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판사’의 통쾌함과 불편함은 어디서 오나

악마판사

또 다른 다크히어로의 탄생이다. tvN 토일드라마 <악마판사>는 대놓고 주인공에 ‘악마’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모범택시>, <빈센조>에 이어 <악마판사>까지. 도대체 다크히어로들은 어쩌다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 걸까.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판사 작품 맞아?

사실 <미스 함무라비>를 쓴 문유석 작가는 우리에게는 ‘판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건 그가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 전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통해 전 부장판사였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각인된 바 있고, 무엇보다 <미스 함무라비>가 바로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판사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새로 쓴 tvN 토일드라마 <악마판사> 역시 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적어도 <악마판사>를 기점으로 문유석은 ‘판사’보다는 ‘작가’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법정의 현실을 담은 <미스 함무라비>와는 사뭇 다른,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라이브 법정 쇼’를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로서의 현실 경험보다는 작가로서의 상상이 더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악마판사>다. 

 

본래 작품의 판타지는 현실의 결핍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가상의 설정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는 현실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라이브 법정 쇼’에 처음 서게 된 JU케미컬 회장 주일도(정재성)는 독성폐수를 무단 방출해 한 마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우리네 현실에서도 이런 유사한 사건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모티브가 됐던 91년에 있었던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이나, 여전히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을 야기한 가해 책임자들은 거기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을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악마판사>에서 라이브 법정 쇼를 통해 강요한(지성) 재판장은 주일도 회장에게 금고 235년이라는 충격적인 판결을 내놓는다. 또 두 번째로 열린 라이브 법정쇼에서 엄마가 법무부장관이라는 사실 때문에 안하무인 갑질을 일삼아온 피고는 ‘태형(때리는 형벌)’ 30대를 선고하고 그 과정을 생중계한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을 가상의 국가와 라이브 법정쇼 같은 설정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잠시간의 ‘사이다’를 안기는 것. 

 

이런 이야기 구조는 SBS <모범택시>와도 유사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PD이기도 했던 박준우 연출자는 그 프로그램이 다뤘던 실제 사건을 허구의 드라마 속으로 가져와 그 가해자들에게 ‘사적 복수’를 가하는 무지개 운수팀의 사이다 액션을 그린 바 있다. 여러모로 문유석 작가는 이제 현실의 문제를 좀 더 가상을 빌어 풀어보려는 작가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악마판사>는 바로 그런 욕망의 소산이다. 

 

이 라이브 법정쇼가 겨냥하고 있는 것

<악마판사>는 그러나 라이브 법정쇼라는 ‘사이다 법 정의’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강요한(지성)이라는 주인공을 ‘악마판사’라 세우고 있는 데는 그가 과거 어떤 불행을 겪었고 그래서 절치부심 복수극을 펼쳐가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버려진 아이로 대부호의 집에 입양되어 살아온 강요한을 그의 배다른 형인 강이삭(진영)이 살뜰히 챙겨줬지만, 10년 전 그 막대한 유산을 사회적 책임재단에 전액 기부하려던 중 발생한 의문의 성당 화재로 인해 형 부부가 모두 사망하게 된 것. 강요한은 형의 딸 엘리야(전채은)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그 기부를 전면 취소했다. 당시 화재 현장에 있었던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그래서 마치 강요한이 그 화재를 일으키고 그 재산을 모두 강탈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 날 성당에 있던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아이인 엘리야를 밟으면서까지 탈출한 그런 비정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지금도 이 가상의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들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 허중세(백현진), 법무부장관 차경희(장영남), 사회적 책임재단 이사장 서정학(정인겸), 민보그룹 회장, 사람미디어그룹 회장 등등.

 

결국 <악마판사>가 보여주고 있는 구도는 사회적 책임재단으로 불리며 마치 나라 걱정을 하는 이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적 이익에만 혈안인 이들에 대한 강요한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아직 그 실상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당시 성당의 화재와 형인 강이삭의 전 재산 기부 같은 사안의 이면에는 아마도 보이지 않는 사회적 책임재단의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요한이 하는 ‘라이브 법정 쇼’는 그래서 전 국민이 보고 참여하는 라이브 쇼라는 방식을 통해 실제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법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비극을 겪은 가족을 위한 복수극이 펼쳐지는 곳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악마가 판을 치는 다크히어로 전성시대

<악마판사>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선한 주인공이 아닌 다크히어로를 그리고 있다.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집이지만 텅 비어 있어 어딘지 음습하고 쓸쓸한 대저택은 거기 살고 있는 강요한이라는 다크히어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마치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을 닮았다. 고풍스런 대저택에서 살지만 고독하고, 어딘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숨긴 채 살아가는 어두운 인물. 그래서 드라마는 초반에 라이브 법정 쇼로 전 국민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는 강요한이라는 인물이 그 모습과는 다른 ‘악마적인 면모’가 있다는 걸 슬쩍 드러낸다. 그의 등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십자가 모양의 커다란 화상의 흔적은 ‘요한’이라는 그의 이름과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십자가를 진 채 저들 악마의 불길 속으로 뛰어든 다크히어로의 아우라를 만든다. 결국 그가 악마가 되기로 한 건, 그래야만 저 악마보다 더 한 사회적 책임재단의 가면을 쓴 어둠의 카르텔과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판사>에서 단박에 <모범택시>가 떠오르고, 그 어두운 인물의 면면에서 tvN <빈센조>가 떠오르는 건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다크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어서다. <모범택시>의 김도기(이제훈)는 부모가 모두 살해당하는 일을 겪었지만 정작 가해자에 대한 미온적인 사법 처리 과정을 겪으며 ‘사적 복수 대행’이라는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빈센조>는 이탈리아에서 온 마피아 변호사로서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고 말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다. 어쩌다 지금 정의를 메시지로 담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선이 아닌 악을 선택하게 된 걸까. 그건 이 정도의 강력한 대응이 아니면 저들끼리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심지어 ‘성실하기까지 한’ 악을 대적할 수 없다는 공감대에서 비롯된 일이다. 다크히어로는 그래서 어설픈 착함이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악함으로 저들과 싸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러한 다크히어로 전성시대의 밑그림에 어른거리는 대중들의 정서는 사법행정에 대한 불신이다.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범법자들이 돈과 권력의 힘으로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법 위에서 오히려 법을 이용하는 행태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봐왔지 않은가. 그래서 서민들의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외침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현실 속에서 다크히어로는 탄생한다. 그들이 주는 사법 정의가 물론 일시적인 통쾌함을 선사할 뿐일지라도 잠시간의 사이다일 뿐일 지라도 그 시원함을 맛보고 싶어진다. 물론 그 통쾌함 뒤에 남는 건 이런 식의 가상까지 동원해야 하는 현실이 주는 불편함이지만.(글:매일신문 사진:tvN)

‘미션’이 담아낸 의병, 개화기, 여성, 멜로, 글로벌 콘텐츠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추석특집으로 드라마를 감독판으로 재구성해 방송하면서 ‘Gun, Glory, Sad ending’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부제들은 어찌 보면 김은숙 작가가 그간 멜로 장인으로 불리며 그려왔던 작품들과 비교해 이 작품이 얼마나 도전적이었는가를 잘 드러내준다. ‘총과 영광 그리고 새드엔딩’은 김은숙 작가가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확장시킨 자신의 세계를 압축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성과라면 먼저 역사교과서에 박제된 사진 정도로 남아있던 ‘의병’이란 존재들을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로 재조명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역사교과서에서 한번쯤 봤던 의병의 사진을 기억한다.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영국기자의 요청에 의해 찍었다는 그 사진 속의 의병들은 모두 총을 들고는 있었지만, 너무 어린 아이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이 농사 짓다 온 농부들의 모습이었다. 중간에 유일하게 정복을 한 군인이 있지만, 그는 군대가 해산돼서 의병이 됐다고 전한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저마다 아픈 상처 하나씩을 가진 채 산으로 모여 의병활동을 시작하는 이들의 장면은 여러 모로 이 사진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전당포를 꾸려오며 음으로 의병을 돕던 일식이(김병철)와 춘식이(배정남)의 모습은 막 그 사진에서 나온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 사진 속 모습은 저들이 저런 모습으로 얼마나 일제에 항거할 수 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어리고 전투경험이 없어 보였지만, <미스터 션샤인>이 이들을 다르게 느끼게 해준 건 그들이 의병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로 담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문물로 변화해가는 저자거리에서 인력거를 끌거나 빵을 만들거나 양장점에서 옷을 만들고 전당포에서 사연어린 물건들을 받아 돈을 대주며, 병원에서 아픈 이들을 돌보던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군화발로 들어와 무고한 조선인들을 총칼로 쓰러뜨리는 걸 차마 참지 못하고 맞서 총칼을 들게 된 이들이었다. 

고애신(김태리)과 쿠도 히나라 불린 본명 이양화(김민정)가,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들어와 자축연을 여는 일본군인들이 있는 글로리 호텔을 폭파시키는 장면은 그저 그런 액션 장면이 아니라 이 작품이 하려는 이야기와 당대의 시대적 코드를 상징하는 장면이 된다. 한 사람은 모든 이들의 추앙을 받던 집안의 애기씨로 불렸고, 다른 한 사람은 일찍이 아버지에 의해 일본인에게 팔려갔다 빨리 개화하여 돌아와 호텔을 운영하는 사장으로 불렸지만 모두 숨겨진 의병이었다. 글로리 호텔이 폭파하며 튀어 오르는 ‘불꽃’은 저 고애신이 말했듯 의병들의 삶과 죽음을 압축해 보여준다. 그것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불꽃이지만 또한 영광(글로리)의 불꽃이기도 하니까. 

김은숙 작가는 이처럼 의병이란 존재가, 우리네 역사가 어려움에 겪을 때마다 들불처럼 번져 일어났던 사실상 역사의 주인이라는 걸 그려내면서, 거기에 개화기와 여성의 문제를 담는 시도를 한다.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들이 고애신과 쿠도 히나라는 사실이, 그들로 인해 이 의병의 삶에 동참하게 되는 유진 초이(이병헌), 구동매(유연석) 그리고 김희성(변요한)이란 캐릭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여성들의 불꽃이 너무나 활활 타올랐기 때문에 이들은 그 뜨거움에도 불구하고 그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간다. 

이 부분에서 드라마가 절묘해지는 건 의병의 이야기와 개화기라는 시기 그리고 여성의 문제가 ‘낭만’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멜로 코드와 엮어진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개화기는 일제의 침탈과 항거라는 축으로만 이야기된 점이 있었다면, 김은숙 작가는 그 시기가 조선의 신분사회와 유교적 전통이 서구의 신문물과 만나면서 허물어지던 시기라는 걸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여성의 탄생에 주목한다. 고애신도 쿠도 히나가 드라마의 중심에 서게 되는 건 그래서다. 

의병이라는 존재의 재조명과 개화기가 가진 특수성은 ‘확장된 멜로 코드’를 통해 보편적인 이야기로 그려진다. 거기에는 유진초이가 가져온 미국도 있고 구동매나 쿠도 히나가 가져온 일본과 프랑스도 있다. 그 안에는 개화기에 일어난 의병이라는 특수한 이야기가 있는 동시에, 그들이 의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적인 관계의 이야기들이 확장된 멜로 코드를 통해 담겨진다. “당신은 당신의 조선을 구하시오. 나는 당신을 구할 거니까. 이건 내 역사고 난 그리 선택했오.” 유진초이의 이 절묘한 대사는 의병과 개화기와 멜로 코드가 시공간적 특수성을 넘어 보편적인 이야기로 담겨지는 마법을 구사해낸다.

아마도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그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된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이러한 특수성과 보편성의 조화는 아마도 향후 우리네 드라마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 시장을 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꾸준히 추구되어야할 도전이 될 것이다. 이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조선의 개화기라는 시공간은 그래서 향후에도 다양한 해석들로 드라마들이 풀어내야할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우리는 ‘콘텐츠의 개화기’를 맞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의병, 개화기, 여성, 멜로, 글로벌 콘텐츠... 김은숙 작가가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작품 하나를 통해 거둔 성과들은 꽤 크다. 그리고 이 시도들은 향후 우리네 드라마가 나가야할 한 방향을 지목하고 있다는 데서 의미가 깊다. 이미 시장은 열렸고, 우리네 대중들의 눈높이도 그 열린 시장만큼 높아졌다. 이미 시작된 글로벌 콘텐츠 전쟁 속에서 때론 새드엔딩이 될지도 모르지만 불꽃처럼 타오르는 의병들 같은 새로운 콘텐츠들의 영광스런 행보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미스터 션샤인>이 걸었던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사진:의병박물관)

‘미스터 션샤인’이 다루는 개화기, 그 독립의 의미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첫 회에 들어간 이 내레이션은 개화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 저마다 투쟁하는 삶을 살아온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 드라마가 할 거라는 걸 예고한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의 빗장을 열고 침탈해 들어오는 그 시기와, 그래서 의병의 길을 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이들이 원하는 그 길이 ‘조선의 독립’이라는 걸 알게 해준다. 하지만 그것 만이었을까. 그들이 원한 독립은 진정 조선만이었을까.

이 부분은 우리네 개화기를 다루는 콘텐츠들이 항일 투쟁의 역사에 집중하다보니 종종 놓치고 있는 지점이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는 콘텐츠들은 마치 그것만이 정답인 것처럼 항일 투쟁의 역사만을 채택하곤 한다. 워낙 절박한 시기였으니 그런 선택들이 잘못됐다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 사라지는 건 개인이다. 나라를 위한 선택들은 숭고하지만 동시에 개개인들은 어떤 투쟁의 시기를 거쳤을까. 항일 투쟁을 하는 이들에게는 개인적 삶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개화기가 갖는 외세에 대항하려는 뜻과 전통적인 신분사회의 틀이 무너져가는 시기의 딴스홀과 모던보이로 대변되는 ‘낭만적 삶’에 대한 욕망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미스터 션샤인>의 인물들은 그래서 조선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향해 ‘각자의 방법으로’ 나가는 중이지만, 동시에 개인의 독립을 향해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중이다. 

반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애기씨’로 불리며 살아가는 고애신(김태리)은 밤이면 남장을 하고 지붕을 뛰어넘으며 친일하는 자들에게 총을 쏘는 스나이퍼 의병의 길을 걷고 있지만, 또한 당시 조선의 여성들이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어른들이 정한 혼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정인이 따로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 전통적인 조선 여성의 삶으로부터 독립 투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조선을 떠나 더 멀리 훨훨 자유롭게 날고 싶어 한다. 유진 초이(이병헌)와 함께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부모가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조선을 도망쳤던 유진 초이는 고애신과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조선인들에게는 미국인으로 불리고, 미국인들에게는 조선인으로 불리는 그 애매모호한 정체성 속에서 ‘대의’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개인’으로만 살기를 원한 그가, 차츰 고애신을 만나 그 대의를 같이 걸어가려 한다. 그는 조선 사회의 신분제 속에서 조선에 대해 갖고 있던 뿌리 깊은 분노와 신분에 대해 스스로 갖는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고 있다. 

부모가 이완익(김의성) 같은 친일파 중의 친일파인 쿠도 히나(김민정)나 악덕지주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김희성(변요한)도, 부모와 집안이라는 과거의 족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독립하는 삶을 선택한다. 쿠도 히나는 글로리호텔을 운영하며 때론 아버지 이완익과도 대립하면서 스스로를 지키는 삶을 선택하고, 김희성은 신문사를 차려 억울한 이들의 진실을 전하는 일을 하려 한다. 

<미스터 션샤인>이 다루는 개화기가 용기 있다 여겨지는 건 그 시대를 다룬 콘텐츠들이 역사적 대의 앞에서 삭제하곤 했던 이런 ‘개인적 삶’에 대한 부분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독립은 누구나 추구해야할 대의지만, 또한 새롭게 열리고 있는 시대 앞에서 개인들이 저마다 과거로부터 ‘독립’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 이들이 원한 독립은 조선만이 아니었던 것이다.(사진:tvN)

‘미스터 션샤인’으로 만난 김민정의 인생 캐릭터

이 정도면 김민정의 인생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글로리 호텔 주인 쿠도 히나는 실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기모노를 입고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조선에 들어와 사업을 하는 일본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본래 이름이 이양화라는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자신이 그런 일본 이름을 갖게 된 것이 뼛속까지 친일파인 아버지 이완익(김의성) 때문이었다는 게 드러나면서 이 캐릭터의 만만찮은 복합적인 심리가 그려진다. 

그는 늘 웃으며 손님들을 응대하고 때론 여유가 느껴질 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진 사업체의 경영자 면모를 드러내지만, 그 속에는 많은 걸 잃어버린 상처 입은 자의 날선 독기가 느껴진다. 남성들과의 대화 속에서 오히려 주도권을 쥘 정도로 신여성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그런 모든 행동들이 어떤 대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업주로서의 비즈니스적인 선택이라는 걸 분명히 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황은산(김갑수) 같은 의병 대장을 뒤에서 움직이는 고종의 최측근 정문(강신일)이 쿠도 히나를 찾아와 은밀히 지시를 내릴 때, 그는 “그래서 내가 얻게 되는 게 뭐냐”고 묻는다. 그 질문 하나는 차별이 더 심했을 당시의 신분이나 성차 같은 권력관계를 비즈니스라는 차원으로 수평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쿠도 히나는 비련의 주인공이지만 <미스터 션샤인>에서 가장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이다. 

<미스터 션샤인>은 개화기 때 미국으로 도망쳤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전혀 애국심이라고는 없을 법한 유진 초이(이병헌)라는 인물이 고애신(김태리)라는 숨은 의병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을 만나 변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 주목되는 건 오히려 여성 캐릭터들이다. 고애신은 고운 한복을 입고 가마를 타고 다니는 반가의 애기씨지만 밤이 되면 양복으로 성별을 숨기고 총을 든 채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스나이퍼다. 개화기라는 구시대의 전통과 새로운 시대의 신문물, 문화가 겹쳐지는 시대를 고애신이라는 캐릭터는 그 상반된 양면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데 고애신은 여전히 반가의 여식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일찌감치 김희성(변요한)의 집안과 약속해 놓은 혼사의 틀에서 벗어나 혼자 자유롭게 살아가겠다 말하는 인물이지만, 그게 그리 현실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쿠도 히나는 다르다. 이미 아버지를 통해 원치 않는 삶을 강요받고 많은 걸 잃어봤던 그는 이제 그 어느 것 하나 잃지 않겠다며 살아간다. 어찌 보면 쿠도 히나가 고애신보다 훨씬 더 개화되고 능동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때론 돋보이기까지 하는 이유다. 

총을 든 고애신과 칼을 든 쿠도 히나는 <미스터 션샤인>이 개화기라는 시기를 통해서 담아내려는 신시대의 여성상을 상징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 복합적이지만 너무나 단단한 내면으로 분명하게 호불호를 밝히는 쿠도 히나라는 캐릭터가 심지어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봐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쿠도 히나를 연기하는 김민정은 그래서 인생 캐릭터를 얻었다고 말할 만큼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빛내고 있다. 무표정할 때 드러나는 속내와 미소 속에 담겨지는 처연함, 웃음 뒤에 숨겨진 카리스마까지 그 복합적인 면들을 김민정은 자유자재로 연기해내고 있으니.(사진:tv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