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기술과 예술, 현실과 상상 사이

파벨만스

극장 앞에서 어린 샘(마테오 조리안)은 겁에 질려 있다. 영화에는 거인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샘에서 아버지 버트(폴 다노)는 영화가 사진과 다르지 않으며 여러 사진을 빠르게 돌려 빛에 투과시키면 동영상이 된다는 ‘모션 픽처’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것이 그저 기술이고 허구라는 걸 알려줌으로써 샘이 겁먹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노력이다. 

 

버트는 컴퓨터 천재 공학도로서 산업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기술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극복해가며 기술을 발전시키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샘에게 하는 영화에 대한 설명은 다소 어린 아이에게는 과하고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이해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런 버트와 달리 피아노에 천재성을 가졌지만 아이 셋을 낳고 가정에 눌러 앉게 된 엄마 미치(미셸 윌리암스>는 샘에게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아들아, 영화는 꿈이란다. 영원히 잊히지 않는 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파벨만스>의 이 같은 오프닝은 짧지만 영화에 대한 두 관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카메라로 찍고 이를 편집해 영사기에 돌림으로써 가능한 과학적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기술이 발전해 더 좋은 카메라가 등장하면 더 좋은 영상들을 보다 쉽게 찍어 영화로 만드는 게 가능해진다. 그것은 결국 영화 역시 자본이 투입되는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미치가 말하듯 현실을 훌쩍 넘어서는 상상의 세계를 담아내고, 인간이 꿈꾸는 것을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예술이다. 샘은 그래서 버트와 미치라는 서로 다른 삶과 예술에 대한 입장을 가진 인물들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부모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애써 자신을 누른 채 가족을 지키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결국 파열음을 낸다. 

 

샘은 아버지가 평생 엄마를 숭배하듯 헌신해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예술과 예술적 삶에 대한 갈증을 억누른 채 평범한 가정에 눌러 앉아 스스로 파괴되어가는 엄마를 이해한다. 어린 샘은 서로 다른 부모를 각각 이해하지만 그들의 부딪침이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을 수용하기가 어렵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 배타적으로 보이는 양자들을 끌어안는다. 친구들과 영화를 찍으면서 아버지가 아이디어를 내 문제해결을 해나가는 것처럼 특수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낸다. 그러면서 기술과 현실의 차원을 뛰어넘는 예술과 상상으로 그가 만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파벨만스>는 샘이라는 아이를 통해 그가 가족들과 더불어 친구, 연인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보고 찍은 영화에 어떤 영향을 받고 성장했는가를 에둘러 담고 있다. 엄마와 아빠의 설득을 통해 처음 그가 보게 된 영화 <지상 최대의 쇼>에서 기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에 빠진 샘이 선물로 받은 장난감 기차와 자동차를 충돌시켜 보고 엄마의 제안으로 그걸 카메라에 찍게 되는 장면은 그의 영화가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영화에 대한 헌사를 담은 영화들이 있다.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으로 기억되는 <시네마 천국>이 그렇고, 최근 방영됐던 <바빌론>도 그렇다. 이중 <파벨만스>는 <시네마 천국>에 더 가까운 영화지만, 그 안에는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거장의 영화가 어떤 토양에서 어떤 영향들을 받아 탄생했는가에 대한 단초들이 담겨있다. 영화 속에서 보리스 삼촌이 등장해 “예술과 가족, 그게 너를 둘로 찢어놓을 거란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가족과 예술의 대립항은 그에게는 중요한 숙제였던 걸로 보인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동화 같은 가족애를 담은 영화를 그려내곤 했던 감독이다. <파벨만스>라는 제목이 달린 것도 그래서다. 이것은 샘 파벨만이라는 거장의 탄생을 그리는 영화지만, 그걸 만들어낸 건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지향점으로서 늘 가족을 담았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이야기지만, 동시에 <파벨만스>는 이를 기반으로 영화가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아낸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각별한 영향을 주고받는 우리에게도 이 영화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것은 한 재능 있는 아이가 현실을 넘어 꿈을 이뤄가는 그 과정들을 부모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지지해줘야 하는가에 대한 단초가 이 영화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지만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그 누구라도 자신의 가족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끝내 이 영화를 통해 하고픈 말이었을 지도.(사진:영화 '파벨만스')

‘보스턴 교살자’, 여성 서사 돋보이는 미국판 ‘살인의 추억’

보스턴 교살자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 여성들이 피해자이고, 그 피해자들에게는 모두 마치 장식이라도 하듯 목에 리본이 매어져 있다. 디즈니+ 오리지널 영화 <보스턴 교살자>는 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추적하는 레코드 아메리칸 신문사 여성 기자들인 로레타 매클로플린(키이라 나이틀리)과 진 콜(캐리 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을 준비하면서 참고했다는 실화, 보스턴 교살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인지라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고도 불렸는데, 실제로 영화는 이 교살범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로레타의 치열한 추적과 열망을 담고 있다. 또한 연쇄 살인이 몰고 온 공포 속에서 사회가 범인을 밝히기보다는 이를 빠르게 무마하려는 시도 속에서 진실이 오히려 묻히는 그 과정 또한 <살인의 추억>을 닮았다. 

 

하지만 <보스턴 교살자>가 <살인의 추억>과 차별되는 지점은 로레타와 진의 활약 속에서 돋보이는 여성 서사다. 형사도 또 범죄 보도를 하는 기자들도 응당 남자들이 하는 일로 여겼던 그 시대에, 새로 출시된 토스터기를 체험한 기사나 쓰던 로레타는 그 생활부를 벗어나 사건다운 사건을 기사에 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결국 기회를 갖게 되고 형사들도 또 기자들도 그들만의 네트워크 속에서 쉬쉬하며 별개로 치부되던 이 사건의 ‘연결고리’를 찾아내 보도한다. 세상은 발칵 뒤집어진다. 이 단독보도에 형사들이 반발하고 기자들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낸다. 

 

여성들만 타깃으로 삼아 살해하는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고, 그것을 연쇄살인이 아니라 단순한 개별적 사건으로 치부하며 자신이 하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고 어려운지만 말하는 형사는 실상 범인 검거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영화는 여성들이 죽어나가고 그래서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과, 두 여성이 대결하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담담하게 기자들 앞에서 농담까지 해대는 형사들은 이로써 사회는 여전히 안전하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만, 그건 그들의 무관심을 덮으려는 거짓말이다. 

 

이 사건에 몰두하는 로레타는 집안에서도 세 아이의 엄마로써 가정을 등한시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물론 남편은 로레타가 일을 하는 것을 애써 도와주려 하지만, 그 역시 아내가 하는 일이 가정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걸 쉽게 인정하지는 않는다. 아이가 다치고 오자 아이 돌보는 일을 도와주는 남편의 누나 캘리는 “로레타가 아이들을 망칠 것”이라고 말한다.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지만, 어째 우리 사회에서 지금도 많이 들릴 것 같은 그런 말이다. 

 

<보스턴 교살자>는 계속해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로레타의 그 집요함을 끝까지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다. 거기에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픈 마음도 있지만, 로레타라는 여성이 당대의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한국의 관객들이라면 여성들만 타깃으로 벌어지는 이 범죄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처럼 ‘여성 혐오 범죄’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게다. 그래서 그 문제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던 그 상황들 또한. 

 

영화가 끝내 다다른 진실은 충격적이면서도 울림이 크다. 단순히 로레타의 활약으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는 어떻게 여성 혐오의 범죄들이 끊임없이 벌어져 왔고 또 앞으로도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경고와, 여성은 물론이고 아이들 가족들 모두 진정한 안전한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자동차는 중요한 오브제로 쓰인다. 로레타가 범행현장을 찾아갈 때 그의 앞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위협적인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범인이 범행 대상을 따라가는 자동차 역시 그러한 공포감을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남성들(형사, 기자)이 주로 차를 몰고 다니는 장면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마지막에 사건이 마무리된 후 비로소 로레타가 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집 앞에 도착한 로레타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집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다가 차를 돌려 바로 간다. 거기 술을 마시고 있는 진과 합류한다. 

 

이 장면은 로레타라는 여성의 이런 선택이야말로 사회의 안전을 향한 능동적인 행동이라는 걸 보여준다. 로레타가 아이들을 망칠 것이라고 말하던 그 사회에 대해 영화는 이 인상적인 엔딩으로 답을 준다. 세상의 더 많은 로레타들이 존재해야 비로소 사회는 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사진:디즈니+)

조금 안 어울려도 괜찮아, ‘신성한, 이혼’의 엇박자 매칭이 보여주는 것

신성한, 이혼

사랑하지만 이미 엇나간 관계 때문에 고민하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임신까지 하게 되자 결국 이혼도장을 찍고 이혼선물까지 주며 이별을 선언한 장형근(김성균). 그 현장에 숨어서 그 광경을 보던 친구들 신성한(조승우)과 조정식(정문성)은 펑펑 우는 장형근을 토닥인다. 그런데 장형근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뜬금없이 성한의 집에 가서 싱글 몰트 30년산을 까자고 한다. 성한은 자기 집에 그런 거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 형근은 그게 어디 있는지 위치까지 정확히 알려준다. 

 

감정적으로 먹먹해지는 이 장면에서 갑자기 전개되는 이 웃기는 코미디 상황에 대해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JTBC 토일드라마 <신성한, 이혼>이 자꾸만 슬픈 상황에 그 아픔을 웃음으로 넘겨주려는 친구들의 이런 모습은 시청자들의 몰입을 깨려는 작가의 악취미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이 작품이 들려주려는 메시지에 가깝다. 작가는 이런 상황을 통해 말하고 있다. 조금 망가져도 또 조금 안 어울려도 괜찮다고. 옆을 지켜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만 있어도 또 살아가게 된다고. 

 

<신성한, 이혼>은 이혼 전문 변호사 신성한이 변호를 맡게 된 사례들을 에피소드별로 보여주지만, 그 사이 사이에 들어와 있는 성한과 형근, 정식의 브로맨스가 또 한 축의 중요한 서사다. 이들의 이야기는 너무 무거울 수 있는 이 이혼 관련 변호의 에피소드에 발랄함과 경쾌함을 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테면 성한이 죽은 동생의 생일날 묘소를 갔다 늦게 출근하자 그 슬픔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형근이 눈가에 붙은 휴지를 떼 주려다 뽀뽀라도 하려 한 걸로 오해를 받는 장면이 그렇다. 

 

힘겨운 상황들을 저마다 겪고 있지만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은 이렇게 이를 웃음으로 바꿔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어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유영아 작가의 전작이었던 <서른, 아홉>에서 차미조(손예진)와 정찬영(전미도) 그리고 장주희(김지현)가 힘들 때마다 서로를 위로해주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그 아픔을 잊게 해주려 했던 그 광경이 <신성한, 이혼>에서는 이 세 남자들의 이야기로 변주된다. 

 

그런데 이러한 브로맨스는 그저 드라마가 너무 무겁게 침잠하지 않게 하기 위한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혼’이라는 소재를 담고 있는 이 드라마의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다. 성한과 형근, 정식은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다. 성한은 피아노를 쳤었지만 동생이 법정싸움을 하다 사망하고 아들마저 시댁에 빼앗기자 뒤늦게 공부를 해 변호사가 된 인물이고, 형근의 그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 역할을 하는 인물이고 정식은 그 건물에서 부동산을 하는 인물이다. 

 

뭐 하나 어울리지 않는 이 인물들의 면면은 함께 캠핑을 가서도 각자 자신의 핸드폰만 들여다 보고 각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모습을 통해 그려진다. 함께 그 캠핑을 간 이 사무실의 새내기 변호사 최준(한은성)은 이럴 거면 캠핑을 왜 오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건 이들 세 사람만이 아니다. 변호사 사무실에 이혼 의뢰로 들어왔다가 일자리가 필요해 상담실장 역할을 하게 된 기상캐스터 출신 라디오 DJ 이서진(한혜진)도 그렇고, 경쟁 로펌에서 스파이 역할을 하라고 하자 이를 성한에게 다 털어놓고 이중스파이를 자처한 최준도 그렇다. 

 

어울리지 않지만 이들은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변호하는 일마다 괜찮은 성과를 낸다. 툭탁대지만 친구들의 관계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끈끈하다. 하다못해 단골 라면집에 바뀐 주인으로 온 김소연(강말금)이 라면에 반주로 소주가 아닌 와인을 내놔도 그게 또 어울린다. 김소연은 라면집 대신 마카롱집을 하겠다고 하지만, 단골손님들인 성한과 친구들은 그게 그곳 상권에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자 김소연은 안되면 다시 라면집 하면 된다고 한다.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갈등이 될 것 같고 그래서 실제로도 부딪치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헤어질 수도 있고 또 만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결과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하고 있다. 이혼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서로 맞지 않아 죽을 것처럼 서로를 물어뜯기도 하고 헤어지고 아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옆에 누군가가 있어 살아가게 된다는 것. 그래서 이러한 이혼들은 모두가 바깥에서 보기엔 세속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처럼 보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이면에는 사람의 마음이 오가는 ‘신성함’이 있다. 

 

라면에 와인, 와인 잔에 소주, 건물주지만 허름한 변호사 사무실, 트로트와 클래식... <신성한, 이혼>이 의도적으로 담아낸 엇박자 매칭은 그래서 때론 이혼까지 치닫기도 하는 우리네 관계를 은유하고 있다. 변호하는 사건 케이스들 사이에 들어있는 성한과 친구들의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의외로 상황을 반전시키고 웃게 만들어주는 브로맨스는 그래서 이 드라마의 감초가 아니라 메인 메뉴인 셈이다. 조금 안 어울려도, 조금 망가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사진:JTBC)

끝내 마음에 그려진 김다미와 전소니의 우정, 아니 사랑(‘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보여.” 하은(전소니)은 미소(김다미)의 얼굴을 그리며 어떤 자신의 마음을 봤을까. 민용근 감독의 영화 <소울메이트>는 하은이 거대한 캔버스에 그린 미소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극사실주의로 그려진 그 그림은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연필로 하나하나 그어진 선들이 만들어낸 얼굴이다. 그 선 하나하나에서 그 그림을 그린 하은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울메이트>는 그 그림으로 시작해서 그 그림으로 끝난다. 그림 속 미소의 얼굴은 학창시절 하은과 하은의 남자친구 진우(변우석)와 함께 제주의 어느 산길을 오르다 찍힌 사진이다. 돌아보는 미소를 순간 찰칵 찍어낸 하은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미소의 얼굴을 캔버스에 담았을 게다. 풋풋한 청춘의 건강함이 묻어나는 미소의 그 얼굴은 어딘가 놀란 듯 보이면서도 생기가 넘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슬픔 같은 것이 묻어난다. 

 

덥고, 지루하고 졸리고 나른하던 어느 날 전학 온 미소는 오자마자 교실을 박차고 나가 바다가 보이는 뚝방 위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는 그런 아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엄마마저 그 아이를 제주에 남겨 놓고 떠났다. 외롭게 괴로웠을 미소지만, 그는 이름처럼 늘 생글생글 웃으며 하은과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성장한다. 

 

미소는 그가 ‘찐’이라고 생각하는 제니스 조플린을 닮았다. 27살의 나이에 활활 타올랐다가 저 세상으로 떠난 아티스트. 같은 나이에 요절한 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과 더불어 3J로 불리며 이른바 ‘27살 클럽’의 멤버 중 하나로 불리는 히피 문화를 대표하는 싱어 송 라이터. 그는 미소에게는 자유의 존재로 읽힌다. 제니스 조플린의 명곡 ‘Me & Bobby McGee’에 나오는 가사 내용 중 ‘자유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일 뿐(freedom’s just another word for nothin’ left to lose)’이라는 대목이 미소가 마주하고 있는 ‘쓸쓸한 자유’의 면면을 잘 설명해준다. 

 

제주에서 서울로 떠나 성북동 달동네 위에 있는 도시 속 섬 같은 허름한 집에서 지내며 하루하루를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가지만, 미소는 하은에게 자유로운 제니스 조플린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편지를 보낸다. 바이칼 호수에는 가본 적도 없지만, 그 곳을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엽서를 가져온다. 미소는 결코 제니스 조플린처럼 자유로운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런 자유를 늘 꿈꾸고 있었을 뿐이다. 엄마마저 돌아가셔 남은 가족조차 없는 미소는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었지만, 퍽퍽한 삶은 그 어디도 그를 날게 해주지 않았다. 

 

반면 단란한 가족의 품에서 자라난 하은은 미소의 그 자유를 부러워하지만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조차 타지 못해 섬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인물이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잘 그리지만 제주에서 학교 선생님이 되어 지낸다. 제주와 서울로 떨어져 지내며 하은과 미소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보듬으면서 우정 그 이상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두 사람의 다른 삶은 그들이 그리는 그림으로도 표현된다. 하은은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는 극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리는 반면, 그런 틀 자체가 싫은 미소는 입시 미술 학원에서 데생을 할 때조차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그들이 학창시절 비 맞은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그리는 장면에서도 하은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그린 반면, 미소는 추상적인 고양이의 형상에 마음까지 그려 넣는다. 

 

똑같이 그리는 건 재주일 뿐, 재능이 아니라고 여기는 이도 있지만, 하은과 미소의 그림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지와 사랑이라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은 같은 지점에서 만나 서로를 채워가며 완성되어 간다. 따라서 <소울메이트>는 그림을 매개로 해서 서로를 완성하고 채워가는 하은과 미소의 우정,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을 담아낸다. 맞다. 그건 사랑이다. 그저 이성과 동성이라는 구분이 불필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사랑. 

 

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폴더폰이나 싸이월드, MP3, 펌프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당대의 오브제들은 당대를 살았던 중장년층의 마음을 추억 속으로 소환시킨다. 하지만 이 그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은 뉴트로를 힙하게 바라보는 MZ세대들의 마음 또한 이 작품은 툭툭 건드리고 있다. 마치 ‘인생네컷’ 사진을 통해 바로 찍은 디지털 사진을 즉석으로 인화해 손에 쥐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갖고픈 MZ세대들의 취향을 이 작품은 레트로한 영상과 색감, 정서 등으로 사로잡는다. 

 

그 위에 하은과 미소의 한 평생을 담아낸 마음들을 이를 연기한 김다미와 전소니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만든다. 특히 이미 <마녀>로 강렬한 인상을 주며 등장해, <이태원 클라쓰>로 걸크러시를 보여주고는 <그해 우리는>으로 달달한 감성까지 전해줬던 김다미는 이 작품 속 미소라는 청춘의 초상을 통해 자유와 슬픔, 그리움과 행복 등이 버무려진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마치 청춘의 초상을 상징하는 듯 그림 속에 얹어진 그의 얼굴로 시작해 그의 얼굴로 끝을 맺는 영화는 그래서 김다미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뇌리에 새겨넣어준다. 

 

“이젠 니 얼굴을 그리고 싶어. 사랑 없인 그릴 수조차 없는 그림 말야.”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마음이 보인다는 하은의 말에 화답하듯, 영화는 그런 미소의 답으로 끝을 맺는다. 그림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의 이야기는 그래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그건 우정을 넘어선 사랑이야기고, 그래서 이성애의 틀을 벗어버림으로써 드디어 삶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들이 쉽사리 객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여운은 그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만이 아니다. 그건 어찌 보면 찬란하면서도 슬픈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은 데서 오는 먹먹함 때문이 아닐까.(사진:영화'소울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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