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쓰나미급 흥행, 인간, 시간, 공간을 담았다

'해운대'는 흥행도 쓰나미급이다. 벌써 600만 관객을 넘어 이번 주말에는 700만 관객을 넘보고 있다. 올해 들어 가장 높은 흥행 수치이면서, 그 흥행 속도 또한 점점 빨라지고 있어 역대 최고가 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초대형 쓰나미가 해운대를 덮친다'는 간략하지만 강력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해운대'. 도대체 무엇이 이런 쓰나미급 흥행을 만들었을까.

볼거리에 웃기고 울리기까지, 인간을 담다
그 첫 번째 요인은 영화 내적인데서 찾아볼 수 있다. '해운대'는 블록버스터 재난영화를 장르로 취하고 있지만, 여타의 유사 재난영화와는 결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우리 식의 멜로와 가족드라마적 전통을 내러티브로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쓰나미가 해운대를 강타하는 그 지점 이후를 떼놓고 보면, 이 영화에서 우리는 다양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익숙한 멜로드라마와 가족드라마를 발견할 수 있다.

재난이라는 상황이 도달하기까지의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은 코믹하게 그려진 멜로드라마와 가족드라마의 틀로 채워 넣었다. 좀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해운대'는 그 과장을 감수하고라도 기꺼이 관객들을 웃기는 블록버스터로서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블록버스터란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면에서 개연성 자체보다(물론 개연성이 없으면 안되겠지만) 효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초반부에 확고히 웃겨주면 후반부에 확실히 울릴 수 있다는 '해운대'의 계산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이것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갖는 아드레날린의 롤러코스터를, 우리식의 감정의 롤러코스터(웃기고 울리는)로 해석한 결과다. 쓰나미가 해운대를 먹어 치우는 볼거리는 물론이고, 드라마에 웃고 울었다는 그 포만감은 관객들의 만족감으로 나타났다. 이로써 '해운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는 발견이 쉽지 않은 '인간'을 담아냈다.

여름방학! 우리도 '해운대' 보러가요, 시간을 담다
'해운대'가 제 아무리 좋은 영화 내적인 장치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이들이 제한적이라면 이처럼 쓰나미급 흥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운대'가 가진 이야기는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아이들에게도 어필했다. 12세 관람가의 '해운대'와 '국가대표'는 지금 현재, 극장에서 우리 영화의 흥행이 얼마나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의 손에 달려 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차우'는 영화 자체가 매니아적인 면모를 갖고 있어, 12세 관람가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흥행에서 멈추고 있는 형국이며, '10억'은 15세 관람가인데다, 영화 내적인 면에서도 그다지 잘 짜여진 스토리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 흥행은 미지수다. 하지만 '국가대표'나 '해운대'는 확실히 아이들의 시선을 끌어 잡는데 성공했다. 전반적으로 웃음과 감동 같은 가족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다가, 그 위에 볼거리를 더했으니 아이들 입장에서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영화가 된 것이다. '해운대'를 보기 위해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손을 잡고 극장을 찾는 풍경은 낯선 것이 아니다. '해운대'는 여름방학이라는 시간을 영화 속에 확실히 담아냈다.

해운대라는 지역, 공간을 담아내다
'해운대'는 제목 자체가 실제 공간인 해운대를 지칭한다.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호텔과 빌딩이 서 있는 이 도시와 해변이 공존하는 곳으로서, 해운대는 영화적으로도 가장 적합한 공간이다. 부산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인데다, 여름 휴가철이면 뉴스보도에 늘 첫 번째로 나오는 바로 그 곳. 그만큼 해운대라는 공간은 지금 영화가 한창 상영되는 이 시점에 가장 핫한 곳이 아닐 수 없다. 그 곳으로 쓰나미가 덮친다? 이것은 하와이나 도쿄에 쓰나미가 덮치는 것과는 다른 강력한 스토리성과 화제성을 유발한다.

'해운대'의 흥행에는 바로 이 해운대라는 지역이 가진 힘이 내재되어 있다. 실제 해운대에는 영화 해운대의 포스터들이 즐비하게 걸려있고, 부산 시민들은 바로 이런 영화적 관심이 만드는 지역에 대한 주목을 환영하고 있다. 병에 '해운대' 포스터를 넣고 해운대 무료시사까지 진행하는 대선주조처럼 지역에 연고를 둔 기업들이 이른바 '해운대' 마케팅을 통해 실질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는 점은 이 영화에 대한 부산 지역의 호감이 얼마나 큰 지를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운대'의 쓰나미급 흥행은 이처럼 희비극을 품은 인간과, 여름방학이라는 시간, 그리고 해운대라는 공간이 잘 균형있게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갖는 토착적인 특징들(이 땅의 인간, 시간, 공간)을 이 블록버스터가 잘 파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깊이가 있다거나, 영화적인 완성도에 있어서 어떤 성취를 했다거나 하는 그런 영화라고 볼 수는 없지만, 블록버스터의 토착화라는 점에서는 이 영화가 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파’라는 용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다. 그 용어는 주로 최루성 멜로물, 자극적인 설정 남발, 뻔한 소재와 스토리 전개처럼 구태의연하고 식상한 스토리텔링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 현재의 작품을 얘기할 때, 신파적이라는 말은 절대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부정적인 의미의 신파 코드들이 여전히 문화 전반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고, 때로는 호평받는 작품 속에서도 발견되며, 심지어는 이 코드를 버리고서는 대중성을 얻기가 어렵다고까지 말한다.

시청률 45%를 넘긴 국민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흔히들 착한 드라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호칭은 작가 스스로도 밝혔듯이 애매한 구석이 많다. 이 드라마는 물론 주제가 착하지만, 드라마의 극적 구성으로 보았을 때 여타 자극적인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탓이다. 아무리 계모라 해도 남편이 죽자(실은 살아있지만) 자식을 내치고 그 유산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정신지체인 은성의 동생 은우까지 멀리 내다버리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은 자극이다.

그런데 이 극과 극을 치닫는 대립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른바 신파 코드(이것은 신파라기보다는 신파적인 코드들을 활용하는 것을 지칭한다)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계모에 의해 버려졌지만 착한 심성으로 하늘이 도와 결국, 잘 살게 되는 이야기 구조는 우리네 고전적인 이야기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으로, 신파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찬란한 유산>의 고은성이 계모 백성희로부터 버려지지만, 그 착한 심성으로 거의 신적인 존재인 장숙자 여사(반효정)의 구원을 받는(게다가 왕자님인 선우환(이승기)까지!) 이야기는 소재적으로나 극적 구성에 있어 신파 코드를 잘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파 코드의 활용은 이미 우리네 드라마에서 흔한 것들이다. 대표적인 신파 코드인 출생의 비밀은 최근 드라마들만 예로 들더라도 쉽게 발견된다. 시대극을 표방한 <에덴의 동쪽>이 그렇고, 다시 리메이크된 <미워도 다시 한 번> 역시 그러하며, 심지어 최근 방영되는 사극 <선덕여왕>이나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는 <태양을 삼켜라>에서도 이 코드는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된다. 그 이유는 그 신파적인 코드가 자극적인 감정 분출을 쉽게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유행했던 막장 드라마는 바로 이 자극적인 감정 분출의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파적인 코드들, 예를 들면 출생 비밀, 불륜, 불치 같은 소재들을 섞어 심지어 개연성을 무시하고 나열했던 드라마들이다.

한때 이러한 신파 코드들이 활용되는 드라마들이 외면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른바 트렌디물이라 불리던 멜로 드라마들의 퇴조와 미국 드라마(미드) 열풍으로 일어난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환호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과연 신파적이고 트렌디한 멜로 드라마는 사라졌을까? 잠깐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호응은 낮았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으로는 감정 과잉 드라마가 식상하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감성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드라마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현재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이제 미드식의 장르 드라마를 구사하면서도 그 안에 우리식의 신파 코드를 반드시 끼워 넣는다. <카인과 아벨>은 의학 드라마에 가정 비극(이 코드는 <찬란한 유산>과 유사하다)을 넣었고, <태양을 삼켜라>는 액션 드라마에 트렌디한 멜로 구조를 끼워 넣었다.

신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느낌을 주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신파가 주로 다루는 감정의 분출을 근간으로 삼는 콘텐츠들은,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음악 등에서도 하나의 지류를 이루고 있다. <친정 엄마와 2박3일> 같은 연극은 암에 걸린 딸이 친정 엄마를 찾아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전형적인 신파조의 극으로 연일 매진 사례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신파가 가진 부정적인 의미들 즉, 틀에 박힌 대사나 연출 등을 벗어나 같은 소재라도 새롭고 진지한 접근을 하려는 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2009년 상반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 역시 바로 이런 시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신파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신파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신경숙 작가의 스토리텔링에 대중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또한, 대중음악에 있어서 신파적인 코드들은 주로 외환위기 시절에 활용되었었다. 조성모의 <아시나요>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나중에 등장한 이른바 소몰이 창법들의 창궐과 퇴조는 신파 코드가 가요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대변해 준다. 현재 발라드 가수들은 여전히 신파 코드가 담겨진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예능 프로그램 출연 같은 웃음의 코드를 동시에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가수가 트리플 크라운(드라마, 가요,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이승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분야 진출은 다양한 감정의 분출을 통해 캐릭터의 균형을 잡아준다. 이것은 마치 <찬란한 유산>이 구사한 감정의 양면 전략과 유사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가요에까지 신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늘 어떤 시기에 새로운 옷을 입고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파가 가진 어떤 힘이 우리네 문화 속에서 그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한국식’이라는 수식어를 즐겨 사용한다. ‘한국식’ 블록버스터, ‘한국식’ 액션, ‘한국식’ 의학 드라마 등등. 그런데 여기서 ‘한국식’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네 정서 속에 자리한 특유의 ‘감정 중심 문화’와 ‘특유의 끈끈한 관계의 문화’가 들어 있다. 우리는 아직까지 할리우드식의 아드레날린 과잉의 드라마나 영화에 익숙하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끈끈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폭풍, 혹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콘텐츠에 더 익숙하다. 외국의 문화 콘텐츠들이 하드보일드한 감정 배제의 스토리텔링을 할 때, 우리는 끝없이 감정을 터뜨리고 끌어올리는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이것은 볼거리 위주의 콘텐츠들이 갖는 대규모의 투자와 대규모의 소비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우리네 문화 산업의 특징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는 볼거리보다는 그 속에 있는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물량 투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작품은 물론이고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문화 콘텐츠는 여전히 인력에 의지하는 산업이다.

흔히들 신파라고 말하면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마련이다. 그 상투적인 설정과 뻔한 스토리, 게다가 그런 스토리에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리고 나면 이성적인 문화의 소비자들은 도리어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에 치중하는 우리식의 문화 경향을 모두 후진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스토리텔링이란 그 나라의 문화적 특징을 부정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감정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갖는 힘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흔히 신파라고 했을 때 갖게 되는 부정적인 인상을 제거하면서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발전적인 것이 아닐까.(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볼거리만 있고 스토리는 없는 '태삼'의 문제

'태양을 삼켜라'는 애초에 기대만큼 불안감도 컸던 드라마다. 그리고 그 기대와 불안감은 같은 한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대작, 이른바 블록버스터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가 기대만큼 불안감이 큰 이유는 그것이 볼거리에 지나치게 치우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볼거리가 왜 위험성을 내포할까. 그것은 드라마라는 장르와, 그 드라마가 방영되는 TV라는 매체를 이해한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는 영화처럼 볼거리가 주는 영상체험보다는 스토리에 더 치중되는 장르다. 우리가 과거 연속극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드라마는 그 끊임없이 찾아보게 만드는 스토리의 연결고리가 그만큼 중요하다. 끊임없이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고, 캐릭터의 내면에 집중시키는 것은 따라서 드라마가 가진 책무이자 가장 큰 재미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볼거리가 드라마에 만들어주는 힘은 그다지 크지 않다. TV라는 매체 자체가 집중보다는 분산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여지는 영상만으로는 영화만큼의 몰입도를 가져오기가 어렵다. 폐쇄된 공간에 불이 꺼진 채 대형 화면과 실감 음향을 통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극장의 볼거리는 같은 영상이라고 해도 TV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드라마의 몰입을 만들어주는 것은 볼거리가 아니라 스토리(그 속의 캐릭터들)가 만들어내는 감정이입으로서의 몰입이다.

물론 스토리도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면서 볼거리까지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적인 선택은 아닐 수 있다. 차라리 볼거리는 조금 차치하고라도 일단 스토리가 탄탄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더 경제적인 방법이다. '찬란한 유산'은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스토리가 매번 시청자들의 눈을 홀리게 만들었다. 결과는 47%라는 경이적인 시청률로 나타났다.

'선덕여왕'은 대작으로서 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볼거리에 치중하지는 않는 영리함을 보이고 있다. 백제와의 전쟁 신에서는 훌륭한 볼거리를 보여주었지만, 그 외에는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왜 전쟁 같은 스펙타클이 또 안 나오냐고 불평하기보다는, 덕만(이요원)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가는 그 스토리나 비담(김남길)처럼 스토리성을 그 안에 갖고 있는 캐릭터의 등장이 주는 몰입감에 열광하고 있다. 결과는 시청률 30%를 넘어 40%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반면 '태양을 삼켜라'는 수목드라마들이 모두 주춤하는 사이에 시청률 1위를 여전히 기록하고는 있지만 대작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 1위는 오히려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스토리가 눈에 띄도록 매력적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이 드라마는 초반부에 반드시 살아나야 하는, 주인공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마저 잘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거의 기초적인 것이다.

주인공 김정우(지성)의 탄생배경을 보여준 초반 1,2부의 스토리는, 말 그대로 현란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그 초반 스토리를 장악했던 정우의 아버지 일환(진구)의 모험담은, 다만 정우와 혈연적 관계를 말해줄 뿐, 스토리로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보여주지 못한다. 즉 주인공 정우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나 목적, 욕망과는 상관없는 드라마의 볼거리만을 나열한 셈이다.

이것은 그나마 드라마 초반에 있어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방법적인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떨까. 정우는 일환과의 연결고리 없이 그저 가난하고 거친 삶을 살았다는 뉘앙스로 불쑥 등장하고, 갑작스레 장민호 회장(전광렬)의 휘하로 들어간다. 정우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공에 대한 욕망 같은 상투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수현(성유리)이 갑자기 서커스 공연을 기획한다고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것과 정우와 그 친구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프리카에서 망명한 갑부의 경호팀으로 역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것은 그 둘은 라스베이거스라는 공간에서 만나게 하겠다는 의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설정 자체가 지나치게 무리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드라마의 애초 기획의도에 들어가 있는 해외로케의 정당성마저 찾아내기가 어려워진다. 그 곳에서 잭슨리(유오성)가 도박을 하고 동시에 교차편집되어 보여지는 그의 여자가 선정적인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도박과 섹스를 연결한 자극을 보여주지만, 스토리의 맥락과는 역시 떨어져 있다.

스토리가 잘 구축되지 않는 볼거리란 때론. 캐릭터가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볼거리를 위해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맥락 없이 돌아가는 라스베이거스의 풍광들이나, 비키니 입은 여인들, 그리고 가끔씩 등장하는 폭력적인 장면들은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캐릭터의 심리와 깊게 와 닿지 않을 때, 그저 지나치는 파편적인 영상으로 전락한다. 계속 반복적으로 이미지가 삽입되는 '태양의 서커스'는 물론 볼거리로서는 압도적일지 몰라도, 왜 그게 그렇게 등장하는지 드라마는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이런 경우, 캐릭터는 당연히 살아나기가 어렵다. 모든 행동이 맥락을 찾지 못하는 캐릭터에 어떻게 시청자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엄청난 물량이 투입되는 미국 드라마에서도 볼거리는 스토리보다 중요하지 않다. 치밀한 스토리가 있고 그 위에 볼거리는 덧씌워질 뿐이다.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지향했던 '로비스트'가 스토리는 없이 볼거리만 나열하고 추락했던 것처럼, '태양을 삼켜라' 역시 마찬가지 길을 가고 있다. 볼거리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볼거리에만 치중하고 스토리에 소홀하게 되면 상황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볼거리가 드라마를 잡아먹는 것이다.

캐릭터 자체의 매력과 스토리텔링이 만드는 기대감

'선덕여왕'에 비담(김남길)이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든 시간은 얼마일까. 짧게 말하면 1초도 걸리지 않았고, 길게 말한다 해도 10분을 넘기지 않았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맨발만 살짝 드러냈을 때, 그리고 빛으로 나와 예사롭지 않은 얼굴로 하품을 해댈 때, 덕만(이요원)을 향해 찡긋 윙크를 했을 때 그는 이미 범상치 않은 고수의 캐릭터로 우리들 마음 속에 들어와 있었다. 후에 덕만을 해치려는 무리들을 향해 무차별 칼을 휘두르는 장면은, 이미 시청자들의 마음에 구축된 캐릭터를 확인시켜 주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선덕여왕'의 제작진이 비담을 비밀병기라고 공공연히 발표한 시점은 작품이 시작하기도 전부터였다.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이 얘기는 그저 지나가는 얘기처럼 들렸다. 하지만 20회가 지난 시점에서 비담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비밀병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선덕여왕'이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하고 활용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선덕여왕'은 주제를 함축하고 스토리를 굴러가게 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내고는, 그것을 특유의 미션식 스토리텔링 속에서 가장 극대화되는 지점에 순차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캐릭터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나가고 있다.

'선덕여왕'이 만들어내 첫 번째로 선보인 캐릭터는 미실(고현정). 이 매력적인 캐릭터는 모든 갈등과 구조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이 사극의 뼈대에 해당하는 캐릭터다. 강력한 악역으로서의 미실이 구축된 후, 그녀로 인해 중국으로 도망친 어린 덕만이 고개를 내민다. 당돌하면서도 착하고 때론 대담하면서도 남다른 영민함이 보이는 이 캐릭터는 미실과의 격차를 드러내면서 차츰 대립각을 만들어낸다. 덕만이라는 캐릭터가 미실에게 근접하고 그 미실을 누르는 과정이 이 사극의 전체 얼개라면 이때 이미 이 사극의 방향성은 만들어진 셈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천명(박예진)과 유신(엄태웅)으로 이들은 각각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어 보이는 미실과 정면승부를 예고하며 부각되었다. 즉 미실의 캐릭터를 통해 구축된 이 캐릭터들은 정치적인 상황 보다는 대의 그 자체에 몰두하는 것으로 미실의 정치 장악력을 벗어난다. 한편 미실 측은 그들대로 새로운 캐릭터들을 구축하며 진영을 갖춘다.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그 카리스마를 보여준 설원공(전노민)이 무인이면서도 동시에 지략을 갖춘 캐릭터로 등장하고, 미생(정웅인)은 미실의 일식을 이용한 깜짝쇼를 구상해내고 때론 미실의 심중을 정확히 읽어내는 면모를 보이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부차적인 인물들이 다만 부차적으로만 활용되지 않는 것은 '선덕여왕'이 가진 캐릭터들의 가장 큰 장점이다. 사막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소화(서영희)와 칠숙(안길강)이 궁으로 돌아와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궁의 인물들과 그들이 가지는 일련의 만남들에 극적인 상황을 제공했다. 칠숙과 덕만의 만남, 칠숙과 미실의 만남, 미실과 소화의 만남... 이런 식으로 극은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사극의 감초로서 죽방(이문식)과 고도(류담)는 극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극을 만들어가는 역할도 수행해낸다.

중요한 것은 이 많은 캐릭터들이 덕만을 중심으로 잘 꿰어져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덕만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그다지 복잡하지 않게 드라마를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덕만을 위기로 몰거나, 혹은 도움을 주는 캐릭터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덕만을 움직이게 만든다. 캐릭터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이처럼 이 사극이 가진 캐릭터 장악력과 거기서 비롯되는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 능력 때문이다. 사실상 캐릭터들은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 저마다의 숨겨진 이야기를 하나씩 이상은 갖고 등장한 셈이다.

마찬가지로 비담의 등장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그 캐릭터 속에 내장된 앞으로의 이야기를 첫 등장에서부터 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사에 무심한 듯 보이며, 뛰어난 무공을 갖추고 있지만 어느 편에 붙을 지 종을 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아군이라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 되지만, 적이라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덕만의 입장에서 사극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비담이란 존재가 주는 무게감은 따라서 클 수밖에 없다. 그가 미실의 버려진 아이라는 점은 이 상황을 더 흥미진진하게 한다. 혈육으로서의 입장은 버려졌다는 입장과 상충하며 비담이라는 캐릭터의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선덕여왕'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바로 이 범상치 않은 캐릭터들과 그 캐릭터의 운용으로 만들어지는 스토리텔링에서 나온다. 가장 적확한 스토리의 시점에서 가장 매력적인 성격의 캐릭터라면, 그것이 구축되는 데 드는 시간은 어쩌면 단 1초면 충분한 지도 모른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 속에 척척 달라붙는 캐릭터의 힘, 그것이 '선덕여왕'이라는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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