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범죄스릴러보다 공포물처럼 보이는 이유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우리시대에 스마트폰이란 어떤 의미일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하루 온종일 내내 우리는 스마트폰과 함께 한다. 잠을 깨워주고 날씨와 스케줄을 알려주며 음악을 들려주고 사진을 찍어 불특정 다수의 인물들과 소통하게 해준다. 또 뉴스를 보고 쇼핑을 하며 게임을 하기도 하고 때론 위치를 찾아주기도 한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가 하는 실감은 스마트폰 없는 하루를 살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번쯤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경험을 했던 분들이라면 내 삶의 일부가 뚝 잘려진 것 같은 기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넷플릭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극단화한 범죄스릴러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스마트폰을 떨어뜨린 이나미(천우희)에게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이 그것이다. 하필이면 연쇄살인범 오준영(임시완)의 손에 들어간 스마트폰은, 그것만으로도 이나미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오준영은 지능적인 방식으로 이나미의 스마트폰을 해킹함으로써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감시하며 서서히 그 삶을 파괴해 나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오준영이 하는 이 범죄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스마트폰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가 적나라하게 보여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이 우리네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건, 오준영이 해킹을 통해 벌이는 범죄를 통해 드러난다. 즉 마치 이나미인 척 SNS에 글 몇 개를 악의적으로 올리는 것만으로 그의 사회적 삶이 망가진다. 오준영은 이처럼 이나미에게 범행을 하기 전 주변인물들과의 관계를 하나하나 제거해나가는데 그 과정이 스마트폰 해킹 하나만으로도 어렵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2018년에 제작된 일본 동명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범인의 정체를 일찍부터 드러낸다는 점에서 원작과는 사뭇 다르다. 즉 원작은 범인의 실체가 뒷부분에 드러나는 것으로 그 궁금증과 반전의 힘으로 흘러가지만, 이 작품은 이 스마트폰을 습득한 범인이 어떻게 이나미는 물론이고 그 주변사람들까지 파괴해 가는가 하는 과정과 결국에는 벌어지는 대결로 흘러간다. 

 

이러한 설정의 변화는 이 작품을 원작이 가진 범죄스릴러의 색깔보다 공포물의 색깔을 갖게 만든다. 범인이 어떻게 스마트폰을 활용한 범죄 행각을 벌이는가가 보여지고, 시시각각 오나미를 향해 조여오는 범인이 기상천외한 범죄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공포감이 영화 전편을 가득 채운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그래서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그것이 악용되었을 때 어떤 일까지 벌어질 수 있는가 하는 공포를 그린다. 

 

그런데 그 공포의 실체가 아이러니하다. 결국 그토록 스마트폰에 집착하며 사진으로 일상을 공유하기까지 하는 건 사람들과 연결되고픈 욕망 때문이다. 거기에는 ‘고립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집단적인 욕망이 작동하는 것인데, 이 작품에서 범인의 손에 들어간 스마트폰은 정반대로 주인공을 고립시킨다. 이 아이러니를 통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 하는 걸. 

 

이 작품 속에서 스마트폰은 결국 그걸 소유한(어찌 보면 거꾸로 스마트폰이 우리는 소유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 자신처럼 그려진다. 술에 취해 이나미가 스마트폰을 떨어뜨린 건 그래서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잠깐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일이 되고, 그걸 습득한 오준영이 수리해주는 척 해킹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제 손으로 깨는 장면은 그 주인인 이나미의 존재 자체를 산산조각 내버리는 장면처럼 그려진다. 스마트폰이 나 자신이 된 세상은 모든 걸 그걸로 할 수 있는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그걸로 나의 세상이 모두 저당 잡힐 수 있는 디스토피아이기도 하다. 

 

그래서 범죄스릴러의 외양을 갖고 있지만 공포물 같은 느낌을 주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또한 스마트폰 사회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사회극이자 하나의 보고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원작과 다른 이러한 방향성이 중후반부의 긴장감을 다소 흩트리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선택이 담아낸 사회적 의미는 더 선명해진 면이 있다. 물론 이건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가 하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것이지만.(사진: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연애대전’, 단언컨대 김옥빈 아니면 이런 멜로는 불가능하다

연애대전

언젠가부터 K드라마에서 멜로가 시들해진 건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 있어서다. 먼저 여주인공이 너무 천편일률적이었다. 캔디거나 신데렐라거나 혹은 그 변주 어디쯤에 있는 캐릭터들이 대부분이라 “아직도 저래?”하며 채널이 돌아가곤 했던 것. 게다가 남자주인공들도 잘 생기고 잘 나가는 것으로 뭇 여성들을 무조건 설레게 만든다는 그런 전제 하에 등장하는 ‘왕자님’의 또 다른 버전 정도라 식상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가부정적 틀 안에 머물러 있는 멜로의 구도가 달라진 현 시대의 감수성에는 너무 구닥다리로 보이는 면이 컸다. 

 

그래서 연애세포가 현실에서도 멜로드라마에서도 식었다 느낀 분들이 적지 않을게다. 그래서 이런 마음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연애대전>이라는 제목을 보면 먼저 선입견부터 생긴다. “또 연애네?” 하다가 “혹시나 하지만 역시나겠지”하는 마음부터 생겨 좀체 플레이버튼을 누르기 꺼려지기도 한다는 것. 하지만 <연애대전>은 단언컨대 그런 “아직도 저래?”나 “또 연애네?” 혹은 “역시나” 하는 그런 멜로가 아닐까 하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멜로드라마다. 

 

물론 구도는 다르지 않다. 남자주인공은 톱배우 남강호(유태오)이고 여자주인공은 연예기획사를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로펌 변호사 여미란(김옥빈)이다. 여기에 여미란의 절친 신나은(고원희)과 남강호의 매니저이자 형 같은 존재 도원준(김지훈)의 서브 멜로가 더해져 있다. 그러니 이 구도만 보고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일종의 갑을 계약관계로 만난 남강호와 여미란이 그러다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 옆에서 절친과 동생을 지지해온 신나은과 도원준 또한 가까워지리라는 걸. 

 

구도가 다르지 않지만 이 멜로드라마가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 건 여미란이라는 인물의 매력이다. 등장부터 취객 상대로 소매치기를 하는 나쁜 놈을 지나치지 못하고 화려한 액션으로 때려 눕히는 여미란은 저 흔한 캔디나 신데렐라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게다가 “여자가?” 같은 성차별적인 말을 그냥 지나치며 넘기지 못할 정도로 여성의 주체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여자 변호사’나 ‘여배우’ 같은 표현 하나 속에 담겨 있는 성차별적 뉘앙스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는 인물. 

 

남자 하면 일단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며 만나는 게 손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여미란은 그렇게 남자들과의 관계를 일종의 대결구도로 바라본다. 그건 과한 면이 없잖아 있어 보이지만, 그렇게 여미란을 만든 건 실제로 성차별적이고 성희롱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회 때문이다. 여미란은 그래서 그런 사회 속에서 차별당하지 않고 버텨내기 위해 하루하루를 싸울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대변한다. 그러니 애초에 연애세포라는 게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남강호는 ‘멜로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여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멜로드라마의 아이콘이지만, 그는 놀랍게도 과거 좋아했던 여자에게 처절하게 버려진 트라우마 때문에 스킨십을 하면 ‘어택’이 오는 공황장애를 겪는 배우다. 그래서 스킨십을 하는 장면에서는 약을 먹어야 겨우 할 수 있는 상황. ‘멜로의 신’이란 그렇게 거짓된 연기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었다. 다가오는 여자들은 그의 화려함만 볼 뿐 그 이면의 상처까지 보진 못한다. 그러니 그는 여성들이 모두 남자 하나 잘 만나 팔자 고쳐보려는 그런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러니 연애는 언감생심이다. 

 

<연애대전>은 이렇게 연애 자체에 철벽을 치는 남녀가 싸우듯이 만나고 그러다 점점 진심을 알게 되고 그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변해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서사의 틀은 전형적인 멜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워낙에 이 여미란이라는 걸크러시 캐릭터가 독보적이고 그래서 그 매력에 점점 빠져드는 남강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저도 모르게 성차별적 세상의 문제들을 공감하고 그것과 싸우는 여미란의 자세에 응원과 지지를 하게 된다. 

 

흥미로운 건 멜로의 신으로 불릴 정도로 멜로드라마만 하던 남강호가 드디어 누아르 액션영화를 찍게 되고, 그래서 ‘근본 없는 싸움’에 재능이 있는 여미란에게 액션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관계가 진전되고 그 속에서 엑스트라 액션까지 하게 된 여미란이 이 남성판인 누아르 영화 촬영장에서 점점 독보적인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사실 누아르 액션은 남성들의 마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장르지만, 그 안에서 오히려 주목받는 여미란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그러면서 그 누아르 판에서 남강호와 여미란의 진짜 사랑이 싹튼다. 

 

물론 세상은 여전히 성차별적 시선으로 두 사람의 연애를 바라본다. 즉 그저 로펌 변호사 혹은 엑스트라라고 하면 주목하지 않지만 남강호의 여자친구라고 하니 갑자기 주목받는 그 상황이 그렇다. 여미란은 그걸 뛰어넘기 위해 오로지 실력으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고 오롯이 그 자신의 역량으로 인정을 받는다.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 속에서 두 사람 역시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서로 부딪쳐가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변화해간다. <연애대전>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들의 티격태격은 끝까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면서 사회적 관습 안에서 저도 모르게 내재되어 왔던 차별적인 것들이 조금씩 바뀌어나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흥미진진한 건 여미란의 시원시원한 액션이 더해진 멜로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김옥빈이라는 배우가 가진 매력은 이 캐릭터를 더더욱 매력적이게 만든다. <악녀> 같은 작품을 통해 카리스마 넘치는 액션 연기를 선보였던 김옥빈의 이미지가 밑그림을 그려주고 그 위에 이 주체적인 여성이라 더욱 달달한 멜로가 더해진다. 실로 김옥빈이 아니면 이 역할이 이렇게 두드러질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다. 그래서 멜로드라마를 봐도 별로 설레지 않거나 유치하게 느껴졌던 분들이라면 강추하는 드라마다. 죽었다 생각했던 연애세포를 흠씬 두들겨 패서 깨워내는 김옥빈의 매력에 푹 빠져들테니.(사진:넷플릭스)

이런 게 스캔들이 되는 볼썽사나운 사교육 현실(‘일타스캔들’)

일타 스캔들

“설마, 따로 봐준다고? 남해이를 최치열이?” 결국 일타강사 최치열(정경호)이 남행선(전도연)의 딸 남해이(노윤서)의 ‘비밀과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다. 조수희(김선영)의 딸 방수아(강나언)가 남해이의 가방에서 나온 최치열의 교재를 의심했고, 거기 적힌 빨간 펜 글씨들이 최치열의 글씨라는 걸 확인하게 되면서다. 조수희는 도저히 이 일을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결국 흥신소 사람까지 써서 최치열을 미행 추적하게 한다. 

 

tvN 토일드라마 <일타스캔들>은 달달하고 빵빵 터지는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의 색깔이 강하지만, 이 드라마 뒤편에는 사교육을 둘러싼 볼썽사나운 사교육 현실이 깔려 있다. 일타강사가 7명만을 뽑아 가르치는 특별반을 운영하는 것도 그렇지만, 거기 들어가기 위해 난리를 치는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이 도를 넘는다. 시험을 봐서 합격한 남해이를 이런 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서 내쫓더니, 그 자리에 떡 하니 부유층 자제가 낙하산처럼 내려앉는다. 

 

게다가 아이들을 대하는 학부모들은 정상이 아니다. 누가 부모이고 누가 아이인지 뒤바뀐 듯한 선재(이채민)네 집을 보면, 그의 엄마 장서진(장영남)은 술에 취해 아들에게 너 밖에 없다며 너마저 잘못되면 엄마는 진짜 죽는다고까지 말한다. 여기서 잘못된다는 건, 진짜 무슨 죄를 짓거나 하는 그런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이 이 엄마에게는 잘못된 일이다. 

 

장서진이 “너마저 잘못되면”이라고 말하는 건 이미 그의 형이 부모의 엄청난 압력 때문에 엇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 압력을 못 버텨낸 선재의 형 희재(김태정)는 입시 당일 시험을 치르지 않고 대신 방으로 숨어버린다. 은둔형 외톨이가 된 것. 이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지 못한 부모들은 그가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공부한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실상 그는 밤이면 슬쩍 집을 나와 의심스런 행동들을 한다. 그는 잘못되었다. 엄마가 ‘잘못됐다’고 하는 순간 진짜로. 

 

조수희의 딸 방수아 역시 ‘잘못되는 중’이다. 그는 상당히 자발적으로 이 입시 경쟁 속에서 그 누구도 자신을 앞서면 안 된다는 강박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 그의 엄마 조수희도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 자발성이란 부모의 내 자식만 생각하는 그 태도가 당연한 듯 수용되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제대로 된 부모라면 자식이 그처럼 지나친 경쟁의식을 갖는다면 이를 풀어줘야 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이 이상한 엄마는 특별반 7인 중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도 오로지 ‘내 새끼’만을 생각한다. “난 이럴수록 휴강은 아니라고 봐. 어차피 애들도 다 알 텐데 얼마나 놀랍고 무섭겠어요? 근데 수업까지 안해? 그럼 우리 애들 멘탈 더 흔들려요.”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죽어도 내 아이의 멘탈이 더 중요하다는 이런 생각은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상상해보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 드라마 속에서 ‘열혈맘’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엄마들은 사실 한 발만 물러나서 생각해보면 이상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이미 그 현실 속에 들어와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엄마들을 ‘돼지 엄마’니 ‘강남 엄마’니 하며 그러려니 보고 있지만, 만일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외국에서 이를 접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학원 선생이 이른바 ‘일타강사’로 불리며 연봉 수백억을 받는 스타가 되는 현실이나, 단 7명만 모아서 특별반을 운영하는 학원이나 거기서 자료가 유출되는 것조차 마치 범죄나 되는 듯이 생각하며, 나아가 그 일타강사가 누군가의 과외를 하는 일에 이른바 ‘열혈맘’들이 나서서 분개하는 일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별 이상할 것도 없는 일상이지만, 우리 바깥에서 보면 너무나 이상한 일처럼 보일 게다. 

 

<일타스캔들>은 일타강사가 반찬가게 딸의 수학을 과외 하는 일이 ‘스캔들’이 되는 우리 사회의 이상한 풍경을 밑그림으로 삼아 그려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장르를 잘 이해하고 잘 만들어 설렘과 웃음이 시종일관 멈추지 않는 이 웰메이드 드라마는 그래서 그 사랑이야기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찾게 한다. 결국 이 이상하게 치열한 경쟁의 피 냄새와 음습한 돈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 위에 설렘과 따뜻한 인간애가 느껴지는 ‘밥 냄새’를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대결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진:tvN)

변화의 시대, ‘바빌론’이 100년 전 할리우드를 추억한 건

바빌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말을 태워 옮기는 트럭이 멈춰서고 운전수가 내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에게 트럭을 불렀냐고 묻는다. 그러자 매니는 말이 아니라 코끼리라고 말한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화를 내던 운전수는 그러나 뒤편에 서 있는 진짜 코끼리를 보며 깜짝 놀란다. 절대 안된다는 운전수에게 매니는 할리우드 인사들이 벌이는 파티로 코끼리를 옮기려 하는 것이고, 그걸 해주면 파티에도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자 운전수는 기꺼이 이를 수락한다. 그리고 경사가 심한 길에서 코끼리를 태운 트럭을 거대한 똥 세례까지 받아가며 매니와 운전수가 오르는 기상천외하면서도 코믹한 광경이 펼쳐진다.

 

데미안 셔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의 이 도입부는 그가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한 편의 기발한 은유처럼 그려진다. 도대체 어떤 파티길래 코끼리까지 등장할까 궁금하지만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드는 재즈음악이 가득한 그 곳은 한 마디로 광란과 난장의 끝판이다. 마약과 섹스에 취해 반나로 춤을 추며 갈수록 혼돈 그 자체가 되어가는 그 난장은 자극의 끝판이다. 그러니 코끼리가 등장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 곳은 돈과 화려함으로 빛나는 할리우드 스타들, 제작자들, 감독들, 배우들이 모여 코끼리처럼 매혹적으로 시선을 끌지만 똥 세례를 싸대는 코끼리 같은 엉망진창의 대혼돈이 뒤섞여 있다. 

 

엉망진창이지만 유혹적이고 무엇보다 그것이 현실 공간이지만 완전한 비현실적인 판타지처럼 보이는 환각 파티 현장은 바로 데미안 셔젤 감독이 영화에 대해 갖는 양가감정을 잘 보여준다. 현실에서 허공으로 붕 떠있는 듯한 광경들이 펼쳐지고 실제로 혼몽해진 이들이 인파들 위에 올려져 옮겨지며, 뒤섞여 혼음을 펼치는 모습은, 파티 다음 날 보여지는 영화 촬영장의 난장과 기막힌 댓구를 이룬다. 환각 파티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전쟁통이 따로 없는 영화 촬영장이다. 

 

그런데 그 정신없는 난장판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인물들이 눈에 띤다. 전날 파티장에 대뜸 찾아와 스스로를 ‘타고난 스타’라 말하며 그 혼돈 속에서도 시선을 잡아 끌던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는 파티 때문에 펑크 낸 배우 대신 창녀 역할을 맡아 단박에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파티장에서 넬리 라로이를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매니는 넬리에게 영화판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는 무성영화의 스타인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때문에 영화 촬영장에 우연히 왔다가 기회를 잡는다. 잭 콘래드는 술과 마약에 쩔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지만 감독의 ‘액션’ 소리에 영화 속 인물이 되어 연기한다. 영화 촬영장은 대 혼돈 속이지만 그 안에는 이마저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데미안 셔젤 감독은 이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조악하고 나아가 경박해 보이기까지 한 영화의 현장들은 다름 아닌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의 할리우드다. 녹음기술이 들어가 있지 않아 하나하나 자막을 찍어 인서트 컷으로 넣었던 시대의 풍경이다. 잭 콘래드는 그 무성영화 시대 영화가 탄생시킨 스타다. 대사를 할 필요가 없고, 영화는 하나의 스토리를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극장의 관객들을 환호하게 했던 시대. 당시 영화는 기차역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찍어 보여줘도 경탄의 박수를 받던 시절이었다. 

 

넬리 라로이 역시 이런 시대의 끝자락에 기회를 잡아 벼락스타가 된다. 저 환각의 파티에서 누가 더 과감한 행동과 춤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주목을 받게 되는 것처럼, 넬리 라로이는 타고난 끼로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하지만 <바빌론>은 무성영화 시대에 탄생한 스타의 성장담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당시 정점에 올랐던 스타가 유성영화로 변화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추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심지어 엽기적인 느낌을 주는 현장을 그저 카메라에 담기만 해도 영화가 되고, 그것이 대중들의 판타지를 자극했던 무성영화 시대는, 목소리와 현장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유성영화 시대를 맞아 영화와 대중들 사이에 놓여있던 가림막이 한 꺼풀 벗겨진다. 잭 콘래드는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된 영화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관객들을 목격하고, 가식 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는 것으로 무성영화 시대에 벼락스타가 됐던 넬리 라로이는 이제 말도 안 되는 불어까지 구사해가며 자신을 포장해야 상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한다. 결국 그 끝은 우리가 이미 영화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비극이다. 한 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타들은 그 빛을 지나 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왜 하필이면 지금 데이먼 셔젤 감독은 시간을 100년 전으로 되돌려 무성영화 시대의 끝자락을 들여다본 것일까. 그건 다시 현재 영화가 마주하고 있는 변화에 대한 아름다운 도발이 아닐 수 없다. OTT가 생겨나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이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은 분명 영화에 변화가 생기고 있는 시대다. 데이먼 셔젤 감독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스타와 감독과 제작자들이 탄생할 테지만, 그렇다고 스포트라이트 바깥으로 밀려난 저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한참이 지난 후 다시 할리우드를 찾았다가 우연히 극장에서 옛날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리는 매니를 통해 전한다. 

 

시대는 계속 바뀐다. 그건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2023년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바뀐 새로운 시대는 과거의 시대를 몰상식하고 때론 폭력적이며 때론 거짓과 위선으로만 가득 찬 난장판처럼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 변화된 시대를 맞아 어느 날 갑자기 비웃음을 사는 위치로 추락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디 스타들만의 이야기랴. 보통 사람들 역시 한 때를 구가하지만 시대 변화 속에서 기성세대로 구세대로 밀려나지 않던가. 그래서 할리우드 가십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스마트 진)이 혹평을 한 일에 화가 난 잭을 위로하는 한 마디는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당신의 재능으로 빚은 영화만큼은 천사의 영혼처럼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

 

시대가 바뀌어도 그 시대를 만들었던 이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데이먼 셔젤 감독은 이 또다시 맞이하게 된 영화의 변화의 시대에 대해 100년 전 이야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과거의 시대는 몰상식하고 때론 폭력적이며 때론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난장판처럼 치부되지만, 그 안에도 빛나는 열정들이 있었고 그것은 당대의 영화라는 기록을 통해 후대에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 무려 세 시간짜리 영화지만 극장에서 봐야 진짜 맛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으로 데이먼 셔젤 감독은 영화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전하고 있다. (사진:영화'바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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