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 인간의 공존, <삼시세끼>처럼

 

산체와 벌이 없는 <삼시세끼>를 생각할 수 있을까. <삼시세끼> 어촌편이 시즌2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시청자들의 마음은 벌써부터 산체와 벌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얼마나 자랐을까. 여전히 차승원과 유해진을 알아볼까. 또 함께 지내는 벌이와는 여전히 툭탁대고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제 고양이와 개의 행복한 공존을 이뤄내고 있을까.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차승원과 유해진이 다시 찾은 만재도의 집이 진짜 집처럼 여겨지게 만들어준 것도 산체와 벌이다. 방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 아이들은 과거의 즐거웠던 시간과 현재를 다시 이어주었다. 몸이 엄청나게 커진 벌이는 이제 산체와 대적할 만큼 힘이 세졌고, 그래서인지 산체는 자주 벌이와 대등한 입장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온 차승원과 유해진에게 잠시 경계하는 듯 하더니 금세 가까워져 무릎 위에 홀짝 올라오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제 힘이 좋아진 산체는 방이 답답했는지 게스트로 온 박형식이 데리고 산책을 나가자 거의 그를 끌고 다니다시피 했다. 박형식이 산체를 산책시킨 게 아니라, 거꾸로 산체가 박형식을 산책시킨 모양이었다. 그렇게 즐겁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산체를 보면서 벌이가 눈에 밟힌 유해진은 동네에 버려진 나무를 가져와 캣 타워를 만들어주었다. 만들어 놓은 사람 입장에서야 얼른 거기에 올라가는 벌이가 보고 싶을 테지만 유해진은 강요하지 않고 벌이가 스스로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결국 꼭대기에 오른 벌이를 보며 기쁜 마음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산체와 벌이가 함께 방안에서 노는 장면들은 <삼시세끼>의 중요한 에피소드 중 하나를 차지한다. 매번 방영되는 내용들 중 이들이 하는 행동들은 <삼시세끼> 특유의 자막과 어우러지며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다. “, , 같은 자막은 마치 사람들이 하는 행동처럼 꾸며지며 산체와 벌이의 캐릭터로 흡수된다. 그러니 시청자들에게 산체와 벌이는 그저 우리와는 다른 동물이 아니다. 거의 사람과 다름없는 가족으로서의 산체와 벌이인 셈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사실 산체와 벌이의 방안 에피소드는 시청자들에게 깊은 힐링을 안겨준다. 만재도의 환경을 떠올려보라. 따뜻한 여름이야 그나마 찬란한 햇빛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지난 겨울의 혹독함을 생각해보면 따뜻한 방안에서 뒹구는 산체와 벌이가 그 자체로 힐링이 되어주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섬의 차가운 칼바람에도 만재도가 어떤 따뜻함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데는 산체와 벌이 같은 온기를 나눠주는 존재가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시세끼>, 아니 나아가 나영석 PD의 일련의 예능들이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꽃보다 할배>의 순대장 이순재가 동물의 친구로 불리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는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만난 비둘기 한 마리에게도 자신의 음식을 나눠주고 말을 걸어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행위가 전하는 건 동물에게 먹이를 준다는 단순한 의미만을 갖고 있는 건 아닐 게다. 길거리에 있는 동물에게도 마음을 나눠줄 수 있는 그 마음. 그 따뜻한 마음이 증명해주는 인간애를 우리는 거기서 발견하게 된다.

 

최근 벌어진 가슴 아픈 캣맘 사건으로 생겨난 대립은 이제 우리가 인간과 동물의 공존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놓여 있다는 걸 말해준다. 길거리 동물에 대해 연민을 보이는 이들이 있는 반면, 혐오를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중요한 건 이러한 연민 혹은 혐오가 인간 대 동물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문제까지도 확장될 수 있다는 인식일 게다.

 

적어도 <삼시세끼>가 산체와 벌이를 보듯이만 한다면 어떨까. 이런 문제의 해결점은 의외로 쉽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온기를 가진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건 동물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될 테니 말이다



모든 것들의 자연스러운 혼재, <냄새를>의 세계

 

달콤함과 살벌함은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 적어도 SBS <냄새를 보는 소녀>에 있어서만큼은 이 경계가 무너진다. 장르적 재미에 엄격하거나 그 틀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런 공감각적인 형사물에 적이 놀랐을 수 있다. 이 드라마에는 이토록 철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전 범죄를 실행해 옮기는 권재희(남궁민)라는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 드라마는 일찍부터 그의 정체를 드러내놓고 그가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은폐하는가를 자세히 보여준다.

 

'냄새를 보는 소녀(사진출처:SBS)'

권재희가 의사 천백경(송종호)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유기하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다. 그는 부주방장과 비밀 레시피를 만드는 시간을 자신의 알리바이로 이용한다. 미리 레스토랑에 도착해 요리를 준비해 오븐에 넣고, 타이머를 이용해 자동으로 시간에 맞춰 켜지게 만들어놓은 후 그는 트레일러에 천백경의 차를 실어 낯선 곳에 버리고 온다. 예약된 음식이 조리되는 그 시간을 자신의 알리바이로 만든 것이다.

 

드라마는 이 과정은 세밀하게 시간별로 보여준다. 알리바이를 더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해 대리기사를 이용해 레스토랑에 두고 간 차를 국도휴게소로 가져오게는 하는 시퀀스는 그래서 기막힌 알리바이의 장치가 된다. 그 차가 나가는 걸 본 부주방장에게 권재희는 전화로 집에 향신료를 가지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대리기사가 국도휴게소로 가져온 차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돌아온다. 굳이 천백경의 차를 옮기는데 트레일러를 이용하는 점이나, 트레일러의 번호판을 바꾸고, 대리기사에게 대포폰을 쓰는 등의 디테일들은 심지어 이 권재희의 치밀한 범죄행각을 흥미롭게 만든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런 살벌함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 권재희에 의해 동생을 잃은 뒤 감각을 잃어버린 최무각(박유천)과 역시 그에게 부모를 잃은 뒤 냄새를 보는 초감각을 갖게 된 오초림(신세경)의 달콤한 멜로가 또 한 축이기 때문이다. 순경이지만 동생의 복수를 위해 강력계의 일원으로 수사에 뛰어든 최무각을 초감각 소녀 오초림이 돕는다. 그것은 냄새를 보는 초감각을 이용한 특별한 수사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오초림이 개구리 극단에서 개그맨을 꿈꾸는 소녀라는 점은 이 달콤 살벌한 수사멜로물(?)에 코믹한 설정까지 덧붙여 놓는다. 무뚝뚝한 최무각이 오초림과 콤비가 되어 개그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장르적인 틀로만 바라보면 낯설다. 심각한 살인사건의 수사를 하는 주인공이 갑자기 극단에서 개그 코너를 선보인다는 건 만일 그리스 시대 극작가들이 봤다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장르는 혼재되고 왜 캐릭터는 장르 안에서 비현실적으로 일관성만을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시대다. 개구리 극단 대표 왕자방(정찬우)이 최무각에게 집 날려 먹을 때도 머리에 꽃 달고 개그했어... 개그맨은 그런 거야.”라고 얘기한 게 바로 진짜 현실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들으며 애도하면서도 개그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닌가.

 

달콤함과 살벌함의 혼재. 범죄물과 멜로 게다가 코미디까지 뒤섞이는 장르의 경계 해체. 이런 이질적인 것들이 어우러지는 건 마치 무감각 소년이 초감각 소녀와 만나는 그 설정처럼 자연스럽다. 이것은 초감각 소녀 오초림이 바라보는 냄새의 세계와 같다. 거기에는 일관된 냄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취와 향기가 뒤섞여 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오초림의 시선은 그래서 이 수상한 드라마가 가진 장르 같은 경계를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다.

 

그래서 이 <냄새를 보는 소녀>의 세계 안에서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뒤섞여있는 현실의 실체들이 보여진다. 강력계 형사가 되고픈 순경, 개그우먼이 되고픈 초감각 소녀, 연쇄살인범 셰프. 우리가 일반적으로 봐왔던 직업군들의 일관성이 이들에게는 없다. 형사물과 범죄물이 갖고 있는 그 살벌함이 로맨틱 코미디의 달달함과 잘 어우러지는 세계. 너무 진지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가벼울 이유도 없는 그런 세계.

 

무각은 극단에서 보조스텝으로 전락해 상심하는 오초림에게 불족발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매운 불족발에 슬픔을 숨겨 오초림은 눈물을 쏟아낸다. 그리고 음식점을 나오며 이렇게 말한다. “눈물 콧물 다 뺐더니 아주 시원하네.” 이것은 쿨 하고픈 현 세대들의 표현방식일 것이다. 그 시원함이 무엇 때문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랴. <냄새를 보는 소녀>의 기묘한 재미가 달콤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살벌함에서 기인한 것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힐러 혹은 킬러, 힐링 혹은 킬링

 

KBS 월화드라마는 <힐러>라는 낯선 제목을 달았을까. 우리 식의 슈퍼히어로를 담아내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그 영웅적 존재가 힐러라 불린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즉물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고 X맨처럼 세련된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다. 힐러는 그림자처럼 다가와 비밀스런 일들을 하는 존재다.

 

'힐러(사진출처:KBS)'

힐러라는 제목이 더 명쾌하게 이해되려면 그 반대의 의미를 가진 킬러를 떠올려보면 된다. 즉 이 드라마에서 힐러인 서정후(지창욱)는 밤에 어둠 속에서 나타나 누군가를 죽이고 사라지는 킬러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이다. 그는 누군가를 살리고 위로하며 구원하는 존재다. 그를 사랑하게 된 영신(박민영)이 정후가 킬러인지 힐러인지를 헷갈려하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롭다. 어린 시절 버려진 충격에 정신적인 장애를 겪는 그녀는 그녀를 구원해줄 힐러를 기다린다.

 

<힐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MBC 수목드라마 <킬미 힐미>는 적어도 그 제목만으로는 <힐러>와 유사한 연관성이 엿보인다. 7개의 인격을 가진 다중인격 차도현(지성)의 자아 중 하나인 요섭은 자살을 기도하는 인물이다. 건물 옥상 위에 올라가 킬 미(KILL ME)’라는 죽음의 표식을 남기고 자살하려는 그를 구해낸 오리진(황정음)은 그 글자를 힐 미(HEAL ME)’로 바꿔 놓는다. 이 장면은 이 드라마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죽게 놔둘 것인가 아니면 구원해낼 것인가.

 

<힐링캠프>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대중들의 관심이 힐링 트렌드의 종언을 얘기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사실 힐링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다만 <힐링캠프><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같은 힐링에 대한 조금은 여유 있는 접근방식이 당장이 갈급한 대중들에게는 점점 공감대를 잃어버렸을 뿐이다. 지금 새롭게 떠오르는 힐링은 그래서 킬링을 전제한다. 구원받지 않으면 죽음을 맞게 되는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의 공포까지 느끼는 그 급박함은 도대체 뭐고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힐러><킬미 힐미> 그리고 <하이드 지킬 나> 같은 드라마들이 거의 모두 정신증을 다루고 있다는 건 흥미롭다. <힐러>의 영신은 일종의 공황장애 같은 걸 겪고 있고, <킬미 힐미>의 도현이나 <하이드 지킬 나>의 구서진(현빈)은 모두 다중인격 장애를 겪고 있다. 공황장애가 죽을 것 같은 고통이라면, 다중인격 장애는 자신의 정체성이 지워질 것 같은 공포감이다.

 

최근 들어 드라마에 등장하는 질환이 과거 같은 외과적 문제가 아니라 정신과적인 문제라는 점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이른바 멘탈붕괴의 시대다. 작년 한 해를 두고 봐도 우리는 너무 많은 사건 사고를 통해 아주 가까이서 죽음을 들여다봐야 했다. 게다가 그 죽음에 대해 무력하고 심지어는 무책임하기까지 했던 공권력의 부재를 보면서 그 사회적 불안감은 더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멜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한계는 있지만, 그래서 이렇게 죽음의 공포 앞에 놓여진 정신증의 문제들을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해결이 아닌 개인적인 사랑으로 넘어서려는 한계를 보이고 있지만 그나마 힐링을 갈구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정신증의 문제는 외과적 문제와는 그 치료의 접근방식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외과적 문제는 병변을 적으로 간주해 제거하는 것으로 치료를 꾀하지만, 정신증은 그럴 수가 없다. 다중인격으로 드러난 또 다른 자아는 적이나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나와 싸울 수 없다. 그러니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요즘처럼 적을 외부에서 발견하기보다는 우리 내부에서 발견하는 사회의 구조를 닮았다. 지금을 정신증의 시대라고 말하는 건 세상을 치유하는 방식으로서 외과적인 방식이 아닌 정신증적인 방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저 SBS드라마 <펀치>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디가 적이고 어디가 아군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오리무중 상태라는 점이다. 좋은 내 편과 나쁜 적이 있는 게 아니라, 덜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이 있고, 그것도 영원히 유지되는 게 아니다. 때론 적과도 손을 잡는 그 비정한 세상에 남아있는 건 법과 정의 따위가 아니다. 법은 이미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선량한 국민조차 그 과정에서는 희생자가 된다.

 

이것은 정신병증의 사회다. 우리는 한 가지 일관된 자아를 유지하고 산다기보다는 무한한 욕망 속에서 분열된다. 그 분열된 자아는 어쩌면 자신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보호색일 것이다. 그리고 보호색을 갖지 못한 자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넘어서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마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무런 도움도 테두리도 되어주지 못하는 국가나 법은 방관자이자 공범자가 된다.

 

지금 우리 대중문화를 뒤덮고 있는 힐링에 대한 새로운 갈증은 그래서 킬링하고 있는 현실의 암담함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를 살려야할 이들이 오히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고, 누군가를 지켜야할 이들이 오히려 그들을 더 힘겨운 현실 앞으로 내몰고 있다. 정작 여기서 말하는 힐링이란 저 <힐링캠프>가 가끔 보여주는 그런 사치스러운 고민 따위가 아니다. 그저 <삼시세끼> 걱정 없이 편하게 먹고 싶다는 것뿐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소박한 욕심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된 걸까.

 

 

<혹성탈출> 변칙 개봉 논란과 영화의 공존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이하 혹성탈출)>에서 시저는 유인원 종족들을 이끌고 인간들 앞에 서서 서로의 영역에 대해 말한다. 숲은 유인원들이 사는 공간이고, 도시는 인간 생존자들이 사는 공간이라는 것. 시저는 각자의 영역에서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즉 인간과 유인원 간의 대결을 보여주는 <혹성탈출>20세기 내내 인류를 전쟁으로 내몰았던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사진출처: 영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10여 년을 각각 살아가던 인간과 유인원이 어느 날 우연히 조우해 총성이 울리는 그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 전체를 압축한다. 인간은 낯선 숲에서 갑자기 마주친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유인원에게 느낀 공포로 인해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인원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잡혀 갖가지 실험을 당했던 유인원 코바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와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다른 선택도 있다. 시저와 말콤이 유인원과 인간이라는 타자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어 신뢰와 우정으로 나아가는 선택이 그렇다. 말콤이 유인원들의 숲에 죽음을 불사하고 들어간 것은 그 두려움을 공존의 의지로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공존에 대한 노력은 양자 간의 대결이 아니라 평화를 깨려는 내부의 적들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블록버스터이면서도 진지한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혹성탈출>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개봉에 있어서 아이러니한 문제를 남기고 있다. 즉 이 영화는 공존을 이야기 하지만 이 같은 블록버스터들이 극장가를 점령하다시피 하는 상황은 작은 영화들에게는 공존은커녕 생존을 얘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같은 변칙개봉 논란은 이 거대한 몸집의 영화가 개봉일 변경 하나만으로도 작은 영화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되는 현 영화 생태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논란을 단지 할리우드 vs 우리 영화로 구분해 대결구도를 갖는 건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혹성탈출>의 이야기가 인간 vs 유인원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과 유사하다. 시저는 영화의 말미에 유인원이 인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그것은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할리우드와 우리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네 영화는 상당 부분 할리우드를 닮아가고 있다. 우리 영화에 있어서도 끝없는 스크린 독점이야기가 나오는 건 그래서다.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이 개봉되면 작은 영화들은 소리 소문 없이 스러져 버린다. 그러니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의 문제는 우리 영화를 포함한 블록버스터들의 독점적인 스크린 장악 시스템을 얘기하는 것일 게다. 영화는 이제 자본이 장악하고 있다. 자본 아래 국적성이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진정 <혹성탈출>이 주제로 보여주는 것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는 것일까. 전 세계의 영화관을 거의 독점 하다시피 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시스템을 욕하면서도 우리의 자본은 그 시스템을 철저히 배워 우리 시장에 적용하고 있다. 결국 <혹성탈출>이 얘기하는 것처럼 적은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끝없는 욕망은 영역과 종족 구분 없이 전쟁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다.

 

인간의 총을 가져와 유인원들에게조차 총구를 겨누는 코바의 모습은 그래서 안타깝게도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저 할리우드의 습격을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잣대를 내세워 욕할 자격이 더 이상 우리에게는 없다. 결국 그 총을 들여와 우리 영화계를 향해 겨눈 것은 우리네 거대자본이 아니던가.

 

시저와 말콤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존을 꿈꾸면서도, 시저의 말대로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유인원과 인간의 전쟁이 아니다. 공존하겠다는 의지와 모든 걸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현재 우리네 영화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크린 전쟁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 논란은 할리우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현재 처한 문제이기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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