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에어’ 이은 ‘스포트라이트’, 방송이란 전문직 살릴까

한 때 소설에 있어서 ‘소설가 소설’이라 불리던 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소설가가 주인공으로 나와 자성적인 입장으로 소설 쓰는 어려움을 토로하거나 소설가의 위선 같은 것을 꼬집으면서, 그 특정한 직업군의 특수한 이야기를 통해 일반적인 명제들을 끄집어내는 소설들이었다. 최근 들어 드라마에서 이와 비슷한 드라마들이 등장해 관심을 끈다. 이제 종방을 앞둔 ‘온에어’와 이제 막 시작하는 ‘스포트라이트’가 그것이다.

‘온에어’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과정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로서 연예계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포착한다. PD와 작가, 배우와 매니저의 이야기들을 통해 드라마 제작과정의 어려움과 그 극복의 과정들을 그려낸 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관전 포인트는 바로 그 연예계의 맨 얼굴에 대한 호기심이다. 초반부터 이 드라마는 연예계와 드라마 제작의 문제점들을 꼬집으면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붙잡는데 성공하면서 그 인기를 끝까지 이어갔다.

곧 종영하는 ‘온에어’의 바통을 이어받는 드라마가 ‘스포트라이트’다. 이제 첫 회를 끝낸 이 드라마는 방송국 기자라는 직업군의 세계를 파고든다. 브로드캐스팅이라는 소재는 특종이라는 목적의식과 생방송이라는 긴박감, 그리고 사회 속에 깃들여진 사건사고를 그 안에 포착한다는 점에서 이미 영화에서는 익숙하면서 검증된 소재다. 하지만 아직까지 드라마로서 이 세계를 다룬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에 대한 남다른 기대를 갖게 만든다.

드라마가 TV, 즉 방송을 소재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방송에 대한 관심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온에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드라마 내내 사전제작이니 쪽대본이니 하는 드라마 제작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것은 새롭게 시작한 ‘스포트라이트’도 마찬가지. UCC 시대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방송은(시청은 물론 제작까지) 이제 더 이상 저쪽 세상의 일이 아니라 우리 옆에서 벌어지는 일상이 되었다.

또한 이 일상이 된 방송(혹은 영상)은 여러모로 시청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끄집어낸다. 즉 일방적인 방송을 보는 시대가 아니라 쌍방향에서 요구사항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의 개입은 때론 시청률에만 몰두하기도 하는 방송 스스로의 자성을 요구한다. ‘온에어’와 ‘스포트라이트’ 모두 등장인물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은 바로 시청률이다. 이 상업적인 방송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 자체가 시청자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이 자기 자신, 즉 방송을 캐스팅했다고 해서 신랄하게 자성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온에어’의 아쉬운 점은 초반부 화두처럼 드라마 제작의 문제점들을 끄집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거기에 대한 어떠한 답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반으로 흘러오면서 거의 멜로 구도로 방향을 전환했고, 이를 통해 결말에 대한 관심을 온통 멜로의 성공에 집중시키고 있다. 또한 그 직업의 세계가 이 멜로 구도 속으로 들어가면서 예를 들면 PD와 작가 간의 비현실적인 관계 같은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기본적으로 취해야할 리얼리티 역시 상당부분 후퇴했다는 점이다.

이제 첫방을 끝낸 ‘스포트라이트’는 일단은 그 긴박감이나 직업을 다루는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는 본격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 방송국 기자라는 특정 직업을 통 해 직업 드라마가 갖는 조직 속에서의 스트레스와 성공 그리고 좌절의 이야기 같은 보편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사실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성공은 바로 이 부분, 기자가 아닌 보통의 샐러리맨이라도 같은 조직 경험을 통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갖게 되는 공감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부분의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이 그래왔듯이 이 초심이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만일 끝까지 리얼리티를 가진 직업의 세계를 고수한다면, 방송을 소재로 다룬다는 자성적 의미는 물론이고 드라마의 새로운 장을 개척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적당한 선에서의 타협을 통해 흐지부지된다면 시청률 지상주의를 꼬집는 드라마가 자칫 그 시청률 지상주의를 드러내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될 것이다.

소설가 소설들이 초기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 자신들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장으로 인식되면서 결국 외면을 받았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TV를 캐스팅한 드라마가 문제를 제시하고 아무런 해결책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외면의 길을 걷게 될 지도 모른다. 기왕에 TV를 다루겠다고 한다면 제대로 적나라하게 꼬집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본격’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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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사극, 수목-전문직, 주말-가족극

드라마의 완성도가 뛰어나서 성공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드라마의 장르가 그 방영요일(편성)과 잘 맞아떨어진 결과일까. 최근 드라마들의 성적표를 보면 요일별로 장르가 굳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월화의 ‘이산’, 수목의 ‘온에어’, 그리고 주말의 ‘엄마가 뿔났다’가 그 드라마들이다. 물론 예외적인 것들(예를 들면 ‘조강지처클럽’같은)이 있지만 대체로 이 구도는 꽤 오래 지속되어 왔다.

월화의 밤을 사극으로 굳혀버린 장본인은 다름 아닌 ‘주몽’이다. 34주 연속 시청률 1위라는 괴물 같은 기록을 남긴 이 사극은 타 방송사들의 드라마들을 모두 침몰시키면서 월화의 밤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것이 현재 방영되고 있는 ‘이산’이다. ‘이산’과 함께 맞불 작전을 폈던 ‘왕과 나’ 역시 수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사극의 밤을 장식했다.

물론 수목드라마로서 방영된 사극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태왕사신기’였지만 이것은 방영시기가 계속 늦춰지면서 공교롭게도 월화에 이미 배정된 ‘이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진이’가 평균시청률 21%, ‘쾌도 홍길동’이 15% 정도에 머무르는 시청률을 수목의 밤에 장식했으나 그것은 사극으로 봤을 때는 미미한 것이었다. 물론 완성도나 작품성으로 따진다면 나무랄 데 없는 사극이었지만 말이다.

‘쾌도 홍길동’이 높은 완성도에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을 때, 수목의 강자로 등장한 것은 전문직 드라마 ‘뉴하트’였다. 전문직 드라마가 수목의 장르로 부상한 것은 ‘쩐의 전쟁’, ‘개와 늑대의 시간’같은 드라마들이 있었기 때문. ‘히트’(월화)나 ‘에어시티’(주말)같은 전문직 드라마가 있었지만 시청률면에서나 완성도 면에서 모두 참패했다. ‘뉴하트’의 분위기를 이어받은 것은 ‘온에어’이며, 이 분위기가 그대로 새로 시작되는 ‘스포트라이트’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강력한 경쟁자로서 ‘일지매’가 방영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역시 수목은 전문직 드라마일지, 아니면 사극이 그 틀을 깰 지 귀추가 주목된다.

주5일 근무제로 인해 주말드라마는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오다가 최근 들어 가족드라마를 연달아 내보내면서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며느리 전성시대’, ‘황금신부’의 바통을 이어받은 ‘엄마가 뿔났다’, ‘행복합니다’같은 가족드라마들은 주말밤을 온전히 주부 시청자들의 그것으로 만들고 있다. 가족드라마의 특성상 전통적인 시청자층을 확보하면서도 달라진 시대에 맞게 끝없이 변주하는 작금의 가족드라마들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주말의 장르로 군림할 것이라 예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월화는 사극이, 수목은 전문직이, 그리고 주말은 가족극이 나누고 있는 현재의 드라마 상황은 바람직하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장르의 요일별 패턴화는 작품 자체보다는 굳어진 편성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칫 좋은 드라마들이 어울리지 않는 요일을 만나 주목받지 못할 가능성도 생기기 때문이다. ‘사랑해’나 ‘누구세요’같은 호평 받은 드라마들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이유 속에는 이 같은 편성의 패턴이 분명 작용한 바가 있다.

또한 이것은 요일을 떠나서 최근의 되는 드라마가 사극, 전문직, 가족극 이 세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새로움을 시도하는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드라마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으며, 되는 드라마만 집중적으로 양산되는 이 상황은 자칫 드라마의 다양성을 해칠 위험이 있다. 물론 이것은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결과이다. 그래서일까. 이 수많은 패턴들(요일이나 장르)을 넘어서 시청률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새로운 실험적인 드라마가 등장했을 때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른바 마니아 드라마란 그저 시청률에 실패한 드라마에 붙이는 수식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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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이 보여준 가수의 생존법

가수가 노래만 해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은 예능 프로그램에 대거 진출해 있는 가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적확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1박2일’이다. 강호동과 이수근을 빼고, 은지원, 김C, MC몽, 이승기가 모두 가수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가수들은 ‘1박2일’이라는 예능의 한 배를 타면서 그 주가 또한 급상승했다. 은지원은 은초딩이란 별명을 얻으면서 동시에 “밤에 비와-”로 더 알려진 ‘ADIOS’도 인기를 얻고 있으며, 이승기는 ‘다 줄거야’, ‘추억 속의 그대’등 리메이크곡을 수록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앨범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한편 MC몽은 최근 발표한 ‘서커스’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호응은 음으로 양으로 ‘1박2일’과 떼어놓고 보기가 어려워졌다. 도대체 ‘1박2일’의 어떤 점들이 이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 것일까.

가수들, 살아있는 무대를 만나다
만약 이들이 가수들이 아니었다면 ‘1박2일’의 재미는 분명 반감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경남 거창 편에서 갑작스레 결정된 ‘전국노래자랑’ 출전(?)에 이어, 경북 문경 편에서 우연히 들르게 된 충주대에서 이루어진 게릴라 콘서트 같은 독특한 살아있는 재미는 주지 못했을 테니까. 가수들이지만 예능을 하게된 그들이 그 속에서 무대를 만났을 때 주는 감흥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무대가 그들이 늘 노래부르던 화려한 무대와는 거리가 먼 지극히 서민적인 무대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낮은 무대는 단지 ‘1박2일’에게만 수혜를 준 것이 아니다. 늘 정해진 안무와 정해진 계획대로 짜여진 틀 속에서 노래하던 그들이, 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무대에서 발견하는 것은 진짜 ‘라이브’라는 말에 걸맞는 살아있는 무대다. 충주대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진 게릴라 콘서트는 바로 그 우연성으로 인해 더 빛날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새로운 무대이다. 늘 보던 스튜디오와 조명들과 안무들을 모조리 떼어낸 자리에 남는 것은 마치 연예인들의 맨 얼굴 같은 가수들의 날 것의 모습이다.

가수들, 맨 얼굴을 드러내다
‘1박2일’이 보여준 가수들의 얼굴은 실제로도 맨 얼굴이었다. 추운 야생에서의 하룻밤을 지내고 난 그들의 부스스한 얼굴들에서 과거 가수들이 써왔던 신비주의 전략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 언저리에 새롭게 지지대를 형성하는 것은 바로 친근한 가수들의 얼굴이다. 은지원이나 김C, 그리고 MC몽이 이 예능 프로그램을 만나 시너지를 이룰 수 있었던 원인은 그들의 전략이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먼 친근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은지원의 악동 같은 이미지, 김C는 보헤미안적 이미지, MC몽의 거침없는 자유로움의 이미지는 ‘1박2일’이 주창하는 야생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맨 얼굴 전략’이 주효했던 가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승기다. 이승기는 은지원이나 김C, 그리고 MC몽과는 다른 이미지, 즉 귀공자 이미지를 가진 가수이지만 과감히 전략을 수정하면서 오히려 친근한 이미지까지 얻어냈다. ‘내 여자라니까’를 부르며 ‘누나들 사이에서’ 머물렀던 이승기가 ‘1박2일’에 합류함으로써 바뀌어진 것은 이제 ‘형들 사이에서도’ 귀여운 이미지를 얻어냈다는 점이다. 이로써 이승기의 팬층은 좀더 폭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리메이크 앨범인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가 중년층까지를 소화할 수 있는 옛 노래들을 가지고, 여자가수들의 노래와 남자가수들의 노래를 차례로 부르면서 호응을 얻어낸 팬층과 잘 맞아떨어지는 결과다.

가수들, 가능성을 만나다
무엇보다 ‘1박2일’이 가져온 가장 큰 효과는 이들이 팀을 이루면서 서로 시너지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강호동을 맏형으로 유사가족을 형성한 이 가수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캐릭터를 구축하고 동시에 상대방의 캐릭터를 서로 강화해주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가수들은 ‘1박2일’을 떠나서는 저마다 각자의 가수의 영역 속에서 활동하면서, 동시에 이 프로그램 속에서는 강력한 팀으로서 활약한다. ‘1박2일’이 리얼 버라이어티로서 애초부터 이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가수들의 외적인 활동은 고스란히 ‘1박2일’의 확장으로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가수들의 외적 활동이 ‘1박2일’의 확장된 형태가 되면, 거꾸로 ‘1박2일’은 마치 가수들의 이미지를 매주 제고시켜주는 프로그램으로서도 기능하게 된다. 프로그램 측이나 가수들이나 모두 바람직한 지점을 찾게 되는 것이다.

정해진 안무대로 인형처럼 움직이는(인간이 아닌 듯한 존재) 가수들은, 이제 어떤 식으로든 ‘1박2일’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낼 필요를 느낄 지도 모른다. 물론 가수는 노래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만 이제 더 이상 노래만 잘한다고 성공하는 가수가 되기는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연기자가 연기를 통해 리얼한 모습(멋지게 보이는 모습이 아닌)을 보여주고, 개그맨들이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통해 그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사이, 늘 똑같은 순위 프로그램의 형식 속에서(그것마저도 거의 사라졌다) 얼굴을 드러내야했던 가수들에게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점은 바로 그 리얼한 모습이었다. 그런 면에서 ‘1박2일’의 기획되지 않은 맨 얼굴, 기획되지 않은 무대를 통해 가수들이 만난 것은 이 시대 가수들의 새로운 생존법이면서 동시에 가능성이다.

‘개그야’, 무의미의 실험이냐 의미의 공감이냐

‘개그야’가 생긴 건 분명 ‘개그콘서트’가 열어 놓은 공개무대개그의 영향이 크다. 개그의 무한경쟁 시대를 열어놓은 KBS ‘개그콘서트’가 독주하고, 그 분위기를 감지한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등장한 후에도 MBC는 꽤 오랫동안 ‘웃으면 복이 와요’가 가졌던 콩트 개그류의 전성기가 다시 도래하기를 꿈꾸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대세가 기운 상황에서 MBC가 내민 카드가 ‘개그야’다. ‘개그야’가 여타의 공개개그와 차별점을 두었던 것은 내러티브 속에 잡아넣는 말 개그, 즉 유행어였다. ‘죄민수’의 “아무 이유 없어!”, “MC계의 슈레기"나 ‘사모님’의 “운전해 어서!” 같은 유행어들은 ‘개그야’가 가진 말 개그가 낳은 것들이다.

무대개그의 실험성은 단연 ‘개그콘서트’가 독보적인 상황이었으며, 그 주축을 이룬 개그맨이 정종철, 박준형이었다는 점에서 현재 그들이 이적한 ‘개그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시청률면에서나 관심도면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는 무얼까. 이들의 실험성과 ‘개그야’가 본래부터 갖고 있던 유행어 제조기를 방불케 하는 내러티브형 말 개그는 과연 시너지효과를 거두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유행어 면으로만 보면 현재의 ‘개그야’는 과거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인지도를 예감케 한다. 벌써부터 ‘천수정 이뻐’나 ‘없어’ 그리고 ‘끊지마’같은 코너는 그 제목 자체가 유행어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처럼 누구나 한번 들으면 귀에 쏙쏙 박히는 중독성을 갖고 있다. 특히 ‘천수정 이뻐’는 “힘들어? 오 내 새끼 오 남의 새끼” 이런 식으로 유행어 조짐을 보이는 말들을 연쇄적으로 풀어내는 묘미를 선사한다.

문제는 이런 입에 쩍쩍 달라붙는 말들이 독특한 발성과 높낮이를 통해 강한 중독성을 내포하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를 도출하지 못하는 점에 있다. 개그가 반드시 모든 사회적 의미를 내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닌 간단한 것이라도 의미망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자칫 말장난에서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장난 또한 웃음의 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의미는 바로 그 말장난을 좀더 강력하게 각인시키는 힘이 있다.

의미 형성을 이루지 못하는 재미있는 말들의 상찬은 즉각적인 웃음은 불러낼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만들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러한 말의 무의미성이 극대화된 것은 바로 ‘나카펠라’다. ‘나카펠라’가 가진 실험성은 아카펠라의 패러디, 노래의 재해석, 그리고 몸 개그의 결합 등등 간단히 겉으로만 봐도 실로 극대화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정종철이 가진 다양한 개인기가 아니면 풀어내기 어려운 개그의 형식이다. 하지만 한바탕 웃고 나서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길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이러한 실험적인 코너가 한두 개 있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가 극대화된 풍자나 세태개그가 주류를 이루는 ‘개그콘서트’ 같은 경우에 이런 ‘무의미의 실험개그’가 주는 신선함은 오히려 더 커질 수 있다. 이른바 4차원 개그에 대한 주목도는 나머지 코너들이 대비효과를 주어야 비로소 더 빛나는 법이다. 하지만 ‘개그야’가 선보이는 코너들은 거의 대부분이 4차원에 머물고 있다.

IQ가 430이라 자처한 한 황당한 정치인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 내용은 풍자와 세태와는 거리가 먼 ‘IQ430’라는 코너에서, 개그우먼이 “기분 많이 좋아?”하고 물어볼 때 유행어를 예감케 하는 재미에 비해 그 무의미함으로 인해 그 이상으로 남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다. ‘개그야’에 대한 떨어진 호응도는 아직까지 섣불리 그 원인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제 정종철과 박준형이 투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무대개그의 속성상(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앞으로 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의미의 실험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웃음의 의미가 만들어내는 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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