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을 혹은 여자들만을 위한 드라마

김수현이 그려내는 불륜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는 그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불륜이라면 당연히 여자와 함께 남자가 있어야 하는 법. ‘내 남자의 여자’란 제목은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라는 관계를 설정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제목에 방점이 찍히는 부분이 ‘남자’와 ‘여자’, 양쪽이 아니라는 점이다. 강조되는 부분은 궁극적인 지칭대상인 ‘여자’에 있다. ‘남자’라는 단어 역시 ‘내’라는 여자에 의해 한정되어 있는 존재. 그러니 이 제목에서 ‘남자’는 그냥 가운데 가만히 멈춰선, 혹은 양쪽에 포획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왜 홍준표는 침묵하고 있을까
제목처럼 이 드라마에서 남자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홍준표(김상중)가 남자일까. 교수에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부모의 돈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며, 게다가 천사표 부인까지 있는 홍준표는 과연 이 드라마에서 남자로 그려지고 있을까. 이화영(김희애)과 김은수(하유미)가 마치 입에 기관총이라도 단 듯 거침없이 속내에 잔뜩 품은 총알을 쏘아대고 있을 때, 홍준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가정을 쥐고 또 한 손에는 욕망을 쥔 채 어느 한 쪽도 잡지 못하고, 또 버리지도 못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가 이화영과의 불륜을 저지른 것에 무언가 그만의 이유가 있음직도 한데, 그와 이화영이 밝히고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의도하지 않았다”와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꽃처럼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을 뜻하니, 그것은 운명적인 것이었을까. 그런데 잘 보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 드라마는 운명이나 금지된 욕망에 대해 논하려는 의도가 없다. 머리채를 잡고 프라이팬으로 머리통을 내려치며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는 상황이 그걸 말해준다. 이 드라마는 이화영이 대사 속에서 말한 것처럼 불륜이라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가보는”,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가의 화학반응을 보는 쪽을 택했다.

남자라는 족속은 다 그렇다(?)
그런데 김수현의 직설화법 속에서 왜 유독 홍준표는 그다지도 입이 무거운 걸까. 혹 이유가 없는 건 아닐까. 그저 남자라면 다 그런 족속이라고 드라마가 말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등장하는 남자들의 면면을 볼 때 그런 혐의를 벗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트렌디하기 이를 데 없는 불륜전과자(?), 허달삼(김병세)은 남자란 존재가 ‘다 그렇고 그런 수컷’이라고 말한다. 그의 대사를 보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 놈의 수컷 기질은 어쩔 수 없는 철없는 남자라는 존재가 그려진다. 불륜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는 지수(배종옥) 앞에서 오히려 더 열불을 내고 있는 은수에게 “당신도 처음이 제일 힘들었지?”라고 묻는 남자다.

불륜 사실이 밝혀지고 집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홍준표를 데리고 가 코치랍시고 하는 대사들 속에도 남자는 없고 수컷만 존재한다. “무조건 빌어라. 빈다고 해결되지 않지만 그렇게 지나간다”는 게 허달삼이 코치한 내용이다. 중요한 건 이런 허달삼의 이야기를 홍준표 역시 듣고만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역시, “그게 통할까요?”라고 묻고, “차라리 한 일주일 숨었다가 오라”는 허달삼의 말에, “저도 그러고 싶어요.”라고 맞장구를 치는 캐릭터다. 여기서 그려지는 남자의 모습은 가정이 파탄 날 상황에서도 남자들은 저 혼자 도망칠 궁리만 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저질이고 철없으며 책임회피만 하면서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남자들의 모습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준표의 아버지인 홍회장(최정훈)이 가정부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 “남자란 족속들은 나이가 드나 젊으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 장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남자가 아닌 수컷이다. 왜 이다지도 남자를 극단적인 모습으로 그려 가는 것일까. 이것은 그 남자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과 만나면서 드라마 속에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그것은 이 불륜 게임에서 남자를 소외시키고 여자들만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낸다. “남자들은 어쩔 수 없어. 그러니 우리가 해결해야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자들을 혹은 여자들만을 위한 드라마
김희애라는 팜므파탈이 탄생하는 것은 바로 이 여자들의 대결구도를 흥미진진하게 이끌기 위함이다. 적이 도무지 이가 들어가지 않는 인물이어야 대결은 더 극적으로 전개된다. 이 대결구도는 윤리적으로 말하면 선악구도가 너무나 명징해서 오히려 식상해진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주로 여자와 남자의 대결이었던 과거의 선악구도와 달리 여자와 여자가 맞붙게 되자 이야기는 참신해진다. ‘내 남자의 여자’라는 관계 속에서 화영과 지수는 서로 자리싸움을 시작한다. ‘내 남자의 여자’는 화영의 관점에서 보면 지수가 되고, 지수의 관점에서 보면 화영이 된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인물, 남자는 홍준표이고 그는 침묵을 통해 드라마 전체가 말해주는 ‘남자라는 속물’을 묵인하고 있는 셈이다.

‘내 남자의 여자’는 여자들을 위한 드라마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 드라마가 불륜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갖게되는 최대의 강점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은수가 지수를 위해 화영을 찾아가 ‘박살을 내버리는’ 장면에서 “저런 언니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이러한 여자들만의 구도 속에서 남자 캐릭터가 일방적으로 그려져 상황 자체에서 배제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단 한 명 그렇게 그려지지 않는 유일한 남자인 지수와 은수의 친정아버지인 김용덕(송재호)이란 캐릭터가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적어도 아버지는 남자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다.

‘히트’의 멜로 vs ‘내 남자의 여자’의 불륜

월화 드라마 대전에 새롭게 등장한 김수현 작가의 ‘내 남자의 여자’ 바람이 거세다. ‘주몽’의 후속으로 부동의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으로만 생각됐던 ‘히트’가 계속 부진의 늪을 헤매고 있는 사이, 단 4회만에 ‘내 남자의 여자’가 파죽지세로 거의 ‘히트’를 따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드라마는 단순한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단지 월화에 방영된다는 점에서 그 시청률이 비교될 뿐이다. 그런데 이 ‘월화의 경쟁’은 지금 우리나라 드라마가 겪고 있는 성장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장 고전적인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불륜’은 여전히 되지만, 변화의 바람 속에서 시도되었으나 지나치게 ‘멜로’가 강조된 전문직 드라마, 범죄수사물의 경우는 특히 더 안 된다는 것이다.

히트의 디테일 부족, 미드 때문이 아니다
물론 ‘외과의사 봉달희’ 역시 멜로가 있는 전문직 드라마로서 성공한 드라마지만 ‘히트’는 그것과는 양상이 다르다. 먼저 다른 것은 디테일이다. ‘외과의사 봉달희’ 역시 설정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극적 상황이 전개되었지만 그래도 그 병원 장면이나 스토리에 있어서는 리얼한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히트’의 경우는 스토리 자체가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다.

관습적인 액션들이 몇 번 오갈 뿐, ‘전문직 드라마’라면 보여줘야 할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전문적인 디테일’이 부족하다. 처음 드라마가 시작했을 때는 이 디테일 부족이 단지 미국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가진 선입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8회가 끝난 지금 이 문제는 단순한 비교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홍콩 시퀀스에서 굳이 차수경(고현정)과 김재윤(하정우)을 크루즈에 태워 멜로 라인을 만들어야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그렇게 긴박한 상황에 멜로의 등장은 드라마 흐름의 맥을 끊어버리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에는 홍콩해외로케로 올라간 시청자들의 기대심리가 멜로로 인해 급격한 실망감으로 이어졌다는 점도 한몫을 차지한다. ‘도대체 홍콩에 가서 뭘 했다는 말인가’하는 비판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멜로만 있는 전문직 드라마가 문제
크루즈에서 내려서 이어지는 사건의 해결(장형사를 구하는 것)에 있어서 너무나 손쉽게 처리한 점도 이 드라마가 과연 전문직 드라마를 표방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만드는 요인이다. 찰리박(김병세)을 납치해서 장형사(최일하)와 맞바꾸는 장면은 그간 계속 어렵게 진행되어온 상황의 긴박감을 김빠지게 만들었다. 그 맥 빠진 자리를 채우는 건 장형사와 그 딸의 눈물겨운 상봉이다. 그러니 ‘히트’에서 무언가 긴박하고, 호기심과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전문직 드라마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의 실망은 시청률 부진으로 이어진다.

‘히트’의 시청자게시판은 이 ‘멜로’에 대한 공방이 한창이다. ‘히트의 멜로’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애초부터 기획의도에 이 드라마는 ‘사랑이야기’라고 밝혀진 점을 들어 여타의 미국드라마와 비교하지 말자는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기획의도를 보면 또한 ‘이 드라마는 전문직 드라마’라는 문구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멜로 있는 전문직 드라마’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멜로만 있는 전문직 드라마’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김수현의 불륜, 다른 건 자극의 강도일 뿐
반면 이 시간대에 새롭게 등장한 김수현의 ‘내 남자의 여자’는 그 자극적인 설정과 장면 연출로 여전히 ‘불륜 코드’는 된다는 걸 보여준다. 여기에 ‘김수현의 불륜드라마’는 무언가 다를 거라는 기대감이 작용했다. 그런데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김수현의 불륜드라마가 다르다면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처음 김수현이라는 ‘언어의 마술사’가 하는 불륜드라마라고 해서 그것은 ‘불륜을 통한 인간욕망의 탐구’ 같은 깊이를 보여줄 것으로 생각됐다. 하지만 현 4회까지를 보면 그런 것은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깊이는 없고 겉도는 자극만 가득하다. 저 액션을 표방한 ‘히트’보다도 더 액션(?)같은 주먹다짐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김희애의 소름끼치는 연기가 없었다면 이 드라마는 ‘사랑과 전쟁’과 같은 불륜드라마와 그닥 다를 것이 없다.

김수현이라서 달랐던 것은 자극의 강도였지 깊이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화영 역의 김희애는 처음부터 노출신이 과도하게 등장했고, 홍준표(김상중)와의 애정행각은 ‘이러다 베드신 나오겠다’는 기대반 우려반의 시청자들의 반응을 끌어냈다. 욕망은 육체적인 것과 함께 정신적인 것을 동시에 포함하는데, 홍준표와 화영의 불륜에서는 정신적인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욕망이 아니라 욕정이다.

욕망은 보이지 않고 욕정만 보인다
물론 적당한 선에서 화영과 홍준표의 불타는 욕정의 이유가 밝혀지면서 욕망으로의 전이를 꾀할 테지만 그것은 자극 끝에 달아놓는 변명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생활도 없고 삶도 없고 욕정만 가득한 이 ‘부족할 것 없는 사람들의 애정행각’을 왜 시청자들이 봐야하는가 하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자극적인 설정과 욕설과 주먹다짐이 난무하는, 액션보다 더 강력한 액션에 대한 호기심이다.

궁금한 것은 김수현이라는 부족할 것 없는 ‘언어의 마술사’가 왜 그 뛰어난 재능을 이렇게 쓰고 있느냐는 것이다. 불륜에도 격이 있다. 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같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불륜 속에는 육체적인 욕망을 뛰어넘는 그 무엇(셀레임 같은)이 있다. 불륜,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자기성찰 없이 끝없는 파국을 통한 자극으로만 치닫는다면 이 드라마의 말미에서 ‘얻은 것은 시청률이요, 잃은 것은 작가다’라는 말이 나올 지도 모른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월화 드라마 경쟁에서 보여지는 ‘멜로는 안되도 불륜은 되는’ 상황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두 드라마의 완성도가 절반에만 미친다는 걸 말해준다. ‘히트’가 전문직 드라마를 성공시키지 못하고 멜로 드라마로 가고 있는 반면, ‘내 남자의 여자’는 불륜을 통한 인간욕망에 대한 탐구를 하지 못하고 그저 자극적인 불륜드라마로 가고 있다. 이 두 드라마가 이렇게 된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시청률 때문이다. 이것이 자칫 매니아 드라마가 우려되는 전문직 드라마에 적절한 멜로를 섞은 ‘히트’가 오히려 고전하는 이유이며, 불륜드라마로 시청률에 불을 붙인 ‘내 남자의 여자’가 자극적인 설정으로만 치닫는 이유이다. ‘멜로도 되고, 불륜도 되는’ 완성도 높은 드라마는 나오기 힘든 걸까.

김수현이 ‘내 남자의 여자’를 가지고 또 한번 시청자들의 가슴에 불을 확 질렀다. 들고 온 기름은 화력 좋기로 소문난 ‘불륜’이다. 기름 위에 얹어진 장작들도 여느 장작들과는 달랐다. 그저 불륜이란 소재에 기대 평이한 설정과 연기를 해 이제 식상해져버린 기존 불륜에 넣어진 장작들보다 몇 배는 더 잘 타들어가는 김희애, 배종옥, 하유미라는‘명품 장작들’이다. 그들의 혼을 불사르는 듯한 연기는 김수현이 내지르는 직설화법이란 기름을 만나 활활 타올랐다.

불륜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이제 불륜 좀 그만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하면 첫 방송을 끝낸 이 드라마의 반응은 남다르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자칫 불륜에 집중될 수 있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 그 장본인은 김수현이란 작가와 작품 속에서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준 김희애라는 연기자다. 이 조합이 만들어내는 불륜드라마를 통해 역시 드라마는 소재보다 중요한 것이 완성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륜 드라마도 완성도 있게 만들어지면 인간 본질의 사랑 이야기로 발전하는 것인가.

‘내 남자의 여자’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남자에 초점이 맞춰진 드라마가 아니다. ‘내 남자의’는 수식어고 결국 그 뒤에 붙는 ‘여자’가 중심이 된다. 그래서일까. 드라마는 아예 내놓고 여성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시작부터 중반까지 김지수(배종옥)의 일상을 따라가며 계속되는 대사들은 여성들의 수다에 가까우면서도 대단히 연극적이다. 일상적인 사설은 지겨울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그를 통해 관계는 ‘보여지기보다는 설명’된다. 드라마라는 영상언어가 있는데 왜 이렇게 대사중심의 극을 이끌어가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하게 된다. 혹 김수현이란 작가가 PD의 몫을 빼앗아간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그 목적은 더 치밀한 데 있다는 걸 알게된다. 평온한 가족의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인물, 이화영(김희애)이 그 장소에 오기 전까지 거의 노출된 몸을 보여주었던 것은 그녀가 앞으로 불붙게 될 극적 순간을 예고했던 것이고, 유난히 천사표이자 세상물정 모르는 김지수가 그녀의 보호자격(적어도 불륜에 관해서는)인 김은수(하유미)와 너스레를 떨며 명랑한 하루를 보내는 장면 역시 그 순간의 폭발을 위한 장치였다. 물론 연극적인 대사 중심의 극 전개 역시 후에 벌어질 시각적 자극의 극대화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보아야한다.

김수현이란 작가는 소위 작가들이 말하는 ‘눌러주기’의 대가이다. 한참 겉으로 도는 관계를 평이하게 눌러주다가, 어느 한 순간에 폭발시켜주는 것. 그것이 ‘내 남자의 여자’가 시청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게 만든 요인이다. 이 정도 되면 김수현은 ‘언어의 마술사’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장인임을 증명한 셈이다. 게다가 김수현은 ‘감춰지는 불륜’이 아닌 ‘드러내는 불륜’을 선택했다. 이 차이는 분명하다. 전자는 감춰진 게 드러나는 순간 맥이 빠져버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륜드라마 공식 속의 불륜이고, 후자는 드러낼수록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는 불륜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김희애라는 연기자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내는 이화영이란 캐릭터에 있다. 이 캐릭터는 불륜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의 잘못된 관계를 되돌리려 하기보다는 자포자기하면서 파멸을 향한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즉 드러나서 해결되지 않고 드러나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캐릭터란 얘기다. 여기에 맞상대역으로 먼저 등장하는 김은수 역의 하유미도 만만찮은 연기력을 과시한다. 이 팽팽한 대결구도 앞에서 더 몸서리처지는 것은 ‘지금 이건 맛보기에 불과해’라고 말하는 김수현 작가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불륜드라마라고 무엇이 나쁠까. 불륜은 사실 저 드라마(drama)의 구조가 나왔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연극 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히 내려오는 전통적인 소재다. 그만큼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담기에 용이하다는 말이다. 사회가 가진 가치개념과 인간의 욕망이 부딪치는 이 소재는 욕망을 가지고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늘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또 불륜이냐”는 목소리에는 우리 드라마가 다루었던 소재의 폭이 그만큼 좁다는 것에 대한 비판과 또한 같은 불륜이라도 너무 표피적인 자극으로만 다루었던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다.

김수현이 만든 불륜드라마는 일단 무언가 다를 것 같은 예감을 준다. 작가와 연기자들에게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불륜을 통한 인간의 문제를 천착하지 않고 자극으로만 치닫게 된다면 또다시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또 불륜이냐”는 말보다는 “불륜도 제대로 다루면 다르다”는 의견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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