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 대한 편견을 깨는 착한 드라마, '별을 따다줘'

“별을 따다준다”는 말은 언뜻 듣기엔 유치하고 상투적으로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이 말을 늘 상투적으로만 사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별을 따다줘’라는 드라마가 이 말을 다시 시청자들에게 건네는 방식은 자못 도전적이다. 우리가 상투로 생각하던 그 말에 대한 작가의 동심 같은 순수한 진정성이 절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별을 따다줘”라는 말을 유치하게 여기는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시청자들에게, 그 말이 본래는 감동적인 것이라는 걸 알게 해주는 드라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부모가 모두 하늘의 별이 되어버리고 갑자기 혹처럼 달리게 된 다섯 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내야 하는 진빨강(최정원)은 절망적이다. 자기 하나도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철없이 살아온 그녀에게, 가장의 책무가 내려진 것. 집도 절도 없는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길거리를 떠돌다, 원강하(김지훈)의 집의 가정부로 아이들을 숨긴 채 들어온다. 회사에서는 꼴찌 보험설계사, 가정부로서도 빵점인 그녀는 아이들과의 생존을 위해 할 짓 안할 짓 다하지만 나아지는 건 없어 보인다.

아직 아기인 막내를 짐처럼 등에 업고, 벤치에 앉아 절망에 빠져있는 그녀. 그 때 마치 하늘의 별이 된 부모가 건네는 말에 대한 대답처럼 막내의 옹알이가 들려온다. “별을 따다줘.”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청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하지 않은 그 옹알이를 듣는 순간, 진빨강은 절망을 뚫고 올라오는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 어찌 현실에서 별을 따다 줄 수 있겠냐마는 그 말은 진빨강의 마음 속에 있던 짐을 희망으로 바꿔버린다. 부양해야할 짐으로만 생각해왔던 아이들은 이제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그래 저 별 다 따다 줄께!”하고 진빨강은 소리친다.

‘별을 따다줘’는 짐처럼 거치적거리게 생각되던 가족이라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힘의 원천임을 말해주는 드라마다. 남겨진 다섯 명의 아이들은 그렇게 먼저 진빨강의 마음 속으로 들어와 그녀를 바꾸어놓는다. 남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서 친구의 등이나 쳐먹던(?) 그녀는 달라진다. 살아가야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타인(혹은 타인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을 가족처럼 대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을 생각하며 물기 없이 살아가던 그녀의 삶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아이들이 바꿔놓는 존재가 진빨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들은 그 스스로 주변에 벽을 치고 살아가는 원강하의 영역으로 자꾸만 침범해 들어온다. 원강하의 집은 피도 눈물도 없는 그의 마음을 똑같이 그려낸다. 그는 가정부로 들어온 진빨강에게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음식도 입맛에 정확히 맞춰야 하며, 자신이 있는 이층방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투명인간처럼 일하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 집의 말끔함은 원강하의 무미건조한 삶을 그대로 담아 보여준다.

그의 집으로 숨어들어온 아이들은 그러니까 그의 마음 속으로 숨어들어온 존재들이나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어느 날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몽유병 증세가 있는 아이 진파랑(천보근)이 자신의 침대에 들어와 자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 속으로 조금씩 스며든다. 그러면서 그 마음은 조금씩 열린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 속으로 불쑥 들어온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원강하는 그 침범이 싫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이 드라마는 힘겨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보면 누구나 갖게 마련인 ‘측은지심’을 말한다. 소파에서 떨어지려 하는 아이를 보며 어떻게 지나칠 수 있으랴. 쓰러지려는 막내를 껴안아 올리고 우는 아이를 본능적으로 달래기 시작하는 원강하처럼, 드라마는 이 힘겨운 삶에 처한 진빨강을 향해 손을 내밀기 시작한다. 같은 집에 살아가는 원강하의 동생 원준하(신동욱)와 조카 우태규(이켠)는 그녀와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형을 설득하려 한다. 회사의 팀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에게 기회를 주려한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그녀가 짐이라 생각했던 아이들이 거꾸로 그녀에게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아이들을 위해 “별을 따다주겠다”는 그 마음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 이것은 사회가 흔히 보여주는 약자에 대한 편견을 뒤집는다. 약자라 하면 늘 돌봐 주어야 할 존재로서만 여기지만, 사실 그들이 있어 우리가 살아간다는 생각을 우리는 하지 않는다. ‘별을 따다줘’는 이 이야기를 웃음의 코드로 유쾌하게 우리에게 전하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과 ‘가문의 영광’을 쓴 정지우 작가의 작품들과 궤를 같이 한다. 정지우 작가의 작품들은 주로 유쾌한 멜로를 다루지만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정, 어쩌면 인간애에 더 가깝게 그려진다. 그 안에는 부족한 듯 보이는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그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 변화 가능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정지우 작가의 작품을 훈훈하게 만드는 이유다. ‘별을 따다줘’는 그 훈훈함이 무미건조해져버린 우리네 마음까지 녹여주는 착한 드라마다.

‘파스타’가 일과 사랑을 엮는 방식

‘파스타’와 ‘커피 프린스 1호점’은 여러 모로 닮았다. 먼저 음식점이 배경이라는 점이다. 커피 전문점과 파스타 전문점은 이 드라마들에 묘한 식욕을 돋우는 애피타이저들다. 그 공간에 포진한 꽃미남들과 그 속에 유일하게 서 있는 홍일점 주인공이라는 설정도 그렇다. 여기서 가능해지는 것은 일과 사랑의 공존이다. 일터라는 공간 속의 남과 여. 그것도 여러 명의 남자들과 여자 한 명이라는 설정은 이 여자 주인공의 일과 사랑이 가진 난관을 더 첨예하게 만든다. 남자들과 경쟁해야 하고, 또 그 남자들 중 하나와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파스타’와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다르다. 가장 다른 점은 남자 주인공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한결(공유)이나 한성(이선균)은 모두 한없이 여성들에게 부드러운 남자들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꽃미남 종업원들도 모두 수직적인 위계질서와는 거리가 먼 수평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들이다. 하지만 최현욱(이선균)으로 대변되는 ‘파스타’의 라스페라에 있는 남자들은 위계질서 속에 서 있다. 마치 소리 지르는 게 일상인 듯 이들은 서로 자신의 위치가 높다고 으르렁댄다.

그러니 공간이 주는 분위기도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늘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주지만, ‘파스타’의 라스페라는 늘 전쟁터다. 주방장은 사장과 늘 대립하고, 직원들 위에 군림하며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새 주방장 현욱이 데려온 요리사들은 기존 라스페라의 요리사들과 대립하며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유일한 여성인 서유경(공효진)은 편견에 얽매인 남성들의 세계와 부딪치며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라스페라의 주방이 환기시키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던 직장의 세계, 그 위계질서의 세계 속에서 직장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상황을 라스페라의 주방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 사회가 가진 남성 헤게모니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팀장 현욱의 마초적인 권위와 그 속에서 패배하지 않고 버텨내는 이제 막 인턴을 끝낸 사원(?) 서유경의 모습이 많은 직장인들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라스페라의 주방이 또한 주방장 현욱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주방장이 바뀌면 주방의 풍경도 바뀌는 것은, 주방장의 마음이 고스란히 주방에 변화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현욱이 라스페라에 오면서 주방은 전쟁터가 된다. 그것은 현욱의 마음이 ‘전쟁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과 성공에 상처 입은 요리사는 그 마음 그대로 주방에서 감정을 지워버린다. 주방에서의 사랑이 용납되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이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일과 사랑을 다루는 멜로드라마의 접점이 생겨난다. 주방장 현욱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내는 라스페라의 주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존재 서유경은, 바로 그대로 현욱의 마음 속에서 살아남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드라마 ‘파스타’는 일과 사랑을 다룸에 있어서 ‘커피 프린스 1호점’이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맛을 낸다. 현실의 축소판으로서의 주방과 상처 입은 주방장의 마음을 대변하는 주방을 일치시킴으로써, 그 이야기가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멜로의 틀을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남자의 주방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와 그 남자의 마음을 여는 이야기가 서로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현실+판타지+실용 > 논란

‘공부의 신’이 가진 현 교육제도에 대한 태도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천하대(사실상 서울대의 다른 말이나 마찬가지다)를 가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반은 전형적인 우리네 교육 정책의 엘리트주의를 그대로 답습한다. 특별반에 들어온 네 명의 아이들은 그래도 선택받은 아이들이지만 나머지 병문고 아이들은 거꾸로 버려진 아이들과 마찬가지다. 물론 천하대 특별반을 만드는 강석호(김수로) 변호사는, 늘 그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룰 속에서 패배자로 남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룰을 바꾸기 위해서 천하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위해 엘리트 교육 시스템을 답습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또한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본래의 뜻을 갖고 있는 ‘공부’라는 말이 이 드라마가 내세우고 있는 ‘공부의 신’과 잘 어울리는지도 의문이다. 항간에는 ‘공부의 신’이 아니라 ‘입시의 신’이 더 맞는 표현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입시를 위한 문제풀기의 방법을 익히는 과정을 주로 보여준다. 문제풀기와 실제 배움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논란거리들에서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거꾸로 현실에서 찾아진다. 아마 드라마가 우리네 교육 현실을 실감나게 다루지 않고 그저 뜬구름 잡는 이상만 떠들어댔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이상적일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공감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네 교육현실은 한창 꿈꾸어야 할 아이들이 하루 네 시간씩 자며 입시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니 이 참담한 교육현실을 외면하고 교육을 다루는 드라마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부의 신’은 바로 그 현실을 그대로 가져와 드라마의 바탕으로 깔아놓는다. 그리고 이 현실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는다. 만일 현실을 현실 그대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그려냈다면 ‘공부의 신’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부를 해야할 시간에, 혹은 아이들 공부할 시간에 굳이 이 드라마를 보며 현실의 씁쓸함을 곱씹을 시청자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현실 상황 위에 그것을 넘어서는 판타지를 집어넣음으로써 시청자들이 현 교육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대리 체험하는 쾌감을 제공했다. 물론 ‘수학의 신’ 차기봉(변희봉) 선생이나, 춤과 노래를 하는 앤써니 양(이병준) 같은 영어 선생이 학교에서(아마 학원에서는 가능할 것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천하대 특별반에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고, 그 사연을 넘어서 도전하는 모습과 이를 도와주는 선생들의 이야기는 지친 수험생과 부모들에게 드라마가 주는 작은 위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여기에 ‘공부의 신’은 보다 강력한 양념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판타지 위에 지극히 실용적인 공부의 방법(문제 푸는 방법이 더 많지만 이것이 더 실용적이다)들을 제공한 것. 영어문장을 독해할 때, “단어를 모르더라도 찾아보지 말고 일단 때려 맞춰라”라는 방법이나, 수학문제를 풀 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서로 문제를 내보는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니 이 실용적인 정보들은 판타지와 만나면서, 판타지를 더욱 강화하는 힘을 부여한다. 저렇게 공부하면 나도 천하대(사실은 명문대)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다르지만.

‘공부의 신’의 성공방정식은 ‘현실+판타지+실용 > 논란’이다. 즉 현실을 바탕으로 제시하고 그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은 후, 추가로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스토리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힘은 이 드라마가 “기존 잘못된 교육정책을 결국은 인정하고 심지어는 부추기고 있다”는 그 논란의 불씨마저 압도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대해 우리는 양가감정을 갖게 된다. 드라마의 내용에 강력히 공감하면서도(현실적인 공감),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그 마음. 드라마의 성공이 그만큼 현실의 실패를 말해주는 그 씁쓸한 상황, 이것이 ‘공부의 신’의 성공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천하무적 야구단', 야구는 예능과 어떻게 만났나

찰떡궁합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와, 역시 각본 없는 웃음을 주는 예능이 잘 어울린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야구와 예능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아마도 어디서부터 해야할 지 난감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달려라 슛돌이'의 축구와 '천하무적 야구단'의 야구는 확실히 다르다. 축구는 공을 상대방 골에 넣으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룰을 갖고 있지만, 야구는 책으로 공부해야 할 정도로 룰이 복잡하니까.

예능 프로그램이 일부 야구팬들만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 '천하무적 야구단'은 복잡한 룰을 전혀 야구를 접해보지 못한 일반인들까지 대상으로 보여주면서, 야구도 하고 또 예능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천하무적 야구단'에 들어온 인물들도 야구를 아예 모르는 초보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마르코는 룰 자체를 몰랐고, 김준은 겉보기와 달리 거품(?)이었으며, 마리오는 외모는 메이저 리그였지만 실력은 동네야구 수준이었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야구 룰은 알고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늙은 사자 이하늘, 의욕은 충만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과욕이 되곤 하는 김창렬, 나이 어린 동호, 부실한 몸의 한민관... 그나마 야구를 곧잘 하는 오지호와 김성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공격 이야기고 수비로 들어가면 이들 역시 구멍이었다.

그러니 전적은 지금껏 3승이 고작인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바로 이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점이 '천하무적 야구단'에는 오히려 약이 되었다. 이 예능은 바로 이 실제 야구와 현실인 예능 사이의 거리만큼 리얼 버라이어티쇼로서의 성장스토리를 보여줄 수 있었다. 매번 마르코를 내세워 경기 룰을 가지고 퀴즈를 내고, 후에는 백지영을 단장으로 포섭해 상대적으로 야구에 관심이 덜 한 여성 시청층까지 공략했다. 그들이 차근차근 룰을 공부해가고 경기를 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야구는 조금씩 시청자들에게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야구는 오히려 축구보다 좋은 리얼 버라이어티의 소재가 되었던 것.

바로 이 점은 야구라는 스포츠에도 그대로 큰 도움을 주었다. 야구라는 조금은 거리가 있어보이는 스포츠의 저변을 넓히는데 이만큼 강력한 방법은 없었던 것. 리얼 예능이 가진 독특한 스토리 방식, 즉 웃음을 주면서도 쉬운 것에서부터 차츰 복잡한 것으로까지 이야기를 넓혀나가는 이 스토리의 힘은 야구를 보다 가까이 시청자들 앞에 가져다 놓았다. 프로야구협회에서 '천하무적 야구단'에 상을 주고, 7명의 내로라하는 프로야구 감독들이 이들을 위한 일일코치를 자처하는 등의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두산 베어스의 김경문 감독은 가르쳐주는 입장에서도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거듭 전했다. 그리고 이 감독들의 일일코치를 담은 영상들은 하나의 쉽고 재밌는 야구교본을 방불케 했다.

야구의 저변을 넓히는 것 이외의 효과로서 프로야구경기에 '천하무적 야구단'이 부여한 '야구에 대한 실감'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천하무적 야구단'을 시청해온 분들이라면 2009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는 '천하무적 야구단'이라는 리얼 스포츠 버라이어티쇼를 통해 야구가 누구나 공을 던지고, 때릴 수 있는 그런 쉬운 경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프로야구에서 흔히 보이던 더블 플레이 하나에도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고 감탄을 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프로야구가 보여주는 실책 없는 경기나 담장을 넘기는 홈런에 남다른 실감을 가질 수 있었다.

'천하무적 야구단', 이 야구와 예능의 만남은 양쪽에 모두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예능은 특별한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고도 야구 자체가 가진 재미를 통해 특유의 리얼 성장 스토리를 보여줄 수 있었고, 야구는 이 예능을 통해 야구라는 스포츠가 가진 매력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 좌충우돌 야구단은 한 발 더 나아가 보다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회인 야구를 위해 '꿈의 구장'을 지으려는 것. 야구와 이 예능이 가진 찰떡궁합의 행복한 공존을 통해 볼 때,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꾼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꿈을 향해 달려가는 성장 스토리를 근간으로 삼는 리얼 예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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