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것 김민기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들

한국 포크 음악과 민중음악의 선구자이자 전 학전 대표였던 김민기가 별세했다. 향년 73세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 전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야기는 현재의 문화 예술계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아침이슬’처럼 떠난 김민기

지난 21일 김민기가 별세했다. 향년 73세였다. 그는 떠났지만 그는 ‘아침이슬’처럼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나 이제 가노라’며 ‘저 거친 광야’로 떠난 그는 이제야 좀 ‘서러움 모두 버리고’ 갈 수 있었을까. 그의 삶의 행적을 좇다보면 ‘시대의 아픔’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스무살에 내놓은 ‘아침이슬’이라는 곡 하나만 두고 봐도 그렇다. 1971년에 낸 데뷔앨범에 들어 있던 그 곡은 김민기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유신 정권 반대 시위 현장에서 울려퍼졌다. 결국 정권이 금지곡으로 지정했던 그 곡은 김민기 평생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됐다. 

 

물론 김민기 스스로도 시대의 아픔 한 가운데서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은 그가 당시 했던 활동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독재정권과 정면대결을 벌였던 시인 김지하를 만나고 일찍이 야학에 뛰어들었으며 김지하가 쓴 희곡인 ‘금관의 예수’ 공연에 참가해 주제가인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작곡했던 김민기였다. 70년대 마당극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마당극 ‘아구’에 참여했고 군 생활 이후에는 인천 부평 봉제공장에 취직해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을 하며 ‘공장의 불빛’ 같은 음악극을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운동가요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광장에서 울려퍼졌던 ‘상록수’는 사실 공장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였다. ‘공장의 불빛’ 제작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했던 김민기는 10.26 사태가 벌어진 후에는 농부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고, 탄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삶을 몸소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통해 그의 금지곡들은 일부 해제되었다.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어져온 혹독한 독재정권의 그늘 아래서 그의 삶을 가장 낮은 자들 곁에 있었다. 그들을 위해 살았고, 그 삶이 노래가 됐고, 그래서 핍박받았지만 끝내 그 노래들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네 현대사의 아픈 구석들을 들여다보면, 그의 노래가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삶이 그 시대의 아픔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맨, 김민기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요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용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김민기가 쓰고 곡을 만든 ‘친구’는 고등학생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절창이다. 가사는 시이고 곡 또한 단순하지만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실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고 썼다는 이 곡을 보면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김민기의 면모가 일찍이 드러난다. 거기에는 문학이 있고 음악이 있다. 그런데 그의 활동은 그 틀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노래도 만들고 불렀지만 음악극도 했다. 연극 또한 직접 만들었던 것. 1991년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고 그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은 지난해까지 8천회 이상 상연했고 무려 70만명의 관객이 함께 했다. 

 

그가 만든 학전(學田)은 ‘배우는 텃밭’이라는 의미다. 그 이름 그대로 예술인들의 텃밭이 됐다.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 등 무수한 배우들이 이 곳을 거쳐갔고, 동물원, 들국화, 장필순, 박학기, 권진원, 유리상자, 윤도현 등이 이 곳에서 노래했으며 고 김광석은 1천 회 공연을 했다. 그가 운영한 학전은 출연자들에게 그 날의 공연 수익을 밝히고 정산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운영됐는데, 그건 그 스스로 예술인들의 텃밭이 되겠다는 그 취지에 합당한 방식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문학과 연극과 음악을 아우르는 예술인이면서 동시에 그런 예술인들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학전’의 대표이기도 했다. 늘 적자에 시달리며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스스로에게는 ‘돈 안되는 일’을 자처함으로써 예술인들을 살게 하는 일에 앞장섰던 후원자에 가까웠다. 

 

뒷것 김민기

“나는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 그가 학전을 세워 했던 일들은 그가 생전에 했던 이 말 하나로 설명된다. 그건 물론 뮤지컬, 아동극, 가수들의 공연 등을 무대에 올리는 역할을 자신은 뒤에서 하는 사람이라는 걸 말한 것이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예술인들에게 내려주고 자신은 무대 아래서 그걸 비춰주는 역할을 자임한 그의 삶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학전’이라는 이름 자체가 나서지 않고 묵묵히 예술가들의 못자리가 되어주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닌가. 

 

결국 김민기의 생애는 개관 후 33년 간이나 버텨왔지만 재정난으로 지난 3월 폐관한 학전과 거의 닮았다. 건강이 악화됐고 지난해 가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끝까지 학전의 레퍼토리들을 다시 무대에 올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 뜻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는 우리네 예술계에 영원히 든든한 ‘뒷것’으로 남았다. 

 

올해 4월에 방영됐던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은 그가 뒷것을 자임하며 남긴 우리네 예술계의 흔적들을 담아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다큐멘터리가 담아낸 내용을 보면 그가 뒷것을 자임한 건 예술인들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피혁공장에서 일하며 만난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알고 노동자들을 위로해주는 ‘공장의 불빛’이라는 음악극을 만들었고, 어린 나이에 일터로 나온 그들에게 야학의 길을 열어 주기도 했다. 농사꾼이 되겠다고 연천에 내려가서도 그는 농민들의 뒷것을 자처했다. 중간유통업자들 때문에 농민들이 제 값을 못받고 소비자도 비싸게 쌀을 사야하는 현실을 알고는 직거래를 통해 모두가 좋은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무료 야간학교를 열었고, 달동네 아이들을 위한 유아원 건립을 위해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에 기꺼이 나서기도 했다. 또 ‘지하철 1호선’이 큰 성공을 거뒀을 때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어린이들을 위한 아동극에 뛰어들었다. 돈 안되는 일, 하지만 꼭 필요한 일에 앞장섰던 거였다. 

 

김민기가 삶 전체로 전하는 메시지

그는 떠났지만 그 삶은 우리에게 선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먼저 예술이란 시대와 공명한다는 사실이다.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그것을 담아낸 예술은 당대의 대중들과 호흡함으로써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걸 김민기는 보여줬다. 그렇게 세상은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 또 모든 것이 자본화되고 상품화되어가는 세상에 ‘돈 안되는 일’이 오히려 예술이 해야 하는 일일 수 있다는 걸 그는 보여줬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누군가 뒷것을 자임하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알려줬다. 만일 문화예술에 대해 정부 등이 나서 지원을 한다면 든든한 뒷것의 전형을 보여준 김민기의 선택들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앞것을 자임하는 현실들 앞에서 그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무수한 뒷것들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김민기는 보여줬다. 가난해도 작품을 통해 세상을 말하는 예술가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돈벌이의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는 농사를 짓는 농부들 같은 존재들이 있다는 것. 김민기는 그런 이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걸 삶 전체로 우리에게 전했다. (글:시사저널, 사진:SBS)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신카이 마코토 ‘언어의 정원’

언어의 정원

장마철이 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이다. 흔히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빛의 마술사’라고 표현하지만, 필자에게는 ‘날씨의 마술사’로 더 각인되어 있다. 그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날씨의 정경들을 보다보면 세상이 어떤 표정을 갖고 있다고 느껴진다. 때론 환한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만, 때론 한없이 처연한 눈물을 흘리고, 때론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바로 그 날씨의 정경들이 전해주곤 해서다. ‘언어의 정원’은 그 날씨들 중 특히 비의 다양한 표정들이 담긴 작품이다. 

 

비오는 날이면 오전 수업을 빼먹고 도심의 정원에 있는 정자에서 구두 스케치를 하는 고등학생 다카오. 그런데 어느 날 그 곳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유키노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했지만 어쩌다 말을 걸게 되고 비오는 날마다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언어의 정원’은 이 일련의 과정들 속에 두 사람의 감정변화를 내리는 비로 표현한 작품이다. 갑자기 맞닥뜨린 비에 쫄닥 젖어 유키노의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간 두 사람이 그 곳에서 옷을 말리고 함께 밥과 차를 마시는 고즈넉한 장면이 흘러갈 때 두 사람의 생각이 교차되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여태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창밖으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지만 창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그 풍경은 아주 짧게 스쳐가지만 그것이 마치 우리네 삶의 진짜 행복을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디든 나가기만 하면 험한 현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온기. 장맛비 속을 뚫고 왔지만 쫄닥 젖은 우리들을 넉넉히 안아주는 그 온기가 있어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글:동아일보, 사진: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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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파트너’의 냉정한 변호사로 돌아온 장나라

굿파트너

지금이야 아이돌 가수들이 연기를 하고 이른바 ‘연기돌’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일이 흔해졌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연기자들은 연기를 하고 가수들은 노래를 하는 식으로 ‘영역의 구분’은 확실했고, 따라서 연기자와 가수가 되려는 이들은 거기에 맞는 과정들을 거쳤다. 배우가 신인 연기자로서 단역부터 시작해 자기 영역을 넓혀간다면, 가수 역시 데뷔를 위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영역의 경계를 단번에 해체한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장나라다. 

 

본래 장나라는 SM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 보아와 함께 연습생 생활을 했던 아이돌 지망생이었다. 걸그룹 데뷔를 하려 했지만 당시 SM의 자금난 때문에 자회사격인 퓨어엔터테인먼트를 통해 2001년 첫앨범을 내고 가수로 데뷔했다. 하지만 장나라의 인생을 바꾼 건 우연한 계기로 캐스팅되어 연기를 하게 된 시트콤 ‘뉴논스톱’이었다. 장나라 특유의 귀여운 이미지가 시트콤 속 캐릭터와 맞아 떨어지면서 장나라는 단박에 스타덤에 올랐다. 양동근과의 러브라인이 국민적 인기를 끌었는데, 그 연기 호흡은 시트콤 역사상 최고 시청률인 39.3%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트콤의 인기는 장나라의 가수로서의 입지 또한 수직상승시켰다. 갑자기 등장한 장나라의 앨범이 당시 최정상에 있던 성시경 같은 가수들과 경쟁해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2001년 연말 가요시상식에서 여자 신인상을 휩쓴 이 인물은 2002년 드라마 ‘명랑소녀성공기’로 무려 44.6%의 시청률을 내며 배우로서도 정상을 찍었고, 2집 앨범도 ‘Sweet Dream’, ‘이마도 사랑이겠죠’ 같은 곡들이 모두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로서는 낯선 일이었던 가수와 배우를 넘나드는 ‘멀티 엔터테이너’의 길을 순식간에 개척해냈던 장본인이라는 것. 실제로 장나라가 열어 놓은 이 멀티 엔터테이너의 길은 훗날 무수한 연기돌들이 꿈꾸고 따라오게 된 길이 됐다. 

 

이처럼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멀티 엔터테이너로서의 확고한 입지를 구가했던 장나라는 2004년 중국에 진출하면서 일찍이 한류스타로서의 영역 또한 개척한다. 장나라가 주연으로 출연한 코미디 사극 ‘띠아오만 공주’는 당시 첫 방영에서 8.5%(보통 1%만 내도 성공이라고 한다)의 압도적인 시청률로 중국 전역에 장나라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 작품 역시 ‘명랑소녀성공기’처럼 장나라 특유의 귀여운 이미지가 잘 어필되는 캐릭터로 주목받았는데, 지금껏 중국 내에서 그가 최정상의 한류배우로 기억되는 이유다. 장나라는 중국에서조차 배우와 함께 가수로서도 활동했는데 2005년에는 중국 가수들과 경쟁해 대륙최고 인기가수상을 받기도 했다. 즉 지금은 K콘텐츠의 인기로 아티스트들의 해외 진출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공고했던 국가의 장벽을 깨고 한류스타로서의 확고한 길을 열어놓은 개척자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2003년부터 2011년까지의 중국 활동은 놀라운 성과를 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했는데 그것은 중국에 대한 선입견이 상당부분 작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2011년 ‘동안미녀’, 2014년 ‘운명처럼 널 사랑해’ 같은 작품으로 조금씩 국내 활동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장나라는 2017년 ‘고백부부’로 뜨거운 대중들의 반응을 얻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서 20대 대학생의 나이로 넘어가는 타임리프 연기를 특유의 동안과 더불어 풍부한 감정연기로 소화해내면서다. 이를 기점으로 장나라는 훨씬 다채로운 연기 영역에 도전했다. ‘황후의 품격’ 같은 파격적인 설정의 작품에도 안정감을 부여했고, ‘VIP’에서는 VIP 전담팀에서 그들의 불륜까지 덮어주는 일을 하는 나정선이라는 인물이 남편의 불륜을 마주하며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연기했다. 또 ‘패밀리’에서는 블랙요원이지만 가족들에게는 그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는 강유라라는 인물을 코미디와 액션이 오가는 연기로 소화해냈다. 즉 이 과정은 과거 귀여운 이미지로 그에 걸맞는 캐릭터를 통해 인기를 구가했던 장나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또 성숙해가는 배우의 길을 열어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 그가 출연하고 있는 ‘굿파트너’는 그의 연기자로서의 성숙이 어떤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차은경 변호사는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냉정한 커리어우먼 그 자체다. 유명한 이혼전문변호사로 의뢰인들이 배우자들의 외도 때문에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조차 결코 흔들림 없이 현실적인 최대치의 이득을 의뢰인에게 얻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자신의 역할로 여기는 인물이다. 그런데 일에 있어서 이토록 똑부러지는 인물에게 남편의 외도라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혼전문변호사답게 내색하지 않은 채 증거를 모으고 있던 차은경 변호사는 그럼에도 이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갈등하는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다. 그러다 급기야 눈앞에서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게 된 후 이혼을 결심하는데 자신의 이혼소송에 있어서는 냉정함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굿파트너’는 이러한 배신한 남편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더불어, 이혼전문변호사로서의 현실적인 냉정함을 동시에 보여줘야 하는 차은경 변호사를 통해 보다 현실적이면서도 통쾌한 한판승을 보여주는 복수를 완성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복잡한 이 인물의 감정으로부터 작품의 힘이 생겨나고 있는 것. 

 

장나라는 한동안 본인 스스로도 “지겹다”고 말할 정도로 ‘동안’의 아이콘으로 소비된 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고백부부’ 같은 경우 3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넘나드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워낙 동안이라 30대 후반 연기에 있어 나이를 들게 보이려는 노력을 했던 에피소드가 회자될 정도였다. 지금도 4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동안이지만, 장나라가 원하는 건 그런 젊은 외모에 대한 칭찬 따위가 아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가 “동안이라는 수식어는 기자님들이 저를 보면 떠오르는 게 딱히 없어서 붙여주신 것 같다”며 “이번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수식어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던 대목에서 지금 장나라가 원하는 건 보다 성숙한 연기자로서의 성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최고의 위치에 일찍부터 올랐고 다양한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영역들을 개척해놓은 장본인이지만 여전히 자신을 확장하고 성숙시키려는 노력. 지금까지 여전한 최고의 배우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장나라가, 어떤 경계와 한계 앞에 늘 서게 되는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인사이트가 아닐 까 싶다.(글:국방일보, 사진:SBS)

이 무당 이야기들에는 오컬트부터 가족 서사까지 담겼다(‘샤먼: 귀신전’)

샤먼:귀신전

“뭣이 중헌디?”라는 유행어까지 남긴 영화 ‘곡성’에서부터 최근 ‘파묘’ 신드롬까지 이어진 오컬트 영화들과, ‘손 the guest’에서부터 ‘방법’, ‘지옥’에 이르는 오컬트 드라마들이 독특한 우리식의 오컬트 장르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면, 이제 그 K오컬트라 불리는 영역 안에 다큐멘터리도 한 자리를 차지할 듯 싶다. 바로 티빙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샤먼: 귀신전’이 그것이다. 

 

사실 실제 무당들이 등장해 귀신에 괴롭힘을 당하거나 혹은 귀신에 빙의되어 고통을 겪는 이들이 겪는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샤먼: 귀신전’은 어딘가 오싹한 면이 있다. 첫 번째 사례자의 경우만 봐도 눈앞에 점점 가까이 나타나는 귀신의 형상이 낮이고 밤이고 계속되는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지가 실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컬트적 이야기를 그리 즐기지 않는 분들에게는 진입장벽이 있을 수 있지만, 막상 보다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서사가 펼쳐진다.

 

오컬트 장르물들이 가진 서사가 그러하듯이, 고통받는 사례자와 그 사연을 접하고 그 사례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들어보는 과정의 섬뜩함이 전면에 이어진다면, 이를 해결해주는 인물로서 무당이 등장해 불가해했던 사건들을 무속의 언어들로 풀어주고 굿을 통해 귀신을 떼어내고 귀문을 닫아주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펼쳐진다. 그 과정 속에서 과거 사례자에게 있었던 사건들이 등장하고 귀신 들리게 된 이유가 무당의 입을 통해 제시될 때는 그것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실제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드디어 문제를 해결한 사례자가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간다. 

 

‘샤먼: 귀신전’은 고통받는 사례자와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걸 풀어주는 과정을 담는 오컬트 장르물들이 가진 기본적인 서사를 따라가면서, 무속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를 되짚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치유’의 의미와 가치다. 지금이야 현대의학이 대부분의 질환들을 치료하지만, 100년 전만 해도 아픈 병자들을 고치는 1차 방어선이 한의학이었고 2차 방어선이 바로 무속이었다는 것. 약초에도 해박한 무당들은 그래서 한의사들과 함께 아픈 이들을 치유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거였다. 

 

‘샤먼: 귀신전’이 가진 무속에 대한 ‘치유’의 관점은, 과거 한국의 무속을 연구했던 인류학 박사 로렐 켄달이 “귀신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에 한 답변에도 담겨 있다. “‘믿느냐’는 잘못된 질문 방식이다.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질문의 방향은 ‘믿느냐’가 아닌 ‘효과가 있느냐’인 것 같다.” 그 말은 무당들의 역할이 믿는가 아닌가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치유하는 효과가 분명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니 무속이 그만한 의미를 갖는다는 이야기다. 

 

계속 신의 부름을 거부하다 아이까지 알 수 없는 병으로 고통받게 되자 끝내 신내림을 받기로 결심하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자의 경우는 무당이 되는 일이 얼마나 자기 희생을 필요로 하는가를 절감하게 해주는 사례이다. 끝까지 안하고 싶어 왜 하필 나냐고 눈물을 쏟아내는 사연자에게 엄마 역시 무당이라 그 신내림을 끝까지 도와주는 엄마가 그런 딸을 보며 흘리는 눈물은 오컬트 장르적 서사로만 채워질 줄 알았던 ‘샤먼: 귀신전’에 의외로 진한 감동을 선사한 가족서사였다. 

 

그 누가 자신의 딸을 그 어려운 무당의 길로 들어서게 해주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것을 회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엄마는 딸이 신내림 받는 걸 도와주며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고, 신들에게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다. 그 절절한 과정은 무당이라는 업이 가진 무게감을 드러낸다. 그저 갑자기 신병이 들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되는 게 무당이 아니라, 어려운 이들을 돕는 역할을 부여받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 이들이 무당이라는 것이다. 

 

‘샤먼: 귀신전’은 이처럼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보던 다소 피상적인 무속에 대해 한 발 더 다가가 그 실체에 접근하는 다큐멘터리다. 한 편의 오컬트 장르를 보는 듯한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이 들어있지만, 다큐멘터리 특유의 진실에 접근해가는 진지함이 돋보이고 나아가 무당의 업을 물려받는 자들의 가족 서사 같은 진한 감동도 담겨있다. 다큐멘터리로서 K오컬트의 탄생을 이야기해도 될 법한 재미와 완성도가 충분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사진: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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