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이 만들어낸 막장, 왜 중견들이 쓰고 있나

'신기생뎐'(사진출처:SBS)

임성한 작가의 '신기생뎐'은 막장의 차원을 넘어섰다. 그래도 '막장드라마'라고 하면 어떤 논리적인 흐름을 전제로 하여 거기서 벗어난 것을 말할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신기생뎐'에는 어떤 논리적인 흐름 자체가 없다. 갑작스럽게 귀신이 등장하고, 빙의가 벌어지고, 심지어 눈에서 레이저광선을 쏘는 이 드라마는 드라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TV를 켜면 우리의 눈에 노출되는 드라마는 최소한 공감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엽기적인 취향을 왜 우리가 봐야 하는가.

놀라운 건 이 작가의 회당 원고료가 보통 3,4천만 원에 이른다는 점이다. 이건 뭔가 열심히 작품을 쓰는 젊은 작가들에게는 저주에 가까운 얘기다. '작품? 써봐야 돈이 되지 않는다. 시청률을 뽑아낼 수 있는 걸 써라.' 마치 이렇게 얘기하는 것만 같다. 개연성을 공부하고, 대중들과의 공감과 리얼리티를 고민하는 젊은 작가들이 도대체 뭘 보고 배울 것인가.

사실 중견작가의 문제는 임성한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권력화 되어 있는 스타 중견작가들은 현재 그 존재 자체가 문제거리다. 임성한 작가를 비롯해 김수현, 문영남 같은 이른바 시청률 제조기 중견작가들은 자신들이 받아가는 고료만으로도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액의 원고료는 결국 제작진 누군가의 희생으로 메워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을 써낸다면야 그나마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중견들이 그만한 가치의 작품을 써내고 있을까.

김수현 작가는 누구나 그 필력을 인정하는 작가지만, 그래서 작품을 가지고 가타부타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그 역시 껍데기를 벗겨내면 늘 비슷한 이야기의 도돌이표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시대적인 문제들을 하나 정도씩 꼭 끼워 넣기 때문에 그것이 현재적인 의미를 담보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그 실체를 언뜻 보여주었다. 동성애 문제를 집어넣었지만(물론 그 문제가 가치 없다는 건 아니다), 그것이 지금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대변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젊은이들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청년 실업이 횡행하는 시대, 인생은 과연 그렇게 아름다운가. 아니 그렇게 아름답다고 섣불리 긍정해도 되는가.

그래도 김수현 작가는 작품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문영남 작가나 임성한 작가는 작품을 두고 얘기하기가 꺼려진다. 물론 문영남 작가는 나름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전개방식에 있어서 다분히 시청률에 경도된 자극을 만들어낸다는 혐의는 벗을 수 없다. 본래 정극을 제대로 써왔던 문영남 작가는 왜 중견에 이르러 이런 변신을 하게 되었을까. 결국 그 끝에서 발견하는 건 시청률이다. 임성한 작가가 개연성이 전혀 없는 드라마를 써도 작가 선생님으로 떠받들어지는 것은 그 놈의 시청률이 있기 때문이다.

정하연 작가는 본래 문제의식이 투철하고 작품에 있어서도 말 그대로 문학적인 향기가 묻어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달콤한 인생'은 중견작가로서의 무게감을 드러낸 작품이었다. 하지만 '욕망의 불꽃'은 다르다. 물론 개연성은 어느 정도 담보되어 있지만, 그 흐름은 다분히 자극적인 코드를 만들어내는데 있었다는 심증을 버릴 수 없다. 그만큼 시청률은 무서운 것이 되었다. 누군가는 같은 중견으로 몇 천 만원의 회당 원고료를 가져가는 상황에서 작품만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다.

중견작가들이 그만큼의 원고료를 가져가는 것은 그들이 중견으로서 그만한 책임과 역할을 다할 때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중견들은 젊은 작가들보다도 더 시청률에 목매는 드라마를 써대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중견작가들이 더 많다. 하지만 방송사에 의해 모셔지는 스타급 중견작가들은 대부분 그렇다. 창피한 일이 아닌가. 젊은 작가들의 패기 넘치는 등용문은 이미 단편드라마들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점점 좁아지고 있고, 중견들은 방송사 입맛에 맞는 시청률이나 뽑아내는 드라마를 쓰고 있다. 이래서 어디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여러 모로 중견작가라면 중견에 걸 맞는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한 시기다.

작가가 너무 많은 말을 하게 될 때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가. 이 질문은 모호하다. 작금의 현실적인 삶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묻는 것인지, 아니면 조금은 관념적이지만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인가를 묻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둘 중 어느 질문에 대한 답변일까.

매번 극중인물이 넘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엔딩이 의도하는 바는 명백하다. 삶은 늘 그렇게 우연찮게 넘어지고 다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는 것. 인생은 그래서 아름답다는 것. 하지만 매회 누군가가 넘어져야 끝나게 되는 이 ‘꽈당엔딩’은 말 그대로 작위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 엔딩의 의도 역시 50여회를 반복하면서 하나의 강령처럼 느껴진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표현이 그저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귀에 대고 계속 해서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는 듯한 강박적인 느낌마저 들게 되는 건 그 때문일 게다.

이 강박적인 느낌은 다시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가 하는 질문의 두 가지 의미로 되돌아간다. 즉 ‘인생은 아름다워’는 저 ‘꽈당엔딩’처럼 이 두 의미의 질문을 하나로 엮는다. 현실적인 삶은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표현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작가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배경이 굳이 비행기로 한 시간 정도는 날아가야 도착할 수 있는 제주도에 그것도 펜션이라는 공간으로 설정된 것에서도 작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물론 작가는 늘 그래왔듯이 어떤 공간 속에서든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의 다양한 부대낌을 그려낼 것이지만, 그 복작대는 삶을 마치 포근히 감싸 안는 제주도의 자연이나, 아무래도 보통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펜션이라는 설렘의 공간은 작가의 의지로 제공된 것이다.

이것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병태(김영철)네 가족들에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바깥으로 돌다가 돌아온 시부(최정훈), 병태와 민재(김해숙)의 재혼가족이라는 상황,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결혼을 못하고 있는 병준(김상중)과 병걸(윤다훈), 재혼한 엄마를 둔 지혜(우희진) 그리고 동성애자인 장손 태섭(송창의). 이들이 엮어가는 이야기들은 꽤 복잡다단하지만 거기에 작가의 의지로 제공된 두 인물이 있어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든다. 바로 병태와 민재다.

모든 힘겨움을 자신 속으로 숨긴 채, 가족들에게는 늘 웃는 얼굴로 그 어려움을 묵묵히 들어주는 병태나, 보다 능동적으로 가족들의 고통을 껴안고 이해해주는 민재는 판타지에 가깝다. 태섭이 커밍아웃을 할 때, 함께 울어주는 병태와 민재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감동한 것은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부모 자식 간의 당위의 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김수현 작가가 의지를 갖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그것이 동성애라 해도 그저 가족으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이다. 도대체 가족이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논쟁의 여지가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태섭과 상우(경수)가 성당에서 언약식을 치르는 것은 상황이 다르다. 이것 역시 (굳이 성당에서 하려는 것) 작가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여기에는 가족 바깥으로 나와 성당이라는 현실적인 실체와 부딪친다는 점이 다르다. 가족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을 공적으로 승인하는 장면을 아직까지 우리네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성당이라는 더 복잡한 실체들과 맞물려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김수현 작가가 보여준 동성애에 대한 시각이나 사회에 대한 열린 태도는 비판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본인의 의지를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담아내고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말하게 하는 방식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강변한다고 해서 인생을 아름답다고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누군가의 주장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색을 통해 의지적인 세계를 화려한 대사를 통해 엮어놓기보다는, 그것이 조금 거칠더라도 그저 담담하고도 리얼하게 상황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눈치 채게 할 수는 없었을까. 작품이건 작품 외적이건 김수현 작가가 좀 더 말을 아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와 '동이', 거장들도 반복된 코드로는 어렵다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왜 20% 시청률에서 머물러 있을까. 과거 작가의 작품들이 거의 모두 국민드라마 반열에 올랐던 것을 생각해보면 '인생은 아름다워'의 시청률 난항은 이례적이다. 주말 저녁에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적할만한 굵직한 타 방송사의 드라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좀체 시청률이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 시작한 '욕망의 불꽃'이 서서히 시청률 시동을 걸면서 '인생은 아름다워'를 위협할 기세다.

한편 이병훈 감독이 연출을 맡고 김이영 작가가 대본을 쓴 '동이' 역시 마찬가지다. 끝없이 추락하더니 결국 새롭게 부상한 '자이언트'에 월화극 1위 자리를 내줬다. 사극의 거장으로서 시청률 보증수표라 불리던 이병훈 감독이 만들어낸 일련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다. 사극이라는 극성이 강한 장르는 보통 관성적인 시청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청률 하락은 단지 수치 하락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도대체 무엇이 이 거장들의 작품에 브레이크를 걸었을까.

먼저 이 두 거장이 주로 다루었던 장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수현 작가는 가족드라마의 거장이고, 이병훈 감독은 사극의 거장이다. 가족드라마와 사극. 이 두 장르는 한때 우리네 드라마의 대명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다. 이 힘은 아직도 여전하지만 최근 들어 그 힘이 급격히 빠지고 있는 중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족드라마라는 틀이 너무 오랫동안 비슷한 코드들, 예를 들면 두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혼사장애 같은 것들을 반복적으로 다뤄왔기 때문에 이제는 식상해졌다는 점이 한몫을 차지한다. 여기에 최근에 여기저기 생겨난 막장에 가까운 통속극들이 가족의 끝없는 해체를 부추기면서 이제 웬만한 자극에는 둔감해진 대중들도 영향이 있다. 무엇보다 가족드라마가 그려내는 가족지상주의의 판타지가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해진 현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인생은 아름답다고 얘기해도 그것이 피부에 잘 와 닿지 않는 시대다.

사극은 '선덕여왕'과 '추노'를 겪으면서(?) 기대치가 한층 높아졌다. 따라서 그 기대에 호응하지 못하는 과거의 방식들로는 달라진 대중들의 입맛을 잡아내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사극이라는 장르는 이제 역사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점점 장르화되는 경향을 띄고 있다. 이 말은 굳이 사극과 현대극 사이의 구분이 그다지 새롭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극을 그렸던 '추노'의 곽정환 감독과 천성일 작가가 현대극으로 '도망자'를 그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은 일반론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인생은 아름다워'나 '동이'라는 작품의 시청률 난항에는 이런 환경적인 요인이 아니라 작품 내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가족드라마는 여러 가족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뒤섞이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하나로 엮어내는 시각이 존재해야 한다. '엄마가 뿔났다'는 가족들의 자잘한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그것을 엄마의 시각으로 담아냈지만 '인생은 아름다워'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흐를 뿐 하나의 구심점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매번 비슷비슷한 자잘함이 가득하지만 어떤 추동력을 만들어내는 도드라진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가장 강한 이야기로 동성애가 소재로 들어 있지만, 이 소재는 오히려 보수적인 시청층에게 반감으로만 작용하고 있다. 동성애를 가족주의의 틀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참신하지만, 그 이야기 하나가 이 작품의 전체 이야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또한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일이 있어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보편적인 주제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작금의 냉혹한 현실에서 수긍할만한 것인가는 의문이다.

'동이'는 스토리의 아이디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패인이다. 경쟁작인 '자이언트'에서 한 회 분량에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은, '동이'의 부족한 사건들과 비교해보면 거의 극과 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연장방영은 더더욱 독이 되었다. 그잖아도 없는 스토리를 더욱 늘려서 보여주게 된 것. 물론 이것은 작가의 역량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작가와 함께 작업했을 이병훈 감독의 책임 또한 피할 수 없다.

가족드라마와 사극이라는 시청률을 보증하는 장르들, 게다가 이름만 들어도 기본 이상을 생각하게 하는 김수현 작가와 이병훈 PD라는 거장의 작품. '인생은 아름다워'와 '동이'는 그만큼 높아진 기대치를 맞춰주지 못함으로서 현재의 지지부진함에 머물게 되었다. 물론 시청률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작품들의 시청률 하락은 작품 내적인 문제들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거장이라도 같은 코드의 반복으로는 안된다. 오를 대로 오른 작금의 대중들의 기대치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으로 모든 걸 투영해 내는 김수현 드라마

"당신 오늘부터 앉아서 싸." 김민재(김해숙)의 딸 양지혜(우희진)가 남편인 수일(이민우)에게 하는 이 말은 작금의 달라진 남녀 관계를 압축해서 설명한다. 수일은 과거라면 데릴사위로 있는 처지에, 차에서 내리는 딸의 문까지 열어줘야 할 정도로 아내인 지혜를 여왕 대접해준다. 물론 투덜대지만 늘 자신의 처지보다는 아내와 아내의 가족을 먼저 돌보는 그 마음에는 어느 정도의 진심도 엿보인다. 덜컥 갖게 된 둘째 아이에 기뻐하는 그지만, 그 아이를 지우려는 아내와, 그걸 반대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그는 아내 편임을 공공연히 드러낼 정도로 애처가다. 그에게서 과거 마초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 사위에 그 장인이라고, 수일의 장인 양병태(김영철)는 딸이 사위에게 앉아서 일을 보라고 했다는 말에 허허 웃는다. 오히려 장모인 김민재는 그런 사위를 안쓰러워 하지만, 양병태는 반 농담을 섞어서 "잔뜩 긴장하며 보기 때문에 (자신은)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준다. 한편 그런 수일을 "네가 남자냐?"고 비아냥대는 병태의 동생 양병걸(윤다훈)은 언뜻 남자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그가 사실은 가족드라마에 늘 있게 마련인 감초 같은 수다쟁이 역할을(주로 여성이 맡게 마련인) 맡고 있다는 점은 역시 이 달라진 남녀 관계를 잘 드러내준다. 무엇보다 이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아버지(최정훈)가 돌아온 탕자(?)가 되어 아내(김용임)의 눈치를 보고, 집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있다가 오줌까지 지리는 장면은 가부장주의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인 양병태가 패밀리 비즈니스로서 펜션을 운영하고, 그 아들인 호섭(이상윤)이 그 일을 돕는 모습은 취업이 어려워진 두 세대(고령세대와 젊은 세대)의 새로운 대안처럼 그려진다. 집 밖으로 치열해진 취업 전쟁에서 이제 남자들은 집 안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할 일을 찾아낸 것 같은 뉘앙스가 거기서 느껴진다. 이 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병태의 동생 양병준(김상중)은 리조트 상무로 지내지만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고, 병태의 아들 양태섭(송창의)은 내과의사지만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동성애자다. 물론 동성애는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이 남성성이 사라져가고 있는 가족을 염두에 두면, 이 동성애 또한 그다지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김수현 작가가 그려내는 남자들은 작금의 변화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의 남자들의 모습을 저마다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성 소수자까지도.

한편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의 모습 또한 달라졌다. 젊은 시절 온갖 마음고생을 다해온 할머니는 이제 이 집안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로 우뚝 서 있고, 며느리 김민재는 여전히 부엌을 꿰차고 있지만, 그 부엌은 가사 일만의 공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녀가 요리방송을 하는 모습은 부엌이라는 공간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킨 결과로 보인다. 그녀는 가족에게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지위를 가진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녀의 딸인 양지혜는 자신의 삶을 위해, 생긴 아이를 지울 것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하며, 막내딸인 양초롱(남규리)은 "어장에 물 반 고기 반"이라고 말하며 남자들을 저울질 할 줄 아는 대학생이다.

이처럼 김수현 가족드라마의 가족들은 저마다 변해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대변한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안식년을 주장하는 엄마가 등장하고, 로맨스 그레이를 즐기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처럼, '인생은 아름다워'에 동성애자가 등장하고, 그를 사랑하는 재일교포 채영(유민)이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다양해진 사회 구성원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것은 김수현 가족드라마가 현실의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오래도록 고정적인 팬층을 이어가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 즉 현재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그 가족 구성원들 속으로 담아냄으로써, 그 파격을 보편적인 가족애로 전해주기 때문이다.

도무지 해결될 수 없을 것만 같은 파격적인 갈등도 그 가족애 속에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보인다. 평생을 다른 여자와 살아온 남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 금지옥엽 키워낸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은 사회적인 잣대로 보면 해결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틀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족애로 대변되는 인간애. 그 굳건한 믿음 앞에 김수현 드라마의 가족은 사회 문제를 풀어내는 마력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김수현 가족드라마가 왜 그토록 인기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일단의 답을 제공한다. 우리는 '김수현의 가족'에서 우리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 가족의 갈등과 해결을 통해 큰 위안을 얻게 된다. 우리는 매번 김수현의 드라마가 구성하는 가족을 통해 공감의 틀로 묶여지는 일체감을 경험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넓은 범주의 가족의 경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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