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창력 대결? 이젠 즐거움을 원한다

 

MBC<일밤>에 새로 배치한 <복면가왕>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그건 마치 프로레슬링 같기도 하고 어떤 면으로 보면 <복면달호> 같은 느낌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약간 만화 같은 비현실성을 담고 있다. 어디 현실에 복면 쓰고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

 

'복면가왕(사진출처:MBC)'

무대에 오른다는 건 그 자체로 얼굴을 드러낸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방송에 나온다는 것도 그렇다. 그 무수한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하는 것은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무대에 올라 그 면면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노래를 통해서. 하지만 <복면가왕>은 이를 배반한다. 무대에 오르지만 얼굴을 가린다. 그러니 궁금증은 더 커진다. 노래를 너무 잘 부르면 그 궁금증은 점점 증폭된다.

 

복면을 쓰면 무대에 오르는 이들도 조금은 다른 마음을 갖게 된다. 물론 긴장감은 여전하겠지만 얼굴을 가렸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일상에서는 약간 벗어난 다른 모습을 연출해보일 수도 있다. 경연의 긴장감은 여전할지 몰라도 때로는 무대를 그저 즐길 수도 있다. 강균성이 복면을 쓰고 나와 자기 기량을 뽐내기보다는 다른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모두를 속이려 한 건 이 복면이라는 장치가 오디션의 당락에 대한 집중을 상당부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기량 뽐내기. 가창력 자랑. “나 노래 잘해!”하고 외치는 듯한 무대에 대해서 대중들은 부담감을 느낀다. <나는 가수다>가 점점 힘을 잃고 있는 건 그래서다. 대중들은 스스로 최고임을 증명하려는 그런 시도들에 시큰둥해져 있다. 그것이 어떤 권위를 얻으려는 의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K팝스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은 너무 많은 천재들(?)’ 때문에 부담스러워진다. 심사위원들은 입만 열면 천재를 외친다. 물론 천재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 대중들에게 이런 외침은 강요로 들린다.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강요.

 

복면은 이런 권위를 애초부터 차단시킨다. 얼굴 가리고 노래를 한다는 건 권위적인 면을 내려놓고 온전히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흥취를 주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당연히 심사위원은 필요없다. 프로그램에 앉아 있는 패널들은 노래를 평가하거나 재단하는 대신 그 노래를 한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더 드러낸다. 평가는 관객들의 즉석 투표로 이뤄진다. 누가 올라가고 누가 떨어져도 그리 큰 기쁨이나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다. 떨어진 이에게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건 이 무대가 주는 작은 권위이자 선물이다.

 

<복면가왕>은 여러모로 작금의 오디션 형식에 지친 대중들의 정서를 끌어안는 면이 있다. 경쟁과 서바이벌은 한때 오디션의 가장 중요한 장치였지만 너무 반복되면서 식상해졌다. 그래서 나온 게 콜라보레이션 미션 같은 것이지만 이것 역시 가창력 대결의 또다른 버전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가창력이 뛰어나고 누구는 덜 뛰어나다는 것을 평가하는 시스템에 대해서도 이제 대중들은 그다지 신뢰성 있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심사위원의 심사가 점점 권위를 잃어가는 건 그래서다.

 

이제 대중들이 원하는 건 편안한 오락과 즐거움으로서의 무대다. 누구를 세워주고 권위를 부여하는 그런 무대가 아니라 온전히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무대. 그래서 <복면가왕>은 노래하는 이들에게 복면을 씌우는 기묘한 장치를 만들었다. 얼굴을 가린다는 것. 어찌 보면 단순한 설정처럼 보이지만 이 작은 설정 하나는 무대의 느낌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낸다. <복면가왕>은 그래서 향후 오디션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갈 것인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면이 있다.

 

<나의 독재자>, 개발시대와 아버지 노릇

 

개발시대를 지내온 아버지들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을까. 때때로 자식을 살뜰히 챙기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집보다는 바깥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던 아버지. 무엇이 그리 절박한 지 미친 듯 일에만 빠져 살아오다 어느 날 보니 훌쩍 굽어진 허리에 뒷모습이 쓸쓸하게만 다가오는 그런 아버지. 그것이 개발시대를 살아오신 아버지의 통상적인 이미지가 아닐까.

 

사진출처:영화<나의 독재자>

<나의 독재자>는 벌써 제목부터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많은 뉘앙스를 담고 있는 영화다. 그것은 어찌 어찌 하다 김일성 역할을 평생의 연기로 삼게된 연극을 하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말해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개발시대의 분위기를 살짝 드러내는 제목이기도 하다. 또한 거기에는 나의라는 수식어가 붙음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버지라는 애정 또한 묻어난다. 영화는 이 제목이 가진 느낌들을 모두 담아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사실 개발시대의 아버지란 막연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그리기 마련이지만 <나의 독재자>가 그리는 아버지는 이와는 다르다. 그가 왜 그렇게 김일성 연기에 집착하고 결국에는 연기와 현실을 혼동하게 되었는가는 일과 삶을 동일시한 당대의 아버지들을 연상시킨다. 일과 삶의 혼동은 결국 그를 파괴시키고 그의 주변 가족들마저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시대의 아픔이다.

 

세뇌와 고문은 그래서 개발시대가 가진 독재적 노동의 면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안에서 우리네 아버지들은 혼신의 연기를 하며 살았다. 이른바 아버지 노릇이라는 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당대 아버지들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아버지들이 원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태식 앞에서 왕관을 쓴 존재이고 싶었던 아버지 성근(설경구)은 그렇게 시대의 질곡 속에서 자신의 삶을 엉뚱하게 소진시킨다.

 

하지만 과연 이 시대의 질곡은 개발시대가 지나면서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근의 바톤을 이어 아버지 역할의 무대에 오른 이는 바로 그 아들인 태식(박해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집은 재개발로 포크레인 앞에 무너질 위기에 있고, 태식은 빚쟁이로 몰려 사채업자들에게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그런 그에게 자식이란 자신이 겪어온 대로 그리 탐탁한 존재는 아닐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도 성근이 평생을 해온 아버지 역할을 목도하게 되면서 자신도 그 역할을 짊어질 것을 각오한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아버지 역할은 그렇게 자식으로 이어진다. 다만 그 아버지라는 역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았다. <나의 독재자>가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개발시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그 시대의 아픔을 아버지라는 인물을 통해 조명하면서도 그것을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아버지를 연극배우로 설정해 연기와 삶에 대한 이야기로 그려낸 점은 이 영화가 가진 특별함이다. 설경구라는 배우가 왜 그리 대단한가를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개발시대를 지내온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바라던 일일 것이다.

 

<세결여>의 숨은 주인공, 한진희의 부성애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있을까.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오병식(한진희)은 뭐 딱히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그다지 없어 보이는 아버지다. 그는 한때 택시기사였었고 중소기업 사장의 운전수였다가 지금은 건물의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딸 은수(이지아)가 중견기업 오너의 며느리라는 사실은 얼핏 이 오병식이라는 아버지가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사진출처:SBS)'

늘 차분하고, 성실해 보이는 이 아버지는 그래서 이 드라마에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재혼한 은수의 딸, 슬기(김지영)를 챙겨주는 인물이거나 걱정이 태산인 아내 순심(오미연)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정도의 역할이랄까. 하지만 드라마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차츰 이 아버지라는 존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 자식까지 전 남편에게 넘겨주고 재혼했지만 남편의 불륜 때문에 또 이혼을 준비하는 딸이 아버지에게 마뜩찮을 수는 없을 게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속이 상해도 그 흔한 술 한 번 마시고 주사라도 늘어놓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고 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것은 과년한 첫째 현수(엄지원)가 결혼식도 안올리고 심지어 광모(조한선)와 동거를 하겠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아버지는 그저 한 걸음 물러서 알아서 하겠지.”하며 딸의 선택에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걸핏 하면 소리를 지르고 손부터 올라가는 준구(하석진)의 아버지 김회장(김용건)과는 사뭇 다르다. 김회장이 어딘지 과거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를 닮았다면 오병식은 달라진 현재의 서민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이런 아버지들은 가족 내에서 권위를 상실한 지 오래다. 가장으로서 서 있긴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자식들 앞날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던 시절은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딘지 쓸쓸해 보이기도 하는 이들 아버지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가족들을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되었다.

 

오병식이라는 아버지는 그래서 이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가족들이 힘겨울 때마다 묵묵히 그 아픔을 들어주고 또 버텨내주는 역할을 떠맡고 있다. 남편의 불륜에 상심한 딸을 품어주는 것도 이 아버지고, 결혼 안 하고 살겠다는 딸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도 이 아버지다. 심지어 이혼해서 아버지를 따라간 딸의 자식까지 걱정하고 챙겨주는 것도 이 아버지의 몫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결혼을 몇 번을 하든, 아니면 아예 하지 않든 그들을 딸로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이 달라진 결혼 풍속도가 야기하는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어쩌면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문제들을 자식을 보는 마음으로 품어주는 시선일 지도 모른다. 결국 결혼이란 자신들의 선택일 뿐이라는 것. 다만 부모로서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오병식이라는 아버지는 이 드라마의 숨겨진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그의 부성애는 이 드라마에서 벌어지는 이혼과 결혼, 동거, 불륜, 심지어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는 계모의 이야기까지를 모두 보듬어 안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존재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 언제든 가슴 열어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이것이 제 아무리 세태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가족의 가치가 아닐까. 그가 있어 참 다행이다.

아이들 기피대상 1호 성동일, 꼴찌아빠 아니다

 

아이들은 왜 성동일을 기피대상 1호로 꼽았을까. <아빠 어디가>에서 하룻밤 아빠 바꿔 지내기 미션에서 아이들은 저마다 성동일이 일일아빠 되는 것을 꺼려했다. 그간 방송에 나온 것을 통해 보면 이런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성동일은 그간 아이들을 골려먹기도 하고 늘 풀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아빠로서의 권위 아래서 아이가 긴장하게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빠 어디가(사진출처:MBC)'

그런데 준이가 늘 바르고 곧은 모습을 보이는 ‘성선비’로 불리게 된 것은 어쩌면 아빠 성동일의 이런 남다른 교육관 덕분일 수 있다.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타인을 배려하거나 산만하지 않고 침착하며 때론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준이의 모습은 성동일이라는 때로는 넘어야할 산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받아주는 아빠가 아니라 세상에는 타인과 살아가기 위해 어떤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아빠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빠들도 많고 또 그 아빠들의 교육관도 그 수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송종국은 성동일과는 정반대의 교육관을 갖고 있는 아빠다. 그가 지아를 대하는 태도는 말 그대로의 ‘딸 바보’다. 뭐든 아이가 원하는 것은 챙겨주고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아빠. 그러니 송종국과 하룻밤을 지내게 된 준이는 이 너무 다른 교육관 사이에서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을 수 있다.

 

마치 하소연하듯 맨날 공부만 해서 놀 시간이 없다고 털어놓는 준이에게 송종국은 아빠가 원한 구연동화를 읽어주기보다는 같이 놀아주었다. 송종국은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놀고 싶어 한다고 말했고 함께 나와 축구로 몸을 풀고는 준이가 하고 싶다는 줄넘기 천 번에 도전했다. 그렇게 줄넘기 도전을 성공한 후 받은 송종국의 사인을 다음 날 준이는 아빠에게 자랑하고 싶어했지만 아빠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모든 걸 받아주는 아빠 송종국과 조금은 근엄하고 무뚝뚝한 아빠 성동일은 이 서로 다른 교육관은 그러나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저마다 각자의 아이를 키우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당장의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성동일의 교육방식이 너무 옛날식인 것처럼 보일 수 있고 그래서 마치 잘못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이러한 엄한 교육방식이 가진 좋은 점도 있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건 하룻밤 아빠 바꾸기 미션에서 아이들이 일순위로 꼽은 아빠가 김성주라는 점이다. 김성주는 방송 초반만 해도 아이와 함께 지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때로는 아이에게 화를 내기도 하는 모습이 보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김성주가 아이들의 일 순위가 된 데는 그가 가진 아이들을 말로 밀고 당기는 재주가 한 몫을 했다. 이것은 그가 타고난 방송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나운서라는 특성상 언변이 좋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소통을 통한 교감은 김성주가 가진 남다른 교육방식일 게다.

 

아빠를 바꿔 하룻밤을 지내는 미션은 여러 차례의 교감을 가진 <아빠 어디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미션이다. 그만큼 친밀하지 않다면 어찌 타인의 아이를 거기에 맞춰 챙겨주는 모습이 가능할 것이고, 또 타인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길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아빠들도 자신들과 아이의 모습을 한 번쯤은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아이만 배우는 게 아니고 아빠들도 배운다.

 

<아빠 어디가>는 결국 아빠와 아이가 등장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담길 수밖에 없다. 바로 시골에 가서 직접 밥을 해먹거나 떡을 만들어보거나 밤을 따고 개울에서 뛰어노는 그 몸으로 부딪치는 아날로그적인 체험들은 그 자체로 커다란 교육적 효과를 드러낸다. 지금껏 보여진 아이들의 변화를 떠올려 보라. <아빠 어디가>는 분명 지금의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정서가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들이 보이는 저마다의 교육관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기피대상 1호가 된 성동일이 꼴찌 아빠가 아니고, 성동일과는 정반대의 교육관을 가진 송종국이나 아이들의 1순위가 된 김성주가 일등 아빠는 아니라는 점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교육관이 있을 뿐이다. 어떤 교육관이 맞느냐를 비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빠 바꾸기 미션이 보여준 것처럼 아빠들이 타인의 교육관을 인정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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