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만찬>의 출생비밀 집착 뭐가 문제일까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신들의 만찬>은 도대체 주제의식이 있기는 한 걸까. 적어도 소재에 대한 나름대로의 시도를 한 적이나 있는 걸까. 애초 <신들의 만찬>에 기대했던 것은 그 요리라는 소재가 가진(최근 요리 한류로 이어지고 있는) 매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을 보라. 요리라는 소재는 뒷전이 된 지 오래고 끊임없는 그 놈의 '출생의 비밀' 타령으로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허우적대고 있는 꼴이다.

 

 

'신들의 만찬'(사진출처:MBC)

드라마 초반 요리 대결에 대한 에피소드가 몇 개 나오고 나서는 끊임없이 4각 멜로(그것도 인물들이 그럴 듯한 이유 없이 이리 저리 휘둘리는)가 반복되더니, 이제는 끝없는 핏줄 타령이다. 잃어버렸던 자식의 귀환, 그것을 막으려는 키워진 자식의 갖은 악행, 기억을 잃어버린 엄마. 드라마는 인물들이 엄마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도돌이표로 집어넣는다.

 

그나마 이야기에 개연성이라도 있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자식 고준영(성유리)이 엄마인 명장 성도희(전인화)를 추락시키려는 백설희(김보연)의 음모를 막는다는 이유로, 아리랑에 들어와 성도희와 각을 세우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꼭 그런 방법밖에 없을까(이 상황은 그래서 억지로 저 <하늘이시여>의 기묘한 모녀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의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그렇게 돌아온 고준영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 판단하고 이를 온몸으로 막으려는 하인주(서현진)의 모습도 너무 전형적이다.

 

이것은 출생의 비밀이라는 드라마 코드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다. 왜 등장인물들은 이 핏줄의 틀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할까. 하인주는 왜 굳이 그토록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면서까지 성도희의 딸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걸까. 이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다. 하인주는 이미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능력도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는 왜 여전히 '엄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아기 상태에 놓여져 있는 걸까.

 

이것은 고준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타고난 요리 실력의 소유자이고, 생존력 또한 뛰어난 인물이다. 물론 어린 시절 잃어버린 부모 때문에 꽤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녀 역시 이제는 어엿하게 독립적으로 성공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렇게 여전히 '엄마'를 외치며 눈물 흘리는 아이로 퇴행하고 있는 것일까.

 

출생의 비밀 코드도 적절히 활용되면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극적 장치로 쓰여질 수 있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 코드 그 안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설득력을 잃는다. 이 시대는 물론 핏줄이나 혈연 같은 운명적인 틀로 인해 삶이 고착되는 비극적인 현실을 안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정상적이라 여겨지는 그런 시대는 아니다. 과거에 발목 잡히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 적어도 그것이 드라마가 보여줘야 할 비전이 아닐까.

 

<신들의 만찬>은 이미 성장한 사람들이 모두 아이 때로 퇴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준영과 하인주의 대결은 그래서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결국은 순혈을 가진 고준영이 그렇지 못한 하인주를 이기는(이것은 태생적으로 이미 결정된 것으로 드라마는 치부한다) 이 게임 속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친 딸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는 일뿐이다. 이 얼마나 유아적인가.

 

과거 <제빵왕 김탁구> 역시 출생의 비밀을 드라마 코드로 활용했지만 적어도 그 드라마는 그 안에 성장의 과정을 집어넣었다. 출생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으로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은연 중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신들의 만찬>은 어떤가. 고준영은 성도희의 순혈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재능을 부여받는다. 한 번 냄새만 맡아도 그 재료와 요리 방법까지 꿰뚫는 이 신의 재능은 오로지 그녀가 좋은 핏줄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반면 오로지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그 자리를 버텨온 하인주는 고준영의 등장만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이 드라마는 설마 제 아무리 노력해도 핏줄 잘못 타고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과연 21세기에 어린이 드라마가 아닌 성인들의 드라마에서 버젓이 내놓고 할 이야기일까. 얼개도 느슨하고 메시지도 공감하기 힘든 <신들의 만찬>은 그래서 그 어떤 막장드라마보다 더 막장스럽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도대체 이 불순한 드라마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예능인과 방송인 사이, 전현무가 처한 상황

 

전현무는 밉상이다. 선배건 후배건 사사건건 깐족대는 건 일쑤고, 프로그램은 실수투성이다. 춤은 저질 수준이고 노래는 듣기 힘들 정도다. 물론 누구나 알다시피 이건 캐릭터다. 하지만 아무리 캐릭터라고 해도 본업이 아나운서라는 사실은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아나운서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 어딘지 딱딱하고 단정하며 신뢰가 가는 그 이미지를 그는 확실히 뒤집어엎었다. 아이러니이지만 바로 이 반전요소 때문에 전현무는 대중들의 눈에 들었다.

 

 

'불후의 명곡2'(사진출처:KBS)

아나운서라는데 개그맨보다 더 웃긴다는 사실은 전현무라는 전혀 새로운 방송 캐릭터의 핵심적인 포지셔닝이다. 물론 기존에 아나테이너로 대변되는 아나운서들의 변화의 징후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전현무는 다르다. 그는 여타의 아나테이너들처럼 방송사로부터 프리선언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아나테이너들에게도 어떤 보이지 않는 벽으로 여겨지던 버라이어티쇼까지 진출했다. '생생정보통'에서 아나운서로서는 튀는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던 전현무는, '해피투게더'나 '남자의 자격'에서 한없이 망가지며 웃음 주는 전현무로 변신했다.

 

전현무는 따라서 현재 아나운서라기보다는(물론 서류상으로는 아나운서가 맞겠지만), 예능인에 더 가까운 포지셔닝으로 옮겨갔다. 아나테이터라는 위치가 시대적 요청(정보에도 재미를 요구하는)에 의한 아나운서들의 어쩔 수 없는 변화였다면, 전현무는 아예 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그에게서 우리는 신뢰 있는 정보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전현무에 요구하는 건 밉상 캐릭터거나 저질 댄스거나 돌발 발언으로 스튜디오를 초토화시키는 그 독특한 예능감이다. 우리는 어느새 전현무에게서 재미만을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점은 전현무에게는 그다지 유리한 것이 아니다. 전현무가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애초부터 개그맨이나 예능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아나운서라는 어딘지 엄밀해 보이는 직업군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예능감이 훨씬 돋보였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아나운서로서의 이미지나 포지션이 점점 흐릿해지는 건 나아가 예능인으로서의 포지션 또한 흔들릴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여기에 KBS가 파업 중이라는 사실은 전현무에게는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공정방송을 위한 파업에서 방송사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운서들이 스스로 자신을 어떤 위치에 세우는가 하는 점은 자신들의 정체성과도 관련 있는 문제다. 방송PD들과 아나운서들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 전현무는 어떤 위치에 자신을 세울 것인가. 방송인인가 아니면 예능인인가. 오상진 아나운서와의 비교점이 만들어지고, 개념과 무개념 운운되는 논란이 생긴 건 지금껏 전현무 같은 애매모호한 포지션의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활동은 연예인처럼 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위치는 방송사의 직원이자 아나운서인 전현무는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이 애매한 포지션 때문에 곤혹을 치를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모두가 파업에 나서고 있는 마당에, 연예인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이유로 더 많은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전현무는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다. 연예인(방송인)이든 아니면 방송사에 소속된 아나운서든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이런 애매한 포지션은 사라지겠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전현무는 아나운서라는 바탕과 그것을 뒤집는 예능인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 사이에 축조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전현무는 지금 위태로운 위치에 서 있다. 아나운서라는 바탕을 버리면 자칫 밉상이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밉상이 될 판이다. 그렇다고 예능인으로서의 활동을 좀 더 본격화하거나 아예 버릴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것은 전현무라는 독특한 경계의 캐릭터를 스스로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필 동료 아나운서들이 거리로 나가는 이런 시기에, '불후의 명곡2'에서 하차한 김구라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은 그래서 전현무에게는 정말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현무는 그저 본격적으로 예능인으로서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아나운서라는 본래 위치를 함께 가져갈 것인가. 그 상황이 애매하고 선택이 어렵다는 것은 이해될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정답은 나와 있다. 아나운서라는 위치를 버리는 순간, 예능인으로서의 길도 쉽지 않은 것이 전현무가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현무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시청률 넝쿨째 들어온 '넝쿨'의 비결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하 넝쿨)'은 전체 시청률 1위. 봄철 꽃놀이 인파로 잠재 시청층이 빠져나가기 마련인 요즘, 36.4%의 시청률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과거부터 가족드라마는 기본 시청률을 가져간다는 불문율이 있었지만, 요즘은 이런 사정도 많이 달라졌다. 일일드라마라고 해도 그저 비슷한 공식만 반복하는 드라마는 외면받기 일쑤. 늘 시청률 수위를 차지하던 KBS 일일드라마 '당신뿐이야'가 시청률 20%에 머물러 있는 건 주말극으로 '넝쿨'이 매주 최고시청률을 갈아치우는 것과는 사뭇 대조되는 풍경이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사진출처:KBS)

'넝쿨'이 가진 가족드라마적인 면모는 기존의 것들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점이 가족주의에 머물던 기존의 가족드라마와 달리, 달라진 세태를 며느리와 아들 입장에서 풀어낸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며느리 전성시대' 같은 가족드라마에서 며느리의 관점으로 시댁을 뒤집어보는 시도는 늘 있었던 것이니까. 그렇다면 이 가족드라마만이 가진 진짜 매력은 뭘까.

 

그 답은 드라마보다는 최근 대세를 이루었던 공감개그 혹은 공감에 바탕을 둔 콩트에서 찾아진다. '넝쿨'을 보다보면 그 안에서 우리는 '애정남'이 불쑥 튀어나오고,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을 떠올릴 수 있다. 이른바 '시월드(시댁)'에서 살아남기 버전처럼 보이는 이 드라마는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공감 가는 상황을 곳곳에 배치했다.

 

혼수를 해오지 않은 탓에 세탁기 얘길 하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세탁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로 듣고 신형세탁기를 선물하는 며느리, 또 그런 며느리를 씀씀이 헤프다며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그런 잔소리에 아들이 며느리 편을 드는 것 같자 눈물을 흘리는 시어머니 등등. 이런 시집 식구와의 관계들이 대단히 디테일한 상황으로 보여지는 건 이 드라마의 최대 강점이다. 어쩌면 그렇게 밉상 짓만 골라하는지 미운 짓에도 디테일이 살아있는 시누이의 모습이나 시어머니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물어볼 때 가질 며느리의 곤혹스러움 같은 디테일들은 이 드라마에 대한 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공감 가는 상황 위에 놓여진 반전의 반전은 또 다른 재미다. 며느리 윤희(김남주)의 바쁜 직장생활과 전혀 다른 생활방식 때문에 전형적인 시댁 식구의 공격(?)이 이어지면, 이후에 해결사처럼 남편 귀남(유준상)의 합리적인 해결방식이 제시되며 역공격이 이루어진다. 제사 음식 차리는 걸 돕지 않은 윤희에 대한 시누이의 공격에 귀남이 손수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제사 음식을 하거나, 시누이의 잇따른 아내 구박에 귀남이 "그러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식이다.

 

기존 공감 가는 상황이 현실적인 디테일이라면, 귀남의 합리적인 해결방식은 일종의 바람직한 판타지에 가깝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애정남'과 '롤러코스터'에서 본 적이 있다. 애매한 상황에 어떤 지침을 내려주는 애정남의 방식은 이 드라마가 가진 현실적인 디테일 상황 속에 일종의 해결책을 던져주는 방식과 똑같다. 또 '롤러코스터'가 보여준 리얼한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통쾌한 내레이션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런 디테일한 공감 포인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넝쿨'은 시청자 유입에 있어서 유리한 지점을 갖게 된다. 물론 드라마적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주지만, 만일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아 그 내용을 전혀 모르더라도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공감가는 상황이 주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애정남'이나 '롤러코스터'가 굳이 지금까지의 줄거리(?)를 이야기 하지 않고도 매회 공감을 얻는 것처럼.

 

게다가 이 공감 포인트는 그 자체로 드라마에 대한 호감을 만들어낸다. 딱히 드라마가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은 이 공감 가는 상황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정적인 지지를 하게 된다. 마치 '애정남'에 대한 진짜 재미는 '맞아 맞아'하면서 공감하는 그 대목 자체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대단히 웃기기 때문은 아닌 것처럼. '애정남'을 우리가 공감 개그라고 부른다면 '넝쿨'은 공감 드라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넝쿨'이 승승장구하는 진짜 이유다.

<은교>, 사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

 

"할아버지. 뾰족한 연필이 슬퍼요?" 열일곱 살 소녀 은교(김고은)가 칠순이 다된 국민시인 이적요(박해일)에게 묻는다. 이적요는 어린 시절 학교 갈 때 필통에서 달각거리던 연필 이야기를 통해 연필이라도 각자의 기억에 따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가진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은교가 "그게 시인가요?"하고 되묻는 것처럼 시란 그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라도 저마다의 의미로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과 다름 아닌 것이다.

 

 

사진출처: 영화 <은교>

<은교>에 대한 홍보 마케팅 포인트가 이 영화가 가진 진면목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갖는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다. 마치 19금 영화로 치부되고, 나이든 할아버지가 어린 여고생을 탐하는 변태적이고 성적인 영화인 것처럼 오인되는 시선이 관객들을 영화로 끌어들이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이 영화는 개봉 이전부터 성기나 음모 노출 같은 노출 수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많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똑같은 벗은 몸이라도 그것을 성적인 노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 하나의 나이 들어가는 육체로 바라보는 시선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멸해가는 몸에 대한 서글픈 인간의 조건을 다룬 <은교>에서 노출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적요의 벗은 몸은 그 쓸쓸함을 담아내고, 은교의 벗은 몸은 청춘의 생기를 담아내며, 서지우(김무열)의 벗은 몸은 외로움과 욕망을 담아낸다.

 

산장처럼 깊숙한 숲속에 놓여진 이적요의 집은 이적요 자신처럼 고적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속에 쌓여진 책들 속에 앉아있는 이적요의 모습은 마치 책들의 무덤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책이란 유적처럼 남는 것이 아닌가. 그 이적요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그 집에 어느 날 느닷없이 은교가 들어온다. 은교는 그 낡은 마룻바닥을 청소하고 서재 곳곳에 놓여진 찻잔들을 치우고, 먼지가 낀 유리창을 깨끗이 닦는다.

 

사실 은교의 노출이나 섹스보다 더 가슴을 살랑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낡은 이적요의 공간에 풋풋한 은교가 들어온다는 그 사실일 것이다. 이적요는 차츰 낡아져가는 자신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청춘'의 설렘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은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이적요의 옆에 젊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서지우가 있다는 것은 이 사랑의 아이러니를 잘 대비시켜준다. 젊은 서지우와 은교가 서로의 몸을 탐하는 것은 '외로워서'이다. 젊은 그들은 육체의 욕망에 눈 멀어 사랑을 보지 못하고, 나이든 노구의 시인은 사랑을 느끼나 이미 늙어버렸다. 훗날 은교가 벽을 향해 등 돌리고 누워 있는 이적요에게 쏟아내는 그 눈물이 그토록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건 그 등 돌림 하나가 거대한 시간의 장벽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은교>는 벗은 몸의 에로티시즘보다 그 생기발랄한 몸이 주는 생명력과 사멸해가는 몸의 비통함이 더 느껴지는 영화다. 극 중에 서지우가 이적요에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추문"이라고 얘기했을 때, 이적요가 분노하는 건 마치 이 영화에 대한 오독을 경계하는 말처럼 들린다. 스캔들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분명한 <은교>는 그래서 야하다기보다는 슬프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