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출신의 영화 집착, 논란만 많은 까닭

 

서세원과 심형래. 최근 들어 이 코미디언 출신 영화감독들의 이름이 부쩍 논란의 도마 위에 자주 오르내린다. 서세원은 최근 폭행혐의로 아내 서정희씨에 의해 신고 당했다. 대중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추함을 넘어 추악함까지 보이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서세원(사진출처:채널A)'

서세원은 자신이 제작 총감독을 맡은 영화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시나리오 심포지엄에서 빨갱이들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안 지키면 자녀들이 큰일 난다.”는 발언을 해 세간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영화 <변호인>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란다.

 

또한 그는 똥 같은 상업영화 때문에 한 국가와 시대, 민족이 잘못된 집단최면 상태에 빠지고 있다.”고 말해 대중들의 공분을 샀다. 결국 이 발언은 대중들이 선택한 <변호인> 같은 상업영화를 같다 표현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발언들은 마치 <변호인>을 본 천만관객을 빨갱이에 물든 대중으로 표현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주었다.

 

결국 이러한 무리한 발언들 속에는 영화를 영화적 가치로서 대중들에게 선택받기 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편 가르기라는 편법으로 선택받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이른바 애국 마케팅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는 또 한 인물이 바로 심형래다. 그가 만들어낸 <디 워> 논쟁은 뜬금없는 애국주의를 내세워 부족한 완성도를 가리는 논란 마케팅으로 이어졌다.

 

영구아트의 폐업, 임금 체불로 인한 피소, 그 후로 생겨난 엄청난 구설수들. 하지만 지난 1월 개인 파산신청으로 170억 원에 달하는 채무 탕감을 받고, 또 직원 43명의 임금과 퇴직금 등을 체불해 불구속 기소된 후 벌금 1500만 원을 최종 선고 받은 그는 <디워2>에 대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영화란 거대 자본이 들어가는 산업이다. 작품의 경쟁력이 아닌 얄팍한 마케팅만으로 접근한다면 자칫 업계에 커다란 악영향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서세원과 심형래는 한때 이름만 얘기해도 웃음이 나는 최고의 코미디언들이었다. 서세원의 <토크박스>나 심형래가 활약했던 <유머일번지>의 무수한 코너들은 코미디업계에서는 하나의 레전드로 남아 있다. 그랬던 그들의 현재 모습은 연상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낯설게까지 다가온다. 왜 이들은 이렇게까지 달라졌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코미디언이라는 직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그러하듯 코미디언 역시 오래도록 현업에 머물기 어려운 직업이다. 특히 코미디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코미디에 대한 일종의 폄하가 편견처럼 자리하고 있어 코미디언을 배우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업계의 분위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미디언들은 현업에 있을 때 일찍부터 은퇴를 준비하곤 한다. 코미디언들의 그 많은 음식점 개업과 실패 소식이 업계에 늘 떠도는 건 그래서다.

 

성공한 코미디언들이 영화감독을 꿈꾸는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배우로서 좀체 인정받지 못하는 코미디언들은 그래서 영화 제작자나 영화감독으로 변신을 시도하기도 한다. 서세원이 86년도에 <납자루떼>라는 영화를 만들어 실패를 경험한 것이나, 이경규가 92년도에 <복수혈전>으로 흥행 실패의 아픔을 겪은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심형래는 일찍부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코믹 괴수물로 큰 성공을 거둔 이례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결국 본격 상업영화 시장으로 들어온 그의 감독으로서의 행보는 결코 성공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코미디언에 대한 저평가가 영화감독 같은 자리에 대한 욕망을 더 강렬하게 만드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하지만 성공에 대한 욕망과 감독으로서의 인정을 받는 일은 사뭇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감독으로서 인정받으려면 영화 그 자체의 완성도로 대중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가능한 일이다.

 

해외의 경우는 사정이 너무 다르다. 이를테면 우디 알렌이나 벤 스틸러 같은 코미디 배우이면서 동시에 영화감독들은 배우로서도 또 감독으로서도 칭송받는 인물들이다. 94년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영화 <청춘스케치>로 영화감독으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최근 개봉했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는 감독 겸 배우로 등장해 호평을 얻기도 했다. 우디 알렌은 코미디에서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더 깊어진 영화의 세계를 보여주며 삶의 의미를 담아내는 저력을 보이고 있다.

 

어째서 우리는 우디 알렌이나 벤 스틸러 같은 코미디언들이 없을까. 어째서 비뚤어진 욕망으로 논란만 만들어내는 서세원이나 심형래 같은 안타까운 사례들만 나올까. 이것은 어쩌면 코미디에 대한 우리들의 뿌리 깊은 편견에서 비롯한 일일 수 있다. 그나마 임하룡 같은 중견 코미디언이 배우로서도 존재감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도 코미디언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이 오롯이 배우로서 인정받고 그 위에서 지평을 넓혀가는 건 우리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까. 제발 더 이상 비뚤어진 욕망으로 왜곡된 안타까운 사례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정도전>, 당신은 정도전인가 정몽주인가

 

역심인가 민심인가. 썩어 빠진 조정을 쇄신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정도전(조재현)이 오로지 생각하는 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다. 그는 백성들을 위해서 잘못된 나라를 뒤집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한다. 그것은 민심이기도 하지만 또한 역성혁명이기도 하다.

 

'정도전(사진출처:KBS)'

충심인가 타협인가. 한편 정도전과 맞서는 정몽주(임호)는 그래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혁은 하되 그 개혁 또한 나라를 전제해야 한다는 것. 역성혁명이란 민심을 빙자한 정치적인 야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고려에 대한 충심이기도 하지만 또한 타협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도전이 혁명을 위해 꺼내놓은 카드는 사전을 혁파하겠다는 전제 개혁이다. 가진 자들의 땅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려는 것. 이것 때문에 스승인 이색(박지일)과 그는 날선 대결을 벌인다. 결국 이색을 탄핵하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를 반대하는 정몽주와 철회는 없다는 정도전이 다시 맞선다.

 

삼봉은 지금 정치를 포기하고 전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치의 소임은 절충입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공격을 서슴지 않는 것은 야만이란 말입니다(정몽주).” “정치의 소임은 세상의 정의를 바로 잡는 것입니다. 수백 년 간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밥버러지들과 절충이라뇨. 야합이고 불의이며 백성들에 대한 배신입니다(정도전).”

 

KBS 주말사극 <정도전>에서 정도전과 정몽주가 대립하는 이 장면들은 무려 6백년이 훌쩍 넘은 과거의 역사지만 지금 현재 우리네 현실과 고스란히 맞닿아 또 다른 울림을 만들어낸다.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 배고픈 걸인들의 모습이 과거의 일로만 보이지 않는다. 정도전이 그 걸인들과 길바닥에 앉아 만두를 나누는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송강호)국가는 국민입니다라고 외쳤을 때 그것이 그토록 대중들의 마음을 사무치게 한 것은 현실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은 어느 순간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고 몇몇 가진 자들의 배만을 불리게 해주며 거짓말을 일삼으니 국민이 국가를 국가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정도전>은 끝까지 고려를 선택하다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 정몽주와, 국가가 아닌 백성을 선택해 조선을 세운 정도전을 대립시킨다. 이 둘의 설전은 그래서 지금 현재 국가냐 국민이냐를 놓고 벌어지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대립을 환기시킨다. 한쪽에서는 그래도 애국을 말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힘겨운 현실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국민을 말한다.

 

역사책을 열어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극화한 정통사극 <정도전>이 이토록 대중들의 반응을 얻어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기막힌 과거와 현재의 조우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결국 현재에 의미 있는 과거를 찾아내는 일이 아닌가. 국가인가 국민인가를 묻는 <정도전>의 질문은 그래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정도전인가 정몽주인가.

게임화된 <정법>이 보이는 브라질에서의 야심

 

<정글의 법칙> 브라질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이른바 블라인드 퀘스트라는 걸로 시작했다. ‘블라인드 퀘스트는 안대를 끼고 특정 장소에 각각 내려 GPS와 지도만으로 목표지까지 도달하는 미션이다. 낯선 아마존에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게 안대를 낀다는 것에 대해서 출연자들은 저마다 두려움을 토로했다. 세 팀으로 나눠져 다른 장소에 내린 출연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목표지까지 이동하며 아마존의 다른 모습들을 보여줬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블라인드 퀘스트라는 미션 제목에서 드러나듯 <정글의 법칙>은 게임적인 요소를 차용했다. 이전 보르네오편에서 헝거게임을 차용한 이후 두 번째다. 프로그램 편집도 게임 화면을 연상케 했다. 각각의 출연자 설명은 마치 RPG 게임의 캐릭터 설명처럼 구성되었다. 또 목표지를 찾아가는 블라인드 퀘스트에서도 그 이동과정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장면처럼 보여주었다. 왜 이런 시도를 하는 걸까.

 

이것은 <정글의 법칙>이 이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쓰기 시작했다는 걸 말해준다. 그저 정글에 들어가 생존하는 것이 이제는 식상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글의 법칙>은 집짓고, 사냥하고, 먹방하는 것이 무한 반복된다는 비판이 부쩍 많아졌다. 제 아무리 정글로 대변되는 자연과 공존의 의미와 생존의 문제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어디를 가도 비슷한 스토리가 나온다는 건 프로그램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 <런닝맨> PD였던 유승호PD가 함께 <정글의 법칙>에 투입된 건 그런 목적 때문이다. <정글의 법칙> 브라질편은 아마존의 생존기는 물론이고 여기에 제작진이 제안하는 게임적인 미션들을 풀어가는 과정도 관전 포인트가 된다는 점이다. 이제 <정글의 법칙>은 병만족에게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제작진의 인위적인 손길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글 생존의 혹독함이 사라진 건 아니다. 목표지에 도착한 병만족은 갑작스런 폭우 속에서 저마다 자신들의 역할을 하며 뚝딱 집을 지어냈다. 그리고 김병만의 제안에 따라 아예 철야를 하기로 작정하고 야밤에 사냥을 나가기도 했다. 과거에는 이 정도의 폭우 속에서 추위와 벌레의 습격을 버텨내며 하룻밤을 지새는 것만으로도 독하다고 여겨졌지만 이제는 거기서도 한 발 더 나가는 상황이다.

 

이렇게 된 것은 이미 병만족이 여러 차례 정글을 경험하면서 갖게 된 자신감 때문이다. 초기에는 정글에 들어가면 무엇부터 해야 할 지 우왕좌왕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정글에 어울리는 집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과일을 무조건 채취하며 빗속에서도 불씨를 지켜낸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자극이 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프로그램은 적응한 만큼 더 독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정글의 법칙>은 그 밖에도 월드컵에 대한 야심 또한 드러냈다. 장소를 굳이 이 시점에 브라질로 정했으며, 배성재 아나운서를 신입 병만족으로 투입시켰고 프로그램도 그가 차범근 해설위원의 집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배성재 아나운서는 아마존에 도착해서도 이번 월드컵이 열릴 경기장을 찾아 SBS 월드컵 중계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무엇보다 배성재 아나운서를 투입한 것은 대중들에게 그의 친근한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지난 소치 올림픽 중계에서 김성주 아나운서를 통해 드러났듯 예능에서의 친근감은 스포츠 중계에도 효과를 발휘한다.

 

<정글의 법칙> 브라질편은 게임의 스토리텔링을 사용하고, 더 독해졌으며 거기에 이번 월드컵 중계에 대한 야심까지 드러내고 있다. 과연 이 야심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게임화는 재미를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제작진의 인위적인 개입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리얼리티를 떨어뜨릴 수 있고 또 기존 <정글의 법칙>이 표방했던 정글 생존의 의미화 등을 상당부분 지워버릴 위험성도 있다. 재미는 있지만 과거 같은 정서적 지지는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독해진 병만족의 모습은 그만큼 적응한 탓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적응이 독한 자극으로 이어지는 건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안전 불감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지금은 적정해보이지만 아마존은 조금만 잘못해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는 공간이다. 이 위에서의 과한 게임화는 자칫 안전 불감증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물론 브라질 월드컵을 맞아 배성재 아나운서를 기용하는 등의 기획은 시의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브라질에 대한 이해도 높이고 그 안에 배성재 아나운서를 투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월드컵에 대한 관심도 만들어내며, 또 배성재 아나운서의 캐릭터까지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글의 법칙> 브라질편은 확실히 과거의 행보와는 다른 야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어떤 반응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되는 지점이다.

변호사들의 개과천선, 서민들에게는 판타지

 

우리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변호사가 서민들을 위해 변호하는 장면은 얼마나 될까. 아니 실제 현실에서는? 서민들이 변호사를 쓴다는 일은 그렇게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적지 않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변호사들의 일이란 돈 많은 이들을 의뢰인으로 삼았을 때 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물론 인권변호사 같은 특별한 존재들이 있지만.

 

'개과천선(사진출처:MBC)'

변호사의 개과천선이 주는 깊은 감동을 가장 잘 보여준 건 영화 <변호인>이다. 송우석 변호사(송강호)는 세법 변호사로 돈을 버는 지극히 평범한 속물 변호사에서 자신과 인연이 있는 국밥집 아들이 인권을 유린당하는 과정을 보면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난다. 서민들에게 자신들을 대변해주는 변호사가 일종의 슈퍼히어로처럼 여겨지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법에 의해 움직이고 그 법은 돈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돈이 아닌 억울한 서민들의 편에 서는 변호사는 그래서 서민들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의 김석주(김명민) 변호사는 최고의 로펌인 차영우펌의 에이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는 오로지 회사에 돈을 주는 재벌 의뢰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변호를 해온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어느 날 사고를 당하고 기억상실을 겪게 되면서 그 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핵심 테마다.

 

엄청난 법 지식과 노련한 경험을 갖춘 이 변호사 슈퍼히어로는 사고 후 깨어난 병원에서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서민들의 일들을 척척 해결해낸다. 옆 병상에 있는 자동차 사고를 겪은 이가 보험회사 직원과 벌이는 실랑이를 지나가는 말처럼 툭툭 몇 마디 던지는 걸로 김석주 변호사는 문제를 해결한다. 카시트는 대물배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보험회사 직원의 말에 대해 그는 만 8세 이하 아이들은 카시트에 태우는 게 의무화되어 있기 때문에 카시트가 고객 개인의 편의나 취향에 따라 장착된 설비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당연히 보험회사에서 대물배상 범위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또 병상에서 떨어져 다친 환자에게 병원측이 그건 환자의 부주의에 의해 발생한 2차 사고라며 병원비나 간병비 모두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하자, 김석주 변호사는 병원 내에서 충분한 보호장치를 하지 않았고, 병원 지배구역 내에서 일어난 일이며, 간호 수칙과 간호 매뉴얼을 100%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병원측이 병원비, 간병비를 보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법 조항과 적용에 대해 잘 모르는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런데 이 김석주 변호사는 뭐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몇 마디 던지는 것만으로 일을 척척 해결해낸다. 이것은 <개과천선>이라는 드라마가 대중들에게 기대감을 주는 가장 큰 이유다. 그 대단한 실력과 능력을 가진 자들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갖지 못한 서민들을 위해 쓴다는 것.

 

김석주 변호사의 옆자리에 위치해 그와 점점 가까워질 존재로서 이지윤 인턴(박민영)의 역할 또한 작지 않다. 그녀는 김석주 변호사의 변화를 가까이서 목도하는 인물이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곱씹게 해주는 역할이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질 멜로는 그 인간적인 변화가 가져오는 달콤함 결과물이 될 수 있다.

 

왜 현실에서는 개과천선한 변호사를 만나기 힘들까. 그것은 그 직업적 선택이 결국은 자본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이 정의를 구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게다. 그래서일 것이다. 더더욱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나 <개과천선>의 김석주 변호사 같은 이들의 변신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마치 사회적 부조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거꾸로 정의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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