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뚤어진 시각으로 각설탕 보기

‘각설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달리는 천둥이일까, 아니면 그 말 위에 있는 시은이일까. 반려동물영화라면 당연히 그 포커스는 천둥이와 시은 양쪽에  맞춰졌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된 드라마 흐름은 그 포커스를 시은쪽에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빚어지는 결과는 참혹하다. ‘동물과 인간의 우정’은 퇴색되고 ‘우정을 빙자한 동물 학대’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되자 이 영화는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회극처럼 보여진다. 눈물을 나오지 않고 대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달콤한 이미지의 ‘각설탕’이라는 제목은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영화적 맥락 속에서 그 제목은 ‘주는 주인’과 ‘받아먹는 동물’의 주종관계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포커스를 받지 못한 천둥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천둥이는 자신의 부모, 장군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면서부터 인간들의 굴레 속에 평생을 견뎌내야 할 운명을 부여받는다. 자신이 태어나는 날, 부모를 저 세상으로 보낸 천둥이는 단지 일어서지 못한다는, 그래서 달릴 수 없을 거라는 기능적인 이유(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읽자면 노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를 따라갈 위기에 처한다(달리지 못하면 말이 아니라는 사고는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인가!). 그런데 천둥이를 구해내 달리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시은이다. 하지만 살았다 해도 앞으로 인간들의 굴레 속에 살아갈 천둥이의 운명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천둥이는 주인에게 버림받고 나이트클럽에서 학대받는다. 그런 천둥이를 다시 만난 시은은 이제 자신이 받는 억압을 천둥이를 통해 풀어내려 한다. 천둥이를 인간의 욕망이 꿈틀대는 경마장, 그 인간들의 순위 경쟁 속에 내세우는 것이다. 천둥이는 경마장에서 달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저 인간 없는 초원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천둥이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에서 어떤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이 저 천둥이와 비슷하다는 사회적 맥락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알아주지 않고 나이트클럽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천둥이의 모습은 우리네 샐러리맨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경마장이라는 서기 싫었던 생존경쟁의 장에서(그것도 내가 아닌 저들의 머니게임을 위해)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다. 천둥이의 죽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어떻게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가 하는 얘기를 닮아있다. 그렇다면 누가 천둥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시은에게 포커스를 더 주고 있는 이 영화 속에는 그 악역이 명백하다. 시은과 윤 조교사의 대척점에 있는 철이와 김 조교사가 그들이다. 그들은 과도한 경쟁에 경도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악역만으로 보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경쟁사회에서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채찍이 아닌 각설탕으로 살아가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채찍이든 각설탕이든 그것은 게임의 룰을 쥐고 있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다루는 방법의 문제일 뿐, 근본적인 지배-피지배 구조에 대한 논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단순화된 채찍보다 은근히 본질을 숨기는 각설탕이 더 무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달콤한 중독으로 사로잡는 현대적 의미의 또 다른 채찍이 되기 때문이다. 천둥이는 왜 마지막 순간에 수술을 받고 더 오래 사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 부분은 모호하다. 수술을 받지 않으려는 천둥이의 의지가 무엇 때문이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그렇게 해석된다. 그 자의적 해석은 천둥이의 비극을 가져온다.

영화가 진정으로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다루고 있었다면 마지막 순간 순위 경쟁으로 다시 내몰아 1등으로 골인점을 통과하고는 죽는 천둥이와 그 앞에서 오열하는 시은을 그리기보다는, 이 경쟁사회의 경마장에서 탈출하는 천둥이와 시은의 모습이 그려졌어야 옳다. 천둥이의 죽음은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비극적인 운명과 닮았다는 맥락에서 슬프지만, 천둥이의 죽음 앞에 눈물짓는 시은의 모습에서 전혀 슬픔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 속 이미지의 문제


해변이 주는 이미지는 발랄하다. 그래서일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이란 제목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강요한다. 여름, 바닷가,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등등.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단 몇 분만 지나면 알게될 것이다.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들은 사실 우리들의 해변에 대한 잡다한 기억들이 만든 편견이라는 것을. 홍상수 감독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흔히 극장 안은 환상의 세계고 극장 밖이 현실의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홍상수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를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배반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아직까지 황사가 날리는 봄이다. 바닷가? ‘서해 최고의 해변 신두리’. 말 그대로 정말 멋진 곳이지만 우리가 이미지적으로 해변이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그런 해변은 아니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는 백사장에서 보이는 바다가 나오지 않는다. 물 빠진 뻘 위를 걷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영화감독 중래(김승우 분), 영화음악작곡가 문숙(고현정 분), 영화세트미술가 창욱(김태우 분), 그리고 이혼을 결심한 유부녀 선희(송선미 분) 이들의 하룻밤은 전혀 낭만적인 냄새가 없다. 그런데 이건 왠일일까. 이 일상적인 이미지에 전혀 부응하지 않는 영화가 시종일관 관객들을 웃기는 것은.

홍상수 감독은 아무래도 영화 속에서 철저히 관객들을 배반하고 싶었나 보다.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것은 창욱의 애인으로 온 문숙이 바닷가에 도착해 “우리 애인 아니예요”라고 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아니 어쩌면 바닷가가 비추는 을씨년스런 풍경들 속에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거슬러올라가 그것은 어쩌면 고현정이라는 배우가 캐스팅 되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아마도 고현정의 새로운 면모에 놀랄 것이다. 그것은 예견된 것이고 다분히 의도적이다. 우리가 가진 고현정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는 영화가 말하려는 일상적 이미지의 허구성을 드러내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고현정은 마치 “연기하지 말라”는 감독의 지시를 들은 연기자처럼 연기한다. 고현정이 쌍소리를 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관객들은 일종의 ‘즐거운 배반’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을 웃기는 개그 코드와 맞닿아 있다. 마치 노을지는 바닷가 앞에서 뭔가 사랑얘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의 연인이, 실상은 온통 살이 그을려 서로의 살을 건드리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줄 때 나오는 웃음과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말 웃긴다.

그런데 웃으면서 자꾸 뒷덜미를 당기는 것이 있다. 머리 속에 그려진 일상적인 이미지가 자꾸 깨지고 현실의 뒤틀린 모습을 자꾸 보면서 삶이 비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래가 자신이 과거의 ‘나쁜 이미지들’(실상은 아내가 바람핀 것)과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일일이 도형까지 그려가며 ‘나쁜 이미지’들이 어떻게 우리를 교란시키는가를 진지하게 설명하는 중래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이중성을 보게 된다. 그의 설명은 아이디어로 넘치고 재미있는 해석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변명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 그 간극 사이에서 관객들의 웃음은 터진다. 그런데 그 웃음의 뒷맛이 쓴 것은 그 모습에서 언뜻 관객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냉소적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감독이 그런 일상에 던지는 진지한 시선 때문이다. “무슨 영화를 구상하고 있냐”는 창욱의 질문에 중래는 자신이 구상하는 대충의 영화 스토리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그 내용은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음악이 세 번 반복되자 그것을 기적으로 여긴 주인공이 몇 십 년에 걸쳐 그 기적의 비밀을 캔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영화는 중래의 말처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중첩된다. 같은 술집과 펜션, 밤늦게 물 빠진 해변에서 만나는 남녀, 잠자리, 개를 데리고 해변을 걷는 남녀 등등. 그걸 통해서 영화는 마치 중래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일상적인 이미지로 뭉뚱그려 보던 것들을 하나하나 재발견하게 된다. 상황은 반복이지만 그 속의 내용들은 조금씩 다 다른 구체성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가진 이미지마저 깨뜨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영화를 어렵게 느껴왔던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실컷 웃어도 좋다. 그렇게 웃다보면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뇌를 장악하고 있는 일상의 이미지들이 너무나 굳건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즐겁고 재미있는 대중성을 확보한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건넨다.
박찬욱, 봉준호 같은 자기 세계가 투철한 작가들이 동시에 대중성을 획득하는 줄타기에 성공한 것처럼,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역시 자신의 세계와 대중성이라는 양끝의 균형자를 들고 줄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인다.

김기덕 vs 괴물

우리나라 사람들은 숫자에 약하다. ‘1000만’ 관객을 ‘단 21일만’에 돌파한 괴물의 괴력에 혀를 내두르며 너도나도 ‘괴물 보자’고 달려가는 지금의 현상은 숫자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것은 괴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숫자라는 괴물에게 쫓기는 형국이다. 괴물을 보지 않으면 수준 낮은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어딜 가도 화제가 되는 그 이야기에서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 결과적으로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비주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그 기저에는 존재한다.

그 두려움은 일반관객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는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부터 날아온 ‘영화제에서의 호평’이라는 외신은 전문가 집단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기대감이 대부분이었겠지만 한 편으로는 강박적인 두려움도 한 몫 했다. 그저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면 그런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호평을 받았다면 그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의 작품 앞에는 새로운 수식어가 붙는다. ‘대중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 블록버스터이지만 ‘의미 있는 블록버스터’. 여기서 ‘대중적’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힘은 기자들에게 지대하다. 모두들 달려가 보는 영화에 적어도 전문가인데 한 마디 곁들여야 전문가로서 소외 받지 않는다는 의식 때문이다. 이렇게 전문가 집단이 여기저기서 강박적으로 쓴 기사들은 온통 매체들을 뒤덮는다.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는 ‘괴물’의 존재감을 느낀다. ‘보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 이상한 의식의 괴물이 우리 마음 속의 한강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영화 ‘괴물’ 속에 등장하는 괴물의 탄생처럼, 우리 의식의 한강 속에 누군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것은 아닐까.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부터 우리를 들뜨게 했던 수치들, 수출목표, 아시아 몇 위라고 하는 GNP, GDP 수치, 툭하면 등수를 매기는 경제지표들에서부터, 올림픽 메달 수와 월드컵 몇 강이라는 스포츠의 수치들, 그리고 그 저변에 죽 깔려왔던 성적표와 등수와 점수로 일관되는 입시교육, 그로 인해 의식화된 엘리트주의. 그 소수에 들기 위한 안간힘들…. 그렇게 숫자로 대변되는 소수엘리트주의라는 포름알데히드는 우리 의식 속에 괴물을 키워왔던 건 아닐까. 포름알데히드 방류에 난색을 표하는 김의 모습은 우리가 숫자라는 괴물에 포획되기 이전,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라며 망설였던 그 때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때 입시교육의 선봉에 서야 했던 선생님들은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인생은 길다. (지금 몇 년은 짧다.) 보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지자.” 저 영화 속의 더글라스 부소장이 “한강 큽니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집시다”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 마음 속에 자라난 숫자라는 괴물은 백주대낮에 영화가를 습격해 아수라장을 만든다. 전국 1400여 개의 상영관 중 620개를 싹쓸이한 것이다. 거의 영화관 2개 중 하나는 괴물을 틀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괴물의 등장 이면에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뉴스는 연일 괴물의 기록행진, 그 선정적인 수치보도에만 열을 올렸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백주대낮에 버젓이 괴물이 등장(사실 괴물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그 실체는 밤에 가려져 있었다)하면서 그간 그토록 괴물의 실재를 호소하며, 자신들이 겪은 상처를 토로하는 영화인들도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피해자 가족들 중에는 김기덕 감독도 있었다.

괴물의 실재와 딸 현서의 생존을 토로하는 박강두를 이상하게만 보는 것처럼,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곡해됐다. 김기덕 감독은 말을 극도로 아꼈고, 그러다 보니 해석이 분분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과거 10년 동안 12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총 관객이 100만 명이 되지 않았던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그것도 해외에서는 각광받는 영화가!). 그것은 마치 박강두네 가족이 그 한강변의 매점으로까지 떠밀려 내려온 사연과 비슷하다. 박희봉이 아무리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떠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쿨쿨 잠만 잘 테니. 오히려 수치를 들어 얘기하면 이해가 될까. 제목 - 괴물 : 활(김기덕 감독의 이전 작품). 개봉관수 - 620 : 1 관객수 - 1000만+∝ : 1398명! 그는 극장이 자신의 영화를 틀어주지 않는 현실을 통탄했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이 나서서 수치라는 괴물과 싸우는 방식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의 경우처럼 여러모로 실패의 요소를 안고 있다. 가장 첨예했던 발언은 영화 ‘괴물’에 대해 “우리나라 관객 수준과 영화 수준이 최고점에서 만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의 해석을 두고 “우리나라 관객 수준이 낮다는 것이냐”, 혹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수준이 높다는 것이냐”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뒤늦게 김기덕 감독은 ‘최고점’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말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뉘앙스를 전달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의 발화점은 높고 낮다는 의미의 해석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수준’이라는 단어에 있다. 그 단어는 저 마음 속 은신처에 숨어있던 괴물을 꿈틀대게 만들면서 저마다 분분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김기덕 감독의 이 발언에는 함정이 있다. 그 발언을 긍정적으로 읽어 이 영화가 최고점에서 관객과 만났다고 해석한다면 스스로의 수준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 발언을 부정적으로 읽는다면 스스로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은 “괴물은 훌륭한 영화”라고(100분 토론에서) 함으로써 스스로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00분 토론에 나와 편중된 수치게임과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김기덕 감독, 강한섭 교수)은 저 영화 속 박강두 가족처럼 무기력해만 보인다. 그들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처럼 각자의 얘기만 할 뿐, 어떤 연대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 

다. 특히 강한섭 교수는 “그 부분은 김기덕 감독님이 해결하시고….”라는 식으로 각자의 선을 그어놓는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입장만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며, 강한섭 교수는 이해할 수 없는 권위적 태도를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저 마음 속에 굳게 뿌리내린 괴물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영화 ‘괴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강두네 가족이 괴물과의 사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강두 가족의 괴물과의 사투에서 주목해보지 않은 한 인물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영화 끝 무렵에 느닷없이 나타난 행려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괴물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인물은 바로 그이다(괴물은 화살 한방으로 죽진 않는다. 여기에는 휘발유와 불이 필요했다.). 그는 괴물에게 어떤 피해를 입은 적도 없는 방외인이다. 그는 이 사태의 이해 당사자가 아니다. 이 인물은 도대체 누구며 왜 갑자기 등장한 것일까.

이것은 갑작스런 봉준호 감독의 개입이랄 수밖에 없다. 봉준호 감독의 사회인식은 어둡고 비관적이며 냉소적이다. 그는 전혀 힘없는 한 인물을 집어넣어 괴물을 해치운다. 이것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냉소적 시선이자 스스로 만들어 놓은 괴물을 없애야만 한다는 책임감의 발로다. 그런데 괴물이 죽었으니 강두네 가족의 승리일까. 여기서 봉준호 감독은 사실 괴물의 죽음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강두네 가족이 원한 것은 괴물의 죽음이 아닌 잡혀간 현서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괴물은 죽었지만 현서 역시 구할 수 없었다. 만일 이 영화가 작금의 영화현실에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알게 모르게 풍기고 있다면 그 전망은 밝지 않다. 봉준호 감독에게 있어 숫자는 허상이고(괴물은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중요한 영화(살아있는 현서)는 구하지 못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다지 어둡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괴물을 경험한 후의 강두의 변화이다. 그는 거기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졸고만 지내던 그가 총을 옆에 두고 늘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 영화 ‘괴물’이 일으킨 싹쓸이 논란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속에 수치와 엘리트주의가 뒤범벅된 괴물이 꿈틀거린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해주듯 허상이라는 것.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영화라는 것.

이런 면에서 보면 다시금 괴물이라는 영화가 얼마나 대단하며 놀라운 작품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스스로 블록버스터라는 괴물이 되어버린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 같은 괴물과 싸우고, 그 존재에 대한 경각심은 늦추지 말라는 것이니 말이다. 이 정도가 되면 괴물이란 영화는 영화의 장르를 넘어서 하나의 행위예술이 된다.

내 청춘에게 고함

흔히 ‘마이너리티’라고 하면 숫적으로 적은 집단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마이너리티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건 영화계만 봐도 극명히 드러난다. 실제로 영화계 전체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는 ‘메이저’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개봉 21일만에 1천만 관객을 돌파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전국을 강타한다고 해도 그건 단 한 편의 영화일 뿐이다. 빛의 이면, 즉 그림자 속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이너리티가 되어버린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

인생에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다면 ‘청춘’은 어디에 속할까. 사회적 규범과 이해관계 속에 잘 적응되어 그 주류사회에 편입한 노회가 메이저라면, 청춘은 단연 모든 것이 미숙하고, 그래서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마이너가 될 것이다. 게다가 메이저 사회는 이들 마이너들을 소수자집단으로 치부하면서 억압하고, 이용하며, 들러리 세운다. 1천만 관객 시대에 1만 명 관객 동원을 기뻐하는 ‘내 청춘에게 고함’은 바로 이런 메이저 사회 속에 숨막혀하는 마이너들(청춘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작금의 영화 현실을 닮아 있다.

꽉 막힌 답답한 빌딩 숲 속의 청춘
영화는 21살의 혼란스런 청춘, 정희의 뒷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정희는 전화를 받지 않는 남자친구의 옥탑방을 찾아가는 길이다. 문은 닫혀있고 벽돌 위에 쪼그려 앉은 정희는 캔맥주를 따려다 손톱에 상처를 입는다. 카메라는 집요할 정도로 답답하게 화면 속에 정희를 가둔다. 그때 정희는 마치 그것이 답답하다는 듯 갑작스레 벽돌을 들고 닫힌 창을 향해 집어던진다. 그리고 난간 쪽으로 걸어가 “왜 좀더 기다리지 않았느냐”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댄다. 그 때 잠깐 카메라는 정희의 숨통을 틔워준다. 그러나 그 풍경에 들어오는 것은 다닥다닥 붙은 가옥들의 바다에 섬처럼 돋아나 있는 아파트 건물들이다.

다음 장면에 정희는 언니를 만나러 교회로 간다. 카메라는 교묘하게 교회 담장을 가운데 두고 담 밖에 정희를 세우고 담 안쪽에서 나오는 언니를 잡는다. 세상 밖에서 혼란스러운 정희에게 교회담과 성가대복으로 안전해 보이는 언니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가자고 한다. 그들이 이사가기로 한 집은 한쪽 벽이 창으로 나 있다. 그 창 밖으로 역시 비치는 풍경은 가옥들의 바다에 뜬 아파트들이다. 그 집에 대해서 정희는 창이 너무 넓지 않느냐고 하고, 언니는 넓어서 좋다고 한다. 정희는 위성으로 보면 창이 넓어 우리가 다 들여다보일 지도 모른다고 한다. 정희는 지금 숨는 중이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이 숨을 보금자리를 찾는 중이다. 비좁고 어둡고 어지러운 남자친구의 집에서 섹스를 하는 정희가 “섹스가 아니면 날 만나겠냐”고 남자친구에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남자친구의 공간은 그녀를 보듬어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잠시 망각할 수 있는 도피처일 뿐이다.

그녀가 자신만의 공간을 찾는 이유는 어린 시절, 남들이면 다 가졌을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이가 들었고 이제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스스로 서야 하지만 그녀는 미숙하다. 그녀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의 결별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버지에게 “나는 정희가 아니고 에비타(정희가 맡은 배역)”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밀쳐내고 혼자 서려 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한 평의 공간도 내주지 않는다. 사기를 당한 그녀가 하는 것은 돈을 내고 잠시 자신의 공간이 되어주는 여관방에서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렇게 경찰서에 잡혀간 그녀에게 경찰은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한 내밀한 이유를 들어주지 않는다. 단지 그 방안에서 콘돔이 나왔고, 그래서 성행위가 있었는가 하는 그런 따위의 것들만이 현실에서 그녀와 소통하는 것들이다.

그녀는 사실 그 누구와도 소통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 저 아파트 숲을 향해 고한 말들은 대상이 없이 허공을 떠돌았고, 남자 친구집 창을 향해 던진 벽돌은 도둑의 짓으로 오인된다. 지하철역에서의 자살시도는 그 이유를 묻지 않는 용감한 시민들에 의해 좌절된다. 자신이 부정했던 아버지는 한강에 투신한 시체로서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건넨다. 이제 그녀가 해야할 일은 명확하다. 소통을 포기하는 일이다. 한강철교 위에서 자신을 투신하듯 휴대폰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소통의 대상조차 없는 청춘
두 번째 에피소드로 넘어오면 근우는 아예 소통의 수단이었던 공중전화박스를 수거하는 일을 하고 있다. 공중전화라는 공공의 소통창구가 버젓이 있던 시대에서 휴대폰이라는 사유화된 소통수단의 시대에 근우는 서 있는 것이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 전혀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두 번째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근우는 그 불안하기만 한 (사회라는 이름의) 담벼락 위를 (사회의 의미 따위에) 눈을 감고, 무모하지만 더듬더듬 걸어 나가는 중이다.

그는 같은 직장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은 소통이라기보다는 소통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동병상련식의 토로에 가깝다. 연기자지망생으로 ‘연기연습을 하는 것’이라며 여관방을 급습해 협박을 하는 선배라는 작자는 어떤 규범의 선을 넘어서 느끼는 기형적인 소통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근우는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자신 역시 그 방법밖에는 찾지 못한다. 우연히 남의 전화 통화내용을 엿듣게 되면서 한 여인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창 밖 전신주 위에 올라 자신이 집착하게 된 여인과 그 여인에게 상처를 주는 남자의 대화를 듣는 건 슬픔을 떠나 절박하기까지 한 근우의 상황을 말해준다. 결국 근우는 남자와 여인의 대화를 연결해주는 전화선을 잘라버리고, 선을 넘는다. 술취한 남자를 노래방에 데려가 여인이 좋아하는 노래, 김보연의 <생각>을 부르며 폭행하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슬프다. 한 소절을 부르고 나서 마치 들으라는 듯 남자를 폭행하는 장면 속에 근우의 단절된 삶의 극단을 보게 된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근우는 ‘고(告)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의미 없이 하고 있는 공중전화박스 수거는 사실은 스스로가 자신의 단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근우는 의미를 두지 않았던 죄로 결국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직장에서 해고통지를 받게 된다. 그 내용은 역시 전화로 통지된다. 여인에게 버림받은 근우에게 회사는 해고통지를 하고 노조는 투쟁에 합류를 권유하지만 근우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리고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철길 위에 서 있는 기차를 본다. “왜 저 기차는 늘 저기에 있지?”하는 말은 근우의 처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근우는 어지럽게 난 철길 위를 서성댄다.

청춘을 버려 얻은 것, 혹은 잃은 것
세 번째 에피소드는 마치 20대를 지낸 정희와 근우가 그 고달픈 청춘을 지나 서른에 얻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독문과 박사과정 학생이었지만 서른 살의 늦깎이 군인인 인호는 결혼을 해 마련한 자신만의 공간도 있고, 또 언제든 전화를 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아내도 얻었지만 대신 그는 청춘을 버렸다. 영화 초반 짧게 나오는 군대 장면에서 인호는 이제 닳고닳은 병장으로 신병을 놀릴 줄도 아는, 현실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가 나온 마지막 휴가에서 그는 여전한 공간의 부재와 소통부재의 현실을 절감한다. 집 앞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지만 아내는 없고, 대신 그 빈 공간에서 아내의 부정을 확인하게 된다.

자신만의 보금자리였던 그 집은 이제 그를 소외시킨다.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오고, 자신이 군대에서 보낸 편지는 대상을 잃고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집은 인호를 밖으로 떠민다. 그는 같은 군대의 후배집에 들렀다가, 우연히 대학동창의 결혼식장에 갔다가, 거기서 급기야는 한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를 다시 집으로 복귀시키고 소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내의 고백이다. 아내가 자신의 부정을 고백한다면 모든 일이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는 입을 다문다. 그러니 스스로 아내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저지른 여인과의 하룻밤을 이용한다. 아내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그들의 엇나간 관계를 확인하는 꼴이 될 뿐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인호와 아내는 이미 타인이 되어버린 자신들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는 세 개의 철길이 등장한다. 정희가 그 외로운 떨림을 듣기 위해 귀를 대고 있는 철로와, 수많은 길이 있지만 자신이 갈 길을 정하지 못하는 근우의 철길, 마지막으로 그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 위에 탄 인호의 철길이다. 청춘을 살아가는 정희와 근우는 그 철길 위로 오르지도 못했고, 인호가 오른 철길 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된다. 청춘일 때는 길을 몰라서 헤매고, 이제 현실에 들어오자 엉뚱한 국면을 맞게 되는 그 지점에서 세 편의 에피소드는 하나로 묶이며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단순히 청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길은 많지만 갈 길이 없다
‘내 청춘에게 고함’은 소통되지 않는 현실을 청춘에 빗대 말해주는 듯 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수없이 전화하고 이야기하려 하지만 그 전화는 받지 않거나, 통신장애거나, 받을 수 없게 된다. 영화 자체도 세 편의 에피소드로 단절되어 있으며, 이 매력적인 주인공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들은 독립적인 생활의 공간 속에서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다. 그나마 이 세 편을 연결해주는 연결고리는 영화 뒤편에서 들려오는 뉴스들이다. 여관방에 불을 질렀다거나, 노래방에서 폭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그렇고 그런 사회 뉴스가 흘러나올 때마다 관객들이 웃음을 지었던 것은 그만큼 영화 속 주인공의 고립이 타인의 삶에 어떤 울림이 되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1천만 관객 시대, 600여 개의 극장 동시개봉을 말하는 시대에, 1만 관객 동원과 3개의 상영관 개봉은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마치 자신이 처한 처지를 그대로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소통과 보금자리인 극장은 어디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이너로 치부된 영화가 설 자리는 많지 않다는 것. 길은 많지만 갈 길이 없다는 사실이 미숙해 보이는 청춘들처럼 마이너에 선 영화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건 아닌지. 누가 그들에게 소통의 창구를 열어줄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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