정보들을 가지고 그는 그녀를 만난다.

하지만 그렇게 디지털 시대의 끔찍한 연결망의 도움으로 만나게 된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풋풋한 아날로그의 사랑을 전개한다. 그녀의 해명 동영상으로 멋진 2탄 UCC를 찍어 올리자, 차가운 디지털 세상은 금세 따뜻한 온기로 변한다.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 한번 사귀어 보라’는 네티즌들의 반응은, 댓글 뒤편에서 세상의 일들을 ‘사건’으로 읽어내며 짐짓 차가운 척 날카로운 글을 올리던 그들이 사실은 모두 ‘사랑’을 꿈꾸는 이들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와 진정으로 연결되고 싶었던 것이다.

휴대폰 하나에 의지해 위험해 보이는 대리운전 일을 하는 영희의 삶은 디지털 세상의 또 다른 단면이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일의 세계 속으로 철수가 들어오자 그 일은 따뜻한 세계로 변신한다. 철수가 한밤중에 그녀를 불러내 대리운전 시키는 것은 차가운 자동차가 아니다. 그것은 살과 살이 맞닿으며 온기를 전해주는 자전거다. 그것은 멜로 드라마의 공식처럼 사용되는 오브제이지만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 속에서 그것도 대리운전이라는 엄연한 현실 위에서는 좀더 아날로그적인 소품으로 그려진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꿈꾸는 이들은 단지 미혼의 청춘들만이 아니다. 그것은 결혼을 한 부부인 도민호(공형진)와 나진희(조미령)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결혼과 함께 사랑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휴대폰은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아내가 위치추적을 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피곤한 일상에서 잠시 길 밖으로 벗어난 그들이 꿈꾸는 것 역시 촌스럽지만 풋풋했던 옛 시절이 아닐까. 손과 손이 닿는 작은 일로도 쉽게 열광하던 그 시절.

‘사랑해’는 디지털 시대의 차가운 일상 속에서 그 단순한 제목처럼 담담히 사랑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드라마다. 사랑이란 별다를 것 없이 만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그것이지만, 그 단순해 보이는 일상의 꺼풀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거기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 복잡하고, 뒤엉키고, 감정 과잉이 되게 만드는 드라마들은 바로 그런 사회의 모습들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랑해’가 그리는 건 그런 세상이 아니다. ‘사랑해’는 그런 세상을 그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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