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 묵으쓰면 됐지. 그게 뭐라꼬 여태 얹힜노?” 양우석 ‘변호인’

변호인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양우석 감독의 영화 ‘변호인’은 이 명대사로 잘 알려져 있다. 국가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할 위기에 처한 청년을 구하기 위해 법정에서 그를 변호하는 송우석(송강호) 변호사의 일갈이다.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지만 그럼에도 내게 남은 이 영화의 명장면은 따로 있다. 그건 송우석 변호사가 고시 준비할 때 자주 갔던 국밥집 아지매 최순애(김영애)와의 일화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려고 책까지 다 팔아넘기고 그 집을 찾은 송우석은, 밀린 외상값을 내려고 주머니 속 지폐를 만지작거리다 그만 도망치고 만다. 그 길로 다시 중고서점을 찾아 팔았던 책들을 되찾고 그렇게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어 돌아온다. 

 

그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찾은 국밥집. 송우석이 자신이 그 때 밥 먹고 도망친 놈이라며 외상값이 든 두툼한 봉투를 건네려 하자, 최순애는 만류하며 말한다. “자고로 묵은 빚은 돈 말고 얼굴하고 발로 갚는 기라. 자주 오라꼬. 알긋나? 아이고 마 기분 째진다. 오늘도 공짜다.” 그 말에는 진심이 묻어난다. 빚지고 도망친 이를 나무라기보다는 자신이 차려준 밥 먹고 성공한 이를 기뻐한다. 감복한 송우석이 한번 안아봐도 되냐며 꼭 껴안자, 최순애는 마치 엄마처럼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밥 잘 묵으쓰면 됐지. 그게 뭐라꼬 여태 얹힜노?” 

 

이 국밥 한 그릇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건 값이 아니라, 거기 담긴 마음의 가치다. 호사스런 대접을 받고도 얹히는 마음 없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작은 국밥 하나의 신세도 잊지 않는 마음과, 그걸 그저 돈이 아닌 마음으로 환산하는 마음. 요즘 같은 시대에 더더욱 그리워지는 마음들이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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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이 된 김영애, 마지막까지 보여준 연기투혼

“묵은 빚은 돈으로 갚는 거 아이다. 눈으로 발로 갚는 기다.” 아마도 영화 <변호인>을 봤던 분들이라면 고 김영애가 연기한 국밥집 아줌마의 이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국밥 한 그릇 먹을 돈이 없어 도망쳤던 송 변호사(송강호)가 성공해 돌아와 그 때의 빚을 갚겠다며 돈을 내밀자 아줌마가 했던 그 대사. 

사진출처:영화<변호인>

이제 그렇게 찰진 대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게 됐다. 김영애는 지난 9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고인이 된 그녀의 소식이 특히 놀랍게 다가왔던 건, 최근까지도 우리의 기억 속에 선연히 남은 작품들 때문이다. 유작이 된 KBS <월계수 양복점>에서 우리는 전혀 그녀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알려진 것이지만 끝까지 진통제 투혼을 보이며 펼친 연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김영애가 얼마나 치열한 배우였는가를 각인시켰다. 

김영애만큼 극과 극의 이미지를 연기한 배우가 있을까. <로얄패밀리>나 <황진이> 같은 작품에서 그토록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지만, <변호인>은 물론이고 <닥터스>나 <판도라>, <카트> 같은 작품에서는 서민들의 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다는 소회 때문일까. 그래도 특히 기억이 남는 건 한 그릇의 국밥 같은 따뜻함이 묻어나는 서민적인 모습이다. 

<변호인>이나 <닥터스> 그리고 <판도라> 같은 작품을 보면 김영애라는 배우가 그 작품 전체에 어떤 정서를 만들어냈는지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물론 주인공의 역할은 아니지만 작품의 어떤 색깔을 부여하는 역할. 이를 테면 대사 한 마디로도 느껴지는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줌마의 그 따뜻함이 주는 서민적 정서는 속물이었던 송 변호사가 인권변호사가 되는 계기가 된다. 

<닥터스>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유혜정(박신혜)이 엇나가지 않고 잘 자라 당당한 의사가 되는 그 배경에는 역시 강말순 할머니(김영애)라는 존재가 자리했다. “밥 먹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해? 숨 달려 있으면 먹으면 되는 거지.” 거기서도 이 할머니는 유혜정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준다. <판도라>에서 사지로 아들을 보내며 오열하는 모습이나, <카트>에서 차츰 노동자들과 연대해가는 모습 역시 서민으로서의 아픔과 따뜻함 같은 걸로 기억된다. 

즉 원로배우로서 작품의 뒤편에 늘 서 있었지만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온기나 때로는 차가움마저 작품 전체의 중요한 정서를 담는 역할을 해줬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아마도 같이 작업을 해온 배우들로서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함께 작업했던 제작진들이나 배우들이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는 건 그래서다. 

김영애가 췌장암을 발견한 건 이미 2012년 <해를 품은 달>을 촬영하던 도중이었다고 한다.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책임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9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유작이 된 <월계수 양복점>을 촬영하면서도 고인은 아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고 대사 하나하나를 잊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작품 속에서 그 작품의 정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고인은 아마도 배우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는 모습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모습은 대중들에게 어떤 열정과 따뜻함으로 기억될 것이다. <변호인>에서 보여줬던 영원히 식지 않을 국밥집의 온기처럼.

<닥터스>, 박신혜와 이성경의 변화가 의미하는 것

 

이제 SBS 월화드라마 <닥터스>는 종영을 앞두고 있다. 20%를 넘긴 최고시청률. 최근 지상파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그 능선을 <닥터스>는 어떻게 넘었던 걸까. 흔한 의학드라마처럼 보였지만, 또 달달한 멜로드라마처럼 보였지만 <닥터스>는 여타의 의학드라마와도 또 멜로드라마와도 다른 결을 보여줬다. 그건 관계를 통한 인물의 변화와 성장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닥터스(사진출처:SBS)'

<닥터스>의 여자주인공인 유혜정(박신혜)과 그녀와 대립적 위치에 서 있던 진서우(이성경)의 변화와 성장은 이 드라마의 색다른 주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 때문에 불량하게 살아가던 유혜정은 할머니인 강말순(김영애)과 선생님 홍지홍(김래원)을 만나 좋은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그 좋은 영향에는 친구였던 진서우 또한 일조한 면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선생님 홍지홍과 유혜정이 가까워진 것을 본 진서우는 그 질시가 그녀를 엇나가게 만든다.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유혜정의 비극(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현실과 마주하게 된)은 그녀가 의사가 되게 한 원동력이 된다. 드라마는 좋은 영향뿐만 아니라 나쁜 영향도 어떤 면에서는 그 사람에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게 의사가 된 유혜정은 진서우의 아버지인 진명훈(엄효섭)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되면서 본인도 고통스러워진다. 그런 그녀를 다시 되돌리는 건 다름 아닌 홍지홍의 사랑이다. 홍지홍은 복수가 그녀 자신도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끝내는 건 진서우의 변화다. 늘 대립하는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친구로서의 관계 또한 유지해온 진서우는 유혜정을 통해 아버지의 잘못을 알게 되고 결국 그녀에게 사죄한다. 진서우라는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유혜정 역시 변화하고 성장하게 됐다는 것.

 

사실 이런 화해적인 결말이 조금은 미진함을 남길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봐왔던 많은 드라마들 속에서 악역의 최후나 몰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닥터스>가 본래 드라마를 통해 하려던 이야기는 복수극이 아니다. 그건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영향을 받고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걸 뉘우치면서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극적 갈등이 드라마의 관건이라고 얘기되는 현실에서 이 같은 화해적인 선택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닥터스>는 극으로 치닫는 이야기보다는 그래도 희망적인 화해를 담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그래서 <닥터스>가 얻어낸 것은 특유의 따뜻함이다. 아마도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훔쳤던 건 바로 그 위로와 위안의 느낌이 충분했던 따뜻함이 아닐까.

 

무엇보다 연기자로서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박신혜와 어깨에 힘을 뺌으로써 훨씬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 김래원의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 윤균상과 이성경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의학드라마지만 의술 그 자체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관계의 치유를 보여주었고, 멜로드라마지만 남녀 간의 사랑만큼 인간과 인간의 휴머니즘을 보여준 하명희 작가의 따뜻한 대본의 힘은 힘겨운 현실을 마주한 서민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닥터스>, 한 명의 좋은 사람은 어떻게 탄생하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SBS 월화드라마 <닥터스>에서 혜정(박신혜)은 길거리에서 갑자기 쓰러진 임산부를 돕는 지홍(김래원)을 보며 속으로 그런 결심을 하게 된다. 불우한 가정사 속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자신을 망가뜨리며 살아가던 그녀였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홍을 만난 후 자신도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닥터스(사진출처:SBS)'

좋은 기억과 좋은 사람을 만나면 변화될 수 있다.’ <닥터스>는 의학드라마가 가진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오히려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우리네 삶의 문제로 고개를 돌린다. 돈의 논리에 의해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도 돈 몇 푼으로 합의되고 덮어지는 세상이고, 사고로 불이 나도 집안 좋은 아이들은 피해자가 되고 가난한 아이는 가해자가 되는 세상이다. 이런 비정한 세상에서 희망을 갖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혜정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좋은 기억이 있다. 아버지에게 버려지다시피 할머니 댁에 맡겨지지만, 그 할머니 강말순(김영애)은 상처 입은 그녀를 꼭 껴안아준다.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지만 밖에서 사고를 치고 들어와도 일단 집에 오면 밥부터 챙겨 먹이는 그런 할머니. 그 툭 던져놓는 국밥 한 그릇에 할머니의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화재사고로 모든 걸 뒤집어쓰고 구치소에 들어간 혜정에게 강말순은 도시락을 싸와 먹고 힘내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재수 없는 년으로 치부하며 살아가는 혜정은 할머니에게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라고 말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살뜰히 도시락을 챙겨와 먹이며 정작 자신의 위암 수술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는 할머니. 할머니는 죽을 수도 있는 위암 수술을 밝히는 것조차 혜정이 어떤 의지를 갖게 하려는 의도로 이야기한다.

 

혜정의 친구 순희(문지인)는 경찰서를 찾아와 자신이 진짜 방화범이라고 밝힌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모든 걸 뒤집어쓴 혜정을 그녀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끝내 혜정 대신 구치소로 들어가는 순희는 자신도 그녀를 두고 도망치지 않았다며 그걸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혜정의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좋은 사람이 되려는 순희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그것은 또한 혜정에게 꺼져가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다시금 피울 수 있게 해준다.

 

혜정의 담임선생님인 지홍은 교사로서 그녀를 자극하고 보듬으며 인생의 목표 같은 걸 갖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와 혜정의 좋은 관계를 보고 질투한 서우(이성경)가 루머를 만들어내자, 그는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가장 피해를 입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선생보다는 학생이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피해를 입을 것이라 말하며 그는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된다.

 

다행히 화재사건이 해결되고 구치소에서 나오게 되지만 위암 수술을 받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자 혜정은 다시 절망한다. 그런 그녀에게 지홍이 찾아와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지홍이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애써 그를 밀어낸다. 결국 그녀가 괜찮은 의사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녀를 둘러싼 많은 이들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사랑과 아픈 죽음 그리고 지홍에 대한 존경과 연정, 친구의 의리 같은 것들이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던 그녀를 성장시킨 자양분이 되었던 것.

 

<닥터스>는 이처럼 한 사람의 좋은 변화와 성장을 흐뭇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드라마다. 물론 혜정과 대비되는 금수저들이 만들어내는 극적 갈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드라마는 그들과의 직접적인 대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좋은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그녀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갖게 만든다. 갈등이 만들어내는 힘보다는 한 사람의 성장을 보는 그 흐뭇함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

 

실로 한 명의 좋은 사람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좋은 관계와 영향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코 돈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고 또 누군가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다. 영화 <변호인>의 인권변호사 송변의 경우처럼, 때로는 국밥 한 그릇의 온기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게도 만든다. <닥터스>는 이런 선의들의 가치가 그 많은 허울 좋은 스펙들과 환경들의 힘보다 훨씬 더 세다고 말하는 드라마다. 그래서 그 어떤 드라마보다 <닥터스>가 강력해지는 건, 선의의 가치가 무시되는 우리네 현실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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