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 어쩌다 잔인한 프로그램이 되었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동물학대라 부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정글의 법칙> 사바나편에서는 갑작스럽게 동물학대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사냥을 하기가 쉽지 않은 오지에서 김병만이 무려 6시간에 걸쳐 만든 석궁으로 작은 새를 잡는 장면과, 촬영 끝날 때까지 올무에 잡히지 않은 딕딕(사슴처럼 생긴 동물)이 카메라를 끈 뒤에 잡히자 그 가죽을 벗겨내고 고기를 나누는 장면이 모자이크도 처리되지 않은 상태로 방영된 것에 대해서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원주민들도 살기 위해 사냥해 먹는 동물이고, <정글의 법칙>은 어떤 면에서는 그 곳의 생존법칙을 배우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어쩌면 어쩔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하는 건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끊임없이 동물들을 사냥하고 잡아먹는 장면들을 반복하다 보니 거기에 둔감해진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칫 잔인해 보일 수 있는 장면들을 그대로 내보내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는 것과 그래서 힘들게 석궁까지 동원해 새를 잡은 것까지는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석궁으로 잡아 껍질을 벗긴 새를 나무 위에 얹어놓고 원래대로 나무에 앉아있네하며 낄낄대는 장면을 굳이 자막까지 붙여 내보내는 건 그 뉘앙스가 다르다.

 

물론 현장에서 출연자들이 동물을 학대하는 마음을 갖고 그런 말과 행동을 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달리 바라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더라도 동물과 자연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실제로 과거 <정글의 법칙>에서 강조한 것은 생존만큼 중요했던 게 공존이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사냥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생존하게 해주는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철학 중 하나였다. 이런 철학이 프로그램에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글에서의 사냥이나 어로, 채취가 허용되었다. 특히 먹거리가 풍부해 심지어 먹방의 느낌마저 풍겼던 뉴질랜드편에서조차도 이러한 먹거리들은 자연의 선물로 표현되기도 했다. 얼마나 다른 태도인가.

 

사실 동물학대라는 조금은 과한 비판마저 나오게 된 데는 이번 사바나편이 예능적인 재미를 별로 주지 못하고 거의 사냥과 먹방에 거의 집착했던 것에서 비롯된 바도 크다. 또 세렝게티에서 누떼를 보기 위해 기구를 타고 올라가 감탄하는 장면은 아마도 현장에 있는 출연진들이나 스텝들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을지 몰라도 <정글의 법칙>을 즐겨보는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너무 식상한 장면처럼 여겨졌을 게다.

 

우리는 이미 무수한 동물 다큐들을 통해 더 생생한 동물들의 모습을 너무 많이 접했다. <정글의 법칙>에 시청자가 원하는 건 그런 그림이 아니라 진짜 그 세계 속에 뛰어들어 경험하는 교감이다. 이번 사바나 편과 과거 마다가스카르편을 비교해서 생각해보라. 물론 동물의 종류가 다를 것이지만 마다가스카르편에서 출연진들은 동물과 함께 어우러지는 장면들을 계속 해서 보여주지 않았던가.

 

만일 사바나라는 환경이 마다가스카르와는 달리 생존경쟁의 공간이라 어쩔 수 없이 동물들을 사냥하고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것이 프로그램을 통해 충분히 드러났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사바나편에서는 출연자들의 내면이나 심리변화 혹은 육체적 상태가 그다지 프로그램에 보여지지 않았다. 즉 그저 겉모습만 계속 보여주면서 그들의 생존상황은 좀체 시청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의 과도한 사냥 장면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사냥 그 자체에 대한 집착처럼 보였다는 얘기다.

 

인물들의 내면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는 걸 단적으로 말해주는 건 이번 편에서 유독 출연진들의 캐릭터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새롭게 합류한 이들을 포함한 출연진들은 만만찮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프로그램을 통해 잘 전달되지 않아 심지어 오인까지 받는 상황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글의 법칙>이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이 왜 그 힘겨운 공간에 들어가는가에 대한 명쾌한 이유를 프로그램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생존과 공존 같은 의미는 이 프로그램의 존재 근거를 그저 재미에만 머물게 하는 위험성을 피하게 해준다. 만일 그저 재미만을 위해 정글에 뛰어든 것 같은 느낌을 프로그램이 자아내기 시작하면(그렇게 한다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생존 행위는 그 자체로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게 된다.

 

이번 사바나편에서 상대적으로 보여지지 않은 아프리카가 겪고 있는 눈물은 그런 점에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누떼의 대이동은 그저 장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우리가 공존을 생각해야 하는 의미도 들어가 있다.

 

물론 조작 논란 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글의 법칙>은 꽤 괜찮은 기획이다. 하지만 이 기획이 괜찮으려면 거기에 합당한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자연과 환경을 대하는 철학.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정글의 법칙>은 자칫 사냥의 법칙같은 잔인한 느낌을 주는 프로그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초심, 초심 하지만 <정글의 법칙>이야말로 초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글은 왜 점점 슬퍼지는가

 

30년 전 한 사내가 뉴기니의 해변을 걷다가 얄리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이 사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백인들은 짐이 많은데 우리 뉴기니인들은 짐이 적은 걸까요?” 뉴기니에서 짐이라는 단어는 재산이라는 뜻이다. 이 뉴기니인 얄리의 질문은 지극히 단순해 보였고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이 사내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사실 같은 지구에 살면서도 왜 누구는 부자로 살게 됐고 또 누구는 가난하게 살게 됐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내는 그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그 해답은 <총,균,쇠>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쓰여졌다. 이 사내의 이름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였다. 그는 이 책으로 1998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사진출처:KBS)

얄리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총, 균, 쇠이다. 즉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처럼 삶의 분균형이 생길 수 있었던 원인이 그들이 발명한 총과 그들이 보유한 균(그들에게는 내성이 생겼지만 원시부족에겐 치명적인 이를테면 천연두 같은),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벼려진 칼을 생산하게 해준 강철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생겨난 현재의 빈부가 거기 사는 부족들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유럽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미리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유럽인은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그렇다면 거꾸로 이들이 ‘운이 좋아’ 갖게 된 총, 균, 쇠에 무참히 쓰러져간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요구된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가 다시 읽히고 다시 주목되는 건 바로 이런 자각 때문일 게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 오면서 서구인들의 사실상의 정복 전쟁을 마치 신대륙 발견 같은 문명의 전파로 보는 그들 중심적인 시각에 대한 반성은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계속 되고 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다수와 소수의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의 논리로서 경쟁보다는 공존의 의미를 찾는 건 결국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이 초래한 전 지구적인 위기상황을 우리가 이미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최근 들어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남극의 눈물> 같은 눈물 시리즈 다큐멘터리가 오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적인 새로운 시각으로 이 공간을 다시 바라보기 위함이다. 아마존에 들어간 이들은 도시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오지일 수밖에 없는 그 곳에서 벌거벗고 살아가는 원시 부족들의 삶이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한 삶일 수 있다고 증언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도시의 침탈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그들의 삶을 아프게 포착해낸다. 그들의 눈물이 우리들의 풍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다시 자각시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정글의 법칙> 같은 예능 프로그램 또한 이 슬픈 정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고 있다. 최근 이 프로그램은 일부 장면들이 과장되게 연출되고 때로는 섭외된 원주민들을 출연시켜 조작방송을 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으로 홍역을 겪기도 했다. 물론 <정글의 법칙>은 그 기획의도가 서구의 대표적인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베어 그릴스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베어 그릴스의 프로그램이 제목처럼 인간과 자연을 여전히 대결구도로 그리고 있다면, <정글의 법칙>은 그 혹독한 환경 속에서 다시 찾아내는 가족개념이라든가 원주민들이나 자연과 도시인이 어우러지는 공존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느껴지는 비애감은 이러한 좋은 의도로 찾아간 카메라조차 거기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일 게다. 이미 도시의 바람을 쐰 원주민들은 과거 그들의 전통적인 삶의 공간에 머물지 못하고 도시로 떠나기 일쑤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에 가서 목격한 것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살아왔던 공간에서 벗어나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과거에는 백인 침략자들을 위협하곤 했던 말라리아가 이제는 도시에 모여든(전염이 강해졌다)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현실이다. 아마도 수많은 방송사들이 이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재조명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어도 그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을 도시로 끌고 와 결국은 파괴하는 행위가 된 것은 아니었을지. 그들의 삶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혹여나 방송 프로그램으로서 도시인들의 시각과 욕망을 더 투영한 것은 아니었을지.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정글의 법칙>이 정글 속에서 발견한 미덕은 뭐든 문명의 이기를 덕지덕지 붙인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그것들을 떼어내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진짜 삶의 의미일 게다. 그들은 문명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자연 뿐인 그 깊은 정글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네온사인 불빛대신 별을 보기 시작했고 자동차 소리 대신 새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이 소비되는 통에 그 가치를 알 수 없었던 한 끼 식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고, 따뜻한 집에 안락한 침대에 널브러져 진짜 안락의 의미를 모르던 우리들에게 그저 비 피하고 등 펼 수 있는 곳에서의 하룻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정글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시선으로 정글을 바라본 것일 지도 모른다. 진짜 정글은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때 그 자체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존의 눈물>에 이어 <남극의 눈물>을 찍고 돌아온 김진만 PD는 이 ‘조심스러움’에 대해 필자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희가 황제 펭귄을 찍을 때도 짝짓기부터 산란과 부화 과정을 쭉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으로부터 애정이 우러나더라고요. 어제 아팠던 펭귄들이 오늘 가보면 얼어 죽어가고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정말 마음이 아프죠. 규정 때문에 펭귄들이 알을 품을 때는 70m 안쪽으로는 접근 자체를 못해요. 그러니 만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죠. 만약 규정을 어겼다가는 바로 쫓겨납니다. 촬영하는 동안 호주기지 대원들이 내내 감시를 하고 있어요. 새끼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보면 옷 안으로 넣어주고 싶고 대피소로 데려가 따뜻한 미역국이라도 먹이고 싶었어요. 그러면 바로 원기를 찾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가슴이 미어져도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이 얘기는 지금 현재 원주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방적인 시선과 그 조심스러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글의 법칙>의 논란 속에서 불쑥 불거져 나온 몇몇 이야기들은 또 다른 비극이 정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을 만든다. 실제로 원주민들은 이제 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위협적인 동작을 연출하고,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사냥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조금 심한 농담 속에는 감독이 “액션!”을 외치면 옷을 하나 둘 벗고는 원주민 차림(사실은 거의 벌거벗은)으로 카메라 앞에 나선다는 얘기까지 돌고 돈다. 물론 이것이 모두 사실일 리는 없을 테지만 어쨌든 카메라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원주민들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거 정복의 시대에 원주민들을 정글에서 몰아낸 것이 총, 균, 쇠였다면 이제 정보의 시대에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가 아닐까. 카메라는 심지어 그 카메라의 목적이 그들의 삶을 지켜내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그들의 삶 속에 도시의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도시에 그들의 삶조차 상품화하고 대상화시켜버린다. 따라서 카메라의 세례(?)를 받은 원주민들은 더 이상 과거의 원주민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워진다. 카메라는 그래서 자본주의의 첨병인지도 모른다. 정글이나 오지마저도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그 어느 것이든 상품화해버리는 자본의 속성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암울한 징후처럼 보인다. 이제 카메라는 어디든 들어가고 그래서 그 내밀한 정글을 파헤쳐 그들의 삶을 하룻밤의 오지 체험으로 바꾸고 있다. 또 그렇게 카메라를 따라 들어간 자본은 그 원주민들의 삶 또한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많은 원주민들이 카메라가 영혼을 뺏어간다고 믿었던 것은 그만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 아닌가. (이 글은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정법> 아마존편, 왜 없는 리키 김의 존재감이 더 클까

 

<정글의 법칙>은 서구의 서바이벌 리얼리티쇼를 닮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진화된 형태다. 예를 들어 베어 그릴스가 나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는 <인간과 자연의 대결>같은 프로그램은 흥미롭지만 그것은 여전히 20세기적인 가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가치란 인간과 자연이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해가는 것이다. 물론 <정글의 법칙> 역시 자연 앞에서의 생존을 다루지만 또한 자연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정글의 법칙>을 저 서구의 서바이벌 리얼리티쇼와 구분 짓는 가장 큰 것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점일 게다. 정글에 떨어지는 것은 김병만이 아니라 병만족이다. 그들이 이루는 유사가족은 정글이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어떻게 서로 도우며 공존해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그 곳에 누가 함께 가는가 하는 점은 <정글의 법칙>이라는 진화된 프로그램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정글의 법칙> 아마존편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많이 이들이 함께 아마존에 들어갔지만 과연 그들은 함께 그 힘겨운 환경을 버텨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번 아마존편 만큼 김병만 혼자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이 줄기차게 나왔던 적도 없었다. 그는 거의 혼자 뗏목을 만들고 병만족들을 위해 먹을 것을 찾아 나서며 구한 먹거리로 음식까지 만들어주고 심지어 트럭 운전까지 혼자 다 해냈다. 그리고 그 무리한 혼자만의 헌신(?) 끝에 결국은 콩가개미에 물려 쓰러지고 말았다.

 

물론 김병만은 족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게다. 또 다른 팀원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걸 보여주는 건 방송이다. 방송 내내 김병만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장면을 본다면 시청자들 입장에서도 그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어렵고 힘겨운 상황만 김병만에게 집중된 상태이기 때문에 제작진이 강을 스스로 건너서 정글을 탈출하라는 식의 미션 제안은 ‘도전’의 의미보다는 ‘혹사’의 느낌을 더 주기 마련이다. 강물을 건너다 미르가 중간에 고립되는 위험천만한 장면이나 비로 불어난 강물을 뗏목 하나로 건너는 장면이 과하게 여겨지는 건 그 때문이다.

 

이것은 제작진의 잘못이다. 똑같이 고생을 한다 해도 함께 고생을 한다면(아니 그런 장면이 편집되어 방영된다면) 거기서 어떤 가족애나 형제애 같은 가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힘든 장면들만 반복해서 보여주는 건 보는 시청자들 역시 지치게 만든다. 특히 김병만 한 사람에게 너무 의지하는 건 전술한 ‘공존’의 의미를 기치로 내세운 <정글의 법칙>이라는 프로그램의 취지와도 잘 맞지 않는다. “김병만 혹사 시스템이다”, “추성훈은 왜 갔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대중들의 반응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잘 말해준다.

 

이번 아마존 편에서 많은 이들이 거기 함께 가지 않았던 리키 김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간 늘 김병만 옆에 붙어서 마치 형제처럼, 그림자처럼 그를 도왔던 리키 김이 더 간절해진 것. 물론 처음에는 부딪친 적이 있지만 그 후로는 어떤 일이든 앞장서서 김병만과 척척 일을 해결해가는 리키김은 어쩌면 바로 그런 면에서 이 프로그램이 내세우는 가족애와 공존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정글의 법칙>이 서구 서바이벌 리얼리티쇼들보다 진일보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바로 이 가치 때문이다. 그 가치를 잊어버리고 자연과 사투를 벌이는 자극적인 장면만을 자꾸만 내보낸다면 그것은 이 훌륭한 프로그램을 퇴화시키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아마존 편에서 가장 존재감을 드러낸 인물은 거기 가지 않았던 리키 김이 되었다. 뉴질랜드 편에 합류한 리키 김이 그토록 반가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최후의 제국>이 대선주자들에게 건네는 말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울렸을까. SBS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단 몇 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아주 작은 섬 아누타에서 촬영을 마치고 떠나는 제작진들을 향해 원주민들이 통곡을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우리 주변의 누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시인들에게 그저 이별이 아쉬워 통곡하는 원주민들의 모습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최후의 제국'(사진출처:SBS)

아마도 제작진도, 그 장면을 보는 시청자들과 똑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그들은 처음에는 멍해졌다가 차츰 그 통곡이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어느새 그 울림이 닿은 제작진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장면을 본 시청자도 마찬가지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말이 오고갔던 것도 아닌 그저 진심을 담은 마음 하나만으로 그들은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최후의 제국>. 영어 제목은 <The Last Capitalism>으로 ‘최후의 자본주의’를 뜻한다. 즉 자본주의의 위기를 다루는 이 다큐멘터리는 왜 그 멀고도 먼 외딴 섬 아누타까지 찾아갔을까. 그것은 아누타 섬이 자본주의에 의해 돈으로 모든 가치가 평가되는 세상과 정반대되는 가치를 보여주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제작진 앞에서 펑펑 눈물을 흘리는 그들이 보여준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깊은 공감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그 공감의 가치는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가치로 이어지고 있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의 세계는 아누타 섬과는 정반대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돈으로 가치 매겨지는 세상은 자신의 몸매 관리를 위해 대리 수유모를 사는 부자 엄마와 당장 벌이를 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 대신 남의 대리 수유모가 되는 가난한 엄마를 이어주었다. 급격한 자본의 물결이 몰아닥쳐 신흥 부자계급이 생겨난 데다, 멜라민 분유 파동으로 모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중국의 새로운 풍경이다. <최후의 제국>은 이 풍경에 대해 묻는다. 과연 돈은 모성도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고등학교는 수업에 빠지지 않고 숙제를 잘 해온 학생들에게 돈을 준다. 제 아무리 청소년 범죄를 줄이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려는 학교의 고육지책이라고는 해도 이런 교육은 결국 학생들에게 돈이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이 가치의 본말이 전도된 교육은 과연 이 학생들이 살아갈 세상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라는 미국이 34개 OECD 국가 중 빈곤율 4위라는 충격적인 보고에서 드러난다. 다큐멘터리는 플로리다주의 모텔에서 살아가는 굶는 아이들을 조명하며 이 아이들이 왜 이런 불행에 처하게 됐는지를 꼬집는다.

 

아마도 그토록 멀리 떨어진 아누타 같은 외딴 섬까지 찾아가서야 비로소 자본이 아닌 인간을 찾아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계의 불행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1%의 부와 99%의 가난. 미국에서 월가를 점령했던 그 유명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이 전 지구적인 위기 상황을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불편한 풍경들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과 이기심보다 중요한 공존의 가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돈이라는 번쩍거리는 괴물에 가려 바라보지 않던 그 불편한 진실을 우리 눈앞에 들춰냄으로써 급기야 공감하게 만드는 <최후의 제국>은 그래서 그 어떤 거창한 정상들의 회의나 연설보다 더 우리를 울리는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양극화가 극에 달하고 있는 지금, 저 미국의 풍경이 어찌 우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선에 즈음하여 모든 대선 주자들이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이 단순한 수사에 머무르면 안 될 것이다. <최후의 제국>은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들고 또 실천에 옮기게 만드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돈에 미친 세상에 던지는 다큐의 일침. 이것이 <최후의 제국>이라는 명품다큐가 보여주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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