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의 김남길, '동이'의 한효주

사극과 현대극의 연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극을 연기하던 배우가 사극 속으로 들어갔을 때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반대로 사극 속에서 강력한 캐릭터 이미지를 만들어낸 배우가 현대극으로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부담감이 무색할 정도로 자연스런 변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찬란한 유산'에서 사극 '동이'로 간 한효주와 '선덕여왕'에서 '나쁜 남자'로 온 김남길이 그렇다. 어떻게 그들은 현대극과 사극을 그처럼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었던 것일까.

먼저 캐릭터를 들여다봐야 그 해답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의 비밀병기로 등장한 비담이란 캐릭터는 사극 속이지만 지극히 현대적인 캐릭터다. 그는 '선덕여왕' 속 캐릭터들이 하는 것처럼 옛 어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캐릭터는 '선덕여왕'이라는 신라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툭 떨어진 현대인처럼 보인다. 이 지극히 현대적인 일상어투를 사용하는 비담은 심지어 공주(장차 여왕이 될) 앞에서도 반말을 한다.

그저 한없이 착하기보다는 욕망에 충실하며 때로는 지독히도 상대방을 아프게도 만드는 이 캐릭터가 갑자기 이 사극이라는 공간 속에 들어왔을 때 대중들이 열광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극이라면 갖게 되는 그 형식적인 무게를 가볍게 깨버리는 그 파격, 그리고 그 파격 속에 자리한 현대적인 쿨한 감성이 버무려지는 순간, 그는 단번에 이 사극 속 모든 인물들과 대비되는 강력한 존재감의 캐릭터가 된다. '선덕여왕'의 후반부로 가면서 비담이라는 캐릭터가 조금씩 존재감을 상실한 것은 그가 악역으로 변신해서가 아니라, 차츰 사극 속의 인물로 변해가며 그 차별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연기자 김남길은 비담이라는 캐릭터 그 자체의 아우라를 그대로 갖게 되었다. 그의 연기자로서의 이미지가 비담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은 그만큼 이 캐릭터가 그에게 부여한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한 '나쁜 남자'. 심건욱은 비담이란 캐릭터의 현대적인 버전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나쁜 남자'라는 드라마는 저 비담이란 캐릭터의 아우라를 이미지로 보유한 김남길을 위한 드라마처럼 보인다.

시니컬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속을 시원하게 하는 독한 어투나, 독해보이면서도 슬픈 눈은 이 드라마의 주제와도 그대로 닿아있을 정도다. '나쁜 남자'는 속물로 가득한 세상에 슬픈 눈으로 침을 뱉는 남자의 이야기다. 혹자들은 같은 캐릭터의 반복으로 김남길의 이미지 소비를 빠르게 하는 드라마라고 걱정을 했지만, 실제는 상황이 다르다. 김남길은 사극 밖으로 빠져나와, 현대극 속에서도 비담이 가졌던 그 아우라의 영역을 오히려 공고하게 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전술한 대로 비담이 사극과 현대극을 넘나드는 캐릭터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찬란한 유산'의 은성이란 캐릭터는 현대극이지만 지극히 고전적인 캐릭터다. 착하고 맑고 씩씩하며 때론 지독한 상황에 빠져도 좌절하지 않는 전형적인 캐릭터. '찬란한 유산'에서 그녀가 돋보인 것은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심지어 악마적으로 보이는 현대적 욕망의 화신들과 그녀가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욕망의 시대에 살아남은 지극히 선한 천연기념물처럼 반짝인다.

그런 그녀가 사극 속의 주인공 동이로 분하는 것에서, 어떤 변신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비담이란 현대적인 이미지가 현대극으로 와서 심건욱이란 캐릭터로 자연스러운 것처럼, 은성이란 고전적인 이미지는 사극 속 동이라는 캐릭터로 와서도 자연스럽다. 그녀는 여전히 밝고 맑고 그러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는 선한 캐릭터다. 게다가 '동이'라는 사극은 그 인물들의 대사가 이중적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고어가 사용되지만 일상적인 자리에서는 현대어가 나온다. 이것은 깨방정 숙종(지진희)만이 아니라 동이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사극에서 온 남자, 사극으로 간 여자. 둘 다 새로운 캐릭터로의 변신을 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작이 가진 캐릭터를 보다 공고히 하고 확장하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보통 똑같은 캐릭터가 사극과 현대극을 넘나들 때 흔히 그 어색함이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이 두 사람의 경우 그 이질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물론 사극과 현대극의 경계가 그만큼 얇아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이들 배우들이 갖는 아우라가(옴므파탈의 절정을 보여주는 김남길과 인상녀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밝은 한효주) 꽤 크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착한 남자는 심심해, 나쁜 남자가 좋아 왜?

착한 남자가 나와서 여자친구를 위해 곰 인형을 준비했다며 건넨다. 그런데 이 여자친구 표정이 영 심드렁하다. 그 때 갑자기 우락부락한 남자가 뒤가 다 터진 곰 인형을 들고 등장한다. “널 위해 주워왔다!” 사정없이 들이대는 이 남자에게 그러나 여자는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며 “넌 누구냐”고 묻는다. 그 때 흐르는 비의 노래. “나쁜 남자야!”

이 ‘개그 콘서트’에서 이승윤이 하는 ‘나쁜 남자’라는 코너는 요즘 트렌드인 나쁜 남자 신드롬을 거꾸로 뒤집어 웃음을 전한다. 이승윤의 말을 빌자면, “나쁜 남자라고 하면 멋있고 잘생긴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자기처럼 외모가 별로인 사람이 나오면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속에는 나쁜 남자의 진면목이 숨겨져 있다. 나쁜 남자란 그저 성격 나쁘고 외모도 별로고 능력도 별로인 그런 남자를 일컫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나쁜 남자는 성격은 좀 모나지만, 능력도 좋고 외모도 출중한 그런 남자를 말한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 같은.

그렇게 보면 지금껏 뜬 나쁜 남자들의 면면이 다시 보인다. 이른바 버럭 캐릭터였던 ‘외과의사 봉달희’의 천재 외과의사 안중근(이범수), ‘스포트라이트’에서 보도팀 캡으로 나왔던 오태석(지진희), 대표적인 나쁜 남자 캐릭터였던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과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까지. 이 나쁜 남자들의 공통점은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칭하는 ‘나쁜 남자’라는 말은 사실은 ‘능력 있는 남자’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즉 다르게 표현해보면 ‘나쁘게 해도 될 만큼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는 남자’다. 구준표 역을 소화하고 있는 이민호는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이 그 캐릭터로 좀더 욕을 먹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왠걸? 그가 아무리 거만하고 못되게 굴어도 그것이 그의 타고난 재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또 그 능력이 서민인 금잔디(구혜선)에게 쓰여진다는 점이 오히려 더 매력으로 변하게 하는 지점이다.

반면 능력은 없어도 마음만은 착한 캐릭터는 어떨까. ‘스타의 연인’의 김철수(유지태)는 꽤 매력적인 지적 능력의 소유자지만, 여성 시청자들의 로망이 되지는 못한다. 스타인 이마리(최지우)를 지극 정성으로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사랑해온 과거의 여자친구를 매몰차게 끊지도 못하는 착한 그를 어떤 면에서는 답답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불황은 캐릭터에 대한 로망까지 바꿔놓는 것일까. 능력 없는(여기서 이 능력은 대체로 재력이 된다) 착한 남자의 매력은 점점 떨어지고, 충분히 나쁘게 해도 용서될 정도의 능력을 가진 나쁜 남자의 매력은 점점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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