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 김고은의 미래가 된 김혜수

 

<차이나타운>의 시작은 저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스>를 연상시킨다(본래 이 영화의 제목은 코인라커걸이었다고 한다). 일영(김고은)이라는 아이는 엄마의 배가 아니라 10번 코인로커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이 차이나타운이라는 오로지 쓸모 있어야 살아남는 곳에서 모두가 엄마라고 부르는 마우희(김혜수)에게서 자라난다. 엄마와 아이라는 관계로 서 있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모성도 발견하기 힘들다. 엄마는 생명을 잉태하는 존재가 아니라 쓸모없는 생명들을 파괴하는 존재다.

 

김혜수(사진출처: 영화 <차이나타운>)

그 곳은 엄마 마우희가 만든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의 룰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엄마 마우희도 그 룰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한다. 언제든 쓸모가 없어지면 그녀 역시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우희가 밀입국해 차이나타운에 들어온 중국인들이나 어찌어찌해 흘러들어온 범법자들의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주는 일을 한다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죽어도 그 누구하나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줄 가족이 없다. 마우희나 일영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쓸모없어지면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마우희라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모성 없는 세상의 폭력성과 그 안에서 쓸모 있음을 증명함으로서 살아남으려는 유사가족의 이야기는 현실에 대한 기묘한 우화처럼 다가온다. 가족 관계마저 비정해진 그 세계는 우리가 사는 살풍경한 현실의 축소판이다. 차이나타운이 마우희라는 엄마를 중심에 둔 하나의 패밀리처럼 그려지는 건 그래서 흥미로운 일이다.

 

이 견고한 듯 보이는 세상의 변화는 그래서 쓸모의 차원을 넘어서 일영의 가슴으로 훅 들어온 감정과 함께 생겨난다. 그 작은 감정은 그래서 이 냉혹한 세상을 위협하는 불순한 어떤 것이 된다. 마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이병헌)가 희수(신민아)를 보고는 생겨난 작은 떨림이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파국을 만들 듯이 일영은 마우희가 만들어놓은 세상을 파괴해나간다.

 

그런데 그것은 역시 쓸모 있음을 증명해내야 존재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룰을 따르는 일이다. 일영은 그걸 증명하려 하고 마우희는 자신의 쓸모가 어디까지인가를 회의한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파괴해야 하는 이 차이나타운의 법칙은 그래서 잔혹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 보면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저 생존의 현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방출되는 것이 현실의 법칙이 아닌가.

 

<차이나타운>은 조폭 누아르 장르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주인공들이 두 명의 여성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바로 이 여성의 등장은 보스를 엄마로 부하를 딸로 그리고 조직원들을 패밀리로 치환해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낸다. 보스로서의 잔혹함과 동시에 엄마라 불리는 자의 모성을 담아낸다는 것은 그래서 <차이나타운>이라는 영화를 단순한 조폭 영화로 전락시키지 않는 중요한 지점이다.

 

김혜수의 연기는 놀랍다. 실로 얼굴 가득한 기미들과 잔뜩 살을 찌운 듯한 보형물을 넣어 만들어낸 마우희라는 캐릭터의 탄생은 김혜수라는 연기자의 단단한 공력을 보여준다. 화장기는커녕 기미가 가득한 얼굴에 피가 잔뜩 튄 그 모습조차 여배우는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걸 김혜수는 보여줬다.

 

마우희의 삶이 일영의 미래가 되는 영화 속 이야기처럼, 김혜수가 그려나가는 연기의 길은 마치 김고은이라는 가능성 가득한 여배우의 미래처럼 보인다. 마우희가 구축한 패밀리 안에서 발군의 재능을 보여주는 일영처럼, 김혜수가 만들어내는 극의 무게감 위에서 김고은은 한껏 자신만의 연기 잠재력을 선보인다. 그래서일까. <차이나타운>은 김혜수와 김고은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가 되었다.

 

<휴먼다큐 사랑>, 고인이 된 그가 가족을 위로하는 법

 

마왕 신해철. 그는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갑작스레 떠난 신해철을 위해 마련된 콘서트에서 선후배들의 입을 통해 불려지는 노래 속에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는 후배의 목소리를 빌어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하고 여전히 소리쳤고, 그의 아들 동원이는 화답하듯 난 아빠를 원해!”라고 외쳤다.

 

'휴먼다큐 사랑(사진출처:MBC)'

그는 떠났지만 가족들의 곁에 그는 여전히 자그마한 밥 그릇 앞에 앉아 있었다. 또 집 한 구석에 놓여진 그의 사진 속에 있었다. 가족들은 밥을 먹을 때나 아니면 사진 앞을 지날 때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 특별한 맛이라며 젤리를 아빠의 사진 앞에 놓고는 이제 마음껏 드시라는 딸 지우의 마음 속에, 또 그녀가 차를 타고 가면서 따라 부르는 재즈카페슬픈 표정하지 말아요같은 노래 속에 살아있었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가족을 향한 걱정이자 위로이자 격려였다. 가족에게 그 노래는 다정다감했던 아빠의 목소리이고 그가 여전히 전하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냄새로도 오래도록 느끼고 싶은 아내는 그의 베개 솜을 꺼내 아이들과 자신의 베개에 넣었다. 사라져가는 냄새를 통해서라도 그녀는 계속 그를 붙잡고 싶었다.

 

아내는 둘이 같이 웃었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특별히 어딜 갔던 일도, 특별히 함께 무언가를 했던 일도 아닌 함께 웃었던 일’.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행복했던 기억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그 아내의 행복한 기억 속에서 신해철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49제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 하지만 신해철의 그날 아내는 그가 좋아했던 문어와 갈비찜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문어를 아이들이 챙기며 하나씩 빼먹는다. 그 문어의 추억 속에서, 그걸 먹는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그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다. 마지막을 떠나보내며 팬들이 부르는 민물장어의 꿈속에서도.

 

그의 가장 좋은 옷을 챙겨 태우며 아내는 가족들 몰래 눈물을 삼킨다. 그녀는 그의 평안함을 기원하다가 아이들 잘 챙길께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떠나는 그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가 떠나고 난 그 빈 자리가 얼마나 클 것이라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의 빈 자리는 가족들이 하나씩 채워가고 있었다. 아내는 가장이 되어 더 일을 많이 하고 있었고, 아이들의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더 성장할 때까지 자신이 대신 버티겠다고 담배도 끊었다. 할아버지는 밤이면 그가 해왔던 문단속을 대신 한다. 그래도 동원이는 여전히 아이다. 누가가 잠시 자리를 비울라치면 견디지 못하는 그 아이를 이제 할머니가 맡는다. 그들은 서로가 조금씩 떠나간 그의 빈 자리를 채워간다. 위안 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렇게 서로 똘똘 뭉쳐있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MBC <휴먼다큐 사랑>이 기록한 고 신해철의 다큐멘터리에 정작 신해철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예쁜 아내의 착한 마음 속에, 아빠를 진정으로 원하는 동원이의 마음 속에, 아빠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한다는 지우의 마음 속에, 아프게 가슴에 묻어두고 그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는 부모님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의 마음 속에. 앞으로도.

 

<아빠를 부탁해>, 이토록 훈훈하고 뭉클한 순간이라니

 

그들은 함께 있을 때는 여전히 소년들 같다. 서로가 하는 말에 툭툭 장난을 걸기도 하고 누군가에 말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며 때로는 부러워하고 때로는 짠해지기도 한다. SBS <아빠를 부탁해>의 아빠들 얘기다. 그들은 각자 찍어온 관찰카메라를 함께 모여 보면서 서로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아니면 얼마나 비슷한지를 확인한다.

 

'아빠를 부탁해(사진출처:SBS)'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소년처럼 굴지만 화면 속에서는 영 서툰 아빠의 모습 그대로다. 딸과 함께 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해하고, 딸의 친구들이 찾아오면 자리를 피해준다는 핑계로 그 서먹한 관계로부터 도망치기 일쑤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잘못한 일에 호된 꾸지람을 하고는 후회하고, 자신과는 영 다른 입맛을 가진 딸과의 외식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화면 속의 아빠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던 바로 그 보통의 아빠다. 대부분의 아빠들이 그렇지 않은가. 아빠들은 이경규처럼 딸 예림이와 친구들에게 정성들여 라면을 끓여줄 정도로 살가운 마음을 갖고 있지만 겉으로는 겸상 하면 권위 떨어진다며 자리를 피하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맛있게 먹는 딸과 친구들을 흘낏흘낏 훔쳐보고 다 먹고 나면 설거지까지 해주려고 나선다.

 

아빠들은 조민기처럼 딸 윤경이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여권을 챙기지 않은 실수에 호통을 치지만,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영상통화로나마 혼자 지내는 네가 스스로 잘 챙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랬던 것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그리고 수줍지만 퉁명스럽게 속내를 툭 던진다. “보고싶다.” 그 한 마디 속에는 그래서 참 많은 아빠의 속내가 담겨있다. 미안함과 대견함과 그리움 그리고 쓸쓸함까지.

 

아빠들은 강석우처럼 딸 다은이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절로 입에서 노래가 나온다. 피곤해 하는 다은이가 툴툴 대면서도 함께 옥상을 청소하는 그 시간이 아빠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쌈을 제대로 싸먹고, 설렁탕에는 깍두기 국물을 넣어 먹는 다은이는 그래서 아빠 강석우에게는 여전히 신기한 존재다. 식성은 달라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아빠들은 조재현처럼 나이 들어가는 아버지의 젊은 날 고생을 되돌아보며 자신 역시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먹먹해지기도 한다. 가파른 길을 연탄을 가득 채운 리어카를 끌고 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래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10년 후 또 사진 찍으러 오자는 손녀 혜정이에게 그 때는 할아버지 없다고 말하자 눈물을 흘리는 혜정이에게 “20년 후면 아빠도 위험하다는 조재현의 농담 속에는 그래서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쓸쓸함과 그걸 아쉬워하는 딸에 대한 따뜻함이 묻어난다.

 

왜 우리는 일찍이 아빠들의 진짜 속내를 몰랐던 걸까. 나이 들어 그 아빠의 나이가 됐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그 서먹함과 무표정 속에 숨겨져 있던 아빠들의 쓸쓸함과 따뜻함이다. <아빠를 부탁해>가 뭉클해지는 순간은 바로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는 그 속내를 지금 바로 눈앞에서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 무표정이 사실은 눈물도 많고 그 서먹함이 실제로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그 순간.

 

<동상이몽>, 균형감각 유지가 관건이다

 

SBS <동상이몽>은 어떤 사안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차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어느 한 욕쟁이 소녀의 이야기는 엄마의 관점으로 보면 심지어 집안에서도 쉴 새 없이 욕을 해대며 그것이 그냥 일상어라고 말하는 소녀를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소녀의 관점으로 다시 보게 되자 그녀가 중3 때 눈이 작다고 놀림을 받았으며 그것 때문에 욕을 하게 됐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게다가 잘못한 남동생을 오히려 두둔하며 소녀가 욕하는 것만을 나무라는 엄마의 모습도 살짝 드러난다.

 

'동상이몽(사진출처:SBS)'

사실 관찰카메라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동상이몽>은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처음부터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편집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소녀의 행동을 먼저 부각시키고 나중에 그 이유를 편집된 부분을 보여줌으로 해서 드라마틱한 반전을 만들어낸다. 어찌 보면 악마의 편집처럼 보이지만 결코 <동상이몽>은 그런 자극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당사자들이 가족인데다, 그들이 모두 스튜디오에 함께 자리해있기 때문이다. 관찰카메라의 시선이 보여주는 편향은 극적인 편집을 사용하긴 해도 그것이 거기 서 있는 서로 다른 입장을 표현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드라마틱한 구성은 그 자체로 극적인 효과를 낸다. 소녀가 욕을 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되자 엄마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묻어나고, 결국 숨겼던 속내를 털어내고 그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소녀는 눈물을 터트린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그 개구진 남동생 역시 눈물을 터트리고 사안의 심각성을 이제야 깨달은 아빠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일종의 소통 단절이 가져온 오해가 관찰카메라의 관찰을 통해 소통의 물꼬를 여는 것. 그것이 <동상이몽>이 갖고 있는 재미이자 의미다.

 

이 프로그램은 최근 달라지고 있는 예능의 경향들을 기막히게 연결한 하이브리드의 성격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요즘 트렌드라고 하는 관찰 카메라 형식이 있지만 또한 시청자들에게는 익숙하게 보이는 스튜디오물이 존재한다. 토크쇼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토크는 마치 TV를 보면서 수다를 떠는 듯한 모습이다. 그들끼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주제가 드러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재석과 김구라 같은 톱 MC들이 자리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사연을 갖고 무대로 올라오는 일반인들이다. 즉 최근의 예능이 갖고 있는 일반인 트렌드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연예인 MC가 합류하고 있는 모습이다. 유재석과 김구라의 조합도 특이하다. 김구라가 욕에 대해 얘기하며 자신은 과거의 욕 때문에 존경받지 못한다고 경험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역할이라면, 유재석은 이 서로의 입장이 첨예한 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건 이 예능 프로그램이 웃음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우리 사회의 일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 역시 제공해준다는 사실이다. 욕하는 소녀의 이야기는 학교의 왕따 문제나 학생들의 언어생활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단을 보여준다. 사실 그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한 주제토론보다 이런 여러 입장을 드러내주고 거기에 대해 각자의 의견들을 더하는 형식이 더 효과적이다.

 

<동상이몽>은 이처럼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끌어안아 융합시킨 새로운 예능 형식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관찰카메라도 있지만 스튜디오의 안정감이 있고 일반인들의 놀라운 사연들이 있지만 연예인들의 재치 있는 입담도 곁들여진다. 재미와 의미는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이것은 <동상이몽>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지만 만만찮은 도전도 있다. 이 많은 요소들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욕쟁이 소녀의 사연은 <동상이몽>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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