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가 현빈이 겪는 증강현실로 말하려는 건

점점 빠져들더니 어느새 게임과 현실이 중첩된 이 세계가 불러일으키는 긴장감과 공포, 설렘, 흥분 같은 것들을 느끼게 되었다. tvN 주말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이 마법 같은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과정은 우리가 게임에 몰입해가는 과정을 그대로 따라간다. 돌이켜보면 이 세계를 만든 정세주(찬열)가 스페인 그라나다로 들어오는 열차에서 갑자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기타음악이 흐르며 먹구름에 비가 내리기시작하더니 누군가에게 총에 맞는 장면은 일종의 게임 오프닝에 해당했다.

그리고 그 게임에 투자하기 위해 유진우(현빈)가 정세주가 만나자 했던 그라나다의 보니따 호스텔에 오게 되고 그 날 밤 광장에서 현실과 가상이 겹쳐진 증강현실 게임을 밤새도록 하는 과정은 튜토리얼이다. 그리고 본 게임은 이 증강현실 게임에 대한 투자를 두고 라이벌 관계에 있는 차형석(박훈)과 유진우가 게임으로 연결되어 한 판 승부를 벌이면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그 장면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사실 이들이 왜 현실에서 만나 대화나 주먹질로 싸우지 않고 하필이면 증강현실 게임 속에서 대결을 하게 됐다는 건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 때는 친구이자 동료였지만 회사를 나가 독립하고 심지어 전처까지 빼앗아간 차형석에게 아마도 유진우는 살의까지 가졌을 게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살인을 한다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니 게임 속에서 캐릭터와 칼을 들고 이들은 한 판 대결을 벌인다. 그것이 실제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을 테지만 마치 실제 같은 복수심이나 통쾌함을 대리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즉 이 부분은 우리가 어째서 이 가상의 게임을 진짜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가 들어있다. 우리는 그것이 진짜라서가 아니라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을 대리해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기기 때문에 진짜처럼 받아들인다. 가상은 그래서 현실이 된다. 하루 종일 우리가 실제처럼 게임에 빠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그렇게 컴퓨터 모니터에 혹은 스마트폰의 액정을 들여다보고 열중하고 있는 게임하는 이들은 그래서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정작 그 게임을 하는 이들은 실제처럼 그 세계에 감정을 쏟아넣는다.

유진우와 차형석이 어느 공원에서 증강현실 게임으로 대결을 벌이고, 결국 차형석이 처참하게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짐으로써 패배하자 승리에 기쁨에 차 그 자리를 떠나는 유진우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이것이 그저 게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그 차형석이 진짜 죽은 채 발견되고, 며칠 후 기타선율과 비구름 속에서 그가 마치 좀비처럼 다시 나타나 유진우를 공격해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 그는 자기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차형석을 죽인 건 바로 자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게임 속 세계와 현실이 중첩되며 벌어지는 사건은 실제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가상의 공격이 물리적 타격을 줄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 그 가상 세계에서 실제처럼 감정의 오르내림과 그래서 생겨나는 호흡과 심장박동을 느껴본 이라면 그걸 그저 비현실로만 말하지 못할 게다. 가상의 작동은 이렇게 현실의 감정과 더해져 가능해진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그리는 판타지의 세계가 특별하게 그려지는 건, 그것이 이 곳에서 저 곳으로 넘어간 세계가 아니라 이 곳과 저 곳이 겹쳐진 세계라는 점 때문이다. 유진우는 병실 바깥에 나타나 있는 사이버 좀비 같은 차형석을 피하기 위해 정희주(박신혜)에게 다급하게 문을 열지 말라고 외친다. 하지만 정희주에게는 그 차형석 같은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흔히 현실 위에 글자 같은 게 더해지며 올라오는 증강현실의 세계를 우리는 막연히 신기하게만 바라봤지만 누군가에게는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사실 오싹한 일이다.

차형석의 칼에 맞고 쓰러져 이제 죽을 위기에 처한 유진우 앞에 갑자기 정희주가 등장함으로써 그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건 정희주라는 인물이 이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로부터 유진우를 구원해줄 존재라는 걸 암시하면서, 동시에 가상의 세계를 가로막는 현실적 존재의 의미가 더해져 있어서다. 유진우는 정희주를 끌어안고 가상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그가 현실의 감각으로 이끌어 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이 드라마가 하려는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펼쳐놓은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세계에서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는 예측하기도 어렵고 또 예측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 겹쳐진 세계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사건들을 들여다보며 마치 실제처럼 몰입하고 긴장감과 이완 그리고 피어나는 감정들을 경험하면 될 뿐이다. 어쩌면 이 기상천외한 드라마는 그 과정 자체가 메시지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이상한 세계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고, 그 속에 빠져버린 유진우에게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증강현실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우리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니.(사진:tvN)

'SKY캐슬'은 저들만의 성일까 아니면 감옥일까

“예서는 영재와는 달라.” JTBC 금토드라마 <SKY 캐슬>에서 예서(김혜윤) 엄마 한서진(염정아)은 스스로 다짐하듯 그렇게 말한다. 그건 오히려 그가 얼마나 불안한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언니처럼 따르던 영재 엄마 이명주(김정난)가 자살하게 된 이유가 영재의 복수심을 이용한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형(김서형)의 꼬드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부모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영재에게 김주형은 가장 큰 복수가 저들이 원하는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후 부모를 떠나는 것이라 알려주었고, 실제로 영재가 부모와의 연을 끊겠다고 나오자 이명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

그래서 이 사실을 몰랐던 한서진은 자신의 딸이 김주형의 코디를 받게 됐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를 그만두게 하려했다. 하지만 한서진을 더 불안하게 하는 건 영재네의 비극보다 자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시댁이었다. 무조건 예서를 서울대 의대에 보내는 일만이 자신을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릎까지 꿇어가며 다시 김주형에게 딸을 맡기지만 한서진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김주형에게 딸을 맡기기 위해 무릎까지 꿇은 뒤 겨우 승낙을 받아내고 나오며 입가에 미소를 띠우는 한서진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는 입시 코디네이터를 부리는 건 자신이고 그래서 그 주도권은 자신이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서가 스펙을 쌓기 위해 전교회장 출마를 하려 하자 김주형은 나와 봐야 당선되기 어렵다며 쓸데없는 공력을 낭비하지 말자고 하지만, 한서진은 “그래서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며 그것은 “부탁드리는 게 아니라”는 걸 명확히 했다. 그 말은 결국 시키면 하라는 이야기다.

한서진의 요구에 결국 김주형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 뒤에 어떤 생각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김주형은 벌써부터 한서진의 딸 예서를 더 혹독하게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전교 1등이지만 라이벌인 혜나(김보라)에게 진 거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예서가 가진 경쟁심을 부추긴 것. 영재와는 달리 강한 멘탈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김주형의 이런 지도방식은 예서 역시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까.

한서진은 자신이 김주형을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결국 아이를 쥐고 있는 건 김주형이라는 점에서 이건 결코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 한서진이 스스로 “괜찮을 것”이라 낙관하게 만드는 건 결국 자신의 불안 때문이다. 아이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그 불안감을 겨우 이겨낼 수 있어서다.

<SKY 캐슬>의 이야기 구조를 들여다보면 극명하게 보이는 건 아이들보다 더 불안감에 떠는 부모들이다. 아이가 SKY로 대변되는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으로 치부되는 SKY캐슬은 그래서 우리네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상징하는 공간처럼 보인다. 마치 신기루처럼 손에 닿지 않는 하늘에 세워진 성이고,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 비인간적인 훈육방식에 아이들을 내모는 곳. 밖에서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안에 들어온 이는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그곳은 그래서 부모들을 불안에 잠식시킨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한참 보다보면 그 곳이 누구나 들어가고픈 하늘 위에 지어진 성이 아니라, 아이들은 물론이고 그 부모들도 힘겨운 감옥처럼 보인다. 김주형 같은 괴물은 바로 그 감옥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밀려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그 괴물의 입에 아이들을 집어넣는 한서진의 집착과 낙관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과연 그는 자신이 이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다고 여기는 걸까. 이미 감옥에 포획되어 있는 처지도 모른 채.(사진:JTBC)


책의 가치를 되새긴 ‘알쓸신잡3’, 합당한 예의를 갖추다 

“웬만하면 절판된 책은 안 가지고 나오려고 했는데, 이런 책은 사라져서는 안된다.” tvN <알쓸신잡3> 마지막편에 출연자들이 추천 도서를 소개하는 시간에 김영하는 김은성 작가의 만화책 <내 어머니 이야기>를 소개하며 그렇게 말했다. 40세 처음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만화가가 뭘 그릴까 생각하다 그린 그 만화는, 함경북도 북청에서 피난 와서 이제 여든 살이 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하나하나 어머니가 해주는 이야기를 취재해 그린 그 만화책은 완성하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작가는 ‘어머니는 80대 10년을 당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시며 시간을 보내셨다’며 ‘지금은 내가 어머니보다 어머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김영하 작가는 이 만화의 멋진 점으로 “철저히 함경도 사투리로 재현했다”는 걸 꼽았다. 

총 4권으로 한국의 현대사를 망라하고 있는 이 책에서 구술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만화를 그린 딸은 “우리 엄마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말에 “100번을 시켜도 내가 똑같이 얘기해준다” 말했다 한다. 소설을 많이 읽어 웬만하면 읽다 우는 일이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 “감정이 흔들린다”는 김영하는 그 이유로 “진짜 이야기가 있어서”라고 했다. 김영하는 “만약 한국의 퓰리처상이 있다면 수상할 만한 책”이라며 “우리 모두 하나의 역사고 현대사라는 걸 만화로 보여준 위대한 작품”이라고 했다.

하지만 놀랍고도 안타까운 점은 이 책이 절판된 책이라는 것이었다. 김영하는 세상에는 사라져선 안되는 책이 있다며 이 책은 꼭 다시 누군가 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출판계가 가진 안타까운 상황을 잘 드러낸다. 좋은 책이 살아남기보다는 잘 팔리는 책이 살아남는 현실이 아닌가. 김영하가 굳이 절판된 책을 들고 온 데는 그 안타까움을 전하려는 뜻도 담겨 있다 여겨졌다. 

마지막편에서는 출연자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책 한 권씩을 가져와 추천했다. 김상욱은 과학박사답게 나탈리 엔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를 소개하며 그 추천이유로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라는 걸 담고 있는 책이어서라고 했다. 유희열은 마스마 미리의 <밤하늘 아래>라는 만화책을 소개했다. 편안하게 읽으며 잠깐 생각을 할 수 있는 책이라고 했다.

유시민 작가는 나온 지 55년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가져왔다. 최근에 본 플라스틱으로 배가 가득 채워진 고래를 보고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책을 추천하게 됐다고 했다. 유시민 작가는 이 책을 추천한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세상을 바꾼 책이라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에세이로서 하나의 모델이 될 만큼 훌륭한 책이라는 사실이었다. 김진애 박사는 케빈 켈 리가 쓴 <통제불능>이란 책을 추천했다. 영화 <매트릭스>에 영향을 준 이 책은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알쓸신잡>이 시즌1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번 시즌3에서도 그 마무리를 책 소개로 한 뜻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교양을 예능으로 끌어안은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이 자칫 책보다 재밌는 영상을 통한 교양을 보여줌으로써 ‘책의 가치’를 희석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오해의 소지를 만들 수 있어서다. 실제로 출판가를 들여다보면 방송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방송으로 유명해진 저자들이 대부분의 베스트셀러를 장악하고 있는 게 출판가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알쓸신잡3>만 두고 봐도 이 프로그램의 토대가 되는 건 무수히 많은 인문서적들이라는 걸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에서 이야기됐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렇고, 유시민 작가가 스스로 소크라테스빠(?)를 자청하며 언급한 이야기들을 담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도 그러하며 독일에서 다시 끄집어낸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같은 책도 그렇다. 

사실 너무 많아 하나하나 다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책들이 이들의 지식 수다를 통해 소개되었다. 결국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은 이 많은 책들에 빚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마지막회에 추천도서를 통해 책의 가치를 되새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예의처럼 보인다. 특히 김영하가 절판된 책을 추천한 점은 ‘좋은 책’은 사라지면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됐다고 생각된다. 팔리는 책만 살아남는 환경을 넘어서서.(사진:tvN)

‘남자친구’, 송혜교, 박보검이 웃을 때마다 가슴이 아린 건

“부모잖아. 엄마고 딸이잖아.” tvN 수목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차수현(송혜교)은 그녀를 찾아와 영부인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다짜고짜 “쥐죽은 듯 살라”고 말하는 진미옥(남기애)에게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차수현에게 진미옥은 차갑게 대꾸한다. “관계가 중요해? 난 가치가 중요해. 쓸모 있는 자식으로 살아.”

이 말은 차수현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든다. 관계보다 가치. 그건 부모자식 간의 관계로 모든 것이 허용되고 용서되기도 하는 보통의 관계와는 너무나 다른 차수현과 엄마의 관계를 잘 말해준다. 부모 자식이라도 가치가 없으면 필요 없다는 말이고, ‘쓸모’가 있어야 자식도 자식이라는 말이다. 차수현은 차 안에서 그 말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좀체 웃지 않고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 얼굴은 사실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얼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두운 얼굴 속에 담긴 속내를 읽어내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김진혁(박보검)이다. 그는 그 얼굴을 보고는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차수현을 위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내세요’라고 적으려던 김진혁은 대신 ‘거봐요. 모델보다 더 예쁠 거라고 했잖아요. 봄입니다.’라고 보낸다. 그 문자 메시지 하나에 차수현은 살짝 미소를 짓는다.

전에 김진혁이 생일선물로 준 립스틱을 왜 바르지 않냐고 물었을 때 차수현은 봄에 어울릴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자 김진혁은 이렇게 말한다. “릴케라는 시인이요. 쌀쌀한 도시에서도 서로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사람들만이 봄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했거든요.” 그 말을 듣고 차수현이 바르고 나온 립스틱 이야기로 김진혁은 그의 겨울 같은 얼굴에 봄을 피어나게 한다. 

차수현은 관계보다 가치가 중요하다는 엄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쌀쌀한 겨울 같은 세상에 홀로 던져져 있다. 정치인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살아온 적이 없고, 팔려가듯 결혼을 했으며 결국 이혼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정치 생명을 쥐고 흔드는 재벌가 시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관계보다 가치가 중요한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재벌가 시댁에 딸을 다시 팔려고 한다. 

호텔 체인의 대표로서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진 게 하나도 없는 인물이 바로 차수현이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 살아가는 삶이 허용되지 않아서다. 제 아무리 많이 갖고 있으면 뭐하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조차 할 수 없는 처지라면. 차수현의 얼굴이 항상 무표정하지만, 그 무표정 속에서 마치 울기 직전까지 참고 있는 아이 같은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회사 로비에서 차수현이 만나는 김진혁을 스캔들의 주인공처럼 몰아세우며 공개적인 해명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김진혁이 나서서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했을 때 차수현의 얼굴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눈이지만, 입은 이렇게 나서준 김진혁에 대한 기쁨으로 미소가 피어난다. 그 장면은 엄마와는 달리 가치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차수현과 김진혁의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런가. 사람을 가진 것과 태생과 스펙으로 구분해 가치를 매기고, 겉보기에 그 가치가 등가로 매겨지는 사람과의 만남이 아니라면 그것을 부적절한 관계로 매도하기 마련이다. 이제 썸을 타기로 한 차수현과 김진혁은 그런 차가운 겨울의 시선들 속에 서 있다. 관계가 공개적으로 알려진 후 회사에서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뚤어져 있고, 차수현의 전 시어머니인 김화진(차화연)은 이 관계를 저들이 생각하듯 대표의 가치를 등에 업고 이용하려는 젊은 사원의 다른 의도가 있는 행동으로 치부한다. 

차수현은 본래부터 웃을 일이 없는 세상 속에 있었고, 김화진으로부터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대우를 받은 김진혁은 차수현이 살아왔던 그 세상을 실감하게 된다. 두 사람은 결코 웃을 일이 없는 이 냉혹하고 쌀쌀한 겨울의 세상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만의 시선이 마주칠 때는 미소를 띠운다. 어찌 보면 숨 막힐 듯한 현실 속에서 한숨으로 버텨왔던 차수현은 겨우 김진혁 앞에서 잠시라도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들이 웃을 때는 가슴이 아려온다. 

내부순환도로 교각에 붙여진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을 보며 그 작품의 모티브가 된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구를 김진혁은 조용히 읊조린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그러자 화답하듯 차수현이 시구의 뒷부분을 이어준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 시는 모든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가치 따위가 아니라 모든 관계들이. 그래서 그 시구 절 앞에서 다시 만나 썸 타기로 한 두 사람은 겨울의 현실 속에서도 아프지만 기쁜 봄날의 미소를 피워낸다. 

봄은 시간이 지난다고 그저 오는 게 아니고 또 기다려서 맞는 게 아니라고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봄이 오면 화사한 색감의 립스틱을 바르겠다던 차수현은 김진혁을 통해 화사한 립스틱을 바르는 일로 봄이 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의 진정한 관계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스스로 선택한 삶과 거기서 만나게 되는 진정한 관계들. 그 속에서만이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겨울 같은 우리네 삶을 봄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니.(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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