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45>와 이데올로기

‘서울 1945’는 현재 이데올로기와 전쟁 중이다.
가까운 근대사를 드라마화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많은 논쟁거리를 낳는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삼성, 현대가를 다룬 ‘영웅시대’의 조기종영이 그랬다. 이것은 그 때의 역사가 지금 현재까지 바로 영향을 끼치는 근거리에 있어 외압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시대’의 극본을 쓴 이환경씨가 다시는 근대사를 드라마로 쓰지 않겠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어려움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서울 1945’의 경우에도 상황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일제시대의 이야기에서는 잠잠하던 것이 해방 후부터는 시끄러워졌다. 이른바 친일파에 대한 문제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 등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이 논쟁에서 우리는 다시 해묵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좌파적 시각’의 드라마라는 보수언론들의 논평은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여기에 지방선거의 완승,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일본의 군사대국화 등등 최근의 국제정세는 우익적인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대중문화에도 그 바람은 불어닥쳤다. ‘주몽’과 ‘연개소문’에 이어 가을께에 방영될 ‘대조영’, ‘태왕사신기’까지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준비되고 있고, 강우석 감독의 영화, ‘한반도’는 노골적인 반일감정과 민족주의적 시각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민족주의 바람에 힘입어서일까. ‘서울 1945’에 대한 좌우논란은 시대착오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듯 하다.

“이 드라마는 이념드라마가 아니다”라고 수 차례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드라마를 한쪽 이념의 호도로 몰아가는 것은 ‘드라마가 가진 이념적 색채의 위험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다시 구태의연한 좌우논쟁으로 회귀함으로써 얻어지는 특정 집단이나 정파의 이득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최근 ‘서울 1945’를 보면 그것은 명확해진다. 드라마의 논조는 좌익도 우익도 아닌 ‘인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이게 그 잘난 혁명이었나요. 정녕 이런 것이었다면 나는 반대합니다’라는 투의 대사들이다. 이념의 갈등으로 인해 바로 옆에 있던 이웃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하고, 이제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노역을 져야 하는 비인간적 처사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여기서 죽음으로 몰아넣어지는 인물들은 과거 행적에서 친일파였거나 그만한 죄를 지었던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처사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김해경의 어머니로 나오는 고두심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준다. 동우의 아버지 이인평이 인민재판에 서는 장면에서 고두심은 ‘사람 사는 세상’을 외치며 부처 앞에 기도를 한다. 아무리 잘못을 했지만 이인평이 서는 인민재판에 나가는 것을 사람들은 꺼린다. 그것이 휴머니즘에 반하는 행동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해경 역시 자신이 사랑했던 최운혁에게 ‘이런 혁명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앙상한 이념이 만들어낸 갈등에 대한 휴머니즘적 비판이다.

이러한 대사와 시각을 가진 인물이 고두심이나 김해경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가장 적절해 보인다. 이성적 선택을 강요하는 환경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고, 다음은 연인에 대한 사랑이다. 같은 자식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이 서로를 죽일 수는 없는 것이라는 사고가 고두심이라는 상징적 어머니의 비판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김해경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을 모두 이해하고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념이 아닌 사랑이라는 시각으로 상황을 보기 때문이다. 반면 드라마에서 점점 악역으로 변하고 있는 최운혁의 친구, 오철형이나 김해경의 동생 김연경은 이념에 점점 눈이 멀어 가는 사람들이다. 드라마는 ‘이념 VS 사랑’의 대결구도를 보인다.

‘서울 1945’가 드라마 상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 이데올로기는 사실 구시대적 유물이다. 1990년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는 탈냉전, 탈이념 시대의 도래를 말해준다. 따라서 이러한 이념 논쟁은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1945’가 이제는 구시대의 산물인 이데올로기 자체(좌든 우든)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거꾸로 지금의 사회가 아직도 이 구태의연한 논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는 여전히 보혁 갈등과 좌우 갈등이 남아있다. 같은 집안에서도 어르신들의 입장이 틀리고 자식들의 입장이 틀리다. 어르신들은 좌파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 정도이고, 자식들은 그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울 1945’가 이 시대적 아픔에 대해 내놓는 대안은 이념이 달라도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그 어르신과 자식간에 남은 사랑이다. 약간 단선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갈등의 골이 그만큼 깊다는 반증이다.

<주몽>과 탈역사

월드컵의 집중포화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주몽’이다. 월드컵으로 인해 결방되는 ‘주몽’을 틀어달라는 시청자들의 요청은 그 인기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난 현재, 주몽의 시청률은 마의 고지, 40%를 넘는다.

‘주몽’과 함께 뜬 단어는 바로 ‘퓨전 사극’이다.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지만 극중의 대부분 인물과 설정은 작가의 상상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주몽’은 시작과 함께 역사왜곡의 논란에 휘말려야 했다. ‘주몽’의 인기와 더불어 불거져 나온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은 마치 드라마 ‘주몽’이 민족주의를 표방한 작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드라마 초반부에 ‘주몽’에 댔던 역사적인 잣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드라마가 시작되기 이전, 홍보 마케팅의 일환으로서 주몽은 그 역사성이 강조되었다. 아직 드라마화 되지 않았으니 우리의 뇌리 속에 있는 주몽을 환기시키는 방법은 그것뿐이기도 했다. 따라서 역사적인 영웅으로서 재생산된 ‘주몽’이 역사왜곡의 소용돌이를 빗겨가긴 힘들었을 것이다. 뚜껑을 열고 보니 역시 그랬다. 아무리 퓨전이고 해석된 사극이라 해도, 역사적 해석에 있어서 무리한 설정들이 눈에 띄었다. 사료가 없고 남은 사료도 사대주의적 사관에 의해 쓰여진 것이거나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고대사’라는 점은 문제를 더 미묘하게 만들었다.

절대적인 호응이 있었지만 동시에 비판과 우려가 잇따랐다. 그 우려는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에 ‘퓨전’이라는 날개까지 달았으니 우리의 민족적 자부심인 주몽은 이제 저 무협지와 환타지 속에 등장하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가진 영웅이 될 거라는 데 있었다. 역사는 드라마라는 장치로 인해 보호되고, 역사왜곡은 그것을 통한 민족적 영웅 만들기라는 장치로 막아질 것이었다. 그런 드라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은 있으나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퇴행적 결과를 예고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우려가 맞았을까.

우려와는 반대로 드라마가 중반으로 치달으면서 그런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몽은 타고난 영웅이라기보다는 보통사람에서 차츰차츰 커나가는 영웅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영웅주의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역사왜곡 논란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은 ‘주몽’의 재미가 애초부터 역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퓨전 사극’이 갖는 환타지의 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우려는 사실 ‘주몽’이라는 드라마의 제목에서 비롯된 것이지 그 자체는 아니었다. ‘주몽’은 갑갑한 현실 속에서 마치 무협지나 환타지 소설을 읽는 듯한 모험과 사랑 이야기로 일관했다. 드라마 ‘주몽’은 아이러니하게도 주몽이라는 역사적 영웅에 빠져들지 않았다.

드라마 속에서 주몽은 민족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역경을 딛고 왕이 되는 전형적인 모험담 속의 영웅이다. 그것은 역사극이라기보다는 무협지나 환타지에 보다 가깝다. 이것은 그의 적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드라마는 주몽에게 한나라를 적으로 상정하고 그들을 물리치는 대업을 이루라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그 한나라라는 적은 추상적이다. 가끔 현토군 태수 양정이 나타나 한나라 황제의 말을 전할뿐이다. 물론 그것은 드라마의 흐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여전히 주몽이 실제로 처한 적은 한나라가 아닌 부여에 있다. 대소나 영포, 여미울이나 부득불, 도치 같은 인물들이 주몽의 적인 것이다. 주몽이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이들과 주몽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인물들간의 대결구도가 현재까지 이 드라마의 실제적인 재미이자 시청률 40%의 이유이다.

이러한 대결구도에서 주몽이 하는 역할은 과거 ‘대장금’이나 ‘상도’의 임상옥을 닮았다. 자신의 적과 경쟁하기보다는 자신 스스로의 힘을 키워가는 것이다. 자신의 역량 키우기 이외의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하지 않은 대장금 혹은 임상옥처럼, 주몽도 당장 눈앞에 필요한 소금에 연연하지 않고 궁극적인 해결책을 얻기 위해 고산국으로 떠난다. 사실 주몽은 그들과 직접 대결하지 않는다. 대신 문제를 만드는 것은 대소 같은 적들이며 그들은 얼핏 당장의 우세에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국 실력 우위인 주몽에게 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적이 만들어 놓은 역경과 그 역경이 오히려 주인공에게는 기회가 되는 상황은 이미 ‘대장금’과 ‘상도’에서 익히 보았던 상황들이다.

최근 ‘주몽’의 기록적인 시청률은 이제 이 드라마가 굳이 그 이름이 ‘주몽’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재미있어지는 지점까지 왔다는 걸 보여준다. 주몽은 이렇게 역사라는 두꺼운 옷을 벗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졌다. 사극, 그것도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지만 그 드라마 속에는 현재가 고스란히 녹아난다. 한나라에서 부여를 옥죄는 ‘소금’이라는 무기는 작금의 국제정세 속에서의 ‘석유’로도 읽히고, 현토군 태수의 징병 제안에 대한 금와왕의 거부,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경제제재는 이라크전 징병 문제를 떠올리게도 만든다. 심지어는 TV 사극에서 좀체 보이지 않던 동성애 코드까지 읽힌다.

현재의 문제를 가상의 시대와 공간(여기는 고대사라고 하지만 퓨전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주몽의 세계는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인 것은 분명하다)에 집어넣어 자유롭게 엮고 푸는 재미는 아마도 퓨전 사극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그것은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며 실제로 이 드라마는 그 길을 걷고 있다. 역사왜곡 문제에 있어서도 ‘퓨전 사극’이 ‘정통 사극’에 비해 더 논란이 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 많이 더해짐으로 인해서 ‘퓨전 사극’은 오히려 역사라는 틀 밖으로의 탈출이 용이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모두들 ‘이건 주몽이라는 소재를 다루지만 그래도 드라마일 뿐이야’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정통 사극’이라는 꼬리표는 그 역사적인 근거에 보다 치중해야된다는 점에서 ‘퓨전 사극’보다 불리하다. 드라마 작가가 역사가는 아니며 드라마가 또한 역사 그 자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몽’과 경쟁하는 새로운 대하사극 ‘연개소문’. 정통사극을 주창하고 나온 이 사극이 불리한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일 그 불리함을 이겨내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운다면 그것 역시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역사해석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사극이 하는 말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말이다. 이 말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보다는 드라마적인 요소에서 승부를 내야한다. 드라마 외적인 것의 도움을 구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드라마라는 틀로 숨어버리는 이율배반은 없어야 할 것이다.

월드컵이 우리에게 남긴 것

월드컵이 끝났다. 16강 진출은 좌절됐지만 어웨이 경기에서 첫 승리를 거둔 토고전과 프랑스와 무승부는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그 주역은 두말 할 것 없이 아드보카트 감독을 위시한 태극전사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 명승부에는 또 하나의 주역을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로 월드컵 관련 방송들이다. 애매한 판정까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방송기술, 방송사마다 다른 해설의 묘미, 뉴스가 밀려날 정도로 구성된 월드컵 뉴스, 다채로운 경기분석과 예상을 해준 월드컵 리뷰 방송, 심지어 월드컵과 함께 한 오락 프로그램까지 월드컵을 풍성하게 만든 주역들이었다. 그리고 그 월드컵 관련 방송들의 치열한 경합 속에 방송사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두 마리 토끼의 이름은 공영성과 재미이다.

축구중계방송에도 이변은 없었다
이번 월드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변이 없었다. 전통적인 강호들이 16강, 8강, 4강으로 좁혀들었고 갈수록 유럽국들 간의 제전이 되었다. 그건 축구중계방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으로 축구중계에 강한 MBC가 현저한 차이로 시청률 수위를 달렸기 때문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차범근 감독이 이끈 태극전사들이 도쿄에서 일본을 상대로 짜릿한 2-1 역전승을 했던, 이른바 ‘도쿄대첩’은 또한 MBC 축구중계의 새장을 만들었다. 신문선-송재익의 입담은 순식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2002년 신문선-송재익 콤비는 시청률의 반전을 노리던 SBS로 스카우트되었다. 그런데 SBS의 노력은 MBC에서 새롭게 등장한 차범근 해설위원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 이른바 ‘영양제 논란’으로 불거진 해설의 신뢰도 문제는 MBC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4년 후, 히딩크 감독에 황선홍 해설위원, 게다가 신문선이 합세한 SBS는 이변을 예고했지만, MBC의 차-차 부자에게 또다시 시청률 경쟁에서 밀려나게 됐다. 전통적으로 축구중계방송에 강한 MBC의 승리였다. 이변은 없었다.

월드컵 중계에 있어서 MBC는 SBS, KBS의 중계 시청률을 압도적으로 앞질렀다. 우리나라 경기중계에 있어서 MBC는 3경기 평균 시청률 30.3%, 대한민국과 토고 경기만을 중계한 KBS1은 26.2%, 프랑스, 스위스와의 경기를 중계한 KBS2는 2경기 평균 시청률 12.8%를 기록한 반면, 3경기를 모두 중계한 SBS는 평균시청률 12.0%로 저조한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시청률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KBS뉴스9(평균적으로 약 20%)에 비해 MBC 뉴스데스크가 평균적으로 10% 내외의 저조한 시청률을 갖고 있는 반면, MBC 스포츠뉴스는 15%대의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뉴스보다 스포츠뉴스가 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데는 여러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예를 들면 바로 이어지는 주몽 같은 드라마의 영향) 월드컵이 분명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MBC의 월드컵 중계는 타 방송사의 그것과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차-차 부자의 압승은 달라진 방송 환경의 영향
과거와 비교해 우리의 방송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뉴스는 과거에 방송사와 신문사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 그 둘을 모두 끌어안은 데다 양방향성까지 갖춘 인터넷이 뉴스보도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종이신문들은 인터넷에 밀려 퇴조하고 있고, 방송은 그 속보성에서 뒤쳐지면서 점점 공룡이 되어가고 있다. 인터넷이 끼친 가장 큰 영향력은 독자를 필자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수동적 시청자가 참여하는 주체가 되자, 뉴스를 보는 시각은 ‘들려주는 대로 수용하는’ 상하관계가 아닌 ‘같은 눈높이로 보는’ 수평관계로 바뀌었다.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은 이제 특별한 존재가 아니며 바로 내가 될 수도 있고 내 옆의 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시기에 월드컵에 즈음하여 전문가도 아니고 경륜이 있는 것도 아닌 청년 차두리가 중계방송에 합류한 것은 기상천외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차두리는 우리가 중계방송을 통해 보고 싶어한 우리 옆의 친근한 그 인물(해설가로서는)이었던 것. 우리는 차두리의 순수하고 솔직한 해설을 보면서 갖은 폼을 잡고 자신만이 정확히 아는 전문가인 양 얘기하는 해설가들과는 다른 통쾌함을 느꼈다.

그런데 차두리가 중계방송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차범근이라는 인물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프로 해설자와 아마추어 해설자를 한 자리에 놓는 건 자칫 중계를 망칠 위험이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바로 차범근이 차두리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중계방송을 보는 이들은 편안하게 방송을 볼 수 있었다. 차두리의 돌발발언은 차범근이라는 무게가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귀여운 짓’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차두리가 MBC가 아닌 타 방송사에서 다른 해설자와 함께 같은 식의 중계를 했다면 똑같은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나운서는 이제 프로그램의 중재자
여기에 김성주 아나운서가 포진된 것 역시 절묘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김성주 아나운서의 이미지는 방송의 공정성과 함께 재미라는 측면 그 어느 쪽에서도 어울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달라진 방송환경을 대변한다. 과거 아나운서라고 하면 보도의 공정성에 더 무게를 두기 마련이었지만 요즘은 프로그램의 중재자 역할에 더 충실해졌다. 아나운서로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노현정 아나운서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방송이 보여야 하는 공정성(올드 앤 뉴 같은 프로그램에서의 우리말에 대한 공정 보도)과 재미(말도 안 되는 얘기를 던져대는 개그맨들) 사이에서 그 균형점을 잡아나가는 것이다.

노현정 아나운서가 오락프로그램에서부터 월드컵 리뷰방송까지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김성주 아나운서는 특유의 입담으로 차두리의 돌발발언에 순수함을 부여해주었고 차범근은 무게 있는 해설 속에서도 보다 친근한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김성주 아나운서는 차두리와 차범근이라는 극과 극 사이에 정확한 균형자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제 MBC의 월드컵 중계방송은 세대를 넘어 소통하는 창구가 되었다. 솔직하지만 거친 아들의 발언에 당황하며 허허 웃는 아버지. 그러다가도 따끔하게 한 마디 할 때는 거침이 없는 아버지. 함께 웃고 안타까워하는 그 과정이 축구 중계 이상의 것을 만들어냈다. 중계를 보는 아버지들은 차범근에 감정이입됐고, 아들들은 차두리에 감정이입됐다. 중계방송은 이제 실수까지도 포용하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이 엉뚱한 부자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방송의 균형을 잡아낸 김성주 아나운서의 몸값은 뛰었다.

직설화법의 일방성이 만든 반향
반면 시청률도 떨어지는 상황에서 ‘할 말은 한다’는 식으로 특유의 직설화법을 구사한 SBS 신문선 해설위원은 스위스 전의 발언 하나로 중도하차 하는 불운까지 겪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를 할 줄 아는 용기’라고 생각했을까. ‘심판의 판단이 맞다’는 그의 발언은 일파만파로 번져 인터넷은 온통 신문선 해설위원을 질타하는 글들로 가득 찼다. 그 영향을 의식해서인지 SBS는 신문선 해설위원을 조기 귀국시켰다.

그 심판판정에 대한 진위여부는 여전히 논란중이다. 하지만 그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한 해설위원의 한 마디가 이다지도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과열된 월드컵 분위기와 여기에 부응해 전쟁을 방불케 하는 방송사간의 경쟁이 한몫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문선 해설위원의 해설 방식이다. 많은 네티즌들은 발언 이전부터 신문선 해설위원에 대한 안티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자신감 있는 직설화법은 변화된 매체환경 속에서는 자칫 독선적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었다. 심판 판정에 대한 발언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이것은 최근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범근 식의 ‘노심초사’해설과는 정반대로 읽힌다).

이런 상황에 SBS가 취한 태도 역시 비판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 내용이 어떻든 시청률에 급급한 나머지 중도 하차시키는 모양새는 상황을 더 보기 나쁘게 만들었다. 네티즌들의 안티에 발끈하고 나선 신문선 해설위원의 모습 역시 보기 좋은 모양은 아니었다. “지나친 애국심 때문에 잘못된 해설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은 오히려 반감만 더 키운 꼴이 됐다. 신문선 해설위원의 말이 맞다고 해도 그의 말은 “제대로 된 해설을 위해서라면 국민적 정서 따위는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는 오만으로 비춰질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여기서 신문선 해설위원이 하나 간과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시청자들은 이제 “사실보다는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경규가 간다’라는 코너가 될 것이다.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이경규가 간다’
‘이경규가 간다’는 월드컵 리뷰 방송이다. 따라서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경기가 끝난 후 ‘편집’되어 방송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집’이라는 부분이다. 편집에 의해서 ‘각본 없는 드라마’는 각본을 갖게 된다. 본 중계방송에서는 공을 따라서 카메라가 거의 대부분을 쫓아다니지만, ‘이경규가 간다’는 하나의 논조를 가지고 사실들을 끄집어내 편집해서 전체의 이야기를 만든다. 따라서 월드컵이라는 거대 이벤트에서 비롯된 국민적 감성을 편집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하나로 끌어 모으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 각본 없는 드라마에 각본을 준다는 의미에서, 이번 2006년 ‘이경규가 간다’의 최고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억울하게 진 스위스전이 되었다.

먼저 선취골을 먹은 상태에서 역전과 동점상황을 만든 토고전, 프랑스전의 각본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자체가 국민들을 열광하게 한 ‘각본 없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위스전의 각본은 달라야 했다. 열심히 잘 싸웠지만 골 운도 없었던 데다가 심판 판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경규가 간다’는 스위스전에 대한 국민적 감성을 제대로 읽어냈다. “정말 잘 싸웠지만 어이없는 판정으로 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 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일 스위스전이 끝났을 때 ‘축구는 오늘 죽었다’라는 자막과 함께 끝난 중계방송의 논조와 연장선상에 있다. 하나의 판정이었지만 이에 대한 접근방식은 MBC와 SBS가 이다지도 달랐던 것이다.

‘이경규가 간다’를 K리그로 보내야 K리그가 산다는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우리네 K리그가 가진 문제점을 제대로 포착한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월드컵에서 뛰는 외국선수들의 이름과 주특기를 줄줄이 외우고 있지만 K리그에서 뛰는 우리나라 선수들은 잘 모른다. 이유는 단 하나. 홍보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각본 없는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각본 있는 드라마’ 이상으로 극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극적인 이야기를 원한다. 저 이종격투기 K리그가 단 10초만에 끝나는 경기를 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상대방 선수들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를 쏟아 붓는 반면, 우리네 축구 K리그는 거기 뛰는 선수들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내놓지 않는다(혹은 아무도 경청하지 않을 정도의 홍보만 하고 있던가). 10초만에 끝나도 어떤 경기는 극적인 것이 되는 반면, 어떤 경기는 90분간을 뛰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축구경기는 경기일 뿐이지만 경기를 재미있게 하는 것은 그 경기라는 드라마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이다(물론 여기서 이야기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실에 대한 해석을 말한다).

포스트 월드컵, 보고 싶은 걸 보여준다
월드컵 중계방송이 말해주는 것처럼 방송은 이제 “보고 싶은 걸 보여주는” 쪽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건 다른 말로 해서 공영성보다는 시청률에 더 끌린다는 말이다. 사실보다는 해석에 더 끌린다는 말이다. 이미 인터넷에 떠버리는 기사들을 발굴하기 위해 수십 명의 기자들이 달라붙어 고작 10% 내외의 시청률을 올리는 뉴스보다는, 똑똑한 PD 몇 명이 만들어 훨씬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세상은 이런 일이’나 ‘VJ 특공대’, ‘무한지대 큐’ 같은 ‘점점 진짜 뉴스가 되고 있는’ 프로가 더 경쟁력이 있다는 말이다. KBS 같은 공영방송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신뢰성에서 경쟁도 되지 않으니 뉴스도 중계방송도 달라져야 할 것이 아닌가.

월드컵은 끝났지만 월드컵이 방송사들에게 남긴 결과는 포스트 월드컵의 방송가에서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오락프로그램들이야 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송의 공영성이 강조되는 뉴스나 교양 프로그램 등에서 두드러질 것 같다. 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이 필요한 역사극 부분에서도 이 영향은 그대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몇몇 역사극에서 불고 있는 퓨전 돌풍은 그 전조가 되고있다.

시대가 변했고 매체환경도 변화되었기 때문에 TV가 그러한 감성을 제대로 읽어내고 거기에 부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TV가 가진 공영성보다 시청률에 급급한 것은 문제의 소지를 남긴다. 특히 중계방송이나 뉴스 같은 TV의 사회적 책무가 요구되는 프로그램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또는 너무 똑같은 내용들의 반복이어서, 아무도 보지 않는 뉴스는 불필요할 것이다. 월드컵이 그렇듯이 우리 사회에서 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은 그 자체가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를 공영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시각으로 보여주는 균형 잡힌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 월드컵. 그 중계방송의 성패가 말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드라마의 각본을 제대로 읽으라는 것이다.

리메이크 블록버스터들

미국엔 디즈니랜드가 있고 우리나라엔 에버랜드가 있으며 우리 동네엔 H랜드가 있다. 디즈니랜드는 못 가봐서 모르겠지만 롤러코스터의 천국이라고 한다. 찾는 이들도 전 세계적이다. 가끔 가보는 에버랜드는 그럭저럭 롤러코스터들이 구비되어 있지만 한국식으로 즐겨야 한다. 1시간 기다려서 5분 타는 재미.

하지만 우리 동네 하니랜드는 다르다. 놀이기구라고 있는 것이 고작 오래된 회전목마, 시속 5킬로 이하인 궤도열차, 지상 2미터 높이로 뛰면 손이 닿을 정도로 낮은 모노레일, 소박한(?) 바이킹, 범퍼카 등이 전부다.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기다릴 필요 없고 아저씨한테 잘만 얘기하면 한 번 더 태워주기도 한다. 재미는 없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원으로는 참으로 원칙적인 느낌이다. 이런 상태로 운영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요즘 극장가를 보면 미국의 디즈니랜드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몇 번의 히트작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던 에버랜드는 그 메가톤급 롤러코스터에 주춤한 상태니 전혀 히트작 하고는 상관없이 소박한 하니랜드가 오죽하랴. 그런데 헐리우드라는 이름의 디즈니랜드에서 선보였거나 앞으로 준비할 영화들의 면면을 보니 이건 사실 전부 대충 감이 잡히는 놀이기구들이다.

리메이크 유행, 왜?
<미션 임파서블3>는 TV를 통해 익숙한 구조인데다, 영화로도 전작이 두 편이나 된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를 담았지만(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우리는 다 안다. 단지 톰 크루즈가 이번엔 어떤 상황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모험을 펼칠 것인가가 궁금할 뿐이다.
이어 개봉한 <다빈치 코드>는 이미 책으로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전력이 있으니 그 내용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심지어 원작 만한 영화 없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개봉 5일만에 150만 명을 넘어섰다.
앞으로 개봉될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캐러비안의 해적 2; 망자의 함>, <수퍼맨 리턴즈>, <포세이돈>, <엑스맨 3> 무엇 하나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제목이 없다. 이 계보는 아마도 지난해 외화 가운데 최고 흥행을 기록했던 <킹콩>, 어쩌면 그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 같다. 최근 슬슬 다가오고 있는 블록버스터의 계절을 맞아 헐리우드라는 디즈니랜드는 왜 이다지도 리메이크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만큼 영화가 다양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의 저변은 유럽 영화와 아시아권(홍콩이나 일본, 인도 영화, 우리나라 영화까지) 영화까지 넓어졌다. 과거 헐리우드의 독주시절에는 스크린 쿼터라는 것이 일방적인 문화적 침탈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헐리우드의 독주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류는 전 세계적인 것이고 곧 미국시장까지 파고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른바 한국영화의 ‘어른론’이라는 논리로 스크린 쿼터라는 방패를 반 토막냈다.

마치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헐리우드는 블록버스터를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미 헐리우드 독주시절, 우리 뇌리에서 이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고전들의 리메이크였다. 양적으로 팽창한 영화 시장에서, 따로 홍보하지 않아도, 관성적으로 끌리게 마련인(혹은 끌리게 중독되었던) 이 고전들은 헐리우드의 위치를 확고하게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무기인 셈이다. 게다가 롤러코스터, 블록버스터는 헐리우드의 자기정체성이 아닌가. 대문이 반쯤 열린 지금, 디즈니랜드의 국내 상륙에 에버랜드는 떨고, 하니랜드는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상태다. 악몽은 되풀이된다.

리메이크 우리 체질에도 잘 맞을까
하지만 이런 시점에 최근 우리에게도 이 리메이크라는 유혹은 가깝게 들려오고 있다. 리메이크의 대상은 미국보다는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가까운 일본이다. 이른바 ‘한류에 역류가 시작되고 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그 역류는,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까지 스토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일어나고 있다.

먼저 드라마를 보면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해 호평을 받은 <연애시대>, 그 후에 이어질 <101번째 프로포즈>를 기점으로 <오렌지 데이즈>, <하늘에서 내래는 1억 개의 별>등 총 7편의 일본으로 말하면 ‘국민 드라마’들이 리메이크를 준비중이다. 영화는 일본 소설을 리메이크한 <플라이 대디>, <어깨 너머의 연인>, <반짝반짝 빛나는>, <프리즌 호텔>, <검은 집> 등과,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사랑따윈 필요 없어>, 그리고 영화를 리메이크한 <바르게 살자>, <당신의 가방모찌> 등 그 리메이크 대상도 광범위하다.
최근 발표된 <영웅본색>의 리메이크는 그 대상이 좀더 광범위해질 수 있다는 신호탄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는 필요하지만 기초체력이 부실한 우리 여건에서 이야기를 발굴하기보다는 이미 여건이 충분한 일본 시장에서 손쉽게 가져다 쓰는 게 당장의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일본은 정서적으로도 비슷하고(실제로 그런 지는 모르겠다), 또 한류로 역수출 할 수 있으니 이건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도대체 한류로 자신만만해 하던 우리네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는 것일까.
<은행나무침대>,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살인의 추억>, <올드 보이>,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그리고 <왕의 남자>. 이 영화들이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150억이라는 돈을 들여 만든 <태풍>이 참패하고, 순 제작비 41억으로 1200만 관객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운 <왕의 남자>만 봐도 우리네 블록버스터가 헐리우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헐리우드가 내세우는 단순한 스펙터클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의 블록버스터는 바로 ‘우리네 정서를 담은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엄청난 물량공세로 정평이 난 디즈니랜드가 있는 마당에 똑같이 스펙터클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네 블록버스터가 미국시장은 물론 전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미국식의 그것과는 달라야한다. 그들의 아이덴티티가 스펙터클이기에 리메이크라는 방식은 그들 체질에는 잘 맞는 것이 틀림없지만 우리에게도 그것이 잘 맞는다고는 볼 수 없다.

디즈니랜드라는 괴물을 이기는 방법
물론 리메이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창조임에 틀림없다. 우리네 <시월애>나 <엽기적인 그녀> 같은 영화들이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다는 걸 보면 그 먼 문화적 거리만큼 창조의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리메이크는 이미 충분히 튼튼한 체질을 갖고 있다면 전략상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리메이크라는 전략상품을 만드는 한편으로, 자체적인 체질강화프로그램을 갖지 않으면 결국 우리 문화는 영양실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영화 시나리오와 문학, 연극, 뮤지컬 등 영화의 자양분이 되는 이른바 기초분야에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리메이크에 익숙한 디즈니랜드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스펙터클은 아니지만 우리네 정서를 담은 이야기, 그것이 거대 괴물 디즈니랜드와 대항할 수 있는 대안이다.

어쩌면 롤러코스터는 영화가 가진 실체의 한 측면인지도 모른다. 단 몇 분, 몇 시간만이라도 사람들은 현실을 잊고 온전한 자극과 환상에 빠지길 원한다. 하지만 영화를 문화이게 하는 또 다른 측면을 도외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새로움이 없는, 생각하지 않는 문화는 상품일 뿐이다. 따라서 문화로 포장되어 들어오는 자극덩어리의 상품은 중독적인 병폐만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디즈니랜드의 입성으로 극장이 놀이공원이 되고, 영화가 롤러코스터가 되가는 이 시점, 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봉준호 감독의 ‘생각 있는 블록버스터’, <괴물>이 기다려지는 건 그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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