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주인공도, 최종 빌런도 여성으로 채운 느와르의 탄생

작은 아씨들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종영했다. 12부작으로 쉴 틈 없이 폭풍 전개된 <작은 아씨들>은 한 편의 판타지 느와르에 가까웠다. 엄청난 모험을 겪은 세 자매는 결국 빌런들을 모두 해치우고 해피엔딩을 맞았다. 첫째 오인주(김고은)는 그토록 원하던 자신과 자매들이 지낼 보금자리인 아파트를 얻었고, 둘째 오인경(남지현)은 기자직 제안을 거절하고 하고픈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사랑하게 된 하종호(강훈)와 함께였다. 또 셋째 오인혜(박지후)는 친구 박효린(전채은)과 함께 해외에서 최도일(위하준)의 도움으로 빼돌렸던 비자금 7백억을 찾아 자매들과 골고루 나눴다. 그저 흔한 가족 판타지나 돈보다 중요한 가치 같은 걸 내세우기보다는 느와르가 그리기 마련인 보다 욕망에 충실한 세속적인(?) 엔딩을 담았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작은 아씨들>은 일찌감치 흔한 가족 서사를 저 뒤편으로 밀어낸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 자매의 엄마가 막내의 수학여행을 위해 언니들이 마련한 돈을 들고 해외로 튀는 이야기가 먼저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 후로 부모가 부재한 세상에 덜렁 남은 세 자매의 분투기가 펼쳐졌다.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지지고 볶는 가족 서사를 일단 치워버린 드라마는 인주, 인경, 인혜 세 자매가 각각 원상아(엄지원), 박재상(엄기준) 부부의 집안과 얽히며 벌어지는 사건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즉 이 작품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느와르지만 세 자매라는 여성 주인공들이 이야기 전체를 끌고 나간다는 확실히 다른 설정으로 시작했다. 세 자매는 각각 저마다의 다른 방식으로 원상아와 박재상으로 상징되는 자본화된 시스템이 가진 폭력과 맞선다. 폭력과 맞서는 세 자매의 방식은 그들의 직업과 연결되어 있다. 오인주는 경리로서 비자금과 관련된 사건 속에 휘말리고 그 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오인경은 기자로서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파헤쳐 나간다. 오인혜는 놀라운 미술적 재능을 가진 인물로 그 예술적 능력이 저들과 맞설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작은 아씨들>은 이들 여성 주인공들이 대적하는 최종 빌런 역시 여성으로 세웠다. 처음에는 박재상이 최종 빌런처럼 여겨졌지만, 사실상 원상아가 그를 가스라이팅하며 수족처럼 부린 인물이라는 게 드러났다. 원상아는 그의 대저택 지하에 숨겨진 아버지 나무에 의지해 살아가는 푸른 난초처럼 매혹적이지만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인물로 형상화됐다. 아버지의 폭력을 폭로하려던 엄마가 ‘닫힌 방’에 갇혀 살게 되고, 결국 그런 엄마를 회유하려다 실수로 피를 흘리고 쓰러진 엄마가 딸을 위해 저 스스로 장롱 옷걸이에 목을 매 죽게 되면서 이 최종 빌런이 탄생했다. 

 

<작은 아씨들>은 물론 아버지 나무나 베트남전쟁, 정난회 같은 상징들로 그려진 남성성의 폭력적인 세계와 맞서는 여성들의 서사를 그리긴 했지만, 그러한 성 대결보다 이 작품이 보다 추구하려 한 건 주인공도 악역도 또 주변인물들까지 여성 캐릭터로 채워 넣어 만들어낸 여성 느와르였다. 원상아 같은 최종 빌런도 그렇지만, 이 드라마에는 보디가드이자 비서실장도 고수임(박보경) 같은 여성캐릭터이고, 부패한 언론을 상징하는 인물도 장마리(공민정) 같은 여성 캐릭터로 그려진다. 또 유산을 상속해주는 고모할머니 오혜석(김미숙)이나 느와르의 시작이자 끝을 만든 진화영(추자현) 같은 인물들은 흔한 키다리 아저씨의 여성 버전들처럼 보인다. 

 

이 모험담에 빠지지 않은 멜로 서사 역시 남녀 관계는 역전되어 그려진다. 오인주에 대해 최도일은 호감을 갖고 있지만 오인주는 그럼에도 늘 거리를 유지하고, 오인경과 하종호의 멜로에서도 주도권은 오인경이 끌고 간다. 같이 유학을 가자고 한 하종호의 제안을 오인경은 처음에는 거부했다가 나중에는 받아들인다. 이 작품에서 멜로는 이어지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관계 속에서 여성이 주체적으로 어떤 선택했는가 아닌가가 중요해 보인다. 심지어 원상아와 박재상 같은 빌런 부부의 관계 역시 박재상이 순애보를 보이지만 원상아는 제 목적을 위해 그를 이용하는 인물로만 그려진다. 

 

<작은 아씨들>이 그린 판타지 여성 느와르는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어 세 남매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부모가 해외에서 여행하듯 살고 있는 상황이나, 부모가 모두 인주와 인경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 딸인 효린이 인혜와 함께 손을 잡고 떠나는 광경이 그렇다. 하지만 이건 리얼리티가 아니라 어떤 욕망을 투영시킨 느와르 판타지이고 그 욕망이 그리는 건 여성들의 연대다. 인주, 인경, 인혜의 자매애와, 인주와 화영, 인혜와 효린의 워맨스로 그려낸 여성 느와르의 완성. 그것만으로도 남성 중심으로 그려지곤 했던 서사들의 세계 속에서 <작은 아씨들>이 이뤄낸 성취는 충분하다. 그것도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느와르를 여성들의 이야기로 숨 막히게 풀어낸 것이니. (사진:tvN)

‘작은 아씨들’, 김고은의 판타지, 남지현의 진실, 박지후의 탈출

작은아씨들

쉴 틈 없는 폭풍전개다.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스토리 전개는 머뭇거림이 없다. 곧바로 사건을 전개시키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이 이어지며 그것을 한꺼번에 뒤집는 반전도 벌어진다. 싱가폴에 오인주(김고은)의 명의로 있는 비자금 7백억을 둘러싼 진실이 밝혀지는 8회는 이러한 <작은 아씨들>의 폭풍전개가 짜릿할 정도로 긴박한 속도감을 낸 대표적인 사례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시청자들은 자신의 집에서 목매달린 채 죽은 진화영(추자현)이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바 있다. 워낙 미스테리한 행적을 보인 인물인지라 그가 성형을 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자살을 위장하고 싱가폴로 도주해 그 곳에서 오인주의 이름으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 것이다. 

 

8회 초중반까지만 해도 실제로 진화영이 살아있는 것처럼 오인되었다. 최도일(위하준)과 함께 희귀 난초 경매를 빙자해 비자금을 빼돌리려 싱가폴로 가게 된 오인주를 본 현지 주민들이 아는 체를 하고, 그래서 그 곳에 자신의 얼굴로 성형한 진화영이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원상아(엄지원)가 꾸민 연극판이었다. 진화영이 살아있는 척 현지인들을 연기하게 만들고 오인주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게 해 결국 최도일을 버리고 비자금 7백억을 빼돌려 자신에게 가져오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돈을 모두 빼돌리고 오인주에게 푸른 난초액을 먹인 후 고층 건물에서 떨어뜨려 자살인 척 꾸미려 했던 원상아의 계획은 그러나 최도일이 오인주에게 건넨 권총으로 인해 반전을 맞이하게 됐다. 그것이 모두 원상아의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인주가 마지막으로 트렁크에 든 7백억이 보고 싶다고 했고, 그걸 열어본 원상아는 돈 대신 벽돌이 들어있는 것에 경악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오인주를 마주하게 됐다. 

 

이 흐름은 7백억을 두고 벌이는 한 편의 스릴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뒤집고 뒤집히는 사건 전개가 시청자들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오인주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부에 대한 욕망이 판타지로 담긴다. 싱가폴에 간 오인주는 호텔에서부터 극진하게 MIP(Most Important Person)으로 대접받고 화려한 드레스에 난초 경매계의 여왕처럼 대접받는 판타지 속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원상아가 꾸민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판타지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스릴러로 바뀌었다. 원상아는 자신이 만들었던 ‘닫힌 방’의 미니어처 그대로 진화영을 살해한 인물이다. 그러니 그가 꾸미는 다음 살인 연극의 주인공은 오인주가 되는 셈이었다. 물론 이러한 원상아의 계획은 오인주가 최도일에게 어쩌다 권총을 받게 되면서 반전을 맞게 된 것이지만.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가 눈 돌릴 틈 없이 펼쳐지는 폭풍 전개 양상을 보이는 이유는 오인주만이 아닌 오인경(남지현), 오인혜(박지후)의 각각의 서사가 교차되고 연결되면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오인주의 서사가 7백억을 두고 벌어지는 판타지와 스릴러의 묘미를 안긴다면, 오인경의 서사는 박재상(엄기준)의 비리를 캐기위해 푸른 난초로 연결된 피해자들을 추적하는 진실 추적의 묘미를 안긴다. 오인경은 푸른 난초가 원상아의 아버지 원기선 장군과 함께 했던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비밀작전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오인경의 진실 추적기가 흥미로운 건 그것이 베트남 참전과 연관된 당대의 현대사를 뒤집는 사건일 수 있어서다. 현재까지 이어져온 박재상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축적과 그 시스템이 과거 어떤 뿌리로 연결되어 있는가는 이 작품이 스릴러의 차원을 넘어서 현대사와 자본시스템에 대한 비판의식을 던지는 사회극으로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한 사실상 박재상의 저택에 그의 딸인 박효린(전채은)과 함께 감금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오인혜가 그 집안에서 어떤 단서들을 찾아내고 괴물 같은 부모들 때문에 아파하는 친구를 돕는 이야기 역시 또 다른 이 드라마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서사의 묘미다. 박효린을 도와 오인혜가 그 저택의 비밀을 찾아내고 그 곳으로부터 탈출하는 그 과정을 시청자들은 숨죽이며 바라보게 된다. 

 

오인주의 판타지 스릴러와 오인경의 진실추적기 그리고 오인혜의 탈출기. 이렇게 <작은 아씨들>은 세 자매가 가진 각각의 서사들을 저마다의 묘미를 갖는 스토리로 엮어 교차 편집해낸다. 그것은 각각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세 자매가 그 관계로 묶여 있는 것처럼 사건들도 결국 하나로 뭉쳐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마치 세 개의 서로 다른 몰입감을 주는 스토리가 하나로 묶여 돌아가는 형국이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폭풍 전개는 바로 이런 이야기 구조에서 비롯된다. 

 

구조적으로 보면 오인주가 원상아의 연극판에 갇힌 존재였다면, 오인혜 역시 박재상의 저택에 갇힌 존재이고, 오인경은 이 사건들을 파고 들어가다 더 깊숙이 그 늪에 발을 딛게 된 인물이다. 결국 세 자매가 무언가에 갇히거나 빠져 있는 상황이고, 이들이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궁극적인 작품의 엔딩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곳은 다름 아닌 원상아와 박재상으로 대변되는 저 유혹적이면서 끔찍한 자본화된 세상의 아가리다. 

 

한편 생각해봐야할 또 하나는 이 폭풍전개의 드라마가 16부작도 아닌 12부작이라는 점이다. 그저 관성적으로 미니시리즈라고 하면 16부작으로 편성해놓고 그만한 서사의 분량도 아닌데 이런 저런 불필요한 요소들을 넣어 고무줄처럼 늘여 놓는 그런 드라마들과 너무나 다른 행보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질 끌기보다는 군더더기 없이 풀어나가는 <작은 아씨들>의 이런 선택을 이제 다른 드라마들도 무겁게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사진:tvN)

‘작은 아씨들’, 역대급 캐릭터 만난 엄지원, 자본이 캐릭터화한 듯

작은 아씨들

역대급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엄지원이 연기하는 원상아라는 인물 이야기다. 물론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캐릭터들이 파격적이고, 선명하며, 그 자체로 은유적인 깊이를 갖고 있다. 등장과 함께 사망한 진화영(추자현)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것 없이 태어나 무언가를 갖기 위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또 다른 부캐로 살아가다 결국 불나방처럼 타버리는 강렬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 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첫 회에 사망했지만 그의 잔상과 아우라는 그 후 몇 회 동안 계속 드라마 속 공기에 떠다니는 여운으로 남았다. 

 

역시 등장한 후 한 회도 지나지 않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신현민 이사(오정세)라는 캐릭터도 그렇다. 신발에 남다른 페티시즘을 갖고 있는 이 인물은 죽은 진화영의 발에 신겨진 빨간 하이힐의 잔상으로 남아있다. 오인주(김고은)의 동생이자 사회부 기자인 오인경(남지현)을 자신이 이끄는 부동산 회사의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 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세 자매의 고모할머니 오혜석(김미숙)이란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는 죽었지만 정난회의 일원이었다는 그의 비밀은 앞으로도 여전히 이 인물을 드라마가 소환해낼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이처럼 모든 인물들이 허투루 그려지거나 소비되지 않는 <작은 아씨들>에서 특히 역대급 아우라로 그려진 인물이 바로 원상아다. 아름답지만 위험해보이고, 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섬뜩한 속내를 숨기기 위한 위장처럼 보이는 인물. 하지만 모든 게 우아하고 화려해 보여 유혹적인 향기를 내뿜고 그래서 그 향기에 취한 이들이 결국은 수족처럼 그의 말을 따르게 하는 힘을 가진 인물. 그게 원상아다. 

 

그런데 원상아의 이런 이미지는 이 드라마 속에 미스테리로 세워져 있는 ‘푸른 난초’를 닮았다. 사망한 진화영의 발목에 새겨진 문신 속에는 이 푸른 난초와 더불어 어머니가 사망한 기일이 새겨져 있었고,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신현민 이사의 차 안에도 푸른 난초가 있었다. 또 원상아가 건네준 푸른 난초에 취해 정신을 잃은 오인주는 어떻게 된 일인지 사망한 오혜석을 마주하게 된다. 푸른 난초가 모든 죽음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렇다면 푸른 난초는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 “푸른 유령이라는 난초예요. 자기 전에 뚜껑을 열고 침대 옆에 놔둬요. 오늘 밤에는 꽃이 필거예요. 이 난초에는 힘이 있어요. 밤새 향기를 들이마시면 진짜 자기가 원하는 걸 볼 수 있을 거예요.” 환각, 환영을 일으키는 난초. 그런데 그 난초를 통해 원상아는 자기가 원하는 걸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싱가폴에서 열리는 국제난초협회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한다. 그 일은 마치 예술품으로 정재계 로비를 위해 하는 것처럼 희귀 난초를 통해 비자금을 만드는 일이다. 그 돈의 10%+알파를 원상아는 인주에게 주겠다고 한다. 

 

원상아가 인주에게 속삭이듯 전하는 이 말들은 자본이라는 괴물이 건네는 유혹적인 속삭임처럼 연출되어 있다. 남편이 서울 시장이 되면 그 이권이 어마어마할 거라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 푸른 난초와 ‘아버지 나무’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한다. “인주씨가 싱가폴에서 잘 해주면 나는 이 나무를 아버지 나무에 걸 거예요. 이 난초는 아버지 나무를 떠나면 오래 살 수 없어요. 난초에 필요한 미생물, 곰팡이들을 아버지 나무에서만 얻을 수 있거든. 그건 인주씨 꿈의 난초를 우리가 보살핀다는 뜻이고. 인주씨도 우리와 함께 한다는 얘기예요.”

 

아마도 이런 속삭임은 인주가 처음은 아니었을 게다. 그는 죽은 진화영에게도 이런 유혹과 푸른 난초를 건넸을 것이고, 이미 인주의 동생 인혜(박지후)를 그 저택 지하에 숨겨진 아버지 나무로 데려가 푸른 난초 하나를 건네주며 “네 것”이라고 한 바 있다. 흥미로운 서사지만 원상아가 푸른 난초를 건넨 이들은 마치 아버지 나무와 그 난초의 관계처럼 엮어진다. 그 곳을 오래 떠나면 살 수 없는 그런 관계. 인혜는 원상아의 집으로 아예 들어가 살게 되고, 오인주 역시 원상아의 비밀스러운 난초협회 정난회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 깊숙이 들어간 이들은 쓸모가 다해졌다 여겨졌을 때 사망한다. 아버지 나무로부터 버려져 말라비틀어진 푸른 난초와 함께. 

 

아직 모든 사건의 전말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 나무와 푸른 난초의 관계는 마치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생물, 곰팡이 같은 시스템을 움직이는 자본의 힘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고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겉보기에 아름답고 화려한 자태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독하디 독한 향을 품고 있는 그런 삶. 원상아는 베트남 참전 용사인 아버지 원기선 장군이 자신에게 남겨준 건 재산이 아니라 바로 그 난초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건 일종의 그 아버지 나무와 푸른 난초처럼 관계가 엮어진 네트워크, 시스템을 준 것이라고 해석된다. 아마도 박재상(엄기준) 역시 그 푸른 난초 중 하나라 짐작되는. 

 

원상아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자본이라는 괴물이 가진 유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면면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웃고 있지만 그 미소는 어딘가 섬뜩하다. 진심이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이 인물의 미소는 ‘새파란’ 거짓말이어서 더 섬뜩하다. 어찌 보면 텅 비어 허망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그래서 모든 이들을 빨아들이는 힘을 가진 인물.

 

알맹이는 없지만 그 기능으로 존재하는 삶. 그가 과거 연기자였고 발연기를 그 길을 떠났지만 이제 실제 삶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심지어 실제로는 폭력적인 남편이지만 겉으로는 사회사업가처럼 연기하며 살아가는 박재상과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고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연기하는 삶’이 그의 실체인지라 그걸 떠나면 존재 자체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원상아는 푸른 난초를 닮았다. 아니 그 푸른 난초들을 묶어두고 조종하는 아버지 나무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이든 이 인물이 그려내는 자본의 유혹과 폭력이라는 섬뜩한 현실이 있어 <작은 아씨들>의 세 자매의 목숨을 건 사투가 더 팽팽해지고 의미를 갖는다. 그러고 보면 세 자매가 나란히 위쪽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포스터에 반을 사선으로 가리고 있는 푸른 색이 다시금 보인다. 푸른 난초 같은 자본 시스템의 삶이 부여하는 위기 속으로 이 세 사람은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어찌 보면 그 위에 얹어져 있는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푸른 난초를 닮은 원상아의 ‘새파란’ 유혹 앞에서 세 자매는 어떤 선택들을 할 것인가.(사진:tvN)

‘작은 아씨들’, 웃는 모습이 더 섬뜩한 엄기준과 엄지원의 정체

작은 아씨들

과연 인주(김고은)와 인경(남지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동생 인혜(박지후)를 구해낼 수 있을까.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인혜는 점점 저 괴물의 아가리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그 괴물은 박재상(엄기준)과 원상아(엄지원)로 대변되는 자본이라는 이름의 괴물이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사실 인혜는 박재상의 딸 효린(전채은)의 그림자 같은 존재나 다름없다. 그의 그림을 대신 그려주고 그 그림으로 상을 받게 해준다. 또 그 대가로 외국 유학을 효린과 함께 보내준다는 원상아의 달콤한 제안도 받아들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언니들은 엄청난 당혹감과 불안감에 빠진다. 그래서 인경은 또 다시 술을 마시고 상을 받은 효린을 축하해주는 파티장에 찾아가 고래고래 동생을 부르는 것으로 난리를 친다. 언니가 걱정해서 하는 행동이라는 걸 모른 채 그저 치욕스럽게만 느끼며 바라보는 인경에게 원상아는 짐짓 부드럽게 웃고 있지만 악마처럼 속삭인다. “들어갈까? 우리 인혜는 좋은 것만 보자.” 결국 보다 못한 인혜는 술에 취한 언니를 데리고 돌아가지만, 그런 언니와 인혜는 더 멀어진다. 

 

갑자기 효린과 유학을 떠나게 됐다는 인혜의 말에 인주 역시 버럭 화를 내며 “네가 효린이 하녀냐”고 묻지만, 인혜는 더 충격적인 말을 한다. “난 이 집에서 언니들처럼 사는 것보다 효린이네서 하녀로 살고 싶어.” 인혜는 가난에 지쳤다. 가난하게 자신이 사는 것도 지쳤지만, 자신 때문에 언니들이 ‘어두운 숲속에 처절하게 널브러져 있는’ 그런 희생하는 삶을 사는 걸 보는 것에 더 지쳤다. 그래서 스스로 그걸 벗어나려 한다. 그건 자기를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언니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작은 아씨들>이 인혜를 통해 보여주는 건 천민 자본주의의 끔찍한 세상이다. 인혜는 그 괴물의 아가리 깊숙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박재상과 원상아는 그 괴물의 분신이다. 그들이 사는 그 대저택에서 박재상은 운전기사의 아들이었고, 그 대저택은 원상아의 아버지인 원기선 장군의 것이었다. 그 장군의 아들이었던 원상우(이민우)와 박재상은 마치 지금의 효린과 인혜 같은 관계였던 것. 

 

그 집에서 예쁘장한 모형 집을 발견하고 그 방 중 하나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인형을 슬쩍 훔치다 인혜는 박재상에게 들킨다. 그런데 박재상은 인혜에게 이를 다그치기보다는 왜 자신의 딸 효린 대신 그림을 그려줬냐고 묻는다. 그러자 인혜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효린이가 그린 그림이에요. 그걸 그릴 때 저는 효린이었어요. 가장 효린이 같은 표정으로 효린이가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질감으로 그렸어요. 그 그림은 완벽해요.” 

 

인혜는 진짜 효린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건 과거 박재상이 원상우를 보며 가진 욕망과 유사하다. 박재상은 그걸 간파하고 인혜에게 악마의 혀를 놀린다. “장군님은 내가 특별하다는 걸 아셨어. 그래서 상우가 아니라 날 이 집의 상속자로 점찍으신 거야. 그러기 위해선 큰 희생을 해야 했지만. 난 결국 이겨냈어. 그 인형 갖고 싶니? 그러면 너도 할 수 있겠어? 지구상에서 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할 수 있겠어?” 

 

이 대사를 통해 보면 결국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원상우를 그렇게 만든 건 박재상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건 배신이었을 테고. 인혜는 그것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유혹에 끌린다. 저들의 삶이 너무나 유복해보이고 행복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번지르르한 그들의 삶이 진짜 행복일까. 그건 가짜다. 웃고 있지만 진짜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고, 자못 약자들을 배려하는 것처럼 떠들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뿐이다. 

 

언니들은 이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동생을 보게 된 셈이다. 맏언니인 인주는 자신에게 뚝 떨어진 20억을 다 써서라도 동생들을 그 힘겨운 삶에서 꺼내려 하지만, 둘째인 인경은 다르다. 그건 도둑질이라며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고모할머니인 오혜석(김미숙)의 집에서 지낼 때 저지르지도 않았던 도둑질 누명을 그토록 많이 쓰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이 다르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생각이 있다. 그건 동생 인혜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려서 자기들 말고 더 어린 동생이자 간난 아기가 있었고 그 아기가 가난해서 죽게 됐던 경험을 했던 그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인혜에 대한 남다른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인주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죽지 않는다는 절박함으로 살았지만 그건 결국 동생들을 챙기기 위함이었고, 인경이 힘겨운 이들을 리포팅하면서 감정이입이 과해 기자라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래서 알코올 중독이 됐던 이유도 바로 그 간난 아기의 죽음이 남긴 트라우마와 그래서 생긴 동생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이었다. 

 

자본이라는 괴물이 삼키려는 동생과 이를 막으려 안간힘을 쓰는 언니들. 그건 빈부의 시스템 속에서 생겨나는 처절한 대결구도지만, 그 이야기가 자매들의 끈끈한 애정으로 얽혀 있다는 점에서 <작은 아씨들>은 더 큰 몰입감을 준다. 과연 언니들은 이 위기를 넘기고 돈이면 영혼도 팔게 만드는 이 세상 속에서 끝내 소중히 지켜야 하는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을까.(사진:tvN)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