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시간도 기다림으로 채우는 '슈스케'의 힘

'슈퍼스타K3'(사진출처:Mnet)

"60초 후에 공개됩니다." '슈퍼스타K'에서 김성주 아나운서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이 멘트는 사실 광고 소개나 마찬가지다. 케이블 채널이라는 특성에 맞춰 중간 광고를 60초 넣게 되면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프로그램 도중 뚝 끊기고 광고가 나오는 것을 인식한다면 시청자들은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웬걸? 김성주 아나운서가 이 멘트를 던지는 순간, 불만보다는 기대감 섞인 웃음이 나오는 건 왜일까. 도대체 무엇이 불만을 기대로 바꾼 것일까.

이 멘트가 거의 유행어가 된 이유는 그 멘트가 사용되는 지점과 관련이 있다. 즉 이 멘트는 '슈퍼스타K'라는 오디션 경쟁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은 하이라이트 지점에 포진되어 있다. 이 멘트는 본선 이전의 예선에서는 출연자들에게 어떤 상황이나 사건이 벌어졌고 그것에 대한 의문이나 궁금증이 커지는 지점에 들어갔으며, 본선에서는 어김없이 탈락자 발표 순간에 들어간다. "이번 오디션의 탈락자는..."하고 잠시 시청자와 밀고 당기는 김성주 아나운서의 입에 시청자와 관객의 눈길이 집중되었을 때, 그 긴장감을 무너뜨리며 "60초"가 언급된다.

이렇게 되자 '60초'의 시간은 광고가 송출되는 시간이 아니라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기대감의 시간으로 바뀐다. '60초'는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알리는 시청자와의 약속어가 된 셈이다. 무엇보다 막연한 '잠시 후'가 아니라 '60초'라는, 구체적인 시간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만일 '잠시 후'라고 했다면 언제 프로그램이 시작될 지 알 수 없는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60초다. 그 구체적인 60초는 시청자들을 기대감에 충분히 기다리게 해준다.

물론 '60초 후에 공개됩니다'라는 멘트가 이렇게 효과적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 첫째는 김성주 아나운서의 이른바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즐거워지게 되는' 진행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김성주 아나운서는 스포츠 아나운서 출신답게 '슈퍼스타K'라는 무대를 온전히 하나의 스포츠 게임처럼 구성하는 능력이 있다. 출연자를 소개할 때는 마치 권투나 이종격투기 경기의 그것을 연상시키고, 노래를 부른 출연자들을 세워두고 심사위원의 평가를 받을 때는 마치 중간에 선 심판 같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물론 탈락자 발표에 있어서 밀고 당기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은 그의 진행의 백미다. 이런 진행 방식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60초'를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된다. 그것은 즐거움을 위한 것이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두 번째 전제다. 그것은 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연 자체가 누가 남고 누가 탈락할 것인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팽팽하다는 데 있다. 만일 우열이 확실히 갈린다면 마지막 탈락자 발표 순간의 '60초'는 밋밋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그 시간 또한 지루해질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숨은 실력자로 무대 위에 오른 그들의 경연은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도대체 이 이미 자신들만의 스타일이 완성된 듯한 팀들의 우열을 어떻게 예측할 것인가.

많은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슈퍼스타K'가 독보적인 프로그램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로 이 경중을 평가할 수 없는 뛰어난 실력의 참가자들 덕분이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 당연히 가장 많은 경쟁자들이 몰리기 때문일 것이다. 많이 오기 때문에 그만큼 실력자도 많은 셈이다. 프로그램 중간에 떡 하니 60초 정도는 기다리게 만들 수 있는 힘. 광고시간마저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채우는 '60초'의 위력은 그래서 거꾸로 이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참가자들의 높은 질적 수준을 얘기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가수', 문제도 해법도 청중에게 있다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나는 가수다'는 가수의 무대일까, 청중의 무대일까. 가수의 정체성을 묻는 제목을 보면 마치 이 무대가 가수가 주인공인 무대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가수다'는 철저히 청중과 대중이 주인공인 무대다. 이 무대가 특별한 것은 가수들보다는(그렇다고 그들이 특별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청중들 덕분이다. 아주 미세한 숨소리까지 긴장하며 들어주는 청중이 있기 때문에 가수들은 더 긴장하고 자신의 전력을 다하게 된다.

게다가 이 가수들은 지금껏 TV를 통해서는 '들어주는 귀'가 별로 없던 가수들이다. 그러니 이런 청중이 있는 무대가 주는 힘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제 아무리 가창력이 좋은 가수라고 해도 '들어주는 귀(이것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잘 부르지도 못할 것이다. 노래는 '공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라이브 현장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부르는 노래가 더 깊은 감흥을 주는 건 그런 이유다.

하지만 청중들의 귀는 훈련받은 귀가 아니라 그저 감성과 자극에 솔직한 귀다. 그러니 자극이 강한 지르는 창법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부르는 노래보다 먼저 더 귀에 박히기 마련이다. 조규찬의 도전 첫 라운드에서의 탈락과, 특집으로 기획된 '나가수 출신 가수들'의 경연에서 이소라가 7위를 한 것에 대해 이른바 '막귀 논란'이 생긴 건 이러한 가수별 특성에 대한 고려가 없어 보이는 경연 시스템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전문가들에게 일정 부분 경연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장르적인 고려가 가능해져 좀 더 다양한 가수들이 이 무대에 설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대중들의 '막귀 논란'에 대한 지적은 어딘지 논리적인 모순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이 막연히 '나는 가수다'의 청중이라고 지칭하는 그들은 어쩌면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청중평가단을 신청할 수 있고 평가단에 선정되면 투표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막귀'라는 지적하는 그들은 사실은 우리 자신이다. 김영희PD가 "지금 청중평가단도 달라지고 있다"고 얘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막귀 지적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이 바로 그 달라지고 있는 청중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 말은 '나는 가수다'의 투표 시스템이 결국 청중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문제제기를 하는 순간 이미 그 해결책도 제시되는 셈이란 얘기다.

본래 투표 시스템이라는 것이 그렇다. 누가 더 낫고 못하다는 것을 어떻게 절대적인 기준으로 따질 수 있을까. 다만 한 명을 뽑는 것이니(물론 '나가수'는 세 명을 투표하지만) 각자 청중들이 각자의 취향에 따라 투표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투표하는 청중들도 여론을 인식하고 있다. 지르는 노래가 당장 귀에는 들어오지만 그것만 좋은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차츰 알아가고 있다. 그러니 '나는 가수다'는 어느 순간에는 지르기만 하는 가수를 외면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딘지 촌스러운 발악처럼 여겨질 지도.

'나는 가수다'에 변화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이미 변화를 담보하고 있다. 그것은 '나는 가수다'라는 무대가 애초부터 가수들의 무대가 아니라 청중들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청중들이 원하는 것을 가수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들여 부르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수들의 존재이유이도 하다. '나는 가수다'라는 가수들의 자기존재 증명은 홀로 자기감정에만 빠져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거기 앉아 있는 청중들과 호흡하는 데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수다'의 진면목은 어쩌면 '나는 청중이다'인지도 모른다.


'안녕', 토크쇼도 이제 일반인 출연 트렌드?

'안녕하세요'(사진출처:KBS)

'안녕하세요'에는 '대국민 토크쇼'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어있다. 이 토크쇼는 물론 연예인들이 MC로 앉아있고, 연예인 게스트도 있지만 그들이 주인공은 아니다. '대국민 토크쇼'라는 수식에 걸맞게 이 토크쇼의 주인공은 일반인들이다. '전국고민자랑'이라는 코너는 특별한 사연들을 가진 일반인들이 자신들의 고민을 토로하는 장이다. 연예인들은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웃고 공감해주는 것으로 그들의 소임을 다한다.

일반인들이 주인공인 만큼, 그들에게 낯설 수 있는 스튜디오에는 그들을 좀 더 편안하게 해주려는 배려가 묻어난다. 일단 일반인들이 보내준 고민에 대한 사연을 MC가 맛깔나게 읽어주고 나서 기대감을 갖게 한 후, 출연자는 마치 놀이터에 들어오는 것처럼 미끄럼틀을 타고 무대로 내려온다. 무대를 올라가는 부담감을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방식으로 없애주려는 의도다. 객석들 아래로 놓여진 무대에 마치 사랑방처럼 좌식으로 앉아있는 것도 그 편안함을 유지하려는 프로그램의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반인들의 고민을 자랑(?)하는 마당을 깔아 놓은 이유는 그들이 갖고 오는 사연이 재미있는데다가 무궁무진한 다양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수발을 들어주느라 거의 노예처럼 산다는 남편, 아빠가 하도 어리광을 부려 마치 동생이 하나 있는 것 같다는 아들, 목소리가 특이해 사회생활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람에서부터 특정 연예인을 너무 좋아해서 가정을 등한시한다는 사람까지, 별별 사연들이 다 올라온다.

눈치 빠른 시청자라면 이것이 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매특허의 히트코너인 시청자 사연 코너를 방송 버전으로 끄집어낸 것이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그 자리에 이런 방송에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컬투와 이영자가 앉아 있는 건 그런 이유다. 또한 여기에 특히 일반인 출연자들과의 밀고 당기는 토크가 장기인 신동엽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가 '화성인' 같은 여타의 일반인 게스트 프로그램과 달리, 특유의 훈훈한 느낌을 주는 것은 역시 아날로그 느낌이 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청자 사연 코너를 정확히 벤치마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토크쇼는 최근까지도 연예인들 혹은 유명인들만이 출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것은 토크쇼만이 아니라 TV라는 공간 자체가 그랬다. 하지만 최근 이 벽은 허물어지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일반인 출연자들의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주었다면, 최근 '안녕하세요'나 '화성인' 같은 토크쇼들은 이 경향이 토크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일반인이 출연했을 때 어떤 강점이 있는걸까.

물론 일반인은 연예인보다 그 주목도가 낮다. 따라서 프로그램 인지도가 높아지지 않는 이상 높은 시청률을 끌어내기가 불리하다. 하지만 일단 프로그램 형식에 대한 호감도가 생기고 나면 오히려 연예인 게스트보다 유리한 점도 많다. 즉 연예인 게스트들의 홍보성 출연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토크의 소재가 무한정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물론 '안녕하세요' 같은 일반인 게스트 토크쇼는 여전히 실험중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시청자들이 방송에서 원하는 풍경은 분명 그려내고 있다. 거기에는 연예인과 일반인이 똑같은 눈높이로 앉아 고민을 얘기하고 공감한다. 이것은 어쩌면 영상과 방송이 일상화된 시대로 진입해가는 TV에게 대중들이 바라는 새로운 얼굴인지도 모른다.


혼자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일주일만 살아본 적이 있다면, '인간은 반려(伴侶)의 동물'이라는데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게다. 뭣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심지어 낭만적으로 읽혔던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가 사실은 처절한 생존기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에서 톰 행크스가 폭풍에 떠내려간 윌슨씨(윌슨 배구공이다)를 그토록 애절하게 부르던 장면이 이해가 갈 것이다. 정말이지 모든 인연을 끊고 속세를 저버린 고승들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혼자 살아간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끔찍한 반 지하 자취방에서 두문불출 소설만 쓰던 시절, 친구의 전화 한 통화는 삶의 빛과 같았다. 전화를 받으면 그 곳이 어디든 쪼르르 달려 나가던 나는 친구들과의 이 유난한 애착(?) 관계가 다 이 놈의 어두침침한 반 지하 자취방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이 방만 벗어날 수 있다면 감기처럼 앓던 우울도 사라질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웬걸? 우울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반려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된 건, 휴가를 떠나며 일주일만 자기 집을 봐달라는 친구 덕분이었다. 마치 럭셔리 펜션으로 여행 가듯 즐겁게 친구네 48평 짜리 강남 아파트에 놀러 간 나는 단 이틀만에 똑같은 외로움에 빠져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외로움을 이겨내게 해준 건 그 집 어항에 있던 거북이였다. "이틀에 한 번 밥 좀 챙겨줘라." 이게 친구가 내게 일주일 간 집을 맡긴 이유였는데, 처음엔 여행가면서도 보호받는 이 놈을 보며 묘한 질투심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한 이틀이 지나자 자연스레 나는 이 거북이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인간이 반려의 동물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반지하방 옆 칸 사는 젊은 친구와 가끔 소주 한 잔하는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어디 인연이 좋기만 할까.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갖고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은 어쩌면 거꾸로 관계의 피곤을 앓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수많은 관계 속에 개나 고양이 같은 관계를 더 끼워 넣고 싶어 한다. 처음엔 그 때 생각 때문인지, 거북이를 키웠고, 그 다음엔 열대어, 그 다음엔 햄스터를 키웠다. 거북이는 방치되다가 결국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단양의 한 호수에 방생되었고, 열대어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모두 죽어버렸다. 철장을 빠져나오자 쥐의 공포로 돌변한 햄스터는 결국 다른 집으로 입양 가버렸다. 이제 정말 반려동물이라면 질색을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러다가도 아이들이 고양이나 개를 키우고 싶다고 얘기하면 또 마음 한 구석이 흔들리니 말이다. 혼자 있으면 외롭다가 둘이 되면 관계의 피곤을 느끼는 건 이 인간이라는 반려의 동물의 아이러니인가 보다. 그래도 그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그 누군가를 보듬고 싶은 욕망을 어찌 이겨낼 수 있으랴. 혼자보다는 그래도 둘이 더 좋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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