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마음에 그려진 김다미와 전소니의 우정, 아니 사랑(‘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보여.” 하은(전소니)은 미소(김다미)의 얼굴을 그리며 어떤 자신의 마음을 봤을까. 민용근 감독의 영화 <소울메이트>는 하은이 거대한 캔버스에 그린 미소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극사실주의로 그려진 그 그림은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연필로 하나하나 그어진 선들이 만들어낸 얼굴이다. 그 선 하나하나에서 그 그림을 그린 하은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울메이트>는 그 그림으로 시작해서 그 그림으로 끝난다. 그림 속 미소의 얼굴은 학창시절 하은과 하은의 남자친구 진우(변우석)와 함께 제주의 어느 산길을 오르다 찍힌 사진이다. 돌아보는 미소를 순간 찰칵 찍어낸 하은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미소의 얼굴을 캔버스에 담았을 게다. 풋풋한 청춘의 건강함이 묻어나는 미소의 그 얼굴은 어딘가 놀란 듯 보이면서도 생기가 넘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슬픔 같은 것이 묻어난다. 

 

덥고, 지루하고 졸리고 나른하던 어느 날 전학 온 미소는 오자마자 교실을 박차고 나가 바다가 보이는 뚝방 위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는 그런 아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부모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엄마마저 그 아이를 제주에 남겨 놓고 떠났다. 외롭게 괴로웠을 미소지만, 그는 이름처럼 늘 생글생글 웃으며 하은과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성장한다. 

 

미소는 그가 ‘찐’이라고 생각하는 제니스 조플린을 닮았다. 27살의 나이에 활활 타올랐다가 저 세상으로 떠난 아티스트. 같은 나이에 요절한 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과 더불어 3J로 불리며 이른바 ‘27살 클럽’의 멤버 중 하나로 불리는 히피 문화를 대표하는 싱어 송 라이터. 그는 미소에게는 자유의 존재로 읽힌다. 제니스 조플린의 명곡 ‘Me & Bobby McGee’에 나오는 가사 내용 중 ‘자유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일 뿐(freedom’s just another word for nothin’ left to lose)’이라는 대목이 미소가 마주하고 있는 ‘쓸쓸한 자유’의 면면을 잘 설명해준다. 

 

제주에서 서울로 떠나 성북동 달동네 위에 있는 도시 속 섬 같은 허름한 집에서 지내며 하루하루를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가지만, 미소는 하은에게 자유로운 제니스 조플린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편지를 보낸다. 바이칼 호수에는 가본 적도 없지만, 그 곳을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엽서를 가져온다. 미소는 결코 제니스 조플린처럼 자유로운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런 자유를 늘 꿈꾸고 있었을 뿐이다. 엄마마저 돌아가셔 남은 가족조차 없는 미소는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었지만, 퍽퍽한 삶은 그 어디도 그를 날게 해주지 않았다. 

 

반면 단란한 가족의 품에서 자라난 하은은 미소의 그 자유를 부러워하지만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조차 타지 못해 섬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인물이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잘 그리지만 제주에서 학교 선생님이 되어 지낸다. 제주와 서울로 떨어져 지내며 하은과 미소는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보듬으면서 우정 그 이상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두 사람의 다른 삶은 그들이 그리는 그림으로도 표현된다. 하은은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는 극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리는 반면, 그런 틀 자체가 싫은 미소는 입시 미술 학원에서 데생을 할 때조차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그들이 학창시절 비 맞은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그리는 장면에서도 하은이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의 고양이를 그린 반면, 미소는 추상적인 고양이의 형상에 마음까지 그려 넣는다. 

 

똑같이 그리는 건 재주일 뿐, 재능이 아니라고 여기는 이도 있지만, 하은과 미소의 그림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지와 사랑이라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은 같은 지점에서 만나 서로를 채워가며 완성되어 간다. 따라서 <소울메이트>는 그림을 매개로 해서 서로를 완성하고 채워가는 하은과 미소의 우정,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을 담아낸다. 맞다. 그건 사랑이다. 그저 이성과 동성이라는 구분이 불필요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사랑. 

 

9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폴더폰이나 싸이월드, MP3, 펌프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당대의 오브제들은 당대를 살았던 중장년층의 마음을 추억 속으로 소환시킨다. 하지만 이 그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은 뉴트로를 힙하게 바라보는 MZ세대들의 마음 또한 이 작품은 툭툭 건드리고 있다. 마치 ‘인생네컷’ 사진을 통해 바로 찍은 디지털 사진을 즉석으로 인화해 손에 쥐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갖고픈 MZ세대들의 취향을 이 작품은 레트로한 영상과 색감, 정서 등으로 사로잡는다. 

 

그 위에 하은과 미소의 한 평생을 담아낸 마음들을 이를 연기한 김다미와 전소니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만든다. 특히 이미 <마녀>로 강렬한 인상을 주며 등장해, <이태원 클라쓰>로 걸크러시를 보여주고는 <그해 우리는>으로 달달한 감성까지 전해줬던 김다미는 이 작품 속 미소라는 청춘의 초상을 통해 자유와 슬픔, 그리움과 행복 등이 버무려진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마치 청춘의 초상을 상징하는 듯 그림 속에 얹어진 그의 얼굴로 시작해 그의 얼굴로 끝을 맺는 영화는 그래서 김다미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뇌리에 새겨넣어준다. 

 

“이젠 니 얼굴을 그리고 싶어. 사랑 없인 그릴 수조차 없는 그림 말야.” 똑같이 그리다 보면 그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마음이 보인다는 하은의 말에 화답하듯, 영화는 그런 미소의 답으로 끝을 맺는다. 그림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의 이야기는 그래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그건 우정을 넘어선 사랑이야기고, 그래서 이성애의 틀을 벗어버림으로써 드디어 삶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들이 쉽사리 객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여운은 그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만이 아니다. 그건 어찌 보면 찬란하면서도 슬픈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은 데서 오는 먹먹함 때문이 아닐까.(사진:영화'소울메이트')

사는 게 벌 같았지만... ‘동백꽃’ 이정은이 준 큰 위로

 

“못해준 밥이나 실컷 해먹이면서 내가 너를 다독이려고 갔는데 니가 나를 품더라. 내가 네 옆에서 참 따뜻했다.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네가 다 하는 이유는 용서받자고가 아니라 알려주고 싶어서야. 동백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어. 버림받은 일곱 살로 남아 있지 마. 허기지지 말고 불안해 말고 훨훨 살어. 훨훨. 7년 3개월이 아니라 지난 34년 내내 엄마는 너를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했어.”

 

KBS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정숙(이정은)이 딸 동백(공효진)에게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일곱 살 딸을 버리고 간 그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까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편지에 담긴 정숙의 삶은 불행과 불운의 연속이었다. 술 취하면 폭력적인 남편을 버티다 동백까지 다치게 되자 집을 나온 정숙은 갈 곳이 없었고, 룸살롱 쪽방에서 딸과 함께 지냈지만 그 곳은 어린 딸이 지낼 데가 아니었다. 그 어린 아이가 “오빠” 소리를 배우고 따라했으니.

 

술집 언니들 식모 노릇하며 살았는데 그 곳도 쉽지 않았다. 자꾸 뛰쳐나와 갈 곳도 없는 모녀는 은행을 전전했고 공짜로 주는 박카스를 지겹도록 마셨다. 끝없이 배 고프다는 아이 옆에서 엄마는 결국 절망했다. 자기가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는 아이마저 죽일 것 같았던 것. 결국 엄마는 딸을 살리기 위해 버려야겠다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육원으로 보낸 후에도 정숙은 계속 딸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살폈고 알고 보니 입양 후 파양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이유가 새 엄마가 아이의 그늘에서 술집에서 지냈던 걸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찾은 딸이 진짜 술집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엄마는 마음이 아팠지만, 동백이 밝게 웃고 있는 걸 보면서 엄마는 안심했다. 그렇게 긴 세월을 지나 정숙은 동백의 앞에 서게 됐던 거였다. 함께 지낸 세월이 고작 7년 3개월이라며 신장 이식을 받지 않겠다 버티는 정숙에게 ‘7년 3개월짜리 엄마’라고 부른 동백은 그 기간이 짧았어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동백은 아마도 그 나머지 엄마가 자신과 떨어져 지냈던 34년간이 못내 아프고 화가 났었을 게다.

 

하지만 엄마의 삶은 딸보다 더 아팠다. 그에게도 7년 3개월만이 유일한 삶의 행복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 시간이 마치 “적금 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엄마는 이번 생이 너무 힘들었어. 정말 너무 피곤했어. 사는 게 꼭 벌 받는 것 같았는데 너랑 야 3개월을 더 살아보니까 아 이 7년 3개월을 위해서 내가 여태 살았구나 싶더라. 독살 맞은 세월도 다 퉁 되더라.” 세상에, 사는 게 벌 받는 것 같았다니.

 

엄마에게 버려져 고아에 미혼모로 살아오며 갖가지 편견 속에서 힘겨웠던 동백의 이야기는 이제 그 딸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지독한 가난과 그 후로 내내 불행한 삶을 살아왔던 엄마 정숙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동백꽃 필 무렵>이 정숙의 이야기로 시청자들에게 하려는 메시지는 뭘까. 도대체 이 정숙의 가슴 아픈 사연의 무엇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이토록 후벼 파는 것일까.

 

“이번 생은 글렀어”라고 흔히들 말하는 우리들은 때때로 나의 불운이 태생에서부터 결정됐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건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버린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지만, 그런 문제가 야기하는 불행과 비극을 우리는 개인이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 현실이 너무 어려워 때론 삶을 비관한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위축되고 좀체 제대로 날개를 펴지도 못한다. 그래서 미워지기까지 한다. 심지어 사는 게 벌 받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동백꽃 필 무렵>의 정숙은 온 몸으로 보여준다. 누구나 저마다 사랑받지 않은 존재는 없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않은 존재는 없다고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건 엄마와 자식 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먼저 떠나버린 향미(손담비)도, 심지어 연쇄살인범조차도 그를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는 누군가는 있을 테니 말이다. <동백꽃 필 무렵>이 주는 큰 위로는 바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존재의 꽃을 피워내는 빛이 늘 어딘가에서 비춰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어서다.(사진:KBS)

‘남자친구’ 박보검의 순수직구는 어째서 뭉클하게 다가올까

“오늘부터 1일이에요.” 김진혁(박보검)의 그 한 마디는 순간 차수현(송혜교)을 살짝 놀라게 만든다. 하지만 김진혁은 그 말이 차수현과의 1일이 아니라, 자신이 처음 사온 감자떡 이야기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는다. “감자떡이랑 저랑 1일이라고요.” 쿠바에서 자신이 차수현에게 들려준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자 그것이 차수현이 신청한 곡이라고 직감한 김진혁은 그 밤 골뱅이집 형의 트럭을 빌려 밤새 속초로 달려간다. “고마운데 여기 왜 왔어요”라고 묻는 차수현에게 김진혁은 말한다. 

“음악이 너무 좋아서 잠이 깼어요. 라디오에서 우리 같이 들었던 음악이 나오더라고요. 있잖아요. 대표님 우리는 무슨 사이가 맞을까요? 저도 오는 내내 생각해봤어요. 회사 대표님에게 이렇게 할 일이냐. 나름 책임감 있는 장남으로 자랐고 군대도 갔다 와서 철부지는 아닌데 왜 달려갈까. 우리 사이가 좀 애매하더라고요.” 그렇게 말하자 차수현은 그 ‘우리’라는 표현이 못내 걸린다. 굉장히 가까운 사이임을 드러내는 단어가 아닌가. 그래서 그 표현을 지적하려 하자 김진혁의 거침없는 한 마디가 흘러나온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요.”

tvN 수목드라마 <남자친구>에서 김진혁과 차수현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보면 단어 하나하나에 얼마나 이들이 신경 쓰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저 툭툭 내뱉는 말이 아니라, 단어 하나에도 저마다의 배려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냥 “여기 왜 왔어요?”하고 묻는 게 아니라 “고마운데 여기 왜 왔어요?”라고 묻는 차수현의 질문은 그 감정의 뉘앙스가 너무나 다르다. “오늘부터 1일이에요”라고 감자떡을 빌어 농담처럼 전하는 말 속에는 착한 사회 초년생 순둥이로만 보였던 김진혁이 의외로 할 말은 다 하고 때론 말 몇 마디로 남다른 문학적 정감을 더해주는 표현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는 당당한 연애술사(?)라는 걸 드러낸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매개하듯 나태주 시인의 ‘그리움’이라는 시가 담겨지는 건 두 사람이 이 관계에서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의 섬세함이 문학적인 지점에 닿아있다는 걸 말해준다.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사람의 진면목은 그 외적인 조건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사실 한 회사의 대표인 차수현이 실상은 이혼을 했어도 여전히 재벌그룹 시댁의 손아귀에서 아무 것도 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인물이라는 걸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찌 알 수 있을까.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 아버지를 둔 탓에 어려서부터 사적인 삶을 거의 살지 못한 차수현은 결혼도 그렇게 정략적으로 하게 됐고 이혼도 했지만 그 아버지를 볼모로 삼는 시댁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이건 쿠바의 어느 거리에서 길거리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던 김진혁이라는 청년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다. 청과물집 아들로 건실하게 살아왔고, 이제 겨우 차수현이 대표로 있는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게 된 신출내기지만 그는 어딘지 모든 일에 당당하고 때론 대담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외적인 조건들을 뛰어넘는 면면이 드러나는 건 다름 아닌 그들이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선택해서 꺼내놓는 말을 통해서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이 말에 섬세하고 예민하다는 건 장미진 비서(곽선영)가 차수현이 걱정되어 김진혁을 찾아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장난 같은 호기심’이라는 장비서의 표현에 김진혁은 가만히 생각하다 그에게 달려가 말한다. “장난 같은 호기심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에 들여놓는다는 거 아주 잠깐이더라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진혁은 “좋아하게 됐다”는 말을 “보고 싶어서 왔어요”라고 말하고, “사람이 사람을 마음에 들여놓는다”는 표현으로 말한다. 그 조심스럽지만 정제된 말 표현 속에 이 사람이 가진 섬세한 감수성과 남다른 배려가 묻어난다. 

사람의 진면목은 따로 있고 그건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의해 드러난다는 건 그래서 어쩌면 이 멜로드라마가 하려는 진짜 이야기처럼 보인다. 이른바 ‘공적인 삶’이라는 건 그 외적인 것에 맞춰 보여주는 가식들이다. 이 드라마에서 쌍벽을 이루는 악역을 자처한 그 인물들은 바로 차수현의 어머니 진미옥(남기애)과 그의 전남편 정우석(장승조)의 어머니 김화진(차화연)이다. 그들은 겉면으로 드러나는 조건들로 사람을 판단하고 함부로 재단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가식이 갖고 있는 폭력적인 면면들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직도 차수현을 신경 쓰는 정우석이 다른 여자가 있다며 이혼을 한 것이 어쩌면 차수현을 그 지옥 같은 가식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려는 선택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우석 역시 우리가 흔히 상투적으로 떠올리는 그런 재벌2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을 차수현을 그가 일부러 놓아준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이런 가식의 세계로 옭아매는 진미옥이나 김화진 같은 인물에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게 대결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김진혁이다. 차수현으로부터 이 호텔사업을 빼앗으려는 야망을 갖고 있는 최진철(박성근) 이사가 일부러 스캔들을 만들고 그걸 해명하라고 종용할 때, 해맑은 얼굴로 자신이 그 스캔들의 주인공임을 드러내며 “저 돈 좀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살 테니까 저랑 라면 먹으러 가시죠”하고 묻는 대목은 이 대결구도에 균열을 만들어낸다. 공적이고 가식적인 세계에서 수군대던 스캔들은 그렇게 그들의 순수한 관계를 드러내는 순간 무색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뭐가 잘못된단 말인가 하고 김진혁은 그 해맑은 얼굴로 묻고 있는 중이다. 

‘그냥 당신 인생을 살아요. 거기서 더 다가오지 말아요.’라고 생각하는 차수현에게 김진혁은 ‘나는 선택했습니다. 당신이 혼자 서 있는 그 세상으로 나서기로 결정했습니다. 나의 이 감정이 뭐냐고 묻지 마세요. 아직은 나도 모릅니다. 지금의 나는 당신을 외롭게 두지 않겠다는 것. 그것입니다.’라고 속으로 다짐한다. 그 순간 공적인 삶이라는 허울로 가식의 세계 속에 홀로 서 있던 차수현에게 진짜 순수한 마음이라는 것이 닿는다. 그건 차수현에게 눈시울이 붉어지지만 미소가 피어나는 일이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싶어지는.(사진:tvN)

‘효리네 민박’, 어째서 보고만 있어도 위로가 될까

잠시 동생의 졸업식 때문에 미국에 간 이지은(아이유)의 빈자리는 크다. 이효리와 이상순이 설거지를 하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또 밥을 먹으면서도 입에 ‘지은이’를 올린다. “지금쯤 지은이는...”이라고 하고, “보고 싶다”는 말을 자꾸만 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JTBC <효리네 민박>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어딘지 쓸쓸하게도 보였던 그 뒷모습이나 허겁지겁 뛸 때 뒤뚱대던 모습, 그리고 누군가를 쳐다볼 때 동그랗게 떴던 눈과 우스워 죽겠다는 듯 박장대소했던 그 모습이 그 빈 공간에 어른거린다. 있을 땐 몰랐는데 없으니 그 사람의 존재가 더 빛이 난다. 

'효리네 민박(사진출처:JTBC)'

이런 빈자리가 주는 떠난 사람의 온기는 <효리네 민박>을 찾았던 많은 손님들에게서도 똑같이 느껴진다. 잠시 머물다 돌아간 분들이지만 그 잔상은 그 공간 곳곳에 스며있다. 누군가는 깔깔 웃었고 누군가는 자못 심각하게 속내를 털어 놓았으며 누군가는 울컥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저마다 쉽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예고 동창생인 태윤씨와 조은씨는 햇살이 내리쬐는 민박집 한 켠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눈물이 쏟아졌다. 무려 5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간 조은씨가 눈물을 흘리자 이효리가 다가가 그녀를 다독였다. “학교만 가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존감이 한참 낮아져 생활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이효리는 조은씨에게 “내가 예쁘지 않으면 날 예쁘게 안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건 내가 나를 예쁘게 보지 않아서 그런 거다. 사람들이 날 예쁘게 안 봐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건 조은씨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이효리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늘 밝아 보이기만 했던 영업사원팀들에도 자신들만의 고충은 있었다. 경문씨는 늘 웃는 얼굴로 대해야 하는 부담감을 이야기했다. 요가를 하며 유독 뻣뻣했던 경문씨에게 호흡에 대해 이효리가 이야기하자, 그는 직업 때문에 사실 한숨도 제대로 내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이 보는 이들이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이효리는 그에게 한숨의 사전적 의미를 되새겨줬다. ‘근심 설움 또는 긴장이 풀려 안도할 때 쉬는 숨’이 한숨이니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것. 

조은씨의 눈물을 슬쩍 봤던 이상순이 이효리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대학만 가면 모든 게 행복할 줄 알았대”하고 이효리가 말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새삼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결혼만 하면, 제대만 하면 그리고 가수로 성공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고 했다. 문득 이효리는 “행복해야 된다는 생각을 버리면 행복한데...”라고 했고 이상순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냥 사는 거지..”라고 했다.

많은 이들이 이 민박집에 찾아왔고 또 떠나갔다. 그들은 너무나 다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공통된 한 가지는 행복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 행복을 위해 꿈을 꾸고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하고 잠시 힘겨운 도시생활을 벗어나 저들끼리의 한가로운 시간을 만끽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쇼핑을 하고 낯선 곳을 여행한다. 그들은 이 곳에서 어쩐지 행복해 보였다. 무엇을 하기만 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함께 웃고 때론 아픔도 나누는 그 자체가 행복해 보였다. 

이제 마지막 손님을 받는 <효리네 민박>. 하지만 그 꽤 긴 시간들 속에 이 공간에는 많은 사람들의 온기들이 행복한 잔상으로 남겨져 있다. 멀리 떠나 있어 더 그리워지고, 그래서 그 사람이 남겨 놓은 빈자리의 흔적이 더 소중해지는 것처럼 지나칠 땐 몰랐던 것들이 지나고 나서는 행복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곤 한다. 아마도 <효리네 민박>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위로가 되는 건 바로 그런 삶의 비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소소하게 겪은 많은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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