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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남자’의 성공비결, 파격을 끌어안은 연출과 연기

tvN 월화드라마 <왕이 된 남자>가 종영했다. 결론은 해피엔딩. 왕이 된 광대 하선(여진구)을 위협하던 진평군(이무생)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규(김상경)의 칼에 맞고 대비(장영남)에게 버려져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신치수(권해효)는 하선의 칼에 죽었으며, 대비 역시 하선에 의해 폐모된 후 사약을 받았다. 하선은 기성군(윤박)에게 선위하고 궁을 떠났고, 대비의 원수를 갚으려는 무리들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그를 지킨 장무영(윤종석)의 희생으로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후 중전 소운(이세영)과 꿈같은 재회를 한 하선은 함께 손을 잡고 갈대밭을 걸어 나갔다. 

하선이 모든 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본래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는 엔딩이었지만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듯한 느낌을 주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왕이 된 남자>라는 사극이 가진 파격이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파격은 이 드라마가 가진 장점이자 취약점이기도 했다. 다행스러운 건 이 취약점을 드라마의 연출과 연기가 장점으로 바꿔놓았다는 것. 

<왕이 된 남자>가 파격인 건, 원작인 영화 <광해>와 너무나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작 영화 <광해>는 제목부터 실존 임금의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에 있어 지켜야할 역사적 사실의 선 같은 게 존재했다. 그래서 다소 안전한 선택 안에서 영화적 재미를 만들었던 것. 하지만 드라마 <왕이 된 남자>는 달랐다. 실존 임금의 이름을 떼어내고 역사와 거리를 두면서 드라마는 원작과는 다른 파격의 길을 걸었다. 

그 첫 번째 파격은 실제 왕을 죽이는 신하의 이야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광대를 진짜 왕으로 옹립시키고, 자신이 꿈꾸던 정치를 펴려는 이규의 욕망은 어찌 보면 ‘왕위 찬탈’과 ‘국정 농단’의 하나로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주인공인 하선이나 이규의 이런 파격적인 선택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연출과 연기가 더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파격은 여진구의 폭군과 선한 광대를 넘나드는 연기와 김상경의 잔혹한 선택 뒤에 존재하는 백성을 위한 마음을 이해시키는 연기를 통해, 또 김희원 PD 특유의 유려한 연출을 통해 시청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 파격은 하선이 광대라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신치수나 대비 앞에서 당당히 대적해가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선은 조금씩 광대놀음에서 진짜 왕이 되어가는 면모를 보여줬고, 그래서 중전 소운의 마음도 또 이규의 마음도 얻었다. 이런 파격적인 변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 것 역시 연기와 연출의 힘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파격은 엔딩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모든 일들이 정리되고 선위한 후 궁을 떠나는 하선의 이야기가 그렇다. 그것 역시 지금껏 그 어떤 사극에서도 보기 힘든 파격이었지만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여졌다. 물론 너무 많은 파격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는 마지막회의 안간힘은 다소 급하게 돌아간 느낌을 줬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마무리를 해냈다는 건 나름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파격은 자칫 잘못하면 사극이 가진 유려한 틀을 깨버리는 취약점이 될 위험성이 있었다. 파격적 사건들이 마구 전개되다 보면 마치 막장 같은 뉘앙스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이 된 남자>의 파격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을 실제처럼 몰입감 높게 연기해준 연기자들이 있었고, 이를 튀지 않고 우아하게 그려낸 연출이 있었다. 따라서 파격은 취약점이 아니라 극성을 높여주는 강점으로 바뀌었다. 

이헌(여진구)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하선에게 “제대로 놀지 못하겠느냐?”하고 일갈하던 장면을 떠올려보면, 이 드라마는 확실히 한 판 제대로 논 듯한 인상을 준다.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 같았고, 그래서 진짜였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 정도로 잘 논 한 판. 이건 어쩌면 이제 사극 같은 ‘역사’를 갖고 ‘노는’ 드라마들이 취해야할 선택이 아닐까 싶다. 파격이라도 어떻게 잘 노느냐에 따라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끌 수 있으니.(사진:tvN)

Posted by 더키앙

‘왕이 된 남자’, 원작과 달라진 팽팽한 대결구도

그저 또 다른 멜로 사극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그 멜로가 만들어낼 팽팽한 대립구도가 원작과는 또 다른 이야기를 예고했다. 


tvN 월화드라마 <왕이 된 남자>는 원작 <광해>가 그랬던 것처럼 광대인 하선(여진구)이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약에 중독된 폭군 이헌(여진구)을 대신해 왕 노릇을 하며 생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폭군 이헌과는 너무나 다른 착한 성정을 가진 하선이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펼치는 대목은 <광해>에서도 그랬지만 <왕이 된 남자>의 중요한 재미 포인트다. 

공납을 쌀로 할 수 있게 바꾸려는 대동법 시행을 두고 이를 막으려는 신치수(권해효)와 그 무리들과 맞서며 셈이 빠른 주호걸(이규한)을 통해 비리를 찾아내는 대목은 통쾌한 사이다를 선사한다. 신치수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게 될 위기에 처하자 꼬리를 자르듯 호조의 잘못으로 몰아붙이고, 주호걸을 살인교사하려 했던 그의 아들 신이겸(최규진)의 죄 역시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면될 거라는 걸 알게 된 하선은 이규(김상경)의 계략대로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신치수에게 신이겸의 회초리를 치라는 벌을 내려 치욕을 안긴다. 

하지만 그런 백성의 입장으로 하는 ‘왕 노릇’의 사이다만큼 <왕이 된 남자>에서 좀 더 강화된 부분은 하선과 중전 유소운(이세영)과의 멜로다. 모략에 의해 유소운의 아버지 유호준(이윤건)이 죽을 위기에 몰렸을 때 하선은 그를 구해줬고, 궁에서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버티고 있는 중전에게 조금씩 빠져들었다. 동생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잠행을 나왔다가 우연히 피접을 나온 유소운을 만난 하선은 함께 중양절을 맞은 저잣거리에서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 멜로구도는 약에 중독되어 치료를 받던 진짜 왕 이헌이, 그를 오라비라 착각한 하선의 동생에 의해 풀려나 저잣거리로 나오고 두 사람이 마주하는 장면을 통해 팽팽한 대결구도로 바뀌었다. 유소운의 손을 잡고 있는 하선을 보는 이헌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며 향후 하선이 맞게 될 고난을 예고했다. 

결국 이 장면은 멜로구도가 향후 하선과 이헌이 벌이게 될 ‘왕좌의 게임’을 더 치열하게 만들 거라는 걸 예고하는 게 아닐까. 왕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유소운이 처한 비극을 그냥 두고 보기 어렵게 된 하선의 결단과 행동이 이어질 거라는 점이다. 실제로 예고편에서 살짝 보여진 궁 밖으로 내쳐진 하선과 궁으로 돌아와 유소운과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 하는 이헌, 그래서 다시 궁으로 돌아가겠다 외치는 하선의 모습은 향후 이 사극의 전개가 그저 달달한 멜로로만 가지 않을 거라는 걸 보여줬다. 

어차피 ‘광해’라는 실존 인물의 딱지조차 떼어버린 리메이크 작이다. 그러니 역사의 사실적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좀 더 과감한 하선과 이헌의 대결을 그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이미 하선과 유소운의 애틋한 관계가 깨지지 않길 바라는 시청자들은 하선이 왕좌를 차지하고 멜로는 물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모습을 보길 기대하고 있다. 과연 <왕이 된 남자>는 원작과는 다른 과감한 이야기로 나갈 수 있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사진:tvN)


Posted by 더키앙

‘왕이 된 남자’는 여진구에게 제대로 연기의 판을 깔아줬다

영화 <광해>로 연기력 확장을 입증했던 이병헌을 보는 듯하다. tvN 월화드라마 <왕이 된 남자>의 여진구 이야기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이 그저 우연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왕이 된 남자>가 가진 이야기가 여진구라는 연기자의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특별한 힘을 발휘하고 있어서다. 그건 바로 여진구가 연기하는 하선이라는 광대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하선(여진구)은 가면을 쓰고 당대의 시국을 연기로 풍자하곤 하던 광대다. 얼굴이 왕 이헌(여진구)과 같다는 이유로 암살위협을 받는 왕 대신 왕좌에 앉아 왕을 연기한다. 하선을 그 자리에 앉힌 건, 점점 잔혹해지고 정신을 놓고 있는 이헌에게 그래도 충성하던 이규(김상경)다. 이규는 이헌을 모처에 옮겨 놓고 마약에 중독되고 환청에 시달리는 그를 회복시키려 한다. 

하선과 이헌은 그 성격이 극과 극이다. 이헌은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을 따르던 경인대군마저 죽게 만들고, 그것은 내내 그의 악몽으로 되돌아온다. 심지어 장인마저 죽이라 명하는 포악함을 보이지만, 그 포악함은 그의 유약함이 만들어내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하지만 하선은 이헌과는 달리 죽을 지라도 ‘인간다운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건 어쩌면 광대라는 직업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광대는 결국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이입을 통해 연기를 하는 이가 아닌가. 

물론 1인2역은 같은 연기자가 얼마나 상반된 모습을 연기해내는가를 통해 그 연기공력을 드러내게 해주는 장치일 수 있다. 하지만 <왕이 된 남자>에서 여진구의 연기가 남다르게 보이는 건 단지 1인2역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하선이라는 광대의 직업적 특성이 여진구의 연기에 대한 몰입을 더 극대화시켜주고 있어서다. 

영화 <광해>에서 이병헌이 그랬듯이, <왕이 된 남자>에서 여진구는 왕을 연기하다 점점 왕이 되어가는 광대를 연기한다. 그것은 연기자가 어떤 역할에 빠져들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궁에 들어와 이헌의 역할을 연기하던 하선은 차츰 왕이라는 자리가 만들어내는 역할들을 조금씩 해나간다. 자신의 누이동생 달래(신수연)가 신치수(권해효)의 아들 신이겸(최규진)에게 욕보였다는 사실을 알고 생겨난 복수심은 그 몰입을 더 강화시킨다. 또 궁에서 만난 중전(이세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를 지키려는 행보 역시 하선을 그저 왕 연기에서 점점 왕처럼 몰입시키는 힘을 부여한다.

즉 <왕이 된 남자>는 폭군을 대신해 왕이 된 광대가 궁에 적응해가며 진짜 왕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진구라는 연기자(광대)가 왕 역할에 조금씩 빙의되어가며 나중에는 온전한 왕에 몰입하는 그 과정을 담고 있기도 하다. 중전을 구할 증좌를 갖고도 그를 구하기보다는 대비를 몰아낼 생각을 하는 이규에게 하선이 “비단옷 차려입고 권세를 누리면 뭐합니까? 짐승만도 못한 생각만 가득 차 있는데! 사람다운 생각은 조금도 못하는데!”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하선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자신이 죽게 한 경인대군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린다며 제 귀를 찔러버린 이헌을 보고 그가 다시 왕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이규는 결국 하선을 벼랑 끝으로 데려가 칼을 꽂고 “광대 하선은 죽었다. 이제 네가 이 나라의 임금이다.”라고 선언한다. 이제 온전히 하선이 왕의 위치에 서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서는 장면이다. 연기의 관점으로 보면 여진구라는 배우가 한 걸음 더 왕 역할 깊숙이 들어가는 장면이기도 하다.

여진구는 <해를 품은 달>, <뿌리깊은 나무>, <무사 백동수> 등에서 아역으로 등장해 주목받은 배우다. 사극과의 인연은 그래서 그 후에도 <대박>이나 영화 <대립군> 같은 작품으로 이어진 바 있다. 하지만 아역이 성인역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모든 연기자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성인 역할을 하며 출연했던 드라마들에서 여진구는 도전적이었지만 그만한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런 그에게 <왕이 된 남자>는 확실한 한 판 무대를 열어주고 있다. 잘하면 살판이고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남사당패 광대들의 대사들이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연기의 절절함 또한 그만한 진정성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렇게 깔린 판 위에서 광대가 왕이 되는 신명 나는 한 판 연기의 세계 속으로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하고 있다.(사진:tvN)



Posted by 더키앙

지난 정권의 비선실세, ‘왕이 된 남자’가 새롭게 보이네

“이놈! 제대로 놀지 못하겠느냐?” 폭군 이헌(여진구)이 내리는 불호령에 광대 하선(여진구)은 마치 진짜 왕이 된 듯한 목소리로 “이놈! 제대로 놀지 못하겠느냐?”라고 똑같이 외친다. 그 순간 이헌은 광기와 희열이 교차하는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거울을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똑같은 얼굴을 한 두 사람. 하지만 둘의 표정은 사뭇 다르다. 하나는 웃고 있지만 다른 하나는 당혹스런 얼굴이다. 

이 한 장면은 tvN 새 월화드라마 <왕이 된 남자>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를 압축해 보여준다. 자객의 습격으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 용상을 지키고 있는 이헌은 도승지 이규(김상경)에게 자신이 살 방도를 찾아 달라 요청하고, 이규는 우연히 마주하게 된 하선을 통해 그 방도를 찾는다. 이헌의 대역으로 하선을 세우는 것.

저잣거리에서 탈을 쓰고 왕을 풍자하며 한바탕 광대놀음을 하며 살아온 하선은 진짜 왕의 대역을 맡게 됨으로써 일생일대의 광대놀음을 하게 됐다. 어차피 살 판 아니면 죽을 판이라며 위험할 수 있는 나라님을 갖고 놀기도 했던 하선이었다. 만석꾼 김진사(유형관)네 집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됐던 것도 나라님을 갖고 놀았다는 사실이 빌미를 줘서다. 

하지만 하선은 그렇게 쫓겨나면서도 다시 담장을 넘어 들어가 김진사의 장독을 모두 깨고 보리굴비를 훔쳐 달아날 정도로 자유분방한 인물이다. 이제 어디서도 광대놀음을 할 수 없게 된 그들에게 하선은 차라리 큰 판 한양으로 가자 제안한다. 어차피 인생사 살 판 아니면 죽을 판 아니냐며.

우리에게 <왕이 된 남자>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익숙한 이야기다. 이 리메이크 드라마가 굳이 ‘광해’라는 실제 역사 속 왕의 이름을 지워버린 건, 역사적 사실에 얽매이지 않고 좀 더 자유로운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뜻일 게다. 2012년 개봉해 1200만 관객을 동원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일찌감치 충분히 드라마화 될 수도 있는 작품이었지만, 지난 정권에서는 이 영화가 곱게 보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CJ가 그 박근혜 정권 시절 유독 힘들었던 이유로 이 영화가 지목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지금 <왕이 된 남자>가 다시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건 그래서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비선실세니 꼭두각시니 하는 이야기들이 나왔던 지난 정권은 <왕이 된 남자>의 이야기를 또다시 새롭게 다가오게 만든다. 과연 <왕이 된 남자>는 지난 정권을 지났던 우리의 경험들을 더해 영화와는 또 다른 감흥을 우리에게 전해줄 것인가. 물론 이 왕을 대역한다는 소재 자체가 이미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1인2역을 맡게 된 여진구는 아마도 그의 인생캐릭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 1인2역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작품이 갖고 있는 한바탕 ‘광대놀음’의 이야기는 그에게 연기자로서의 남다른 의미를 전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그의 신명나는 ‘왕 놀음’을 기대하게 하는 건, 지난 정권 동안 블랙리스트로 분류될 정도로 억눌려 오며 표현에 자유롭지 못했던 그 시대의 어둠을 벗어나 이 작품이 맘껏 놀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놈! 제대로 놀지 못하겠느냐?” 왕의 으름장과 거기에 맞춰 제대로 왕이 된 양, 그 말을 외치는 광대의 그 장면은 이런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의미심장하기 이를 데 없다. 권력과 예술 사이에 기묘한 긴장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왕과 광대를 마음대로 바꿔 한 바탕 놀아보는 이 드라마의 거침없는 행보와 연기인생의 새 전환점을 맞게 될 여진구를 기대한다.(사진:tvN)

Posted by 더키앙

<장영실>, 어째서 이 좋은 소재가 이렇게 그려질까

 

KBS 주말사극 <장영실>은 충분히 이 시대에도 의미가 있는 소재다. 장영실(송일국)이란 청춘이 가진 처지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천출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재능이 있어도 출사하지 못하는 처지가 그렇다. 결국 조선을 떠나겠다고까지 마음먹었던 장영실이 아니던가.

 


'장영실(사진출처:KBS)'

그런데 초반 <장영실>의 이런 흥미로운 설정은 어찌 된 일인지 점점 매력이 떨어져간다. 그 흙수저로 태어난 장영실에 대한 공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를 알아봐주는 세종(김상경)이나 마치 형처럼 그를 허물없이 대해주고 밀어주는 이천(김도현) 같은 인물들이 일찌감치 그를 일으켜 세워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지어 소현옹주(박선영)와 장영실은 신분을 뛰어넘어 연정을 가진 관계로까지 그려진다. 이건 역사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멜로 설정까지 집어넣는 건 흙수저로 태어나 가진 게 없었던 장영실을 사실상 모든 걸 다 가진 인물로 느껴지게 만든다.

 

장영실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이야기는 그가 명나라에 가서 주태강(임동진)의 집에 있는 전설의 물시계 수운의상대를 재현하는 데에도 등장한다. 그는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실제 본적이 없는 수운의상대를 척척 재현해낸다. 그런 장영실을 주태강은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본다. 장영실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태강은 심지어 조선의 과학이 명나라를 앞지르고 있다는 얘기까지 꺼내놓는다. 제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이런 식의 극단적인 찬양은 <장영실>이라는 사극에 마치 군대에서 만드는 정훈 영상물 같은 느낌을 덧씌운다. <장영실>은 왜 이 특별한 인물에 대한 현재적인 재해석은 보이지 않고 찬양만 가득할까.

 

이와 상반된 느낌을 주는 작품은 SBS <육룡이 나르샤>.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몽주(김의성)와 이방원(유아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드라마는 이 인물들을 현재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정몽주가 그래도 고려를 지키려는 시대에 역행하는 인물처럼 그려진다면 이방원은 신조선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모두가 못하는 것들을 실행해 옮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이방원을 완벽한 인물로 그리는 건 아니지만 확연히 현재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극이 과거가 아닌 현재를 다룬다는 건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즉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하지만 그 역사를 굳이 지금 현재 들춰본다는 건 그 관점이 현재에 맞춰져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면 <장영실>은 어떨까.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이 사극은 모든 걸 다 갖춘 과학자로 그려낸다. 그는 천문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뭐든 척척 만들어내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천출이라고 해도 청춘의 그림자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왜 이토록 현재와 호응하지 못하는 걸까.

 

<장영실>이라는 사극이 그 좋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창조 경제같은 구호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장영실>은 어째서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 같은 신선한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심지어 옹주와 사랑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까지 집어넣어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장영실처럼 노력하면 지금의 청춘들도 출사해 성공할 수 있다고? 글쎄. 거기에 호응하는 현재의 청춘들이 몇이나 될까.

Posted by 더키앙

<살인의뢰>, 범죄물에 담긴 사형제에 대한 질문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마에 의해 희생되고 그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면 그 무너지는 억장과 고통을 과연 시간이 치유해줄 수 있을까. 심지어 그 살인마가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세상을 비웃으며 버젓이 교도소 안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면? 아마도 당사자만이 그 고통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인의뢰>는 이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담은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 <살인의뢰>

여기 출연한 김상경은 과거 <살인의 추억>의 그 형사를 떠올리게 하는 어딘지 탱자 탱자 형사 일을 하는 인물처럼 등장한다.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지만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 다만 살인범의 단서가 아니면 살인범 비슷하게 생긴 놈이라도 잡아오라고 쪼아대는 반장 때문에 등 떠밀려 현장을 하릴없이 도는 그런 인사다. 그런데 이런 한가로움은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남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이 그의 안온한 삶은 송두리째 깨져버린다.

 

살인을 즐기는 초유의 연쇄살인마의 잔인함과 그를 쫓는 형사들의 이야기는 <살인의뢰>가 전형적인 범죄물이라는 걸 말해준다. 실제로 영화는 그 범죄물의 전개양상인 격투와 추격 같은 액션들이 전체 내용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 살벌할 수밖에 없는 범죄물이 사형제에 대한 담론을 담아내고, 그간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피해자들의 고통을 강도 높게 다루면서 이야기의 정서는 조금씩 변해간다.

 

처음에는 피와 살이 튀는 잔인한 살육과 보복의 이야기처럼 다가오지만 차츰 그 연쇄살인마를 죽이려고 하는 이들의 간절한 심정에 동조하게 되면서 영화는 먹먹하게 보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러면서 그 먹먹함은 자연스럽게 현재 우리네 사형제가 갖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무엇 때문에 살인마들은 저렇게 보호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그것도 아주 잘) 피해자들은 이토록 깊은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피폐해져야만 하는 걸까.

 

우리네 영화판에서 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물들은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와 식상해진 게 사실이다. <살인의 추억>이 어떤 깊이 있는 울림을 가진 범죄물의 시작을 보여줬고 <추격자>가 장르적으로 성공한 이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싸이코패스들이 등장하는 범죄물들을 접했다. 그 범죄물들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기도 했던 흉흉한 연쇄살인사건과 맞물려 대중들에게는 부채감과 분노를 풀어내는 일종의 대체물처럼 흥행을 가능하게 했다. <아저씨> 같은 영화는 범죄물에 이제 판타지적 요소를 덧붙여 현실에 부재한 정의를 대리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이 쏟아진 범죄물들의 리스트에 <살인의뢰>가 올라간다는 건 결코 좋은 시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의뢰>는 기존의 범죄물이 주는 분노와 카타르시스적인 효과 이상의 새로운 정서를 제공해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피가 튀는 끔찍한 범죄물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지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극화된 면이 있지만 <살인의뢰>는 범죄물 그 이상의 진지한 질문을 담아낸다. 사형제 폐지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인권적인 선택처럼 보이는 이야기는 사실 이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면 전혀 피해자의 인권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해준다. 이런 문제제기를 어떤 주의 주장이 아니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정서적인 틀로 전해주고 있다는 것. 게다가 범죄물이 가진 장르적 재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건넨다는 건 이 영화가 가진 중요한 성취로 여겨진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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