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여자들>에 나타난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구질구질한 관계도 궁상맞은 눈물도 안녕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자 이제 ‘여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간에 잘 보이지 않던 새로운 아줌마들의 등장이다. 이름하여 ‘발칙한 여자들’이다.

드라마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신을 거듭했다. 1970년대에는 말 잘 듣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가 대부분이었다. 요즘 같은 시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며느리는 심지어 다른 남자와 바람났다고 모함 받기까지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없을 정도다(1972년 드라마 ‘여로’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강인하고 착하게 보이긴 했지만 남성 권위주의 사회 속에서 책임과 의무에만 절어있는 그들에게서 ‘발칙한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여자들은 이제 신데렐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물론 아줌마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트렌디 드라마들이 등장하면서 보다 환타지를 자극하는 젊은 미혼의 여자들이 브라운관을 가득 메웠다. 상대적으로 아줌마들의 문제가 소외되고 있을 때, 등장한 MBC의 ‘아줌마’라는 드라마는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기존 아줌마 상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권위주의적인 남편과 당당히 이혼하는 원미경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충격을 넘어서 박수를 쳐주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태동을 알리는 현상이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미주(유호정 분)는 지금까지의 드라마 속 여자들의 삶을 단번에 뛰어넘는다. 조강지처였던(1단계) 미주는 정석에게 버림받으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치과의사가 된다(2단계). 그리고 그녀는 귀국해 전 남편 정석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젊은 남자 루키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3단계). 이 3단계의 변신을 보면 그녀가 저 조강지처의 70년대를 넘어서 전문직 종사자가 되고, 나중에는 아줌마지만 젊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어엿한 여자가 되는 그 변신의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드라마 속 여성상의 변화는 그 반대 역인 악역을 들여다보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과거의 드라마들에서 주인공 여성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자는 남성일까, 여성일까. 언뜻 가부장적인 사회가 그네들을 핍박했다는 생각에 남성을 떠올리겠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었다. 70년대 착한 며느리의 대척점에는 악한 시어머니가 있었고, 90년대 이후의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성의 대척점에는 일과 사랑 둘 다를 쟁취해야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커리어 우먼들이 있었다. 이렇게 억압의 주체는 드라마 상에서 정면으로 주인공과 부딪치지 않고 오히려 여성을 내세워 대리전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직격탄을 날린 게 1999년 방영된 ‘아줌마’다. 그리고 ‘발칙한 여자들’의 대척점에 선 이들은 물어볼 것도 없이 상처를 준 남성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가정에서는 부부만 있을 뿐, 모실 부모들은 없으며, 직장에서는 각각 인정받는 전문직 종사자만 있을 뿐 라이벌 관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발칙한 여자의 복수극이 유혈이 낭자하지도 않고, 눈물이 철철 넘치지도 않는 귀여운 장난 같다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이전의 드라마 속 여자들처럼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실 처절하고 질척질척한 복수극의 이면에는 아직도 남은 미련과 집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이 발칙한 여자는 복수조차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이로써 ‘아줌마의 사랑 =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등식은 깨지고 당당한 ‘중년여성의 사랑’이 등장하게 된다.

경제력이 있고, 자신감이 넘치며,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의 사랑과 삶은 여유가 있다. 아마도 ‘발칙한 여자들’이 보여주는 여성상은 과거 결혼 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결혼 후의 여성에서, 이제는 결혼 후에도 당당하게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요즘의 여성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희화화된 남성과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아줌마들의 환타지를 자극하는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 역시 어찌 보면 그간 불륜과 신파의 대상으로서 핍박받아온 아줌마상을 염두에 둘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앞으로 드라마 속에서 꿈꿀 세상들이 궁금해진다.

<천하장사 마돈나>와 소수자의 문제

천하장사와 마돈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할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이미지는 그러나 오동구라는 한 뚱보 소년 속으로 들어온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우리가 근거 없이 가졌던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천하장사와 마돈나, 남성성과 여성성, 소년과 기성세대, 꿈과 현실, 소수자와 다수자 등등. 전혀 한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대결구도를 보여 전혀 결합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편견에 의한 것이라는 걸 꼬집는다.

마돈나와 동구 사이
영화는 어린 동구의 허밍으로 시작된다. 도대체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그 노래는 마돈나의 ‘like a virg다. 그의 귀에는 헤드셋이 끼워져 있다. 그가 듣는 마돈나의 노래와 자신이 따라 부르는 ‘like a virgin’ 사이에는 이만큼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마돈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꿈을 꾸는 동구의 작은 방 한 켠으로 화려한 조명이 환상처럼 돌아간다. 동구는 꿈을 계속 꾸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데 동구는 마돈나가 되기에는 너무 뚱보다. 살이 쪄 가슴이 나왔다는 것과 젖꽃판이 크다는 것 외에 동구가 마돈나와 닮은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가 된다고 해도 어울리지 않을 몸을 갖고 있다. 게다가 동구는 마돈나처럼 가녀린 여자가 아니다. 인천항 하역장에서 남들은 두 개씩만 올려도 힘겨워하는 짐을 다섯 개씩 올려도 끄덕하지 않는 괴력의 소유자다. 이렇게 우리가 가진 마돈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동구를 앞에 세워놓고 의아해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하고 반문하는 것만 같다.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동구의 힘을 앞세워 그의 마돈나가 되고픈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오동구는 여자가 되기 위한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금이 걸린 씨름대회에 나가게된다. 도무지 그의 꿈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괴력(남성성) 또한 그의 꿈을 위해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오동구의 마돈나가 되려는 노력을 보면서 그 거리만큼 그의 강렬한 욕구를 읽게된다. 그런데 그것은 막상 동구에게는 그다지 거창한 꿈이 아니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며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단짝친구 종만에게 동구는 말한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라고.

동구와 아버지 사이
그랬다. 동구에게 여자가 되는 것은 욕망이 아닌 생존이었다. 이야기가 존재의 문제로 확장되자 주변인물들이 여기에 호응하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 초반부 거대한 포크레인의 등장과 그 앞에 선 동구는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측면을 말해준다. 동구의 아버지는 동구에게는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현실과 같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포크레인이며,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면서” 싸워야 버텨낼 수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현실 역시 동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아버지가 동구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사실 꿈을 포기하고 뛰어든 저 노동현장에서부터 가져온 것이다. 편안한 가족의 품을 제공해줘야 할 집은 아버지가 밖에서 가져온 현실로 동구를 압박한다. 아버지의 훈계와 폭력은 사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동구가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아버지는 권투의 꿈이 꺾이는 순간부터 더러운 현실과 마주한다. 주먹은 꿈을 위해 링 안에서 휘둘렀을 때에만 그 가치를 발휘한다. 현실은 주먹이 아닌 때론 교활하고 때론 비겁한 처세를 요구한다.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의 주먹은 애꿎은 동구에게까지 향한다.
하지만 동구는 포기(그것은 생존이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편안한 현실보다 힘겨운 꿈을 선택한다. 여장을 하고 아버지 앞에 선 동구에게 아버지는 현실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주먹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동구는 결정적인 순간, 아버지를 들어 날려버린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는 모래판 위에 남을 수 있었고, 따라서 그의 괴력은 꿈을 위해 건강하게 사용된다.

동구와 아버지의 이야기에는 ‘아버지를 넘어선다’는 전통적인 통과의례적 의미도 담고 있다. 아버지가 가진 권위에 맞섬으로서 동구는 저 스스로 성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앞에는 아버지가 싸워왔던 현실이 놓여지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라”는 정도밖에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이 지점이 꿈과 현실에 대해 아무런 소통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와 동구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동구와 씨름부 사이
아버지도, 사랑하는 일어선생님도,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단짝친구 종만조차 동민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철저히 소수자로서 혼자 살아가야 될 삶을 감지한다. 하지만 동구가 꿈을 이루기 위해 씨름부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씨름부원들과 감독을 만난 동구는 거기서 일종의 ‘소수자의 연대’를 느낀다. 말만 번지르르 하고 씨름은 뒷전에다 오히려 동구에게 춤을 배우려는 친구, 겨드랑이가 너무 민감해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쓰러지는 친구는 물론이고, 설명은 없어도 출세와는 비껴있는 감독, 손이 터져라 연습해도 늘 지는 주장까지 모두 ‘다수자의 지지’에서 비껴난 소외된 인물들이다.

씨름부라는 남성적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구가 쉽게 그들과 어우러지는 것은 그들이 이 같은 소수자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덩치 큰 동구가 회식자리에서 날렵하게 춤을 추며 렉시의 ‘애송이’를 부를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특히 덩치 트리오 중 문세윤이 연기한 덩치는 동구와 같은 여성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동구를 통해 자신의 감성을 하나하나 발견해나가는 듯 하다. 춤을 배우고 ‘요즘 내가 너 때문에 헷갈린다’고 할 정도로. 이 무거운 주제의 영화가 전체적으로 밝고 시종일관 웃음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 소수자들의 유쾌한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만큼 먼 거리를 한 몸에 안은
영화가 말하려는 남성성과 여성성, 현실과 꿈, 소수자와 다수자의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그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인천이라는 공간성에도 나타난다. 동구가 하역작업을 하는 노동의 현장인 땅과, 그 위로 어디론가 날아가는 비행기가 떠있는 하늘, 그리고 동구가 소주를 마시는 차이나타운의 계단과 저 멀리 보이는,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배들 사이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동구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하나로 쓸어 담는다(이것은 류덕환이라는 놀라운 연기자에 의해 가능해졌다).

그리고 영화 끝에 우리는 무대 위에서 ‘like a virgin’을 부르는 동구를 만나게 된다. 이제 동구는 어린 시절 그 때처럼 혼자가 아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에는 씨름부원들도 있고 어머니도 있다. 영화는 여성이 되려는 동구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그 영역을 아버지가 맞닥뜨린 현실로 그리고 소수자들이 서 있는 현실로 확장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성적 소수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 일상으로 파고든다. 남성성과 여성성, 소수자와 다수자 같은 양자의 대결구도는 무장해제 된다. 그리고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들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ohmynews.co.kr)

비뚤어진 시각으로 각설탕 보기

‘각설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달리는 천둥이일까, 아니면 그 말 위에 있는 시은이일까. 반려동물영화라면 당연히 그 포커스는 천둥이와 시은 양쪽에  맞춰졌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된 드라마 흐름은 그 포커스를 시은쪽에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빚어지는 결과는 참혹하다. ‘동물과 인간의 우정’은 퇴색되고 ‘우정을 빙자한 동물 학대’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되자 이 영화는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회극처럼 보여진다. 눈물을 나오지 않고 대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리고 달콤한 이미지의 ‘각설탕’이라는 제목은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영화적 맥락 속에서 그 제목은 ‘주는 주인’과 ‘받아먹는 동물’의 주종관계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포커스를 받지 못한 천둥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천둥이는 자신의 부모, 장군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면서부터 인간들의 굴레 속에 평생을 견뎌내야 할 운명을 부여받는다. 자신이 태어나는 날, 부모를 저 세상으로 보낸 천둥이는 단지 일어서지 못한다는, 그래서 달릴 수 없을 거라는 기능적인 이유(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읽자면 노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를 따라갈 위기에 처한다(달리지 못하면 말이 아니라는 사고는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인가!). 그런데 천둥이를 구해내 달리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시은이다. 하지만 살았다 해도 앞으로 인간들의 굴레 속에 살아갈 천둥이의 운명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천둥이는 주인에게 버림받고 나이트클럽에서 학대받는다. 그런 천둥이를 다시 만난 시은은 이제 자신이 받는 억압을 천둥이를 통해 풀어내려 한다. 천둥이를 인간의 욕망이 꿈틀대는 경마장, 그 인간들의 순위 경쟁 속에 내세우는 것이다. 천둥이는 경마장에서 달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저 인간 없는 초원 위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천둥이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영화에서 어떤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이 저 천둥이와 비슷하다는 사회적 맥락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알아주지 않고 나이트클럽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천둥이의 모습은 우리네 샐러리맨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경마장이라는 서기 싫었던 생존경쟁의 장에서(그것도 내가 아닌 저들의 머니게임을 위해)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다. 천둥이의 죽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어떻게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가 하는 얘기를 닮아있다. 그렇다면 누가 천둥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시은에게 포커스를 더 주고 있는 이 영화 속에는 그 악역이 명백하다. 시은과 윤 조교사의 대척점에 있는 철이와 김 조교사가 그들이다. 그들은 과도한 경쟁에 경도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악역만으로 보면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경쟁사회에서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채찍이 아닌 각설탕으로 살아가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런 이야기들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채찍이든 각설탕이든 그것은 게임의 룰을 쥐고 있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다루는 방법의 문제일 뿐, 근본적인 지배-피지배 구조에 대한 논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단순화된 채찍보다 은근히 본질을 숨기는 각설탕이 더 무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달콤한 중독으로 사로잡는 현대적 의미의 또 다른 채찍이 되기 때문이다. 천둥이는 왜 마지막 순간에 수술을 받고 더 오래 사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 부분은 모호하다. 수술을 받지 않으려는 천둥이의 의지가 무엇 때문이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그렇게 해석된다. 그 자의적 해석은 천둥이의 비극을 가져온다.

영화가 진정으로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다루고 있었다면 마지막 순간 순위 경쟁으로 다시 내몰아 1등으로 골인점을 통과하고는 죽는 천둥이와 그 앞에서 오열하는 시은을 그리기보다는, 이 경쟁사회의 경마장에서 탈출하는 천둥이와 시은의 모습이 그려졌어야 옳다. 천둥이의 죽음은 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네 비극적인 운명과 닮았다는 맥락에서 슬프지만, 천둥이의 죽음 앞에 눈물짓는 시은의 모습에서 전혀 슬픔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 속 이미지의 문제


해변이 주는 이미지는 발랄하다. 그래서일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이란 제목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강요한다. 여름, 바닷가,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등등.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단 몇 분만 지나면 알게될 것이다.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들은 사실 우리들의 해변에 대한 잡다한 기억들이 만든 편견이라는 것을. 홍상수 감독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흔히 극장 안은 환상의 세계고 극장 밖이 현실의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홍상수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를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배반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아직까지 황사가 날리는 봄이다. 바닷가? ‘서해 최고의 해변 신두리’. 말 그대로 정말 멋진 곳이지만 우리가 이미지적으로 해변이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그런 해변은 아니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는 백사장에서 보이는 바다가 나오지 않는다. 물 빠진 뻘 위를 걷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랑과 낭만과 로맨스의 연인들? 영화감독 중래(김승우 분), 영화음악작곡가 문숙(고현정 분), 영화세트미술가 창욱(김태우 분), 그리고 이혼을 결심한 유부녀 선희(송선미 분) 이들의 하룻밤은 전혀 낭만적인 냄새가 없다. 그런데 이건 왠일일까. 이 일상적인 이미지에 전혀 부응하지 않는 영화가 시종일관 관객들을 웃기는 것은.

홍상수 감독은 아무래도 영화 속에서 철저히 관객들을 배반하고 싶었나 보다.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것은 창욱의 애인으로 온 문숙이 바닷가에 도착해 “우리 애인 아니예요”라고 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아니 어쩌면 바닷가가 비추는 을씨년스런 풍경들 속에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거슬러올라가 그것은 어쩌면 고현정이라는 배우가 캐스팅 되었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아마도 고현정의 새로운 면모에 놀랄 것이다. 그것은 예견된 것이고 다분히 의도적이다. 우리가 가진 고현정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는 영화가 말하려는 일상적 이미지의 허구성을 드러내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고현정은 마치 “연기하지 말라”는 감독의 지시를 들은 연기자처럼 연기한다. 고현정이 쌍소리를 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관객들은 일종의 ‘즐거운 배반’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을 웃기는 개그 코드와 맞닿아 있다. 마치 노을지는 바닷가 앞에서 뭔가 사랑얘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의 연인이, 실상은 온통 살이 그을려 서로의 살을 건드리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줄 때 나오는 웃음과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말 웃긴다.

그런데 웃으면서 자꾸 뒷덜미를 당기는 것이 있다. 머리 속에 그려진 일상적인 이미지가 자꾸 깨지고 현실의 뒤틀린 모습을 자꾸 보면서 삶이 비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래가 자신이 과거의 ‘나쁜 이미지들’(실상은 아내가 바람핀 것)과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일일이 도형까지 그려가며 ‘나쁜 이미지’들이 어떻게 우리를 교란시키는가를 진지하게 설명하는 중래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이중성을 보게 된다. 그의 설명은 아이디어로 넘치고 재미있는 해석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변명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 그 간극 사이에서 관객들의 웃음은 터진다. 그런데 그 웃음의 뒷맛이 쓴 것은 그 모습에서 언뜻 관객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냉소적으로 흐르지 않는 것은 감독이 그런 일상에 던지는 진지한 시선 때문이다. “무슨 영화를 구상하고 있냐”는 창욱의 질문에 중래는 자신이 구상하는 대충의 영화 스토리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그 내용은 ‘다른 장소에서 똑같은 음악이 세 번 반복되자 그것을 기적으로 여긴 주인공이 몇 십 년에 걸쳐 그 기적의 비밀을 캔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영화는 중래의 말처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중첩된다. 같은 술집과 펜션, 밤늦게 물 빠진 해변에서 만나는 남녀, 잠자리, 개를 데리고 해변을 걷는 남녀 등등. 그걸 통해서 영화는 마치 중래가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일상적인 이미지로 뭉뚱그려 보던 것들을 하나하나 재발견하게 된다. 상황은 반복이지만 그 속의 내용들은 조금씩 다 다른 구체성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를 통해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가진 이미지마저 깨뜨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영화를 어렵게 느껴왔던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실컷 웃어도 좋다. 그렇게 웃다보면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뇌를 장악하고 있는 일상의 이미지들이 너무나 굳건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될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즐겁고 재미있는 대중성을 확보한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건넨다.
박찬욱, 봉준호 같은 자기 세계가 투철한 작가들이 동시에 대중성을 획득하는 줄타기에 성공한 것처럼,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역시 자신의 세계와 대중성이라는 양끝의 균형자를 들고 줄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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