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스타’ 변방에서 중심을 치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이 시대를 갖고 걸판지게 한 마당을 놀았다면, ‘라디오 스타’에서 이준익 감독은 이제 한물 간 스타를 매개로 이 시대의 주변인들을 끌어 모아 라디오라는 마당 위에 펼쳐놓는다.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이 저 왕궁이라는 본진으로 들어가 스스로 민중의 입이 되어주었다면, ‘라디오 스타’의 최곤(박중훈 분)은 영월이라는 변방으로 날아가 DJ의 마이크를 고단한 민중들에게 넘긴다. 한 예술인의 삶으로서 장생과 공길이 왕 앞에서도 거침없이 사설을 늘어놓았다면, ‘라디오 스타’에서 최곤은 라디오 방송이라는 규범적 공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솔직한 이야기들을 엮어낸다. 그리고 ‘왕의 남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라디오 스타’ 역시 변방의 민중들을 끌어안는다. 조금은 구닥다리 같은 영화, ‘라디오 스타’가 주는 어찌할 수 없는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88년 가수왕 최곤, 그가 가진 유일한 것
그는 ‘왕년에’ 가수왕이었다. 지금은? ‘왕년에 가수왕’이었다는 사실을 팔며 살아가는 소위 말하는 한물 간 가수다. 그러니 그를 가수왕으로 대접해주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대마초 사건과 폭행 사건으로 문화면이 아닌 사회면에 등장한 그의 존재를 간신히 기억할 뿐이다. 모든 걸 잃은 그이지만 그를 진짜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는 것이다. 그런 그를 가수왕 대접해주는 사람이 있다. 20여 년 간 일편단심으로 그의 매니저를 해온 박민수(안성기 분)다. 박민수는 여전히 최곤의 담배를 챙기고 불을 붙여준다.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는 어찌 보면 주종관계 같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박민수는 최곤을 “담배 하나도 혼자 피우질 못하는” 인간으로, 그래서 자기가 보살펴줘야만 하는 불쌍한 존재로 인식하며, “우리 같이 물에 확 빠져죽자”고 하는 박민수의 말에 “그러면 우리 둘이 사귀는 줄 알어”라고 말할 정도로 둘의 관계는 밀착되어 있다.

주종관계에는 일종의 암묵적 동의가 숨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공동운명체이며 현재의 어려움을 겨우겨우 버틸 수 있는 힘은, 최곤이 안간힘을 쓰며 지키려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관계를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기대 사람 인(人)자를 만들며 그 균형으로 겨우 서 있는 그들이 절박하다는 반증이다. 그들은 ‘88년 가수왕’이라는 이제는 허울뿐인 과거의 영광에라도 기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다.

변방에서 중심을 치다
그래서 그들이 흘러흘러 밀려난 곳은 강원도 영월 동강이다. “동강은 동쪽에서 흘러서 동강일까? 아니면 동쪽으로 흘러서 동강일까”라고 박민수는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가 변방인지 중심인지를 묻는다. 서울이라는, 가수왕이라는, 전국방송라디오라는 중심은 최곤과 박민수를 영월이라는, 라디오DJ라는, 지방방송라디오라는 변방으로 몰아낸다.

그런데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같은 처지의 동지들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아무도 스포트라이트를 주지 않았던 영월의 주민들이다. 최곤과 그들의 만남은 예고된 것이다. 첫방송에서부터 시작되는 방송사고. 하지만 그 방송사고는 이제 노골적인 최곤의 저항으로 이어진다. 방송의 권위를 없애고 마이크를 저 낮은 곳으로, 변방으로 넘겨준 것.

최곤에 의해 마당에 멍석이 깔리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다방 여종업원 김양의 멘트는 이 영화가 보듬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처음에는 “차 마시고 달아놓은 돈 갚으라”는 멘트로 김양에 대한 우리네 선입견을 드러내더니, 잠시 후에는 김양의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드러내며 그런 우리의 선입견을 부수어버린다. 그 순간 김양은 우리의 이미지 속에 있던 다방레지가 아닌, 저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한 인간으로 부각된다.

최곤은 사랑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꽃집 청년을 위해 주민들에게 꽃을 그녀에게 배달해달라고 하고, 집나간 아비를 향해 울먹이는 한 소년을 대신해 최곤은 “당장 돌아오라”고 욕을 해댄다. 라디오 방송은 이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아무런 기획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사로까지 파고든다. 백수아저씨의 취직상담을 해주고, 하다 못해 화투를 치며 ‘막판 쌍피’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할머니들에게 ‘판정’을 해주기도 한다. 이들이 목소리를 내자 방송은 사람들의 주관심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그저 우연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최곤식의 저항이며, 이준익 감독이 담고자 한 변방의 목소리들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맹렬한 질타
그런데 그것은 무엇에 대한 저항일까. 여기에는 많은 은유와 해석이 가능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심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심의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일까. 최곤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음악에 대한 것이다. ‘제대로 음악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며, ‘음악은 이제 상품처럼 기획되어 팔린다’는 것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오며 사라진 음악과 기획사들의 대거출연은 우연이 아니다. 당장의 시류에 맞는 음악의 기획생산과 여기에 맞물린 비디오 시대의 도래는 음악인을 죽이고(Video kill the radio star), 상품으로 판매되는 음악인의 이미지들만 만들어냈다. 현 우리 가요계가 처한 문제들(음반시장의 위축, 가수들의 탤런트화)은 자본주의가 음악이라는 예술을 쥐게 되면서 생겨난 문제들이다(과거에는 예술을 하면 돈이 뒤따랐는데, 요즘은 돈을 벌려고 예술을 한다). 강석영PD(최정윤 분)가 술에 취해 “내가 왜 청취율에 목매는데... 당신들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야”라고 하는 말은 자본주의가 주는 공포(중심에서 밀려나면 끝이라는)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되자 본 상품은 사라지고 상품의 이미지, 즉 껍데기만 난무하는 세상이 열린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가요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현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 즉 생산의 주체와 소비의 주체 간의 괴리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이 영화는 이러한 괴리로 인해 늘 노동의 현장에 있으나 가난하게 살아가는 농민들, 도시빈민노동자들, 샐러리맨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만들어내는 노동은 본래 예술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여기에 돈의 논리가 개입되자 처절한 현실로 돌변한다. 그리고 이것은 최곤이 지금 시대에 소외된 이유이기도 하다. 돈을 벌어야 하는 시점에 예술 운운하며 가난하지만 고집스레 살아가는 것이 그의 죄다.

영화는 바로 그 점을 끄집어내 최곤과 박민수 사이에 기획사 사장을 끼워 넣는다. 돈의 논리로 무장한 기획사 사장은 박민수에게 “지금까지 매니저로서 해준 게 뭐가 있냐”며 떠날 것을 요구한다. 박민수가 “해준 게 없어 떠난다”며 돌아간 자리는 아내가 혼자 버텨내고 있는 노동의 현장(김밥장사)이다. 사람 인(人)자에 한 획이 떠나가니 나머지 한 획은 홀로 설 수가 없다. 사실 박민수는 그의 아내가 자신을 위해 그랬듯, 최곤의 현실을 대신 버텨준 인물이다. 최곤이 벌인 사건들을 해결하려 밖으로 뛰어다니고, 안으로는 최곤의 종이 되어 그의 자존심을 지켜준 박민수는 그저 매니저라는 직함보다는 형이 더 어울린다.

별은 혼자 빛나지 않는다
그래서 최곤은 가수로서의 재기를 얘기하는 기획사 사장에게 분노한다. 기획사 사장이 한 짓,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형에 대한 무례에 분개한다. 형과 동생의 관계를 하루아침에 돈의 관계로 전락시켜버린 기획사 사장의 논리에 분개한다. 자신을 마지막까지 버티게 해준 진정한 음악인이라는 자존심을 뭉개고 기획된 가수라는 상품으로 그를 짜 맞추려는 기획사 사장의 의도에 분개한다. “다시 가수하고 싶어질까봐” 선선히 무대에 서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음악에 대한 모독에 분개한다.

그는 ‘중심의 논리’에 구토를 느끼며 변방에 남기로 한다. 그리고 박민수를 향해 라디오 메시지를 날린다. “형이 그랬잖아. 별은 혼자 빛나는 게 아니라고. 얼른 와서 나 좀 빛내줘. 같이 반짝반짝 빛나 보자구.” 최곤은 이제 알게되었다.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을 빛나게 해준 것인지를. 저 변방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노동의 현장에서 삶을 버텨내고 있는, 자신의 옆에서 늘 자신을 지켜봐 주는 그들이 자신에게 빛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빛날 수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상황은 다시 역전되어 이제 최곤의 빛은 박민수에게 날아간다. 다시 돌아온 박민수에게, 숨기듯 고개를 돌리고는 감동에 겨워 미소를 날리는 최곤에게 강한 동감을 느낄 즈음, 우리네 가슴속에도 자신을 빛내주었던 많은 주변의 빛들이 별처럼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측은지심의 드라마, ‘내 사랑 못난이’

‘내 사랑 못난이’에서 신동주(박상민 분)는 잠깐동안의 인연을 맺고 헤어진(쫓아냈다는 말이 맞겠다) 진차연(김지영 분)이 자꾸 신경 쓰인다.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가는 그녀를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넌 평생 그렇게 남 뒷바라지나 하며 살거다”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그건 아직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신동주의 동생, 신동현(경준 분)은 레지던트다. 그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최은우(박다안 분)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녀의 병은 전부가 아니면 오히려 고통만을 겪을 뿐이라는 걸 잘 아는 신동현은, 그녀와 헤어지려 하지만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녀를 어쩌지 못한다.

사랑 없이 신동주와 결혼했다 이혼해 엔터테인먼트 사장으로 변신한 정승혜(왕빛나 분). 그녀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결국 이혼을 하게 만든 장본인인 진차연을 미워해야 할 것이지만 왠지 그녀에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도저히 되지도 않는 진차연을 가수로 만들려한다. 그녀는 진차연을 저 가난과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고픈 욕구를 어쩔 수 없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드라마
그들은 어찌 보면 전혀 관계가 없는(혹은 없어진) 이들에게 왜 그리도 신경을 쓰는 걸까. 물론 여기서 “신경이 쓰인다”는 말은 “관심 있다”, “사랑한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 요즘식으로 하면 쿨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인가. 물론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 사랑얘기임에 틀림없다. 잘 나가는 남자와 지지리 복도 없는 아줌마의 사랑, 로맨스, 환타지는 이 드라마의 주된 골격이다. 그것은 금요드라마의 전통과 잘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지 이 드라마가 갖는 힘을 사랑타령으로만 볼 수 있을까. 과거의 여타 금요드라마들처럼 자극적인 상황이나 불륜 코드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30대 이상 아줌마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젊은층까지 끌어 모으는 이 드라마 속에는 혹시 아줌마의 사랑,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는 건 아닐까. 그저 그런 사랑얘기일거야 하면서도 시청자들을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드는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연애드라마치고는 수상한 구조
이 드라마는 먼저 잘난 이들과 못난이들을 나누어놓는다. 잘난 이들의 대표주자가 신동주, 정승혜 같은 인물이고 못난이들의 대표주자가 진차연이다. 그들은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신동주와 진차연이 계약결혼을 하면서부터 이 전혀 다른 세상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둘 엮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신데렐라의 아줌마 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던 캐릭터들의 부딪침이다.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들 두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는 진차연으로 대표되는 ‘못난이들’의 현실은 각박하고 눈물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신동주, 정승혜처럼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유한 사회적으로 ‘잘난 이들’은 놀랍게도 가난한 ‘못난이들’의 행복에 끌린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성공의 꼭대기에 올라오면서 잃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대척점의 맨 앞을 신동주와 진차연이 차지하고 있다면 그 맨 뒤쪽은 진차연의 아들 두리와 신동주의 할머니, 조옥자(여운계 분)가 차지한다. 그 둘은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인물들이다. 어찌 보면 가장 약자로 보이는 이들은 그러나 드라마 상에서 주인공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진차연을 비롯한 ‘못난이들’은 두리를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때론 비굴하기도 하고 때론 굴욕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두리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한편 신동주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는 인물은 치매를 앓고 있는 조옥자다. 그는 결혼의 조건에서조차 상대가 조옥자를 위해 헌신할 인물인가를 먼저 살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조옥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진차연만을 찾는다는 것이다. “진가년이 뭐가 그리 좋냐”는 신동주의 물음에 조옥자는 말한다. “그년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고.

사람냄새 나는 드라마
이 할머니의 한 마디는 이 드라마의 구조를 빈부나 ‘잘난 이와 못난이’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놓는다. 신동주는 이제 알아차린다. 왜 자신이 자꾸 진차연이 신경 쓰이는지. 그것은 바로 그녀에게서 나는 사람냄새다. 그가 할머니에게 이끌리던 그 묘한 힘을 진차연에게서도 똑같이 느낀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단 진차연과 신동주간의 얘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동생 신동현와 최은우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신동현은 우리가 흔히 현실에서 보는 이성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전부가 될 수 있는가’하고 그는 의문을 갖는다. 반면 최은우는 물론 병으로 포장되어있지만,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전부의 사랑’을 하는 인물로 극단화되어 있다. 신동현은 이성이니 사랑이니 하는 허울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반면, 최은우는 온몸을 던져(해줄 수 있는 게 안보는 거라면 그거라도 해주겠다는 식의) 사랑을 해나간다. 병자이지만 우리에게 보다 인간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정승혜는 진차연과 그의 단짝 친구인 이호태를 만나면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한다. 그녀는 진차연에게 어떤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예의를 발견하는 한편, 이호태를 통해 자신의 삶이 허울뿐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인간적인 삶과 행복’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측은지심’의 드라마
작가는 아마도 양끝에 자리한 두 약자(두리와 조옥자)를 세워놓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들은 막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과 불쌍한 마음을 갖게 된다. 아픈 사람을 보며 자신도 아파하는 것,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 즉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을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경험한다.

물론 이 드라마는 사회적 양극화의 문제를 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쉽게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고는, 사랑이란 허울로 해결하려 한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하지만 드라마에서 그걸 다룬다면 시청률 제로에 도전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세상에 쓰러지지 않고 당당하게 맞장을 뜨는 진차연의 ‘인간적인 모습’이 소중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변화하고 있는 우리네 드라마들

최근 미국 시즌드라마들의 영향은 우리네 드라마에 양으로 음으로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젊은 시청자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즌드라마를 접하면서 ‘신파’와 ‘트렌디’로 일관하는 우리네 드라마를 ‘구리다’며 외면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종영한 ‘발칙한 여자들’은 아쉬움도 많이 남는 드라마였으나 그만큼 새로운 면모들과 가능성을 많이 보여준 드라마였다.

‘뒷바라지로 10여 년을 헌신했지만 헌신짝 버리듯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 전 남편에 대한 복수극’.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소재라면 끔찍한 공포, 처절한 복수극 아니면 최루성 신파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괴상한 드라마는 ‘깜찍 발랄한 코믹’에 ‘휴먼 드라마’적인 속성까지 갖춘 어떤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또한 우리의 선입관에 박혀있던 아줌마(생활력의 상징 혹은 가부장제의 희생자)의 이미지를 깨준 드라마이기도 했다.

신파 소재로 신파 깨기
‘발칙한 여자들’의 구도는 신파다. ‘뒷바라지 10년에 버려진 아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치과의사가 된 여자’, ‘그녀의 복수극’. 이것은 과거 드라마에서는 신파의 공식으로 등장하던 소재들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송미주의 10년 고통의 삶이 구체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고 얘기할 뿐이다.

드라마는 대신 10년 후 성공해서 돌아온 송미주에서부터 시작한다. 복수의 일념으로 성공했다지만 성공한 그녀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그녀가 아이를 키워내고 그녀의 목표였던 치과의사가 된 순간, 사실 그녀의 복수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공이 복수’라고 하지 않던가. 이러자 신파가 될 소재는 가벼운 날개를 달기 시작한다. 복수는 귀엽고 심지어는 너무나 가벼워 코믹시트콤 같은 느낌마저 준다.

아줌마로 아줌마 깨기
깜찍 발랄한 전개가 가능한 기본전제는 송미주라는 아줌마의 캐릭터 때문이다. 다 큰 아들을 둔 아줌마이지만 그녀에게서 우리가 과거 아줌마라면 선입견으로 갖고 있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의 일을 갖고 있고 사랑에 있어서도 당당하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했고 이혼까지 했다는 사실은 과거의 아줌마들의 이미지에서는 부정적인 면이 더 부각되었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것들은 ‘풍부한 인생경험’이 된다.

루키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 이러한 자신의 장점들을 발산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 아줌마들의 환타지를 자극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과거의 아줌마 이미지를 깨주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현대여성들은 자신의 일과 삶에 있어서 결혼을 했거나 미혼이거나에 상관없이 자신을 스스럼없이 펼쳐 보인다.

시즌드라마로서의 가능성
이러한 소재와 캐릭터의 참신성은 우리 식의 시즌드라마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 미국 시즌드라마들은 우리네 드라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케이블 채널들에 의해 소개된 미국 시즌드라마들은 이제 ‘미드족(미국드라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시즌드라마들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드라마의 맛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우리네 트렌디 드라마들의 퇴조와도 연관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완성도 높은 드라마에 길들여지면, ‘한류’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그 언저리에서 과거의 영광만을 논하는 우리의 트렌디 드라마는 ‘너무 뻔하고 재미없다’는 것이다. ‘발칙한 여자들’의 시즌드라마로서의 가능성은 바로 그런 트렌디 드라마의 뻔하고 재미없는 설정을 깬 그 지점에 있다.

그래도 남는 아쉬운 점들
하지만 이 드라마에도 역시 아쉬운 점들이 많다. 그것은 고상미, 양다림, 양지환, 백억년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포진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그 중심 축이 송미주와 그 주변인물들에 집중되었던 점이다. 이것은 (한 명의 주인공으로 집중되는) 과거 드라마 구도의 힘이 여전히 지금에도 미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또한 여성들의 캐릭터에 비해 남성 캐릭터들이 너무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는 점도 옥에 티다. 이 드라마의 남성상은 기혼자와 미혼자가 나누어진다. 어릴수록 더 성숙된 인물로 그려져 심지어는 준이가 가장 사려 깊고 이해심 많은(그는 결국 모두를 용서한다) 인물처럼 보인다. 또한 마지막에 가서 ‘남편의 참회’와 ‘그것에 대한 미주의 용서’라는 해피엔딩의 선택 역시 과거의 구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다.

이것은 모두 매회의 에피소드가 하나씩 끝나면서도 계속 연결성을 갖는 시즌 드라마와 ‘다음 회에 계속’으로 이어지는 우리 식의 드라마 구도 사이에 이 드라마가 서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좀 실험적일 수 있지만 애초부터 시즌드라마 형식을 취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여전히 참신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제 막 변화하고 있는 우리네 드라마들의 신호탄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네 드라마들은 이제 좀더 참신하고 좀더 새로우며 좀더 파격적인 그 어떤 것을 요구한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 시대의 요구

요즘 고현정의 변신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쌍소리는 물론이고 망가지는 연기에서부터 거친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내는 새로운 면모들까지 고현정은 싹 달라졌다. 과거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우아하고, 청순했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고현정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깨려고 작정한 듯 하다.

‘봄날’ 이후 1년여의 장고 끝에 선택한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역시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고현정의 변신이다. 영화 속에서 고현정은 그간의 공백기간을 단 몇 마디의 꾸미지 않은 말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채워버렸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답변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마저 느껴졌다. 기자시사회에서 그녀의 변신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런 건 일상용어 아니냐”고 되받아 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은 ‘해변의 여인’이 주는 영화적 재미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일조했다. 홍상수 감독은 본인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상투적인 이미지에 대한 전복’을 고현정이라는 연기자가 가진 이미지의 파괴를 통해서도 보여주었다.

‘해변의 여인’의 이미지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여우야 뭐하니’로 다시 맨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 속의 털털하고 화장기 없는 고현정이 이제는 TV로 들어온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의 고현정은 ‘해변의 여인’과 마찬가지의 파격을 보여주었다(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았던 시청자라면 그 느낌은 배가 됐을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연속적인 행보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해변의 여인’에서 작품에 딱 맞는 연기자가 고현정이라는 인물이었듯이, 고현정에게도 ‘해변의 여인’은 자신의 이미지 변신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 분명하다.

지금 고현정이 하고 있는 작업은 귀족적이고 우아하며 청순한 과거의 이미지에서 보다 서민적인 이미지로의 귀환이다. 그것은 고현정 개인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10년 전 정상의 자리에서 은퇴하고, 재벌가 며느리로의 변신한 그녀는 언론과의 끊임없는 숨바꼭질 끝에 결국 이혼하고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 10년 간 연기자가 아닌 고현정 개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서민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의 그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녀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녀를 보는 대중들의 막연한 상상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연기라는 친정으로 귀환하면서 먼저 이러한 자신의 이미지부터 부수기로 작정한 듯 하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 즉 청순하고 우아한 이미지의 파괴는 극중 캐릭터의 진정성이 잘 살아있는 작품 하에서만 가능하다. 다행히도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공감이 가는 작품 속 이야기에서 우리는 고현정의 파격을 ‘리얼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내 이름은 김삼순’이란 드라마에서 파티쉐라는 익숙하지 않은 직업을 리얼하게 드러냈듯이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곳곳에 이런 리얼함이 엿보인다(잡지사, 산부인과 등등). ‘성담론’이라는 자칫 오해될 소지가 많은 소재가 오히려 당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리얼함에서 오는 진정성’이 확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고현정이 거침없이 얘기하는 속내는 마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를 보는 듯 하다. 성 칼럼니스트로서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당당하고 적극적이면서도 귀엽고 발랄한 현대미국여성들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잘 소화해냈듯이, 고현정이 연기하는 고병희는 우리 식의 적극적인 여성상을 통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스타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던 스타는 이제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시청자와 수평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비호감 연예인들의 인기’와 ‘연예인 생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바로 스타와 시청자간의 새로운 관계를 말해주는 징후들이다. 이것은 ‘솔직함’ 혹은 ‘털털함’에 대한 시청자들의 요구와 연예인 스스로의 ‘자신감’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시청자들은 더 이상 연예인에게 ‘인형 같은 카리스마 혹은 신비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바로 내 주변에서 살아있으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현정의 서민으로의 귀환은 당연하고도 잘 된 선택임에 분명하다. 그녀는 한없이 망가질 것이나 여전히 귀엽고 바로 내 옆집에 사는 여자 같으면서도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