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으로 펄펄 나는 배우들, 드라마 이미지는 어쩌나

 

매우 쳐라!”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긴박한 상황과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뒤에 박수를...”이라는 대사가 덧붙여지며 이 긴장감은 웃음으로 전화된다. 차승원이 현재 SK텔레콤의 이상하자캠페인으로 하고 있는 광고의 한 장면이다. 그는 이 광고에서 곤룡포를 입고 걸어 다닌다. 그 왕의 이미지는 당연히 지금 현재 방영되고 있는 MBC 사극 <화정>의 광해에서 나온 것이다. 사극 속 근엄했던 왕은 극이 끝나자마자 광고 속으로 들어와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이건 광고를 위한 사극인가.

 


차승원 SKT 광고 캠페인(사진출처:SKT)

이 광고의 캐치 프레이즈가 이상하자. 주로 서비스의 혁신을 기상천외한 이상한 상황들을 통해 강조하는 광고 캠페인이다. 사극을 배경으로 그 시대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하이힐이나 스마트폰 같은 현재의 문물들이 소개되는 장면들이 이어지며 이상한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한다. 광고로만 보면 괜찮은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다. 하지만 지금 한창 방영 중인 드라마를 생각해보면 어떤 충돌지점이 느껴진다. <화정>에서 연기하는 차승원은 한껏 냉혹한 얼굴을 드러냈다가 광고 속에서 그 모습 그대로 등장해 그걸 무너뜨리는 중이다. 이건 과연 괜찮은 일일까.

 

드라마 속 이미지와 실제 모습을 분리해서 보는 시각은 이제 시청자들로서도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니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그 주인공이 현실에서 광고를 하든 예능을 찍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가 있을 것이다. 드라마 속 캐릭터는 결국 몰입에 의해 그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캐릭터의 몰입을 동시적으로 깨는 작업을 한다는 건 과연 시청자를 배려하는 일일까.

 

차승원은 <삼시세끼> 어촌편을 통해 차줌마라는 캐릭터를 갖게 되었다. 그 예능 캐릭터 때문에 <화정>이라는 사극을 시작할 때 부담이 됐었던 것도 사실이다. 왕의 이미지와 차줌마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지워지고 새로 그려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부담감을 토로하기도 했던 차승원이 이런 광고를 선뜻 하고 있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광고를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지만, 드라마를 위해서는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통해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송일국이 KBS1TV의 차기 주말사극인 <장영실> 출연을 두고 고심 중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사극의 노동 강도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강하다. 따라서 <장영실>을 찍으며 동시에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강행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송일국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하차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지만 제작진측은 전혀 그런 일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당연한 얘기다. 현재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송일국과 삼둥이는 중심축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이들이 하차한다는 건 프로그램에 직격타가 될 수밖에 없다. 그걸 송일국 당사자도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송일국은 그 본질이 배우다. 언제까지 계속 예능으로 쌓은 이미지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장영실> 같은 괜찮은 작품의 캐릭터라면 연기하고픈 마음이 클 것이다.

 

KBS 측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을 것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도 하고 <장영실>도 하고. 그런데 여기서도 역시 저 차승원과 비슷한 딜레마가 생긴다. 장영실 캐릭터를 연기하게 된다면 그 이미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든 마찰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드라마와 예능의 병행이 가져올 엄청난 노동 강도는 양자를 모두 충실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연기와 예능은 병행해도 무관하고 또 그래야 하는 시대다. 하지만 그것이 동시에 이뤄지는 것은 양측에 모두 부담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가끔씩 예능 프로그램을 하던 인물이 드라마를 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우리는 봐 왔다. 그 때마다 느끼는 건 드라마에 의해 축적된 피로감이 예능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곤 했다는 점이다. 그건 정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부작용으로 드러날 것이다.

 

최근 들어 예능으로 펄펄 나는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이 배우들이 작품에 들어갔을 때 생겨나는 딜레마들도 점점 커지고 있다. 물론 예능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 배우들을 대중들은 원한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지켜야할 것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사극에서 세운 캐릭터를 광고에서 웃음으로 소비해버린다거나, 과중할 수밖에 없는 동시 출연으로 양측에 모두 충실할 수 없다면 그건 고스란히 시청자들에 대한 불편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괜찮아>, CF처럼 살지만 상처투성이 현대인들에 보내는 위로

 

왜 하필 조인성이어야만 했을까. SBS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인성이 연기하는 장재열은 마치 광고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가 집에 들어오면 마치 아파트 광고의 한 장면 같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 냉장고 광고 혹은 생수 광고처럼 보이며,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면 자동차 광고 같다.

 

그렇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 덕분이다. 그가 공개된 DJ 부스나 클럽에서 음악에 맞춰 살살 춤을 추기만 해도 순간 그 장면은 광고의 한 부분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조인성이 광고를 통해 대중들에게 이미지화된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그저 걷거나 숨만 쉬어도 광고 같은 완벽한 비주얼과 느낌을 보여준다.

 

하지만 광고란 일종의 환상이다. 사람은 결코 광고처럼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은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가진 광고 같은 삶이 사실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는 아프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맨발로 피가 나도록 집으로부터 도망쳤던 인물이고, 아버지에게 맞는 엄마를 놔두고 도망쳤다는 것을 자책했으며, 그러던 어느 날에는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트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 상처는 현재의 장재열의 주변을 여전히 맴돈다. 그래서 한강우(디오)라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투영된 가상을 만들어내고는 그를 때로는 다그치고 때로는 보듬어 안고 때로는 함께 웃으며 밤거리를 달리는 중이다. 광고 같은 삶? 그렇게 쿨하고 멋지게 보여 지고 싶지만 그것은 결코 장재열의 현실이 아니다.

 

그는 어쩌면 가족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아버지의 폭력에 맞서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형 장재범(양익준)은 그의 말대로 억울하게 동생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엄마는 동생을 살려내기 위해 형을 범인으로 지목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장재범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도 사실은 이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어느 게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투약하면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아미탈 같은 약물의 힘을 간절히 원할 정도로.

 

하지만 어느 것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가족이 모두 비극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장재범이 교도소 철창 안에 갇혀 지내고 있지만 장재열 역시 마음의 감옥에서 복역 중이다. 그 둘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떨까. 이미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을 해버린 그녀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처럼 광고처럼 쿨하게 보이는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아픔 하나씩을 껴안고 살아간다. 홈 쉐어라는 어찌 보면 쿨해야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주거 환경 속에서 광고의 한 장면 같은 파티를 벌이는 그들이지만,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그들은 다시 자신을 기다리는 상처를 껴안고 잠들어야 한다.

 

당찬 정신과 의사 지해수(공효진)는 어린 시절 지속적으로 목격한 엄마의 불륜으로 일종의 남성 기피증을 갖고 있고, 멀쩡한 허우대에 쿨한 성격의 박수광(이광수) 역시 어린 시절 이유 없이 찾아온 투렛증후군으로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재혼해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며 아픈 이들을 돕는 조동민(성동일)도 마찬가지다. 껄껄 거리고 웃는 그의 얼굴 이면에도 어떤 허허로운 아픔 같은 것들이 어른거린다.

 

<괜찮아 사랑이야>는 마치 광고의 한 장면처럼 깔끔하고 쿨하고 괜찮아 보이는 현대인들의 삶 이면에 놓여진 결코 괜찮지 않은 아픔을 꺼내놓고는 괜찮다고 보듬어주는 드라마다. 상처 입은 영혼들은 각각 힘겨워 하지만 의외로 타인에게 간단한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스킨십 기피증을 갖고 있는 지해수에게 그냥 하면 된다며 장재열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 그렇다. 지해수는 그 방법을 결벽증을 가진 환자에게 적용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치유하면서 동시에 그 주변 사람들까지 치유시켜준다.

 

겉보기에 우리의 삶을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광고 속의 삶을 꿈꾸고 어느 정도 성공한 이들은 그 삶을 현실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멀쩡해 보이는 삶의 진면목은 심지어 병을 앓을 정도로 아파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상처다. 사랑? 물론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줄 수는 없다. 다만 모두 상처받은 이들이라는 타인과의 공감과 그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교감이 그래도 우리네 삶을 괜찮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 <괜찮아 사랑이야>가 하고 있는 이야기다.

 

섹스 이야기를 그토록 입에 달고 다녀도 섹스 한 번 하지 못하는 스킨십 거부증을 갖고 있는 지해수와 연예인인지 작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장재열의 사랑은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게 희망이자 위안이 될 지도 모른다. 화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없다. 다만 괜찮다고 애써 말하며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그래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

 

방통위는 왜 시청률조사의 문제점을 숨겼을까

 

아마도 TV를 보는 젊은 시청자들은 왜 자신이 재밌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낮은 것에 대해 의아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최근 방영되고 있는 SBS 드라마 <쓰리데이즈><신의 선물 14> 혹은 MBC 주말 예능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10% 정도의 시청률에 머물고 있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 사이에 모였다 하면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들이 아닌가. 2030 세대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됐다면 적어도 5%에서 10% 이상은 더 나올 시청률이 아니었을까.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이처럼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시청률은 현재의 시청률표만 들여다봐도 쉽게 발견된다. AGB닐슨의 25일자 시청률 상위 10위를 보면, 1KBS 일일연속극 <사랑은 노래를 타고(29.8%>, 2<기황후(26%)>, 3<KBS 9시뉴스(22.8%)>, 4KBS일일극 <천상여자(18.3%)>, 5MBC 아침드라마 <내 손을 잡아(15.8%)>, 6SBS일일극 <잘 키운 딸 하나(13.7%)>, 7KBS TV소설 <순금의 땅(11.9%)>, 8KBS <인간극장(11.7%)>, 9KBS <러브 인 아시아(11.6%)>, 동시 9<KBS 뉴스7(11.6%)> 순이다.

 

아마도 젊은 시청자들은 그런 프로그램이 있기는 있었나 하는 의아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드라마나 아침 프로그램 그리고 저녁 시간대에 배치된 일일극 등이 상위 10위를 거의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30의 직장인들은 아예 배제된 시청률이다. 한 눈에 띄는 것은 시청률 톱 10위에 KBS의 비율이 단연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25일자만 봐도 <기황후>, <잘 키운 딸 하나>를 빼고는 모두가 KBS 프로그램이다. 이 표만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KBS만 틀어놓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한 언론매체에 의해 입수되어 보도된 방통위 시청점유율 조사 검증 연구에는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시청률이 나오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가 밝혀져 있다. 2012년과 13년 두 해 동안의 시청률 조사의 문제점을 분석한 이 연구자료를 보면 시청률 조사에 있어서 2030 세대의 의견 반영 비율이 50세 이상의 의견 반영 비율에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료가 분석한 시청률 조사 연령별 비율을 보면 AGB닐슨은 203021%인데 반해 50세 이상은 41%였고, TNms 역시 203020%, 50세 이상이 39%였다.

 

100% 유선전화를 통해서 이뤄지는 기초조사 역시 국내 10가구 중 3가구가 유선전화가 없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전화를 받더라도 낮 시간대에 집에 머무르는 노년층이 주된 응답자가 된다는 점이다. 또 소득별로도 월 4백만 원 이상 고소득자가 기준보다 많고 2백만 원 미만 서민층이 적어 서민 의견 반영 역시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으며, 조사에 참여하는 패널 중 무효패널 비율도 조사회사가 발표한 5%의 두 배 이상인 것으로 보고됐다. 무효패널 비율은 닐슨이 10.4%였고 TNms는 무려 30.5%에 달했다. 이 정도면 신빙성 있는 시청률 조사라고 하기 어렵다.

 

시청률 조사는 단지 순위 매기기가 아니다. 시청률은 광고와 직접적인 영향이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방송 콘텐츠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이처럼 세대 반영 비율이 엉터리인데다, 조사 방식의 허점도 너무 많은 시청률이 여전히 그 프로그램에 대한 잣대로 활용된다는 것은 실로 큰 문제다. 이른바 창조경제를 주창하는 시대에 그 평가지의 역할을 하는 시청률 같은 중대한 수치가 이렇게 제멋대로 만들어져 자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방통위와 조사기관이 이런 사실을 영업비밀 혹은 대외비라며 공개하지 않고 숨기려 했다는 점이다. 방통위는 조사기관이 민간회사라는 점을 들어 정부가 민간회사 조사방식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며 발을 빼고 있고, 조사회사들은 영업비밀이라며 집계방식을 숨기고 있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공무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민간회사에 업무를 위탁하는 방식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어찌 시청률 추산 같은 방송의 중차대한 일을 민간회사라는 이유로 방통위가 뒷짐 지고 있는 걸까.

 

이것은 마치 2030세대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것을 의도적으로 묵인하고 있는 듯한 인상까지 준다. 누구나 알다시피 방송은 저널리즘으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다. 지난 대선의 표가 203050대 이상으로 명확하게 갈라졌던 점을 생각해보라.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시청률에 반영된 프로그램(뉴스, 시사 프로그램을 포함해 드라마, 예능 전 분야에 걸쳐)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시청률이 정치적으로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판단은 성급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드러난 문제점을 고치지 않고 방관하는 것은 시청자들을 우롱하는 행위다. 실제로 시청자들은 점점 시청률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광고주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이 연구의 검증팀이 방송사와 광고대행사 등 78개 기관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54개 기관의 무려 94%시청률이 납득이 안돼 조사기관에 문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시청률 조사를 왜 하는 걸까.

김연아와 안현수, 숟가락만 얹는 부끄러운 대한민국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48초 동안 숨죽인 대한민국이다. 너는 11번을 뛰어오르는 대한민국이고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다. 너는 1명의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

 

'패러디영상(사진출처:Olive Oh)'

대한민국이라는 단어가 무려 여섯 개나 들어가 있는 모 기업의 이미지 광고는 지금 대중들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 있다.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라는 도발적인 문구가 너는 1명의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으로 바뀌는 이 광고는 김연아를 상찬하는 것 같지만 그 자체로 지나친 국가주의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실로 김연아가 그 정상에 오르기까지 국가가 해준 것은 별로 없다. 지금까지 그녀가 해온 일들은 그녀의 가족과 그녀 자신이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이지 제대로 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이룬 성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느 날 갑자기 정상에 서게 된 김연아라는 세계적인 선수를 통해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해외에 알려지는 판이다.

 

그런데 김연아가 아니라니. 김연아라는 개인을 부정하고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투입시키는 건 너무 노골적인 국가주의 마케팅이다. 물론 김연아는 대한민국라는 등호는 그만큼 김연아 선수가 대한민국 그 자체일 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의 생각은 다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호명이나 칭호가 그다지 달갑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러시아로 귀화해 금메달을 딴 안현수 선수가 만들어낸 국내 빙상연맹에 쏟아지는 후폭풍은 지금 현재 국가에 대한 민심을 드러낸다. 세계적인 선수가 귀화를 결심하고 마치 보란 듯이 절치부심해 금메달을 따는 과정은 마치 국가에 대한 한 개인의 투쟁처럼 보여진다. 우리 선수들과도 경쟁해서 따낸 금메달이지만 지금 우리네 대중들은 러시아 국적을 가진 안현수 선수를 거꾸로 응원해주고 있다. 왜 그럴까.

 

국가라는 이름을 호명해 자리 하나씩을 차고 앉아 있는 관료들의 행태를 이미 대중들은 보지 않아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현수 선수의 귀화는 그래서 국가를 저버린 행위가 아니라 국가로부터의 탈출로 받아들여진다. 지긋지긋해서 살기 싫다며 이민을 생각하는 수많은 이들이 갖는 그 생각.

 

국가가 무언가를 해주는 것을 대중들은 이제 그다지 바라지 않게 되었다. 다만 그냥 내버려두길 원하는 것이다. 잘 하는 이들이 그저 잘 할 수 있게 내버려달라는 것이다. 김연아 광고에 쏟아지는 비난과 안현수 선수에 대한 응원 속에는 해준 것 없이 숟가락만 얹으려는 국가에 대한 반감이 들어가 있다.

 

국가는 국민입니다!”라고 <변호인>에서 일갈했을 때 그 단순한 말 한 마디가 대중들의 마음을 울렸던 것은 국가를 제 멋대로 해석해 그 권력으로 국민을 심지어 고문하기도 하는 세상에 대한 당연한 분노가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이 우선이 아니라 국가가 우선인 세상에 대한 분노.

 

그래서 김연아 광고를 뒤집어 놓은 한 패러디에는 국가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와 그 어려움 속에서도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는 김연아라는 개인에 대한 찬사가 들어가 있다.

 

당신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당신은 피겨약소국의 한 운동선수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챔피언이고 당신은 어린 후배를 위해 기꺼이 다시 뛰어오르는 선구자입니다. 당신은 김연아입니다. 당신이어서 고맙습니다.’

 

힘겨운 대중들에게 그래도 할 수 있다는 힘을 늘 안겨주는 김연아 선수의 선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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