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 ‘사말’이 주는 감동의 실체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주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비가 내렸거든.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서 그 사람을 쳐다 봤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딴 생각에 잠겨 있는 거야. 그런 모습이 좀 쓸쓸해 보이더라. 근데 오늘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어. 나는 천둥소리를 듣고 놀랐지만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던 것처럼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나만 듣고 나만 알게 되는 일들이 생겨. 그걸 그럴 때마다 수어로 문자로 설명하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막막해져. 들리지 않아서 쓸쓸한 순간만 생각했는데 들려서 쓸쓸해지는 순간도 뭐 있을 수 있는 거구나. 그런 생각 들더라고.”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정모은(신현빈)은 친구 오지유(박진주)에게 미술관에서 송서경(이은재)과 권도훈(박기덕)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지만, 듣지 못하는 차진우(정우성)에게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심정을 그렇게 에둘러 털어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생겨나는 비밀이 만들어내는 쓸쓸함. 그건 듣지 못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만 생기는 쓸쓸함은 아니다. 그게 말이든 글이든 수어든, 근본적으로 완전한 진심이 소통되기 어려운데서 만들어지는, 결국은 혼자라는 쓸쓸함이다. 

 

정모은도, 차진우도, 송서경도 또 정모은의 절친인 윤조한도 비밀이 있다. 정모은은 자신의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다. 낳아주신 엄마는 따로 있다. 어려서 아빠와 엄마가 다투는 소리를 우연히 듣고는 그 사실을 알았다. 절친인 윤조한(이재균)은 정모은과 함께 시골집에 가서 우연히 보게 된 사진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정모은은 그 사실을 안 이후로 엄마가 “날 진짜 사랑하는 걸까. 사랑하는 척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고 한다. 어려서 불안하기만 해서 가졌던 그 어리석었던 생각들을 털어놓으며 그런 비밀은 몰랐으면 더 나았을 뻔 했다고 정모은은 털어 놓는다. 

 

차진우는 송서경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 있다. 학교에 불이 났었고 그로 인해 차진우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무슨 이유에선지 송서경은 아픈 말들을 잔뜩 쏟아붓고는 차진우를 떠났다. 차진우는 큰 상처를 받았지만, 세월이 한참 지나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 송서경에게 그 때 왜 떠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송서경에게는 비밀이 있지만 그건 지나간 과거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정모은은 차진우와 송서경 사이에 있었던 일이 궁금하고 그래서 차진우의 절친인 홍기현(박재준)을 찾아가 묻지만 그건 그 비밀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들이 신경쓰여서다. 고맙게도 홍기현은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면서 차진우의 마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거라고 정모은에게 말해준다. 

 

윤조한은 정모은을 좋아하지만 절친이고 정모은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 비밀을 털어 놓지 않는다. 대신 정모은이 출연하게된 드라마의 OST를 맡아서 만든 곡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 정모은은 모르겠지만 윤조한은 그렇게 멀리서나마 스스로의 마음을 전한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드라마지만, 불타오르는 사랑의 화려함보다는 그 여백으로 남아 있는 쓸쓸함이 더 짙은 여운을 주는 드라마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자기 감정을 자꾸만 차진우에게 드러내고 말하려는 송서경과 달리, 차진우도 정모은도 또 윤조한도 쉽게 말로서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말로 전해질 수 없는 진심이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쓸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 드라마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쓸쓸한 존재로서의 우리들을 인정하기 때문에,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진심이 전해지고 그 진심이 닿게 되는 그 순간의 감동은 더 짙다. 침묵한 채 따뜻한 시선으로 정모은을 바라만 보는 차진우의 마음은 그래서 그 침묵 속에서 더 잘 전해지고 그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 역시 그가 그리는 그림 속에서 더 잘 살아난다. 정모은의 진심은 차진우에게 쉽게 말하지 못하고 세심하게 고민하며 말을 아끼는 그 모습에서 드러난다. 

 

윤조한의 진심은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대신 음악을 들려주는 데서 드러나고, 낳아준 엄마는 아니지만 딸을 생각하는 정모은의 엄마 나애숙(김미경)의 마음은, 우연히 딸의 남자친구를 만났는데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게 걱정되어 “귀가 성치 않든 고아든 간에 지가 좋아서 만난다는데 ‘그래 니가 좋으면 나도 좋다’ 시원하게 그 한 마디를 못해준 것”을 후회하며 눈물 흘릴 때 절절히 드러난다. 

 

때론 말하지 않을 때, 차라리 비밀로 남겨둘 때 그 침묵을 또 비밀을 알아봐주는 이에 의해 오히려 더 진심이 전해지는 순간이 있다. 차진우의 전시회에 온 어느 마지막 손님이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왜 눈물을 흘렸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정모은에게 그녀는 말한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혼자 이 고즈넉한 연못을 바라보면서 화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살았고 어떤 이유에서 이런 그림을 그리게됐을까 떠올려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제 넘죠? 그림 한 장으로 그 사람의 삶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건 결코 주제 넘은 일이 아니다. 수천, 수만의 단어를 동원해도 알 수 없던 누군가의 삶의 진실을 우리는 순간을 포착해낸 그림 한 장으로 때론 아름다운 가사를 담은 노래 한 곡으로 알아보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던가. 그 그림 앞에서 눈물 흘렸던 사람처럼, 우리는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해줘>가 주는 감동과 여운을 마주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을 느끼며. (사진:지니TV)

‘나쁜 엄마’, 웃기면서 울리는 배세영 작가 필력에 모두가 인생연기

나쁜 엄마

“진영순이 너 나와! 너.. 어떻게 나한테 이랴. 어떻게 나한테 끝까지 이랴. 나 미친 년 만들어놓고 어딜 간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나는 인정 못햐. 야 요즘 세상에 죽을병이 어딨어? 아니, 못 고치는 병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당장 가서 고쳐 와 이년아! 너 아무 데도 못가 이년아. 그러니까 내 옆에서 평생 나랑 싸워야지, 이년아, 이년아.” 

 

JTBC 수목드라마 <나쁜 엄마>에서 영순(라미란)이 위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박씨(서이숙)는 영순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낸다. 그런데 그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목소리는 감정을 주체 못해 떨린다. 아들 삼식(유인수)이가 도둑질에 감방까지 갖다 와 영순의 아들 강호(이도현)와 늘 비교되는 걸로 마음의 앙금이 있어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그러면서도 영순을 동생처럼 챙기는 따뜻한 인물이 바로 박씨다. 

 

화를 내지만 절절한 마음이 깃든 박씨의 이 묘한 대사는 <나쁜 엄마>의 무엇이 이토록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 끌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배세영 작가는 희비극에 능수능란한 베테랑이다. 코미디를 잘 쓰고, 무엇보다 캐릭터를 생생하게 만들어내는 이 작가는 그 웃음 속에 깃든 삶의 비의나 페이소스를 정확히 알고 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코미디의 웃음에는 저마다의 비의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이 작가는 즐거운 반전을 보여주는 인물들과 톡톡 튀는 대사들을 통해 그려낸다. 

 

박씨 역할을 한 서이숙의 연기가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빛이 나는 건 이런 캐릭터의 매력이 이 베테랑 연기자의 연기력을 쿡쿡 찔러 끄집어내기 때문일 게다. 이건 서이숙만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이미주(안은진)와 그의 엄마 정씨(강말금)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이 두 사람의 연기자로서의 매력은 피어난다. 딸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정씨는 딸이 강호를 좋아하는 걸 반대한다. 강호가 제 정신으로 돌아온 줄 모르는 정씨는 딸이 자기처럼 남편 수발하느라 인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 역시 영순을 친 동생처럼 여기고, 그래서 그의 아들 강호가 사고로 7살 기억으로 돌아간데다, 영순마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슬퍼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주 앞에서는 아이들이 강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들의 관계를 반대한다. 딸 걱정 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다. 그런 반대에 미주가 던진 한 마디는 정씨를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든다. “엄마 닮아서.” 미주는 아빠가 그렇게 속을 섞였어도 끝내 아빠를 챙겼던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꺼내놓는다. 미주에게 아빠라는 존재를 엄마가 끝내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다. 

 

<나쁜 엄마>는 이처럼 인물을 단편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 인물이 가진 여러 결들을 겹쳐놓고 그래서 반전의 매력을 꺼내놓는다. 윤항기가 부른 “나는 행복합니다-”를 습관처럼 들으며 애써 밝게 살아가는 영순 역할의 라미란이 그 밝음 밑에 깔린 깊은 상처를 통해, 그 강박 같은 습관이 사실은 불행했던 삶의 깊이를 말해주는 거라는 것까지 표현해낸 것처럼, 차가운 검사에서 7살 아이 같은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따뜻한 강호의 본 모습을 연기한 이도현에게서는 이제 한층 깊어진 연기의 맛이 느껴진다.  

 

도둑질을 하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가볍디 가벼운 방삼식이라는 인물을 연기한 유인수도 그렇다. 그 가벼워 보이는 인물의 뒤에 숨겨져 있는 선한 면모들이 유인수라는 연기자를 통해 제대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조우리 마을 사람들 역할을 한 김원해, 장원영은 물론이고 아역의 기소유, 박다온 또 짧게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트롯백 역할의 백현진에 이 마을에 들어와 어쩌다 ‘귀농 청년’이 된 소실장, 차대리 역할의 최순진, 박천, 또 늘 얼굴에 팩을 한 채 등장했던 이장부인 역할의 박보경까지 <나쁜 엄마>에는 빈틈없이 채워진 인생연기들이 가득하다. 

 

드라마의 긴장감을 끝까지 챙겨준 송우벽, 오태수 역할의 최무성, 정웅인과 그 악역의 희생자가 된 오하영 역할의 홍비라도, 또 카메오로 출연한 류승룡도 빼놓을 수 없다. 배세영 작가는 이 여러 인물들이 겹쳐진 사건들을 코미디와 스릴러, 휴먼드라마를 오가며 풀어가면서도 출연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들의 패러디까지 집어넣는 여유를 선보였다. “지금까지 이런 마을은 없었다. 이것은 조우리인가 천국인가....” 류승룡이 등장해 <극한직업>을 패러디한 대사를 선보이는가 하면, 방삼식과 함께 이미주가 병원에 감금된 오하영을 구출할 때 의사 옷에 안경을 낀 미주를 보며 “아주 슬기로워 보여”라고 하는 대목으로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패러디했다. 

 

<나쁜 엄마>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으로만 주목받았던 배세영 작가가 드라마 작업에서도 베테랑다운 작품 세계를 펼쳐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코미디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그래서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을 끄집어내는 이 작가가 들려준 반어법은 비정한 세상을 꼬집는 사회적인 의미까지 담았다. 나쁜 엄마가 아니라 나쁜 세상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벌써 아쉽게도 끝을 내려는 ‘나쁜 드라마’다. 시청자들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아놓고 떠나는 이 드라마에 대한 여운이 이토록 진하게 남았는데. 먼저 간다는 영순에게 “아무 데도 못가 이년아”라고 말하는 박씨의 마음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사진:JTBC)

‘사랑이라 말해요’, 이광영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쌓은 감정의 더께

사랑이라 말해요

“캠핑을 중학교 입학하면서 대홍 아저씨한테 처음 배웠어요. 그 때는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불렀었고. 어머니가 결혼하셨던 분들 중에 처음으로 아버지라고 불렀던 분인데 3년만인가? 어머니가 다른 분하고 다시 결혼을 하셨어요. 그 때 아저씨는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캠핑한다고 전국을 떠돌고 나는 그 때부터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울타리 안에서 살아 본 적이 없었어요. 내 어머니는 내 약점이에요.”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이라 말해요>에서 동진(김영광)은 우주(이성경)에게 자신의 약점을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 속에는 그가 왜 캠핑을 좋아하게 됐고 캠핑 전시 관련 일을 하다 회사까지 차리게 됐는가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그의 엄마가 왜 그가 못 견딜 정도의 약점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도 들어있다. 특히 ‘제대로 된 울타리 안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는 말은 못내 가슴을 후벼 판다. 

 

그건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행복감을 주는 그런 심리적인 의미의 집이다. 그는 마음 둘 데가 없었고 그래서 집이 아닌 캠핑을 할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그 말을 들으며 우주는 어쩌면 동진이 퇴근 길 유난히 쓸쓸하게 보이는 ‘축축한 등’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버젓이 넓은 집이 있지만 퇴근해도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거리를 배회하던 그 등짝을.

 

동진이 우주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곳은 바로 그가 살고 있는 집이다. 그 집은 동진 홀로 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하다. 어둠이 그를 삼켜버릴 듯이 축 가라앉아 있고, 우주의 표현처럼 금방 이사를 간다 해도 믿을 정도로 가구도 없고 냉장고도 텅 비어있다. 온기가 없다. 그런데 동진이 우주와 함께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여전히 어둑하지만 어딘가 포근하다. 마치 캠핑을 온 것처럼 창가에 의자를 나란히 놓고 적당히 떨어져 앉아 차를 마시는 그들 사이에는 영상으로나마 모닥불이 타 오른다. 

 

이광영 감독은 이 장면을 문밖에서 그 문의 프레임 안에 마치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담아내는데, 그래서인지 너무 넓어서 휑하고 쓸쓸하기만 했던 집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을 준다. 작아서 귀엽고 오밀조밀한 공간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와 눈빛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오늘 자고 갈래요?”라고 조심스럽게 던지는 동진의 말에 우주가 그저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장면은 그래서 더 애틋해진다. 그건 이 두 사람이 더할 나위 없는 자신들만의 공간 속에 들어왔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동진이 깨어나 먼저 나간 우주가 챙겨 놓은 밥을 먹는 장면은 이전에 그가 혼자 먹던 장면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광영 감독은 이 작품에서 유독 인물들의 뒷모습을 많이 담아내는데, 동진의 뒷모습은 그가 살고 있는 집처럼 덩치가 커서 오히려 더 쓸쓸한 모습으로 담겨지곤 한다. 하지만 우주와의 하룻밤을 보내고 깨어나 동진이 아침을 먹는 장면에서는 창가에서 마치 축복처럼 햇볕이 쏟아진다. 그리고 카메라가 뒤로 빠져나가면 거기 우주가 동진을 위해 아침을 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마치 한 장면인 것처럼. 홀로 아침을 먹고 있어도 동진의 뒷모습이 왠지 축축해보이지 않는다. 

 

<사랑이라 말해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작품에서 이광영 감독의 연출이 만들어내는 지분은 절대적이다. 이광영 감독은 인물들을 프레임에 담을 때 그저 서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담지 않는다. 그보다는 감정을 담아내려 한다. 부감으로 찍을 때와 정면으로 담을 때 그 안에 인물이 어떤 정도의 크기로 어느 위치에 들어가야 그 때의 감정이 살아나는가를 세심하게 배려해서 담는다. 

 

그건 동진의 회사에 앙심을 품고 망하게 하려고 한 신대표가 회사를 찾아와 최선우(전석호)가 대들면서 난리가 났을 때 모든 직원이 일어서 있는 상황 속에 동진과 우주만 자리에 앉아 있는 장면 같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 앉은 눈높이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칠 때 전해지는 감정선 같은 걸 이광영 감독은 놓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연출이 가능한 건 인물들의 감정을 세심하게 담아내는 대본과 대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좋은 대본이 있어도 연출이 그 감정을 켜켜이 쌓지 못하고 훑어지나가 버리면 그 느낌이 살 리가 없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멜로 연출의 맛에 시청자들은 우동커플(우주와 동진) 얼굴만 봐도 눈물 나는 먹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진:디즈니+)

‘사랑이라 말해요’가 말하는 사랑이란

사랑이라 밀해요

“세상 외로워 보이고 세상 심심해 보이는 그 등짝이 제일 별로라고. 겉만 멀쩡하면 뭐해? 그런 축축한 등짝을 달고 사는데. 미련해 보여서 싫어.”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이라 말해요>에서 우주(이성경)는 동진(김영광)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애증이 담겨있다. 그건 다름 아닌 ‘불쌍하다’는 이야기지만, 우주는 애써 그게 ‘별로’이고 ‘싫다’고 한다. 

 

이 복합적인 감정은 우주가 동진에게 접근한 이유에서부터 비롯된다. 우주가 동진의 회사에 계약직으로 들어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그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내연녀였던 마희자(남기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마희자는 우주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내연녀 마희자 때문에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엄마는 화를 속으로 삭이다 암에 걸렸다. 겨우 언니와 동생과 함께 버텨가며 살았지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들이 살던 집조차 마희자가 빼앗아버린다. 우주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지경에 이른다.   

 

“매일 매 순간 매 초마다 생각했어. 내 주제에 무슨 복수냐. 관두자. 참는 게 남는 거다. 근데 이거 내 생각이 아니라 우리 엄마가 입에 달고 산 말이거든? 나는 여전히 그 때 우리 엄마가 그 아줌마 머리채라도 잡았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럼 적어도 암은 안 걸렸을 거 같아. 그래서 난 뭐라도 해야겠다고. 안 그럼 내가 미쳐버릴 것 같거든.” 

 

그런데 그렇게 복수하기 위해 동진의 회사에 들어온 우주는 가까이서 이 남자를 들여다보며 연민을 느낀다. 지독히도 당하고 아프게만 살아가는 사람인데 뭐 하나 아프다고도 말하지 않고 항변조차 않는 남자. 그의 주변에는 배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7년 만났던 애인이 배신했고, 살뜰하게 자신이 가정사까지 일일이 챙겨줬던 거래처 본부장이 배신을 했으며, 직원마저 회사를 망하게 하기 위해 내부 정보를 빼돌리는 배신을 했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그 배신의 상처 앞에 이렇다 할 말 한 마디를 토로하지 않는다. 애인이 배신했을 때는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고, 배신한 거래처 본부장을 찾아가 “술 적게 드시고 건강 챙기라”고 말한다. 직원의 배신을 알고도 그는 대놓고 뭐라 하지 않는다. 라이벌업체의 신대표(신문성)가 그 배후인 걸 알고 그 사실을 드러내면 또 다른 직원에게 접근할 거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뭐라 항변도 하지 않고 늘 당하기만 하는 그가 우주는 몹시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혼자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힘겹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눈에 밟히고, 비틀대다 차가 달려와도 마치 그대로 죽고 싶다는 듯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애써 끌어당겨 구해낸다. 그러면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우주는 끝없이 대놓고 동진에게 속에 있는 날이 선 말들을 쏟아낸다. 그러자 참다못한 동진이 드디어 입을 연다. 

 

“근데요, 그렇게 매번 속에 있는 말 다 하고 살면 편해요? 심우주씨 눈엔 다른 사람들이 미련해서 참는 거 같은가 본데, 속에 있는 말 다 해버리면 실시간으로 내 말에 상처받는 얼굴들 보고 있어야 하니까. 그게 참는 거보다 더 고역이라서 안간힘 쓰는 사람도 있어요.” 동진의 그 말은 우주를 주춤하게 만든다.  

 

<사랑이라 말해요>에서 우주와 동진의 관계는 결코 사랑처럼 시작하지 않는다. 아니 복수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복수의 마음은 우주가 동진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누그러지고 어떤 지점에서는 지독히도 상처받은 이들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게 만든다. 한없이 저마다의 세상에서 눈물을 삼키며 버텨내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지치고 지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때 알 수 없는 뭉클함이 솟아오르는 건 그래서다. 그 눈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도 아파? 나도 그래. 

 

우주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고, 정반대로 동진은 뭐라도 하면 누군가 상처를 입는 걸 봐야하는 걸 견디지 못해 아무 것도 하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상반되어 보이지만, 이 두 청춘의 공통점은 그래서 그 참혹한 현실 앞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모들 사이의 관계로 들여다보면 결코 가까워지면 안 될 것 같은 두 사람이, 차라리 잘 됐으면, 그 아픔을 서로가 보듬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김영광은 <썸바디>의 그 살벌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한없이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동진을 뒷모습마저 공감하게 만들고, 이성경은 그저 밝기만한 청춘의 이미지를 탈피해 한없이 텅 빈 슬픈 눈빛으로 톡톡 쏘아대는 상반된 모습을 통해 이 복합적인 감정의 인물을 놀라울 정도로 잘 소화해내고 있다. 여기에 밑바닥을 긁는 주인공들의 축축함을 순식간에 말려주는 신스틸러 성준과 김예원, 전석호의 연기가 더해져 <사랑이라 말해요>는 균형 잡힌 드라마가 됐다.   

 

그래서 <사랑이라 말해요>가 말하는 사랑이란 뭘까. 어른들에 의해 꼬이고 꼬인 관계 속에 놓여 있고 그래서 참 많은 설명과 설득이 필요한 관계지만, 둘 다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만 봐도 서로를 이해하고 행복감이 느껴지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어떤 것. 그걸 이 드라마는 사랑이라 말하고 있다. (사진: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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