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이 흥미로워지는 지점, 욕망하는 존재들

 

차승원이 연기하는 광해군은 무엇이 다를까. MBC 월화 사극 <화정>이 다루고 있는 광해는 최근 들어 수차례 사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정도로 재평가됐다. 역사에서 광해군은 사후에 이 붙여졌고 죽었을 때 붙는 묘호도 갖지 못한 왕이다. 하지만 역사는 시대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최근 다뤄지는 광해군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훨씬 더 부각되는 면이 있다.

 

'화정(사진출처:MBC)'

<화정>의 광해군이 여타의 사극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그가 일면으로 그려지기보다는 다양한 입장에서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인 존재로서 그려진다는 점이다. <화정>에서 광해군은 어린 정명공주(허정은)에게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세자저하가 아니라 오라버니라 부르라고 말할 정도로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어린 공주 앞에서 한없이 자애로운 눈빛을 보내는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박영규)가 죽어가는 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독을 마시고 목이 타는 듯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선조에게 이를 거부하며 그는 외친다. “결국엔 이렇게 될 것을, 어찌 그토록 소자를 미워하셨습니까. 나는 전하와 다른 임금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나라의 왕은 접니다. 아버지.” 즉 공주와 사적인 자리에서 보여준 광해군의 모습은 일면에 불과하다는 것. 그는 죽어가는 선조 앞에서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다.

 

광해군의 이런 모습은 <화정>이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화정>은 형제와 남매로 엮어진 사적인 관계에서의 모습과 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공적인 관계에서의 모습이 공존하는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광해군과 그의 형인 임해군(최종환)의 관계가 그렇다. 임해군은 광해군을 돕는 인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영창대군(전진서)을 제거하려 해 오히려 그 어머니인 인목대비(신은정)의 숨겨진 생존본능을 건드렸다는 것 때문에 광해군에 의해 내쳐진다.

 

임해군은 결국 역모로 붙잡히게 되지만 그를 믿어준 광해군 때문에 명나라 사신단 앞에 나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을 일부러 보여준다. 장자인 자신이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 광해군의 즉위의 정당성을 만들어주려 한 것. 이를 고맙게 여긴 광해군이 사적으로 임해군을 찾아가 자신도 그가 역심을 품었다 생각한 걸 미안하다고 말하자, 의외로 임해군은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걸 털어놓는다.

 

부왕의 장자는 나였으니까. 그 자리는 원래 내 것이 아니었더냐. 그래서 나는 네가 보위에 오르면 날 세제로 삼을 줄 알았다. 당연히 다음 자리는 나였을 터. 날 그렇게 내칠 줄은 몰랐다.” 형제로서 눈물을 흘리던 임해군 역시 그 왕좌에 대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 광해군은 이 사실을 알고는 충격에 빠진다. 즉 제 아무리 형제라 하더라도 왕좌라는 욕망 앞에서 적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

 

광해군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듯이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과 그의 세력들까지 냉혹하게 처리한 인물이다. 그래서 훗날 폭군으로 기록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정>은 광해군을 그리면서 그가 왜 그렇게 냉혹해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욕망으로 다루고 있다. 왕좌를 놓고 벌어지는 제거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 용상에 오르려는 욕망의 분출은 그래서 사적인 관계의 살가움과는 사뭇 다른 광해군의 모습을 그려낼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모두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더구나 용상은 욕망의 끝 이제 곧 지난 16년의 시간보다 더한 것을 아시게 되겠지요. 인간의 다짐이란 허망하고 누구도 믿을 수 없단 것을. 왕좌는 뜨거운 불처럼 강하고 아름답지만 전하를 삼킬 수도 있다는 걸요.” 광해군의 책사 역할인 김개시(김여진)의 이 말은 <화정>이라는 사극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이 사극이 드러낼 각각의 인물들의 욕망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지 기대된다.

 

 

대선과 올해의 대중문화 콘텐츠들

 

대선이 있는 해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대중문화 자체가 본래 대중들의 정서와 염원을 담기 마련이지만 올해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이미 대선은 끝났고 그 결과도 나왔지만, 그 결과만큼 중요한 것이 그 과정이 담고 있었던 대중들의 염원일 게다. 올해의 어떤 작품들이 대중들의 어떤 정서를 담아내고 있었을까.

 

'추적자'(사진출처:SBS)

올 전체 드라마 중 가장 돋보였던 작품으로 지목받는 것은 단연 <추적자>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국민드라마’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것은 과거 시청률 몇 프로를 넘었을 때 붙이던 그런 호칭이 아니라, 국민들의 열망을 담아냈다는 의미의 호칭이었다. <추적자>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이번 대선에서도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양극화의 문제라든가, 사회 정의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뤘다는 점이다.

 

백홍석(손현주)이라는 서민 가장을 대변하는 인물과 강동윤(김상중), 서회장(박근형) 같은 이른바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인물들의 대결구도가 양극화에 허덕이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흥미로운 건 드라마 말미에 절정 부분에 들어간 내용이 대선이었다는 점이다. 작가의 염원이 들어간 것일 게다. 투표로서 세상을 바꾸고픈 대중들의 의지를.

 

영화에서 대중들이 소망하는 리더십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은 <광해>일 것이다. 올해 1천2백만여 관객이 이 영화를 봤다. 늘 대선에 즈음해 리더십을 다루는 작품이 주목을 끌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광해>는 기존 왕의 리더십을 다루던 사극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간다. 백성을 살피는 성군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백성 중 하나가 그 왕 역할을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것은 다분히 SNS로 대변되는 대중정치 시대의 달라진 대중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즉 왕이나 정치인보다 더 뛰어난 일개 광대를 왕의 대리 역할로 세움으로써 정치란 그렇게 복잡한 역학관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행하는 것이란 걸 잘 보여주었다. 이것은 지금 대중들이 정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정치적 행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광해>가 대중들을 통쾌하게 했던 것은 바로 그 명쾌한 상식(일개 광대도 알고 있는)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성군이 되는 정치의 세계를 목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중에서 가장 청춘들의 문제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은 <마의>일 것이다. 겉으로 보면 출생의 비밀을 안고 마의로 자라난 백광현(조승우)이 인의가 되어가는 성장담을 그린 전형적인 퓨전사극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메시지는 지금 현재의 청춘들과 맞닿아 있다. 출생에 의해 모든 게 결정되는 조선사회는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나 스펙사회를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정치하는 자들의 끝없는 모략과 편견에 의해 궁지에 몰리게 되는 백광현이 그 장애물들을 하나 하나 넘어가며 성장하는 모습은 아마도 작금의 청춘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판타지가 될 것이다. 스펙을 넘어서 오로지 실력으로 인정받는 일련의 과정들은 어쩌면 그런 기회조차 잘 주어지지 않고 있는 작금의 청춘들에게는 부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잘못된 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 바로 <마의>다.

 

한편 이정희 전 대선후보가 대선토론에서 언급해 화제를 모았던 <청담동 앨리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많은 아파트 중에서 내가 살 수 있는 아파트는 없다.” 그녀가 언급한 극중 이 대사는 역시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양극화를 담고 있다. 이 드라마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청담동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와 자신이 태생부터 결정되어버린 가진 것으로는 도무지 넘어설 수 없고 또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세계를 경험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결국 이 많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들을 건드리고 있다. 아마도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어디 위로받을 곳 하나 없는 대중들은 값싼 대중문화를 통해 잠시 동안의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대선의 결과가 나왔다. 누가 당선이 되었고 당선되지 못했다고 해도 이 대중들의 소망이나 염원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모쪼록 이 소망들이 실현되는 세상이 오기를.

광대는 어떻게 대중들을 대변했나

 

이병헌 주연의 영화 <광해>는 자꾸만 ‘광대’로 읽힌다.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다름 아닌 기방에서 왕 흉내 내며 웃음을 주는 대가로 살아가는 광대다. 그 광대가 광해를 대신한다. 처음엔 연기였는데 하다 보니 점점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해나가기 시작한다. 광대가 광해가 되어 광해보다 더 민초들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게 되는 이야기. 1천만 관객 돌파에 스크린 독점과 지나친 마케팅이 일조한 것이 사실이지만 <광해>의 흥행에는 바로 이 ‘광대’라는 위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강남스타일'과 '광해'(사진출처:YG엔테테인먼트, 영화 광해)

지금으로 치면 연예인에 해당할 것이다. 대중들에게 값싼 대중문화를 통해 심지어 희망까지 주는 존재. 청소년들 세 명 중 한 명이 희망하는 직업. 물론 그만큼 치러야할 대가도 만만치 않지만 대중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그런 사람들. 영화 <광해> 속 하선(이병헌)은 분명 작금의 연예인을 빼닮았다.

 

요즘 연예인들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고 그런 발언이 대중들의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영화 속 하선이 던지는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명분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라는 대사는 SNS 시대에 때론 소셜테이너들이 던지기도 하는 속 시원한 한 줄 촌철살인 그대로다. <광해>는 여러모로 광대로 읽힌다.

 

또 한 명의 광대가 있다. 이 시대를 온통 말춤으로 들썩거리게 만든. 바로 싸이다. 광대나 딴따라라는 표현은 어딘지 비하적인 뉘앙스가 있어 많은 연예인들이 피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싸이는 아예 자신이 광대임을 드러냈다. “내 직업은 광대, 떴다고 모범적으로 살지 않겠다.” 싸이의 이 발언은 아예 광대의 본분과 철학을 담고 있다.

 

월드스타니 한류스타, 혹은 국민가수(?) 같은 호칭을 거부하고 국제가수라는 애매한 명칭을 스스로 부여한 것에도 광대의 철학이 묻어난다. 국제가수라는 명칭에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뉘앙스가 없다. 그저 해외에도 활동하는 가수라는 의미만 있을 뿐. 광대는 국가나 민족의 부름에 구획되어 모범적으로 억지로 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저 하선이 저잣거리에서 왕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웃음거리로 만들며 살아가듯이. 저 하던 대로 그대로.

 

사실 ‘강남스타일’이 미국에서 빵 터지기 전까지 국내에서 싸이에 대한 관심은 그냥 그랬다. 국가가 관심을 가졌던 적도 없다. ‘라잇나우’ 같은 곡에 19금 딱지를 붙이는 것이 국가가 가진 관심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로 싸이에 대한 관심이 번져나가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시청 앞 광장이 월드컵을 재연하고, ‘라잇나우’는 19금 딱지를 떼었으며 심지어 국가는 싸이에게 훈장을 부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해외에 그만큼 우리나라를 알렸으니 훈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이 시대의 광대들을 위해 해주는 것이 고작 결과를 만들어낸 자들을 공치사 하는 일 밖에 없는가 하는 의구심은 있다. 이것은 싸이의 공을 치하하는 것인가 아니면 싸이에게 훈장을 줌으로써 정부도 한 일이 있다는 식의 또 다른 숟가락 얹기인가.

 

사실 정치인들보다 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이 시대의 광대, 연예인들이다. 하지만 지금껏 연예인들은 정치적인 상황에 이용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거다. 정치가 대중문화에 종사하는 연예인들을 딴따라 취급하며 저 발톱의 때처럼 바라보던 시대가 가고, 이제는 대중문화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올해 대선에서 3강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가 모두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제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면 대중문화라는 말 등 위에 올라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저마다 말 춤을 추며 광대 싸이를 코스프레 하고 있다. 이것이 대중의 시대의 새로운 정치 스타일이다.

 

<광해>가 광대로 읽히고, 싸이가 스스로를 광대로 내세우게 된 건 대중문화가 이제 우리네 정치적 입장까지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니 제발 대중문화나 광대를 우습게 보지 말라. 선거 때 반짝 광대 흉내 내고는 막상 정치권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 싶게 저 <광해>의 신하들처럼 저들 이익에만 휘둘리면서, 대중문화의 토대와 저변을 마련해주기 보다는 뜬 대중문화에 서둘러 숟가락이나 얹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 저 왕을 연기한 광대가 대중들의 입을 빌려 한 그 준엄한 꾸짖음을 잊지 말라.

표절시비부터 강제 천만 영화 만들기 논란까지

 

영화 <광해>가 31일 만에 9백만 관객을 돌파함으로써 천만 관객 동원 초읽기에 들어갔다. 최근 몇 년 동안 영화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CJ E&M이 추석 시즌을 목표로 야심차게 준비한 작품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이 되었다. 마치 예상한 시나리오대로의 흥행 성적을 보이고 있는 <광해>. 하지만 여기에 대해 대중들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다. 국내에서 천만 관객 영화라면 사실상 신드롬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텐데, 어째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사진출처: 영화 '광해'

그 발목을 잡고 있는 첫 번째는 표절 시비다. <광해>는 할리우드 영화 <데이브>를 표절했다는 논란을 받아왔다. 동아일보는 <광해>와 <데이브>의 18가지 유사점을 조목조목 짚어낸 기사를 내기도 했다. 그 내용들을 보면 대통령 대신 왕이, 대역 직장인 대신 대역 만담꾼이, 비서실장 대신 도승지 허균이, 대통령 부인 대신 중전이, 각료들 대신 신하들이, 흑인 어린이 대신 어린 나인이, 경호원 대신 호위무사가... 등등. 대구를 이루는 것들이 너무 많을 정도로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데이브>를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광해>가 꽤 괜찮은 작품이라 여길 만하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이병헌의 1인2역도 단단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왕이라는 항상 서민들의 판타지가 투영되기 마련인 존재의 이야기를 왕이 된 평범한 민초의 시각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공감대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이것은 대선을 앞두고 있는 올해 같은 상황을 두고 보면 기획적으로도 적절했다 여겨진다. 하지만 <데이브>와의 유사성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이 괜찮은 완성도가 오히려 너무 심했다고 생각될 수 있다. 표절을 했건 안했건 영화로서 너무 비슷한 것만은 사실이니까.

 

여기에 천 만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한 각종 마케팅과 스크린 독과점의 문제까지 겹쳐지면 <광해>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를 가늠할 수 있다. 자사 계열 배급사의 영화에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스크린 수 밀어주기를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특히 그 불공정성이 노골화되는 양상이다. <광해>는 개봉일에 상영관 689개를 확보하며 시작했지만 반달 만에 1000개가 넘는 상영관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는 무료 26%가 넘는 스크린 수 점유율이다. 이 정도면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볼 게 없어 <광해>를 본다는 볼멘소리가 이해될 법 하다.

 

또한 <광해>의 관객 수가 마케팅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허수라는 논란도 있다. <광해>는 CGV에서 이른바 ‘1+1’이라는 한 명이 보면 다른 한 명은 공짜 이벤트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되면 관객 수의 수치는 천 만을 넘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 유효 관객 수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애매해진다. 결국 천 만 관객 마케팅을 위해 그 수치를 강제로 뽑아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고 있다는 얘기다.

 

<광해>는 콘텐츠적으로 괜찮은 완성도를 가진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작품의 표절 시비나 배급과 마케팅 문제에 있어서 꽤 시끄러운 잡음을 내고 있는 영화인 것도 분명하다. 소급해서 생각해보면 <도둑들>이 올 여름 최고의 기록을 낸 데도 결국 대형 배급사의 마케팅 수완이 한몫을 했을 거라는 심증이 짙다. 이제 천 만 관객도 마케팅으로 만들어내는 시대가 된 것일까. 또 그렇게 영화가 작품보다는 상품에 더 골몰하는 처지가 된 것일까. 거대 자본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그림자는 국내 영화 산업 전체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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