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참 다양하게도 비유된다.
삶을 인생의 여정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글을 쓰는 일도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가는 여행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역시 잠시 이 쪽의 불을 끄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말하기도 한다.

여행에는 낯설음과 익숙함 혹은 새로움과 진부함 나아가 차이와 반복의 이중주가 담겨 있다.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은 낯설고 새롭고 어딘가 지금과는 차이가 있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하지만 제아무리 낯설고 새롭고 차이가 나는 경험으로서의 여행이라도
같은 곳에 오래 머무르거나, 혹은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그 경험은 익숙해지고 진부해지기 마련이다.
삶은 그래서 이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 새로움과 진부함 사이 그리고 차이와 반복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행위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그것 역시 삶과 여행을 빼닮았다는 걸 알고 있다.
처음에는 새로운 단어들이나 말들이 갈수록 익숙해지면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 단어나 말들이 지긋지긋해지고 더이상 쓰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

“나는 말(言)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여행과 나날'에서 각본가인 '이(심은경)'는 그렇게 말한다.
이는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각본가로 일하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쓰는데, 아마도 그녀에게 처음부터 일본어가 쉬웠을 리는 없다.
이건 심은경이라는 배우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느꼈던 소회하고도 일치한다.
그 일본어를 쓰며 하는 연기는 그래서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한국어로 하던 연기의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연기를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본어가 점점 익숙해지면서 이는 그마저 '말의 틀'에 갇히고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슬럼프에 빠지기 전 그녀가 쓴 작품으로 된 영화는 여름 날 어느 낯선 바닷가에서 만난 소년 소녀의 이야기다.
대단한 사건도 대단한 대사도 없지만 묘하게도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그 영화는
그 무료한 바닷가에서 함께 바다 속으로 뛰어들고 수영하는 광경을 관능적으로 담아낸다.
작가의 이의 무료함은 그렇게 영화라는 세계 속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여행의 낯설음을 꿈꾸게 한다.

그 작가의 권태로움이 극에 달해 말의 틀에 갇혀버린 이는
이제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말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여행을 떠난다.
영화 속 세계가 어느 여름날의 바닷가 소년 소녀의 판타지에 가까운 상상이었다면
현실 속 이가 떠난 세계는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 속 지도에도 없는 허름한 여관에서 만난
괴팍해 보이는 아저씨 주인과 만난 지극히 현실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이는 온천도 스키장도 아닌 이 지도 바깥에 있는 이 낯선 여관에서
주인 아저씨 벤조와 일상을 보내며, 그가 하는 엉뚱한 짓에 가담해 의외의 작은 모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벤조가 왜 혼자 그런 외진 곳에서 여관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사연도 알게 된다.
그 엉뚱한 모험을 한 후 이가 한껏 웃는 얼굴로 벤조에게
“이렇게 즐거웠던 건 오랜만이에요.”라고 말할 때
벤조가 툴툴 대며 옆자리로 눕는 장면은 이 영화의 깨알같이 빛나는 대목이다.

벤조의 사연은 자못 비극적이고 아련한 면이 있고,
그건 그의 하루하루를 온통 채우는 일상 그 자체다. 새로울 리도 없고 그러니 즐거울 리도 없다.
하지만 벤조의 그 일상 속으로 여행해 들어온 이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 바깥으로 나와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낀다.
영화는 잔잔하기 이를 데 없고 대사도 많지 않다.
특히 전반부에 등장하는 이가 쓴 작품 속 바닷가 소년 소녀의 이야기는
익숙한 영화 문법과는 사뭇 동떨어진 광경들이 등장하며
낯선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였고, 그 영화의 각본을 쓴 이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익숙함에 갇혀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새로움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 또 하나의 영화다.
극중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이
익숙함의 틀에 갇혀 즐거움을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즐거운 여행으로 인도하는가를 담아낸다.
이 영화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삶은 둘 중 하나가 된다.
여행을 하고 있거나 혹은 나날(일상)을 살아가고 있거나.
그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즐거움을 추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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