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기 일주일 전’, 김민하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뀔 수 있을까

내가 죽기 일주일 전

“봄이 제일 힘들다.” 티빙 드라마 <내가 죽기 일주일 전>에서 정희완(김민하)이 하는 이 말은 역설적이다. 만물이 피어나는 봄을 정희완이 제일 힘들게 여기는 건, 죽은 김람우(공명) 때문이다. 좋아했지만 람우는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희완은 대학을 갔지만 4년 간 세상과 문을 닫고 살았다. 람우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탓하며. 모든 게 피어나야할 청춘의 시기에 맞이한 람우의 죽음으로 희완은 그 청춘을 제일 힘든 나날들로 보내고 있다. 

 

“그 중의 4월은 최악이다.” 희완은 그 중의 4월. 그것도 4월1일 만우절을 최악으로 생각한다. 교생선생님을 속이기 위해 람우와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친구들도 선생님도 그들을 바꾼 이름을 부르게 됐고, 나중에는 그들 자신들도 바꾼 이름에 고개가 돌려게 됐던 그 일 때문이다. 물론 그 이름 바꾸기는 희완과 람우 모두 학창시절 가장 재밌던 일이었지만, 람우의 죽음은 그 재밌던 일을 악몽으로 바꿔 놓았다. 희완은 자신이 당첨된 별똥별 보기 천문대 행사에 람우를 대신 보냈다. 평소 별똥별을 보고 싶어하던 람우에게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는 선물이라며. 하지만 그 천문대에 난 화재로 람우가 죽었다. 

 

아름답고 빛나던 삶의 순간들은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는 가장 힘든 기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은 바로 그 빛나던 청춘의 순간들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삶의 의지조차 잃어버린 희완 앞에 어느 날 문을 두드리고 찾아온 람우의 이야기다. 람우는 자신이 저승사자라며 대뜸 희완에게 일주일 후에 너는 죽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람우는 그 남은 일주일 동안 그간 못해본 것들,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를 하자고 한다. 2인용 자전거 타기, 클래식 공연 보기, 패러 글라이딩 하기 같은 것들을 하게 되지만 그건 희완이 아닌 람우의 버킷리스트다. 

 

희완 앞에 나타난 저승사자 람우라는 존재는,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이라는 드라마를 하나의 판타지로 보이게 하지만 그건 절망의 끝에 서 있는 희완이 이제 더 이상 못버티겠는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처럼 읽히기도 한다. 즉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은 이제 삶이 너무 버거워 삶을 끝장내려는 희완이 마지막 일주일 동안 람우와의 기억들을 되새기고 남은 이들을 찾아가 하나하나 정리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희완 역할의 김민하는 연기의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매력을 발휘하는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김민하의 화장기 하나 없어 주근깨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꾸밈 없는 모습은 희완 그 자체로 보인다. 그 빈 도화지 같은 희완의 모습 위에 김민하는 삶의 생기와 죽음의 허무를 한 인물 안에서 끌어안아 그려낸다. 그래서 이 작품 속 김민하를 보다보면, 청춘의 발랄함과 그 이면을 가로지르는 삶의 유한함이 겹쳐지며 웃다가고 울게된다. 

 

김민하가 연기로 보여주듯 삶과 죽음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다. 학창시절 설레던 사랑과 따뜻했던 우정으로 빛나던 삶은 죽음 앞에서는 더더욱 아련해진다. 정반대로 사라져 버린 죽음 앞에서 삶의 기억들을 더더욱 찬란하다.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은 이 삶과 죽음의 변주를 담아낸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이 드라마는 삶의 활기와 발랄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학창시절 이들이 얼마나 빛났고 행복했던가를 희완은 저승사자로 나타난 람우와 함께 기억해내고, 그 행복한만큼 사라진 시간들의 회한을 느낀다. 

 

드라마는 희완과 그녀의 앞에 저승사자로 나타난 람우가 일주일 간 티격태격하면서 보내는 시간들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희완의 환영이라고 생각하면 이 밝은 시간들이 얼마나 절절한 아픔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는가를 절감하게 된다. 이름을 서로 바꿔 지내며, 서로의 이름으로 살아왔던 그들이다. 이렇게 저승사자로까지 나타나 희완에게서 떼어지지 않는 람우의 모습은 너무나 이해되면서도 아픈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날밤 이후로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그런데 네가 내눈앞에 이렇게 나타나 있으니까 순간순간 니가 진짜로 살아 있다고 기대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 왜 옛날처럼 나한테 잘해주 고 웃어주고 나 때문에 니가 죽은 일이 없는 것처럼 구는 건데? 도대체 너 나랑 뭐하고 싶은 거야, 진짜?” 

 

희완은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지만 그런 그녀에게 람우는 말한다. “정희완. 좋아해 희완아. 나 너 많이 좋아했어. 지금도 좋아해. 미안해 너무 늦게 말해줘서.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니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많이 보고 싶어서.” 그건 람우가 못다한 말이면서, 희완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게다. 일주일 후에 희완이 죽는다는 람우의 말은, 희완 스스로 일주일만 살겠다는 의미였을 게다. 

 

하지만 그 일주일 동안 저승사자로 나타나 람우와 보낸 시간 속에서 희완은 생각대로 끝을 맞이할까. 어쩌면 람우와의 빛나던 기억들이 희완이 놓으려하는 삶의 끈을 다시 쥐게 하지는 않을까. 죽음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고통이지만, 망자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그래도 살게 해주는 희망일 수 있지 않을까. 웃으면서도 눈물이 나고, 그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을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사진:티빙)

간만에 드라마 보며 펑펑, 무엇이 눈물 버튼을 눌렀나

폭싹 속았수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땐 연애편지 쓰듯 했다. 한 자 한 자 배려하고 공들였다. 남은 한 번만 잘해 줘도 세상에 없는 은인이 된다. 그런데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겐 낙서장 대하듯 했다. 말도 마음도 고르지 않고 튀어 나왔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대학생이 된 금명(아이유)이 엄마 애순(문소리)에게 전화통화하며 유학 문제로 괜스레 화를 내는 대목에는 이 같은 내레이션이 흐른다. 

 

유학 장학생으로 뽑혔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못가게 되자 담당 교수가 사비를 털어서 보내주겠다 한다. 거절했지만 그 마음이 너무 고마운 금명은 교수에게 마음만도 너무 감사하다며 “일본 갔다 온 거 같다”고 예쁘게 말한다. 금명의 내레이션이 말하듯, 그 표현은 마치 ‘연애편지’처럼 배려하고 공들인 티가 난다. 그것도 진심으로. 

 

하지만 그 교수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 엄마한테 전화해 귤이라도 한 상자 보내달라 하던 금명은, 뭐가 그렇게 고마우냐는 엄마의 궁금증에 저도 모르게 “돈까지 빌려주려 한다”는 말을 꺼내놓는다. 그것이 엄마에게는 가시가 되는 건 줄도 모르고. 그래서 말다툼을 벌이고 “엄마랑 통화하면 짜증만 난다”는 말까지 꺼내놓는다. 낙서장에 아무렇게나 찌끄리듯이. 

 

이 짦은 장면에는 금명과 애순의 전화 말다툼을 회고하는 금명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그 내레이션은 아마도 시간이 흘러 어쩌면 금명 또한 애순처럼 딸을 낳고 엄마가 됐던 시점에 돌아본 소회처럼 들린다. 이것은 엄마나 아빠 혹은 가족 같은 너무나 가까워 늘 하는 일들이 고마운 일이 되지 않고 당연한 일이 되곤 하는 관계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이다. 그건 드라마 속 이야기지만, 인물을 통해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렇게 들려온 말들은 시청자들 각자의 기억을 헤짚는다. ‘연애편지’와 ‘낙서장’이라는 비교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남’과 ‘은인’이라는 말 역시. 

 

<폭싹 속았수다>는 간만에 눈물 버튼을 눌렀다. 시청자들의 후기를 보면 대부분 드라마보다 펑펑 울었다는 간증이 쏟아진다. 내 경험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첫 회에 물질하고 나온 애순의 엄마 광례(염혜란)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그 버튼이 눌렸다. 쫄닥 젖은 채 지옥을 갔다 온 사람마냥 절절해보이지만 두 눈만은 생존의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 그 버튼이었다. 그건 6,70년대 어떻게든 살아내려 애쓰던 우리 모두의 엄마들이 가졌던 그 눈빛이 아니던가. 

 

광례가 죽는 순간도 그랬지만, 그 어린 딸 애순(김태연)이 유일하게 엄마를 챙기려 애쓰는 모습도 그랬다. 그렇게 그 애순(아이유)은 또 자라나 광례 같은 엄마(문소리)가 되고, 자신 같은 딸 금명(아이유)을 낳는다. 아이유가 애순의 젊은 시절과 그 딸인 금명을 1인2역으로 소화하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삶은 그렇게 마치 분신의 삶처럼 연결되어 있고 이어진다. 엄마가 살아남기 위해 포기했던 학업의 꿈을 딸이 이어받아 대신 이뤄내고, 그 딸의 꿈을 위해 엄마는 오래도록 추억과 상처가 가득한 집까지 팔고서도 기꺼워한다. 

 

애순의 옆을 무쇠처럼 지켜온 관식(박보검, 박해준) 또한 그 시대의 아빠들의 자화상이 어른거린다. 어떻게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밖에서는 모질게 일하면서도 집에서는 아프다 소리 한 번 안하고 살아온 아빠들. 딸 얼굴 한 번 보기 위해 천안에서 서울까지 일부러 찾아오고는 지나다 들렀다고 둘러대고, 떠나는 버스 안에서 쑥스럽게 손을 흔들다 딸이 손을 흔들어주자 너무 기뻐 양손을 흔드는 바보 아빠들이 그들이다. 무쇠가 닳도록 일하고도 “아빠 아직 살아있어”라고 자식 앞에서는 허세부리는 그런 아빠들. 

 

<폭싹 속았수다>는 이 윗세대와 그 아래세대들의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그려나가면서도, 중간 중간 시간을 넘나들며 엄마의 이야기와 딸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그 딸이 엄마가 되어 자신의 딸과 엮어내는 이야기가 또 겹쳐진다. 젊어서 무쇠 같던 관식이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어 절뚝거리며 아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교차된다. 바로 이 시간을 넘나들며 보여주는 교차점에서 우리는 저마다 깨닫게 된다. 왜 그 때는 몰랐었을까. 그 때의 엄마, 아빠의 나이가 되니 알겠는 그 마음들이, 시간을 넘나드는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다. 

 

그 장면들의 교차 속에서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게 낙서장 쓰듯 했던 우리 각자의 후회와 미안함이 피어오른다. 순간 순간을 살다보니 놓치고 있던 것들이 인생 전체를 통해 내려다보니 드디어 가슴 저미게 보이는 것들이 생겨난다. 드라마 속 엄마, 아빠의 이야기가 저절로 시청자들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드라마를 보며 불쑥 불쑥 무심했던 마음들이 새삼 떠오른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하고픈 마음이 <폭싹 속았수다>의 눈물 버튼을 누르고 우리는 여지없이 울 수밖에 없다. (사진:넷플릭스)

‘눈물의 여왕’, 울지 않는 마녀 이미숙과 우는 남자들 김수현, 홍수철

눈물의 여왕

홍만대(김갑수) 회장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휠체어를 몰아 계단 끝에서 자신을 죽음을 향해 내던지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자신이 죽어야 모슬희(이미숙)라는 마녀의 손아귀에 들어간 퀸즈 그룹의 모든 것들을 다시 가족들에게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미소를 지으며 끝을 맺었을까. 복수의 의미도 담겨 있을 테지만, 가족들에게 보내는 따스한 마음의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극단적인 선택을 결행하기 전, 그가 홍해인이 두고 간 녹음기에 남겨뒀을 메시지가 궁금해진다. 거기에는 아마도 그 미소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줄 그의 마음이 담겨 있을 테니.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은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한 편의 ‘동화’ 같은 로맨틱 코미디다. 퀸즈가라는 왕궁에서 살아오던 공주 홍해인(김지원)은 온갖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고, 사랑했지만 그걸 표현하지는 못했던 남편 백현우(김수현)와 이혼한 데다, 모든 걸 모슬희라는 마녀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그 위기는 홍해인에게 그간 잊고 있던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퀸즈가에서 쫓겨난 백현우는 그걸 알게 해주는 흑기사 같은 인물이다. 그는 이혼했지만 홍해인 옆에 끝까지 남아 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 저 마녀가 장악한 퀸즈가를 되돌려 놓으려 한다. 그런데 이 흑기사 캐릭터는 우리가 동화에서 봐왔던 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흑기사다.

 

처가살이를 토로하며 술에 취해 흘리던 눈물은 어딘가 찌질해 보였지만 그의 눈물은 깊은 공감의 발현이라는 게 갈수록 드러난다. 홍해인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래서 그 도도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 이면에 담긴 아픔이나 상처를 공감한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린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이토록 우는 남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그 눈물은 약해서 흘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능력의 눈물이다. 그와 정반대 위치에 서 있는 모슬희나 그의 아들 윤은성(박성훈)이 눈물 한 방울을 보여주지 않는 모습과 대비해 보면 그 가치가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자신이 원하는 걸 갖기 위해 아들마저 보육원에 보내버리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모슬희는 괴물처럼 그려진다. 비뚤어진 모성을 가진 이 괴물은 아들을 학대한 양부모를 죽인 건 자신이라며 그것이 아들을 위한 자신의 마음이라 말하는 자다. 어찌 보면 윤은성에 대한 연민의 감정마저 들게 만드는 괴물 모성의 모습이 아닌가. 

 

‘눈물의 여왕’에는 또 한 명의 우는 남자가 있다. 그는 홍수철(곽동연)이다. 모슬희와 함께 사기를 치고 도망쳐버렸지만 그는 아내 천다혜(이주빈)와 아들 건우를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바보처럼 윤은성의 사기에 넘어갔고 능력자인 누나 홍해인에 대한 열등감에 눈이 멀어 그런 사건을 만들었지만 이 남자가 사랑하는 방식은 순정 그 자체다. 돌아와 용서를비는 천다혜 잘못을 저질렀지만 홍수철에 의해 구원받는다. 가짜 얼굴로 연기하던 그의 눈에는 눈물이 피어난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같은 문구가 여전히 화장실에 붙어 있을 정도로 남자의 눈물은 여전히 흘리지 말아야 할 어떤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이지만, ‘눈물의 여왕’은 정반대로 그 눈물이 가진 가치를 꺼내놓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눈물의 여왕’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눈물 흘리는 홍해인을 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차츰 그 의미가 새로워진다. ‘눈물 흘리는 남자 백현우의 여왕 홍해인’이라는 뜻으로. 그러고 보면 모든 걸 되돌리기 위해 마지막 최후를 맞이하며 보였던 홍만대의 희미한 미소는 또 다른 눈물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 이어령 선생님은 ‘눈물 한 방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눈물, 즉 박애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눈물이란 없다. 그것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다는 것을 이 드라마 속 새로운 남자들인 백현우나 홍수철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고 있다.(사진:tvN)

‘눈물의 여왕’, 김지원은 ‘행복한 왕자’ 같은 변화를 보여줄까

눈물의 여왕

“내가 어렸을 때 <행복한 왕자> 보고 느낀 건 딱 하나였어. ‘하여튼,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아니, 왕자 입장에서도 이런 데 살 때가 좋았겠지. 괜히 밖에 나갔다가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어? 보석이며 눈알이며 다 남 퍼주고 에휴, 쯧쯧쯧.”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해인(김지원)은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동화 <행복한 왕자>에 대해 현우(김수현)에게 그렇게 말한다. 

 

3년 전 너무나 사이가 좋았던 두 사람이 독일 포츠담 상수시 궁전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그 궁전이 바로 그 행복한 왕자가 살던 곳이었다는 현우의 이야기에 해인이 보인 반응이었다. 알다시피 <행복한 왕자>라는 동화는 생전 부유하게 살 때는 몰랐지만 마을 광장 높은 탑 위에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채 서있는 동상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의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이 많다는 걸 알고는 눈물을 흘리던 왕자의 이야기다. 그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제비에게 사파이어로 된 제 눈까지 떼서 나누어주는 이야기. 

 

<눈물의 여왕>이 갑자기 에필로그를 빌어 꺼내놓은 동화 <행복한 왕자> 이야기는, 해인이 현재 마주한 상황과 그로 인해 그가 겪을 변화를 예감하게 만든다. 퀸즈백화점 사장으로 도도하게 세상 위에 군림하며 살아왔던 해인은 갑작스런 희귀병으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변화를 겪는다. 먼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걸맞게 남편 현우에 대한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부정맥도 아닌데 남편 보고 심장이 떨리고, 어떤 날엔 남편 눈망울을 보면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어떤 날엔 남편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어진단다. 

 

물론 이 도도한 여왕이 그런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인하려하고 비서에게 마치 남이야기처럼 하는 장면은 어딘가 설레면서도 빵빵 터지는 코미디로 그려진다. 너무 섹시해보여서 세상에 내놔도 괜찮을까 싶어진다며 마치 남 이야기하듯 하는 해인의 이야기가 설레면서도, “진짜 꼭 병원 가 보라 그러세요. 아픈 거야 그건.”이라는 나비서(윤보미)의 자못 진지한 리액션은 여지없이 그 설렘을 깨고 들어와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하지만 이 코미디는 어딘가 진짜 해인에게서 벌어지는 심경의 변화에 대한 예고다. 주치의를 찾은 해인은 자신이 이상하다며 그 증상을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걸 보면 동정심이 생겨요.” 스스로 “피가 차가운 여자”였다며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는 해인은 자꾸만 “공감이 된다”는 ‘증상(?)’을 이야기한다. 사무실에 든 잡상인 남자에 화를 내다가 그의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있다는 이야기에 짐짓 나비서에게 화를 내는 척 그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까지만 봐줄 거라며 그 남자를 도와준다. 

 

아픈 엄마가 수술을 해야 하는데 시집 갈 때 쓸 돈이라며 수술을 하지 않으려 한다며 우는 직원의 이야기를 화장실에서 몰래 듣고는 “아픈 거야 고치면 되지 왜 울고 난리”라고 툴툴 대면서도 그 이야기에 공감되어 눈물을 보인다. “제가 원래 안 그랬거든요. 누가 아프거나 말거나 울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도 없었는데 왜 자꾸 공감이 돼죠? 남편 보고 설레질 않나? 아무래도 제 뇌가 정상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주치의에게 해인이 털어놓는 이 말은 그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해인은 이제 “안하던 짓”을 해보겠다고 공언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고 남들 다 하는 거 안하고 살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억울하단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거 이제 하면서 살겠단다. 그건 과연 ‘행복한 왕자’의 삶을 살겠다는 것일까. 경제성이니 효율이니 하면서 1조클럽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싶은 것들도 안하고 감정 또한 드러내지 않으며 ‘피가 차가운 여자’로 살아왔던 것 대신,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단다. 

 

<눈물의 여왕>은 이제 이 드라마의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 꺼내놓고 있다. 그 눈물은 아마도 저 ‘행복한 왕자’가 비로소 동상이 되어 마을을 들여다보고는 알게 됐던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향해 흘리는 것일 테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고, 눈물 따위는 결코 흘릴 것 같지 않았던 해인의 눈물은 그래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해인의 이런 변화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윤은성(박성훈)이 돈이면 누군가의 은인이자 가족이나 다름 없는 반려견을 죽여도 상관없다 생각하는 감정 없고 공감도 못하는 사이코 패스라는 점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분명하게 해준다. 약자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가진 것들을 다 내어주면서 드디어 진짜 행복을 찾아가는 해인과, 더 많은 걸 갖기 위해 감정 없는 사이코 패스처럼 살아가는 윤은성으로 대변되는 자본화된 비정한 세상에 대한 대결구도가 그것이다. 

 

해인은 사랑에 대해 윤은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행복한 걸 함께하면서 달콤한 말을 해주는 게 아니라 싫어서 죽을 것 같은 걸 함께 견뎌주는 거야. 어디에 도망가지 않고 옆에 있는 거.” 달콤함이 아니라 쓴 걸 함께 견뎌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그걸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다고 해인은 말하고 있다. 그는 불치병에 걸렸고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았지만 그래서 어떤 의미로 보면 그건 병이 아니라 어쩌면 고쳐지는 중인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눈물의 여왕>은 그래서 이 해인이라는 인물의 감정 변화를 기분좋게 꺼내놓는 과정이 작품의 메시지나 다름 없는 관건인 드라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역할을 맡은 김지원이라는 배우의 연기는 대체불가라는 생각이 든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만 같은 도도한 모습에서 마치 그 얼음이 녹아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그 변화를 이토록 설득력 있게 연기해내고 있으니. 그가 앞으로 할 ‘안하던 짓’을 계속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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