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 강용석과 일반인 강용석

 

SBS 박상도 아나운서가 자유칼럼그룹에 게재한 ‘강용석의 변신은 무죄?’라는 칼럼은 강용석이 방송으로 일종의 ‘이미지 세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한때 우리가 강용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정서를 갖고 있었던가를 떠올려보면 지금의 이미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

 

'썰전(사진출처:JTBC)'

혹자는 사적인 장소에서의 말 한 마디가 무슨 주홍글씨나 되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문제의 아나운서 비하 발언이 나왔던 장소가, 비록 대학생들과의 술자리였다고 하나 그것을 사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평소 친분이 있던 대학생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치인이라는 공인으로서 대학생과 만남을 가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걱정이랍시고 아나운서 지망한다는 여학생에게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 수 있겠느냐”고 일종의 ‘조언(?)’을 했던 것이다.

 

아나운서라는 특정 직업이 나왔기 때문에 아나운서 협회가 고소장을 냄으로써 이 문제만 불거졌지만, 사실 그 자리에서 나왔다는 다른 이야기들은 이 땅의 여성들 모두가 불쾌함을 느낄만한 것들이었다. “심사위원들은 토론 내용을 안 듣는다. 참가자들의 얼굴을 본다.”는 말이나, 청와대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여학생에게 “그 때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 남자는 다 똑같다. 예쁜 여자만 좋아한다”면서 “옆에 사모님만 없었으면 네 번호도 따갔을 것”이라고 한 발언은 심지어 사석이라도 정치인이라면 내놓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2년 전 <개그콘서트> 의 '애정남'으로 한창 주가를 날리던 최효종을 고소했을 때 마치 공공의 적처럼 강용석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던 것은 그런 행위가 어떤 정치적 신념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자신의 대중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이용’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강용석이 최근 방송을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 모으고 있는 것은 박상도 아나운서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방송이라는 마법이 만들어낸 ‘잘못된 기적’처럼 보인다.

 

국민 비호감으로 전락해 정치권에서조차 퇴출된 인물이 오히려 방송가의 뜨거운 인물로 급부상한데는 그만한 이미지 변신 전략이 깔려 있다. 강용석은 먼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식으로 방송 이미지를 확보했다. <슈퍼스타K>에 출연해 오디션을 본 것은 그저 뜬금없는 행위가 아니었던 셈이다. 정치인으로서는 고소남으로 이미지화되었던 그는 방송인으로서는 지적질을 당하는 입장에 자신을 세웠던 것.

 

비호감 정치인은 스스로 대중들이 돌팔매질 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방송으로서의 입지를 마련한 셈이다. 게다가 그가 정치인으로서 변호사로서 갖고 있는 정보들은 지금의 예능 프로그램의 MC들과 어떤 차별화를 만들었다. 늘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비슷비슷한 예능 프로그램의 멘트들과는 다른 ‘전문적인 느낌’이 주는 신선함이 거기에는 있었다. 강용석 이미지의 마법 같은(?) 변신은 이처럼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방송이 가진 힘이 작용했던 것이다.

 

박상도 아나운서의 글은 그래서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왜 이 글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는 걸까. 여기에는 그가 글에 호명한 ‘대중’이라는 글귀에 대한 서로 다른 정서가 들어있다. “이런 그의 행태를 보면서 ‘그냥 웃자고 한 말이겠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마음 한구석에서 ‘도대체 대중이 얼마나 우스우면 저럴까?’하는 분노가 생겨납니다.” 여기서 박상도 아나운서가 하려는 말은 대중은 무섭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이 말은 강용석이라는 인물이 이렇게 급호감으로 바뀐 것에 대한 비판의 글들과 뒤섞여 정반대로 읽힐 소지도 있다.

 

즉 대중들이 강용석을 좋아하게 된 것에 대해 박상도 아나운서가 ‘우스운 대중’ 운운하며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박상도 아나운서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이미지도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끌어와 포장하려는 방송이며, “사석에서는 이처럼 좋을 수 없다”는 일반인으로서의 강용석이 아니라 정치 일선에서 공인으로서는 하지 말아야할 일들을 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방송인이라는 공인으로 서 있는 강용석에 대한 것이다.

 

물론 한 번 잘못하면 영원히 퇴출되어야 한다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방송인에 대한 대중들의 허용은 일종의 정서적인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다른 방송인들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을 때 일종의 자숙기간을 갖는 것은 대중들에 대한 예의다. 하지만 강용석은 그런 기간이 없었다는 것. 잘못에 대해 사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말 한 마디로 모든 걸 쉽게 뒤집는 건 어딘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썰전>에서 허지웅은 “<썰전>이 강변호사한테는 <힐링캠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강용석 변호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의미도 들어 있다. 시청자들은 <힐링캠프>를 때로는 문제 연예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프로그램처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는 점이다. 박상도 아나운서가 제기한 문제제기는 그래서 그저 강용석 한 사람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작금의 방송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지는 면이 있다.

<화신>, 포장지만 바꾼 신변잡기 토크쇼의 한계

 

김희선이라는 예능의 새 얼굴은 신선하다. 신동엽의 콩트와 순발력은 여전히 발군이다. 윤종신의 주워 먹기 토크도 살아있다. 최강 솔직함을 보여준 강혜정, 의외의 애교만점 예능감을 선사한 정만식, 거침없는 19금 입담을 선보인 소이현 등등 매 회의 게스트진도 약하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족하다. 부제로 ‘마음을 지배하는 자’를 달고 있는 <화신>이지만 시청자들의 마음을 지배하지는 못하고 있다.

 

'화신'(사진출처:SBS)

화려한 포장지로 잘 포장되어 있어 뭔가 특별한 선물인 줄 알았는데 막상 뜯어보니 늘 봐왔던 흔한 선물이다. 게다가 이 선물은 받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선물 준 사람이 마치 자신을 뽐내기 위해 준비한 것처럼 보인다. <화신>은 그런 선물 같다. 선물이라고 받았으니 즐겁긴 한데 별로 남는 의미나 강렬한 인상은 없는.

 

<화신>의 ‘문제의 발견’은 신동엽의 <헤이헤이헤이>를 재연한 듯 하고, 설문을 가져다 연예인들의 자기 경험을 빗대 얘기하는 부분은 <야심만만>을 보는 듯하다. 물론 <헤이헤이헤이>나 <야심만만>은 훌륭한 형식이지만(그래서 그 조합 역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이 형식들이 지금의 대중들의 정서를 담고 있느냐는 것이다.

 

만일 <야심만만>이 연일 화제를 끌어 모으던 시절이었다면 지드래곤이 나와서 털어놓는 자신의 연애경험이나 김경호가 최초로 13살 연하의 일본인 여자 친구가 있다는 고백 자체가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은 그 때와는 정서가 달라졌다. 당시 2003년에는 연예인의 신비주의가 벗겨지기 시작하던 시절로서 그들의 맨 얼굴이 담겨진 이야기 자체가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3년 현재, 완연한 대중의 시대가 열린 지금 연예인의 일상은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상대를 내 애인으로 만들 결정타, 남녀 1위는?’에 지드래곤이 과감한 스킨십을 얘기한다고 해도, 또 ‘당장 헤어지고 싶은데... 이별의 발목을 잡는 것, 남녀 1위는? ’에 대성이 아픈 여자 친구 때문에 여권을 잃어버린 척 하고 해외 공연에 가지 않은 사연을 털어놔도 그다지 흥미롭지가 않다. 왜 그럴까. 그것이 내 얘기가 아니라 저들의 이야기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과거 <야심만만>이 연예인 신변잡기에 머물러 있었어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비주의가 벗겨져 나가는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훌륭한 형식은 우리와 연예인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시켜 주었다. <화신>은 여전히 이 공감대를 내세우고 있지만, 요즘은 대중이 ‘왜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채워줄 수 있어야 공감대가 생기는 시대다. 이제 연예인의 이야기라고 해서 무조건 귀를 세우는 시절은 지나갔다는 얘기다.

 

심지어 예능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던 설경구가 나와 자신의 깊은 속내를 드러낸다고 해도 그것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저들의 이야기라고 여겨질 때 대중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하물며 이렇게 강한 이야기도 먹히지 않는데 <화신>처럼 겉만 살짝 드러내는 이야기가 약하게 여겨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토크쇼에서 연예인 프리미엄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한참 저들의 이야기에 웃기는 했는데 그게 우리에게 어떤 감흥이나 의미를 남기지 못했을 때 TV를 끄고 현실로 돌아온 우리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점점 더 저들과는 달리 힘겨워지는 현실은 그 괴리감을 더욱 높이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고 의미에 빠져 침잠하는 것은 예능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음을 느끼게 해주는 건 중요한 일이다.

 

<화신>이 부제와는 걸맞지 않게 대중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은 그 형식이 여전히 매력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주제가 2003년 <야심만만>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마음을 지배하려면 먼저 대중의 지금 현재 관심사를 끌어와 대중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화신>은 심지어 19금 토크를 하는 연예인의 속내로 파고들기보다는 진솔하게 대중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 마음을 지배할 수 있을 테니까.

무엇이 악동뮤지션과 방예담을 갈랐나

 

<K팝스타2>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두 팀을 고르라면 단연 악동뮤지션과 방예담이 될 것이다. 그런데 톱6가 결정되면서 이 두 팀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다음에서 진행된 누구의 무대가 제일 좋았느냐는 투표에서 악동뮤지션의 ‘크레센도’는 무려 71.5%가 지지해 1등을 차지한 반면, 방예담의 ‘I do'는 2.5%로 꼴찌로 랭크된 것. 물론 포털의 투표가 얼마나 공신력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대중들의 마음을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K팝스타2'(사진출처:SBS)

실제로 톱6 결정전에서 방예담은 그다지 좋은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음정은 떨렸고, 어딘지 자신 없는 듯한 목소리와 몸짓은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대중들은 이전부터 방예담에게 쏟아지는 심사위원들의 극찬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대중들이 TV로 보기에는 예쁜 목소리와 가능성을 가진 아이의 무대 정도라고 생각했던 데 반해, 심사위원들은 방예담의 무대만 보면 놀랍다는 표정을 연실 보여주었고, “천재” 심지어 “무섭다”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악동뮤지션에 대한 반응은 또 대중들과 심사위원이 정반대였다. 심사위원은 연거푸 대중성 부족을 들어가며 악동뮤지션의 부족한 면을 지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중성의 장본인인 대중들은 투표를 통해 악동뮤지션을 지지했고, 또 자작곡이 발표(?)될 때마다 음원 차트 1위에 올라가게 만들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가진 특징(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을 보여주면 오히려 투표가 집중되는)이 있고 제작진이 어떤 운용의 묘를 발휘했다고 해도 악동뮤지션의 노래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무엇이 방예담과 악동뮤지션의 희비쌍곡선을 만들었던 것일까. 이 사례에서 보여지는 건 이른바 ‘칭찬의 역효과’라는 교육이론의 한 대목이다. ‘칭찬의 역효과’란 아이들(성인도 포함된다)에게 하는 칭찬이라는 것이 거꾸로 아이들에게 기대에 대한 부담감을 만들고, 또 과정 그 자체보다는 결과에 집착하게 만듦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해가 된다는 이론이다. 한 마디로 칭찬을 많이 받은 아이는 바로 그 칭찬에 집착하게 되어 의존적이 되고, 더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보다는 칭찬받을 수 있는 쉬운 시도만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

 

이 ‘칭찬의 역효과’를 통해 바라보면 방예담에게 그토록 쏟아졌던 극찬 세례는 사실상 그를 성장시켜주기보다는 오히려 가능성을 제한시켜버린 결과로 이어졌을 수 있다. 부담감은 점점 커졌을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칭찬만 받던 아이가 비판을 받았을 때는 그 상처도 더 클 수밖에 없다. 반면 악동뮤지션에게 유독 냉철했던 심사평들은 거꾸로 이들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시켰을 수 있다.

 

이렇게 ‘칭찬의 역효과’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앤드류 최가 어떻게 점점 안정적이고 꾸준한 무대를 선보일 수 있었는지가 보인다. 양현석이 얘기한 것처럼 앤드류 최는 사실상 그다지 큰 기대를 받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고, 적절히 받는 심사위원들의 조언들은 그대로 앤드류 최에게는 뼈가 되고 살이 되었을 것이다. 앤드류 최는 대단히 감미로운 목소리에 절정의 가창력, 게다가 풍부한 음악 경험까지 갖춘 <K팝스타2>의 무시 못 할 우승후보로 올라선 것이 사실이다.

 

흔히들 교육에 있어서 ‘당근과 채찍’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사람은 당나귀가 아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조직관리라는 어찌 보면 비인간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칭찬보다 중요한 건 진심어린 조언이다. 특히 방예담이나 악동뮤지션처럼 어린 친구들에게는 지금 당장의 칭찬이 주는 달콤함(사실상 기대감과 부담감을 만드는)보다 진심어린 조언이 주는 자존감(구체적으로 어떤 걸 더 보완하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유승호는 왜 연예인 특혜를 거부했을까

 

이 친구가 정말 <집으로>에서 그 전형적인 도시 아이 역할을 연기하던 그 꼬마가 맞단 말인가. 어느새 훌쩍 자라 군 입대를 한 유승호에게서는 단지 아역스타의 아우라에 기댄 연예인이 아니라 제대로 성장한 개념 사회인의 모습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렇게 젊은 청년에게서 이토록 당당한 모습이 주는 흐뭇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을까.

 

사진출처:유승호 팬카페

연예인에게 있어서 병역 문제가 특히 대중정서에 민감한 이유는 특혜 시비 때문이다. 군대가 무엇인가. 사회에서 제아무리 날고 기는 배경과 학벌(심지어 나이까지)을 가졌다고 해도 들어오는 순간 군복과 계급 아래 모든 게 새로운 체계 속으로 들어가야 맞는 조직이다. 하지만 실상이 그런가. 아마도 돈 없고 줄 없는 서민들에게는 그렇겠지만, 특권층들에게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갖은 병역 비리와 기피가 불거져 나오고 그것이 대중들의 정서에 불을 붙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은 이 몇몇 특권층이 저지르는 병역 비리에 대한 반감이, 어쩌면 연예인이라는 도드라진 존재들에게 집중적으로 폭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군 입대를 거부하고 미국 국적을 가짐으로써 영원히 국내에 발을 못 붙이게 된 유승준의 사례는 그 분노의 감정이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준다. 최근 비로 인해 불거진 연예사병에 대한 논란 역시 바로 이러한 정서에서 비롯된다.

 

물론 연예사병의 실상은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과 상관없이 대중들에게는 연예사병이라는 존재 자체가 특혜처럼 비춰지는 경향이 있다. 아니 입대하는 과정이 무슨 거대한 이벤트나 되는 것처럼 방송되는 것 자체가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풍경으로 여겨질 수 없다. 심지어 단 몇 주면 끝나는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면서도 팬클럽을 모아놓고 떠들썩하게 이벤트를 벌이지 않았던가.

 

이들은 그런 떠들썩한 이벤트가 다른 입대 장병들에게 줄 상대적 박탈감을 생각해봤을까. 아마도 이런 상황 때문일 게다. 유승호의 너무나 ‘조용한 입대’가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그저 팬 카페에 올린 유승호의 20초 남짓 입대영상에는 그저 군대 다녀오겠다는 담담한 몇 마디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 <집으로>의 그 귀엽기만 했던 꼬마는 어느새 이렇게 훌쩍 자란 청년이 되었다. 드라마 <보고싶다>를 통해 과거 아역의 이미지를 훌훌 털어버리고 성인 연기자로서의 아우라를 한껏 드러냈던 그가 아닌가. 어찌 보면 이제 한껏 날개를 펼 시점에서 군 입대를, 그것도 연예사병이 아닌 일반병으로, 그것도 자청해서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유승호의 남다른 개념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사실 연예인에게는 대학 진학 또한 특혜가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대학으로서는 연예인의 인지도를 대학 인지도로 끌어올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연예인 특례입학이 하나의 관행처럼 되었던 것. 하지만 유승호는 연예인 특례입학을 거부하고 그 이유로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도 학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는 것과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연예사병과 특례입학 같은 연예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특혜에 대한 거부는 거꾸로 유승호의 연기자로서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즉 최고의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서 군 입대를 결정할 만큼 언제 돌아와도 다시 연기로서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고, 학력이 아니라 오로지 연기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군대 생활 역시 이 땅에 살아가는 연기자로서는 대중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 아닌가.

 

누릴 수도 있었을 일련의 연예인 특혜를 거부한 유승호는 그래서 온전히 대중들을 위한 연기자 인생에 대한 출사표를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장 눈앞의 인기나 편안함이 아니라 대중들을 대변하고 대중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앞으로 길게 이어질 연기자로서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 그래서 조용한 유승호의 군 입대는 마치 그의 연기자 선언 같은 인상마저 준다. 이제 겨우 입대했지만 벌써부터 기대된다. 다시 돌아와 한층 성숙해진 연기를 보여줄 유승호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