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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과 ‘타짜’, 드라마와 영화 그 엇갈린 반응 왜?

왜 같은 허영만 화백의 만화이면서 드라마 ‘식객’은 되고 ‘타짜’는 잘 안 되는 걸까. 또 아이러니 하게도 이 상황은 왜 영화에서는 거꾸로, 즉 ‘타짜’는 되고 ‘식객’은 안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두 작품은 그 소재에 있어서 각각 적합한 매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즉 ‘식객’은 드라마가 더 적합했고, ‘타짜’는 영화가 더 적합했다.

‘식객’과 ‘타짜’, 그 다른 이야기 구조
‘식객’이 드라마에 더 적합했던 첫 번째 이유는 그 원작의 특징이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병렬적으로 이어놓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시리즈로 방영되는 드라마가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담기에 더 유리했고, 상대적으로 영화는 두 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 안에 그것을 소화해내기가 부담이 되었다. 영화와 드라마 모두 운암정을 사이에 둔 봉주와 성찬의 대결구도가 그 메인이 되고 그 뼈대 위에 소소한 이야기들이 살처럼 박혀있는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두고 볼 때, 이러한 반응의 차이는 서로 다른 매체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타짜’는 그 이야기 구조가 ‘식객’과는 다르다. 물론 허영만 화백 특유의 취재에 근거한 리얼한 에피소드들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주인공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즉 편편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연결고리를 유기적으로 갖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평경장 같은 한 인물의 이야기는 ‘식객’처럼 그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인물들과 계속 이어지게 되어 있다. 이러한 ‘짜여진’ 구조는 드라마처럼 늘여서 보는 것보다 영화처럼 압축적으로 보는 것이 더 흥미진진하기 마련이다.

영화여서 담을 수 있는 것, 드라마여서 못 담는 것
‘식객’은 그 소재 자체가 음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TV 방영에 있어서 부담이 없다. 하지만 ‘타짜’는 다르다. 도박이라는 소재는 여러모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위험성이 있다. 실제로 손가락이나 손목을 걸고 하는 도박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영화는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다. ‘타짜’가 영화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저 홍콩도박 영화들이 가진 선악구도의 개념 자체를 뛰어넘는 도박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물론 ‘타짜’에도 주인공이 있고 그와 대립하는 아귀라는 절대적인 악이 존재하지만, 주인공이라고 해서 선한 존재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저 도박이라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 ‘타짜’는 바로 이런 캐릭터들이 존재했다. 아귀나 정마담은 악한 인물이면서도 이 타짜의 세계를 통해 보면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 ‘타짜’에는 분명한 선악 구도가 나뉘어져 있다. 고니(장혁)는 ‘착한 타짜’고 아귀(김갑수)는 ‘악한 타짜’가 된다. 고니가 도박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것이지 도박 자체에 매료된 탓은 아니다. 이것은 드라마로서 도박이라는 사행심리를 자칫 부추기는 결과를 피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 ‘타짜’가 영화의 그것처럼 리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분명한 선악구도를 그 안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타짜라는 소재는 매력적이다. 즉 도박의 세계 자체가 인간의 욕망을 끌어내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네 TV에 적합한 소재인지는 의문이다. 물론 시청연령을 제한하는 고지가 나오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방영되는 TV드라마에 대한 우리의 정서는 아직까지 도박과 폭력을 용인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식객’과 ‘타짜’, 모두 좋은 소재의 작품이지만 저마다 적합한 매체는 달랐던 셈이다.

Posted by 더키앙

80년대 드라마 식의 어법과 운명적 장면의 어색함

‘에덴의 동쪽’은 시청률면에서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첫 회에 10%대를 가볍게 넘겼고 6회에 20%를 넘기고 나서 현재 12회에 이르러 27%(AGB 닐슨)로 30%대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시청률과 함께 점점 이 드라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 진원지는 다름 아닌 ‘대사’다. 어째서 이 나연숙이라는 베테랑 작가의 작품을 두고 때아닌 대사 논란이 불거지는 걸까.

오랜 세월 동안 만나지 못했던 형제가 만나는 장면에서 동생 동욱(연정훈)은 형 동철(송승헌)에게 연거푸 “형 맞아!”하고 소리친다. 어두컴컴한 그 장면에서 절절한 동욱의 외침과 “동욱아, 형이야!”하고 답하는 동철의 대사는 그 상황 자체로 보면 극적이고 가슴 절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장면이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차안에서 그 장면을 보던 국회장(유동근)의 “불 좀 켜 줘라”하는 대사는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결국 보는 이에게 참았던 실소가 터지게 만든다.

이런 장면은 이 드라마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마카오에서 동철이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는 장면에서도 이들은 그렇게 “동욱아!” “형!”을 반복해 소리쳤다. 오랜 세월을 지나 동철이 어머니 춘희(이미숙)를 다시 만나는 장면 역시 지나칠 정도로 길게 장면을 잡았다. 한참을 서로 쳐다보고, 아주 천천히 한 걸음씩을 떼면서 다가오는 동철에게 춘희는 “어딜 갔다 이렇게 지 아부지 마냥 훌쩍 커서 온겨!”, “왜 말을 못하냐! 예전처럼 말문이 막힌겨!”하고 반복해서 소리친다. 이 장면은 역시 극적이지만 떠오르는 건 멀리 서서 반복해 소리치는 “동욱아!” “형!”의 변주처럼 들린다.

이 절절한 가족애가 ‘에덴의 동쪽’이 승승장구하게 만드는 힘인 것은 분명하다. 김범이 연기했던 어린 시절의 동철이 동생 대신 방화의 죄를 뒤집어쓰고 기차에 올라 “너는 내가 사랑하는 동생이다!”라고 외칠 때 그 울림은 실로 컸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그런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표현 자체가 그들의 애틋한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극적인 대사는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어색하기 마련이다.

드라마 속에서 이런 극적인 대사의 활용은 적절하게 사용될 때 효과를 발휘한다. 반복적으로 활용되어 의도적으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는 강박관념이 작용할 때, 이 대사들은 힘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드라마의 현실성을 무너뜨린다. 거의 매 시퀀스마다 극적 상황을 연출하겠다는 강박관념이 강한 이 드라마는 따라서 거기 활용되는 대사들도 비일상적이다.

물론 연기력 부재에서 비롯한 바가 크지만 이연희의 연기력 논란은 이 비일상적 대사가 더 부추긴 이유도 있다. “벌써 날 사랑하게 된 거니?”같은 대사나, 혼자 읖조리는 듯한 톤의 대사들, 예를 들면 “충성스런 사냥개로군”처럼 “∼군”같은 어미로 끝내는 대사들은 연극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일상언어를 추구하는 드라마로서는 부적격하다.

만일 지금이 8,90년대라면 이런 대사들과 어법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의 드라마들은 아직까지 운명적인 사랑 같은 것들을 다룰 만큼 극적 스토리가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호응을 얻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2008년이다. 운명적 사랑은 사극에서나 겨우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이 드라마는 여전히 2008년도에 묶여있다.

운명적이고 극적인 것보다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더 보편적인 이 시대의 드라마에 있어서 과도함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 ‘에덴의 동쪽’은 스토리나 연기자들 소재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드라마임에 분명하지만, 지나치게 극적 장면에 집착하고 있다. 사실상 스토리 자체가 극적인 이 드라마는 오히려 좀더 절제하는 맛이 필요하다. 과도한 대사와 과도한 연출은 극적 상황마저 과장된 것, 혹은 우스운 것으로 바꾸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더키앙

드라마,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말하다

아버지는 죽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처럼.

‘엄마가 뿔났다’에서 엄마가 뿔을 내는 동안,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늘 그 엄마 주변을 빙빙 돌며 눈치를 보거나 혼자 씩 웃고 있거나 가족 대소사에서 한 걸음 뒤편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내는 뿔을 거의 다 받아주었다. 심지어 ‘1년 간의 휴가’를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나서서 엄마가 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닐 정도였다.

‘엄뿔’이 보여준 아버지의 존재감
이 가족드라마에서, 그것도 가족의 변화형태를 가장 잘 포착한다는 주말 저녁 드라마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과거의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주말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중장년 여성이란 점이 영향을 끼친 결과이겠지만, ‘엄마가 뿔났다’에서 남성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성의 시점으로 타자화되어 그려진다.

엄마, 김한자(김혜자)의 독백으로 설명되는 가족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엄마의 시선으로만 채워진다. 장남은 어딘지 부족한 인물이며, 맏사위는 이혼남이고, 둘째 사위는 어딘지 부모의 치맛폭에 사는 듯한 엄친아다. 반면 맏며느리는 생활력 강한 여성이고, 장녀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며, 차녀는 성격 좋고 늘 밝고 솔직한 여성이다.

이것이 엄마의 시선이기 때문에 여성을 좀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선 속에서 제외되어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나일석이다. 한없이 열려진 마음을 가진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은 아직까지 집안의 어르신으로 서 있는 반면, 나일석은 늘 그 바깥에 존재한다. 김한자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할 때, 그 허락을 구하는 당사자는 나일석이 아니고 나충복이다.

이 시대 드라마가 향수하는 아버지
최근 이 같은 아버지 부재의 신호들은 ‘엄마가 뿔났다’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드러난다. ‘에덴의 동쪽’은 아버지 부재의 시대에, 그 빈자리에 대한 향수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비극적인 가족의 탄생은 시대가 살해한 아버지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부터 강한 엄마, 양춘희(이미숙)가 탄생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고 해체된 가족을 묶어두려 안간힘을 쓰는 이동철(송승헌)이 자리한다. 이 드라마의 힘은 시대를 과거로 돌려 현재에는 시대착오가 되어버린 강력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내는 데 있다.

이렇게 강력한 아버지를 찾는 드라마들이 거의 시간대를 과거로 되돌리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주말 저녁을 오랜 시간 점유하던 KBS 사극은 바로 이 아버지의 시간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대 역시 흔들리고 있다. 주말 밤에 대거 포진되어 점차 사세를 넓히고 있는 엄마들의 드라마(이것은 엄마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말할 뿐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이제 아버지들도 즐기는 드라마가 되었다)가 그걸 말해준다.

사극이 그리는 왕은 이제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왕으로서의 역할을 나누게 되었다. ‘대왕 세종’은 물론 신하들과의 우여곡절이 많지만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강력하게 펼쳐나가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반면, 아버지로서는 한없이 약한 존재로 자리한다. 주중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 유리왕(정진영)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왕이지만, 국가의 존폐를 위해 자식을 버려야 하는 비운의 아버지다. 즉 사극 속에서 아버지라는 위치는 왕이라는 직능과 늘 부딪치는 거추장스런 옷이 되고 있다.

나일석의 어깨가 쓸쓸해보이는 이유
이것은 가족드라마가 아닌 현대물에서도 마찬가지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주인공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짐이 부여되지 않는다. 강마에(김명민), 두루미(이지아), 강건우(장근석)의 가족들은 드라마를 위해서 거세되었다. 반면 아버지의 모습은 ‘똥 덩어리’라 모욕을 당한 정희연(송옥숙)의 남편 박진만(이봉규)이나, 가족을 위해 오케스트라의 꿈을 접고 후배에게까지 고개를 숙이며 사회생활을 해온 박혁권(정석용)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뒤돌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지금 현실이 그렇다는 걸 말해주고는 꿈을 향해 달려간다.

‘타짜’에서 아버지는 도박 때문에 돈도 다 날리고 결국엔 죽음을 당하는 존재다. 고니(장혁)가 잡으려고 하는 욕망은 어쩌면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그 돈을 가지려는 것이며, 따라서 도박판은 이 시대 아버지들의 생사를 건 생존경쟁의 축소판이 된다. 속고 속이는 현실 속에서 늘 손모가지든 목이든 걸어야 하는 힘겨운 아버지들의 상황, 그것이 바로 ‘타짜’의 세계다.

드라마 속 이 시대의 아버지는 죽었다. 삶은 아버지에게 그만큼 팍팍해졌고, 그 속에서 여성들은 아버지가 짊어졌던 현실의 짐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위의 시대가 가버린 그 자리에 남겨져 아내에게 구박을 들어도 뭐가 그리 좋은 지 킥킥 혼자 웃는 나일석의 어깨가 가끔씩 쓸쓸해 보이는 건 왜일까. 이것은 아마도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갖게되는 상반된 두 감정, 즉 해방감과 함께 솟아나는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Posted by 더키앙

매체에 따라 달라지는 ‘식객’의 맛, 그 이유

원작 만화 ‘식객’이 영화화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 많은 에피소드들을 과연 영화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제대로 배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였다. 원작 만화 ‘식객’의 묘미는 편편이 음식 하나하나로 끊어지는 그 독자적인 에피소드들의 상찬에 있다. 거기에는 고구마, 부대찌개, 김치 하나에도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따라서 만화로 ‘식객’을 볼 때 우리는 마치 뷔페식당에 온 듯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당신이 고기류를 좋아한다면 ‘쇠고기 전쟁’을 골라보면 되고, 토속적인 맛을 즐긴다면 ‘청국장’이나 ‘메생이’같은 음식편을 찾아 읽으면 된다.

‘식객’의 영화화는 왜 실패했나
하지만 이 만화라는 매체만이 갖는 찾아보고, 다시 보고 하는 묘미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다. 영화는 한정된 시간(그것도 두 시간 내외) 안에 한정된 공간에서 상영되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주제를 향한 스토리의 연결고리가 그만큼 중요해진다. 영화‘식객’이 처한 불리함은 오히려 너무나 많은 반찬들 때문에 오히려 주요리가 묻혀질 수도 있는 ‘식객’만의 풍족한 재료에서 비롯된다. 어느 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따라가자니 영화 전편으로 꿰뚫기에는 좀 약한 듯 싶고, 그렇다고 몇 개의 에피소드를 가져가자니 얼기설기한 느낌을 주게 된 것이다. 아예 형식 자체를 만화가 가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상업영화로서는 거의 시도하기 어려운 모험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영화화된 ‘식객’이 지나친 대결구도에 몰두하면서 오히려 ‘식객’만의 묘미였던 서민적인 밥상이 외면되었던 것은, 사실은 원작 만화의 진짜 맛이었던 이 소소해 보이는 에피소드들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남겼다. 여러모로 ‘식객’의 영화화가 실패한 점은 그 매체의 다른 특성을 영화적으로 해석해내기가 쉽지 않은 ‘식객’ 원작 만화가 가진 에피소드별 구성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드라마화된 ‘식객’, 어떻게 재료의 균형을 맞췄나
그렇다면 드라마화된 ‘식객’은 어떨까. 같은 영상으로의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영화와 드라마는 그 매체 특성이 다르다.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해야 하는 반면, 드라마는 시간적 흐름(몇 달 동안) 위에 에피소드들을 구성할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 리메이크의 관건은 따라서 드라마적 특성인 메인 뼈대(이것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이 된다)를 세우고, 그 위에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살처럼 붙여놓는 작업에 있었다.

드라마‘식객’이 뼈대로 세운 것은 운암정 후계자를 두고 벌이는 성찬(김래원)과 봉주(권오중)의 대결구도다. 드라마 초반부 거의 숨 쉴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들어낸 ‘식객’은 그 위에 하나씩 살을 붙이기 시작한다. 그 살이란 성찬과 봉주의 대결 구도 밖에 있는 서민들과 음식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이다.

음식 칼럼니스트 테드 오가 그리워했던 부대찌개에 관한 에피소드,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유순철)의 애끓는 부정(父情)을 얘기해준 게장 에피소드, 직업적인 편견을 넘어선 정형사 강편수(조상구)의 에피소드, 며느리와의 정을 녹차김치에 담아 얘기해준 치매할머니(김지영) 에피소드, 음식은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다는 걸 말해준 진수(남상미)의 어머니 에피소드 등등. 원작만화 ‘식객’이 가진 진짜 맛은 바로 이 살을 구성하는 에피소드들이 내는 깊은 맛에서 비롯된다.

드라마 ‘식객’의 첫맛과 중심 그리고 끝맛
너무 흔한 구도라 하여 식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 전통적으로 드라마 문법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대결구도를 뼈대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 쉬운 구도 덕분에 드라마는 폭넓은 시청층의 눈을 일단 잡아끄는데 성공했고, 그것을 통해 ‘식객’ 본연의 맛으로 시청자들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음식이 가지는 첫맛과 중심의 맛, 그리고 여운의 맛을 구성을 통해 연결해낸 것 같다. 첫맛은 대결구도로 강렬하게 잡아끌고 중심의 맛에서는 음식에 대한 성찬의 철학(서민적인 맛을 지키는)과 봉주의 철학(맛의 세계화)의 부딪침을 보여주며, 마지막 여운으로 음식이 가진 삶의 이야기를 남겨주었던 것이다.

컨텐츠의 융복합이 문화의 한 경향이 되는 요즘, 이처럼 다른 매체는 거기에 담겨지는 컨텐츠의 맛에 영향을 끼친다. 같은 제목이라도 서로 다른 맛을 우리에게 선사한 ‘식객’은 만화와 영화, 그리고 드라마의 리메이크가 활발해지고 있는 요즘, 한번쯤 매체가 가진 융합가능성과 그 한계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본 원고는 청강문화산업대학 사보 100도씨(100C)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Posted by 더키앙

‘온에어’ 의 다중창 전략, 어떻게 쓰였나

과거 드라마라는 은막의 창은 늘 이편이 아닌 저편에서 신비로운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TV라는 창은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높아졌고, TV 이외에 다른 창들이 수시로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한다. 드라마에 몰입하고픈 시청자들은 따라서 좀더 창이 투명해져서 거기에 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질 정도로 드라마가 리얼하기를 원한다. 창에 리얼함을 깨는 먼지 한 톨에 대해서도 시청자들은 인터넷으로 달려가 그 먼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드라마는 퓨전이니 환타지니 하는 수식어가 붙은 사극들처럼 아예 투명함을 포기하거나, 전문직 장르 드라마처럼 투명해지거나 해야 한다. 적당한 멜로는 금세 탄로 난다. ‘온에어’는 이런 상황에서 좀 독특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것은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창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중창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현실인지 가상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전략이다. 이 드라마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그러니 믿으라고 시청자들에게 강변하지 않는다. 대신 드라마 속에 다른 창을 하나 띄워놓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시청자들을 믿게 만든다.

첫 번째 창, 드라마의 앞모습을 잡는 창
‘온에어’는 드라마에 대한 드라마.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중의 창을 가지고 있다. ‘온에어’는 먼저 우리가 믿지 않는 드라마(혹은 연예계)에 대한 창을 먼저 보여준다. 그것은 첫 회에 등장한 시상식 에피소드다. 그 시상식은 우리가 TV를 통해 불신감을 갖고 보아왔던 바로 그것이다. 조작가능성, 나눠 먹기식 시상이 우리가 시상식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온에어’는 먼저 그 시상식을 통해 드라마의 앞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뒤집어 말해 시상식의 뒷모습에 우리가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시상식에서 수상거부를 하는 오승아(김하늘)가 제일 먼저 드라마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온에어’의 네 인물인 오승아, 이경민(박용하), 장기준(이범수), 서영은(송윤아) 중 시청자들에게 TV 화면으로 친숙한 인물은 배우인 오승아다. 나머지는 모두 TV 뒤편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인물들이다. 그러니 TV의 앞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승아를 주목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오승아에 대한 주목, 즉 시청자들이 믿지 않는 TV의 내용에 대한 장면들은 그것을 깨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이제 시청자들은 오승아라는 배우의 진짜 모습, 그리고 TV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었다. 시상식에서 오승아를 찍는 카메라에서 한 걸음 뒤로 빠져나오면 그 카메라를 잡는 새로운 시선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제 그 새로운 시선은 자유롭게 배우와 PD, 작가, 매니저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방송계와 연예계의 뒷모습을 포착한다. 바로 이 시선이 이 드라마의 두 번째 창인 셈이다.

두 번째 창, 드라마의 뒷모습을 잡는 창
이렇게 시점이 첫 번째 창에서 두 번째 창으로 넘어오면서 시청자들은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온에어’라는 드라마를 조금씩 믿게 된다. 그것은 진짜로 알고 싶었던 드라마의 뒷모습이 펼쳐지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보고싶은 걸 믿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시종일관 툭탁거리며 말다툼을 해대는 작가와 배우 간의 줄다리기가 있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엮어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PD와 매니저가 있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끊임없이 현재의 드라마들에 대한 논쟁적인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배우들은 연기 못해도 CF 많이 찍으면 스타인 줄 알지만, 미국 배우들은 쓰지도 않는 제품 홍보하는 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작가 서영은이나, 여기에 맞받아 “그러는 작가님은 왜 작품마다 PPL로 도배를 하죠?”라 말하는 오승아가 그렇다. 또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작품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서작가 작품에는 명대사만 많을 뿐 진정성이 없다.”고 말하는 이경민 PD의 말도 그렇다. 이렇게 드라마에 대한 논쟁이 오고갈 때, 시청자들에게 묘한 착각이 생겨난다. 그것은 자신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바깥에 서 있다는 착각이다.

이것은 믿지 못할 드라마를 믿게 만드는 이 드라마의 트릭이다. 재미있는 건 이경민 PD가 서영은 작가에게 “왜 작가가 배우에게 그렇게 의존하려고 하죠”하고 말할 때, 그렇게 말하는 이경민 PD는 실상 박용하라는 배우라는 점이다. 배우가 배우를 비판하는 순간, 거기에 배우라는 박용하는 사라지고 PD로서의 이경민이 생생히 부각된다. 이것은 이 드라마 전략과 일맥상통한다. 이 드라마가 드라마를 비판하면서 비로소 존재감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 번째 창, 카메오라는 현실의 창
그런데 이 두 번째 창은 진짜 현실이 아니다. 그것 역시 드라마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점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은 카메오라는 현실의 틈입이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온에어’에서 카메오라는 장치는 그저 이벤트적인 속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이중의 창으로 혼동되는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적당한 현실감각을 시청자에게 부여해주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온에어’ 자체에 현실감을 강화해주기도 한다.

즉 이서진이 등장해 “이번 일이 끝나면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곧 결혼 예정인 그의 현실상황을 끌어들였을 때, 그것은 ‘온에어’가 진짜 같다는 리얼리티를 부여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게 진짜 현실”이라는 자각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이서진이라는 카메오를 극중의 인물로서 활용하지 않고 현실의 이서진을 상황 속에 끼워 넣는 장면은 그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연예뉴스’와 다를 것이 없다. 실로 이 드라마에서 카메오는 이러한 현실 개입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창을 활용하는 ‘온에어’의 트릭은 드라마를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작금의 시청자들에게 대단히 효과적이다. 시청률이 오르는 것은 단지 등장인물들의 대립이나 서서히 생겨나고 있는 멜로 라인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현실감이 있는 것처럼 연출된 장면들이 좀더 시청자들을 드라마에 몰입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트릭 어떻게 쓰이고 있나
중요한 것은 이 트릭들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드라마를 비판하는 드라마’로서 새로운 드라마의 대안을 제시하는데 쓰여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쉽게도 ‘온에어’는 그 이상은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몰입된 상태에서의 재미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지만 여전히 트렌디한 드라마로 굴러가면서 ‘드라마를 비판하는 드라마’로서의 자가당착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 트릭들은 이 드라마의 마케팅에 더 잘 활용되고 있다. PPL 문제를 비판하면서 그 장소 자체를 PPL하고, 해외로케를 비판하면서 한 회 분량을 온전히 대만관광 홍보로 꾸밀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트릭에서 비롯된다. 이런 장면들은 마치 이 드라마 자체도 포함해 자기비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트릭을 통해 논란을 피해나가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혐의가 짙다.

이것은 드라마라는 장치가 가진 한계인지도 모른다. 드라마의 허구성을 깨는 그 순간, 드라마는 드라마이기를 포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시 상업적인 드라마는 현실 자체보다는 판타지에, 자각보다는 몰입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걸 말해준다. 어쨌든 이 ‘온에어’가 취하는 다중창의 전략은 작금의 상황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멀티미디어 사회, 디지털 사회 속에서 하나의 창으로서의 드라마가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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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키앙

작가나 배우 뒤에 숨겨진 진짜 문제들

드라마를 비판하는 드라마, ‘온에어’의 한 장면. 작가 서영은(송윤아)과 배우 오승아(김하늘)가 언쟁을 벌인다. 작가 서영은이 “우리나라 배우들은 연기 못해도 CF 많이 찍으면 스타인 줄 알지만, 미국 배우들은 쓰지도 않는 제품 홍보하는 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자 여기에 맞받아 오승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는 작가님은 왜 작품마다 PPL로 도배를 하죠?”

‘온에어’는 확실히 이런 우리네 드라마들이 가진 문제점들을 끄집어내는 대사들이 많다. 서영은 작가와 이경민(박용하)PD가 벌인 시청률과 진정성 논쟁도 그 중 하나다.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작품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서작가 작품에는 명대사만 많을 뿐 진정성이 없다.”고 이경민이 말하자 “드라마의 반이 구성이라면 나머지 반은 대사다. 95%의 상투성에 5%의 신선함만 있으면 된다.”고 서영은은 반박한다. 그대로 토론 프로그램에 올려놓아도 될만한 이야기들이다.

분명히 과거에는 없던 소재이고, 대사들이다. 무엇보다 액자소설처럼 드라마를 비판하는 드라마라는 점이 흥미를 끈다. ‘온에어’의 기획의도를 인터넷을 통해 보면 이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인 기획과 내용으로 이제는 ‘공산품이 되어버린’ 우리네 드라마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어 그런 문제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비판적인 발전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문제의 원인제공자로서 작가, PD, 배우, 그리고 스텝들(매니저를 포함한 연예계 관계자들까지)이다.

이경민 PD는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가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이경민 PD의 캐릭터는 대사 속에서 등장하듯이, 대충 시청률을 의식해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한 드라마가 아니라, 진정성이 살아있고 통일성이 있으며 메시지가 일관되어 결과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드라마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여기에 장기준(이범수)이란 매니저는 결과적으로 이경민 PD를 드라마 밖에서 지원하는 인물이다. 그는 스타가 아니라 배우를 키워내고 싶은 매니저다.

우리네 드라마의 문제가 도출되는 것은 작가 서영은과 배우 오승아를 통해서다. 그들은 이른바 속된 말로 뜰대로 뜬 인물들이다. 아쉬울 것 없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 드라마가 한류바람을 타고 활개를 칠 때의 그 의기양양함을 닮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지금 우리 드라마들의 문제점도 똑같이 닮았다. 이 드라마에서 제시되는 이들의 문제는 ‘초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서영은도 그렇고 오승아도 그렇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이들이 초심을 찾아가는, 그래서 본래 열정이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리네 드라마의 문제가 작가나 PD, 혹은 배우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하는 점이다. 과연 그들이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드라마의 문제가 생겨난 것일까. 오히려 그것은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의 잘못된 시스템이 초래한 문제가 아닐까. 쪽대본이 난무하고, PPL로 도배되고, 시청률만 되면 다 된다는 식의 드라마들은 사실, 사전제작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지나친 규제중심의 광고제한으로 오히려 편법광고를 만들고, 시대에 잘 맞지 않는 시청률조사 시스템에 경도된 시청률 지상주의의 결과가 아닐까. 오히려 작가나 PD 혹은 배우는 그 희생자가 아닐까.

여기서 처음 언급했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 무분별한 PPL을 비판하는 대사가 나오는 그 장소(아마도 떡으로 삼겹살을 싸먹는 음식점)조차 여러 번 대사나 장면을 통해 홍보된 곳이란 점이다. 이 아이러니는 우연한 것일까 아니면 의도된 것일까. 우연한 것이라면 드라마를 비판하는 이 드라마조차 그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 된다. 반대로 그것은 어쩌면 작가나 PD에 의해 의도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엔 이런 시스템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라고 자기 작품이 상품으로 도배되는 걸 바라겠는가.

혹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민감한 기자들을 낚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요즘 드라마들은 논란 또한 관심으로 전이시키는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이 드라마가 제작되고 방송되고 홍보되는 시스템은 참 견고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글조차 그 특정 장소를 더 홍보해주는 꼴이 되니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Posted by 더키앙

‘온에어’, 자기비판 통한 성장 이룰까

새롭게 시작한 SBS 수목드라마 ‘온에어’는 드라마에 관한 드라마다. 즉 드라마의 관계자인 PD, 작가, 배우, 매니저를 주축으로 해서 벌어지는 연예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드라마를 제작해나가는 과정이 이 드라마의 주 내용이라는 것이다. 최근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거기 출연하는 배우는 물론이고 작가나 PD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높아있는 상황이며, 제작현장은 더더욱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연예계에 대한 뒷이야기까지 포함하면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이미 반 이상은 거두고 시작한 셈이다.

우리가 TV를 통해서만 보았던 드라마의 외관이 아니라, 이른바 드라마의 속살을 본다는 리얼리티적인 요소는 드라마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첫 회부터 ‘온에어’는 드라마계 혹은 연예계의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나눠주기식의 연말시상식에 수상거부를 선언하는 오승아(김하늘), 그를 두고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하는 스타권력에 휘둘리는 방송사, 배우보다는 스타가 되려는 연예인들의 세태, 키워놓은 배우 빼가는 대형기획사 등등 많은 문제제기를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보다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드라마 제작의 현실이다. 오승아가 작가 서영은(송윤아)과 미드에 대해 나누는 대사가 흥미롭다. “미드는 그런 것 없이도 잘 되는데 왜 당신 작품엔 늘 신데렐라냐”는 오승아의 비판에 서영은은 “미드에도 신데렐라 설정은 있지만 거기에는 진짜 같이 하는 연기자들이 있다”고 맞서는 장면은 우리네 트렌디 드라마에 대한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첫 회를 통해 보여지는 작가와 배우 그리고 PD, 매니저까지의 면면을 보면 도대체 이런 식으로 어떻게 우리네 드라마가 만들어져왔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정작 작품에 대한 논의는 없고 PD와 작가, 그리고 배우들의 신경전만 난무하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시도보다는 되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적당히 되는 소재를 잡아 넣으면 된다는 식의 제작자 마인드에, 진정한 배우의 길보다는 손쉬운 스타의 길을 찾아가는 배우들의 세태는 우리네 드라마가 왜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왔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또한 방송사고라 할만한 연예대상에서의 수상거부 사태에 대해서조차 시청률 잣대로 판단하는 방송사의 태도나, 서영은의 첫 작품이 낮은 시청률이지만 작품이 좋았다는 말에 오승하가 시청률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은 드라마에 대한 시청률 지상주의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런데 ‘온에어’가 이런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의 문제점들을 속속 드러내는 이유에는, 결국 이 사분오열된 제작팀들이 다시 뭉쳐 이 문제들을 넘어서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즉 이 드라마는 어떤 면에서는 우리 드라마가 가진 문제점의 인식 위에서 그 문제를 넘어서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좋은 의도를 가진 드라마가 그들 스스로 비판하는 트렌디의 틀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만일 몇몇 디테일들이 등장하다가 점차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트렌디한 멜로구조로 따라간다면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고 또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앞서는 것은 수많은 좋은 기획의도를 가진 드라마들이 중간에 가서 어떤 이유에선지 그 의도를 버리고 편안한 시청률 올리기 공식으로 돌입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던 탓이다. 부디 이 드라마가 우리네 드라마 전체에 대한 어떤 발전적인 대안이나 상을 제시하는 드라마였으면 좋겠다. 그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시청률은 당연히 따라오지 않겠는가.

Posted by 더키앙

드라마, 연예의 중심에 서다

실로 ‘골드 러쉬’에 비견해 ‘드라마 러쉬’라 할만하다. 5분 짜리 뮤직비디오면 충분했을 내용을 가지고 굳이 두 시간 짜리 뮤직드라마를 만든 이효리부터,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 어느 쪽에서도 호평을 얻고 있는 비, 정지훈, 게다가 최근 연기자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만들어버린 윤계상까지 가수들의 드라마 러쉬는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여기에 최근 들어 본격화된 영화배우들의 드라마 U턴이 본격화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드라마에 거는 우리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드라마 앞에 줄서게 했을까.

드라마 앞에 줄서는 가수들
가수들의 드라마 출연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명랑소녀성공기’로 스타덤에 올라 중국에서 한류스타로 활동하고 있는 장나라, ‘어느 멋진 날’, ‘눈의 여왕’에 출연한 성유리, 드라마 ‘궁’으로 화제를 만든 ‘윤은혜’, ‘풀하우스’로 드라마에서부터 최근에는 박찬욱 감독의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로 연기로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비, 때론 터프하게 때론 코믹하게 연기변신을 보여주는 에릭,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주목받기 시작해,‘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 확실한 연기를 보여준 정려원, ‘사랑에 미치다’로 가수 연기자들의 문제가 되곤 하던 연기력 논란을 잠재우고 있는 윤계상 등등.

이들의 드라마 진출은 음반 시장의 위축과 함께 예고되었던 일이다. 드라마가 가수들에게 매력적인 요인은 고정적인 TV 노출을 통해 자연스러운 홍보 효과와 이미지 제고를 할 수 있는 데다, 드라마 자체의 성공을 통한 수익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수 영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되는 드라마 PD들의 상황도 한 몫을 차지한다. 드라마로 시작했지만 영화판으로 넘어가 돌아오지 않는 연기자들이 많아지자 마땅한 탤런트를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 또한 참신한 인물을 쓰는데 있어서도 이미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가수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 가수들의 드라마 진출이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복병으로 자리하는 것이 연기력 논란. 일단 이 논란에 휘말리게 되면 자칫 그 가수 연기자 한 명 때문에 작품 전체가 매도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하지만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 가수 연기자의 성공적 데뷔는 드라마 성공에도 시너지 효과를 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들 가수들의 성공한 드라마를 분석해보면 정극보다는 가벼운 로맨틱 코메디류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것은 만화 같은 과장된 캐릭터의 연기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연기력에 대한 안전장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소위 리얼한 연기보다는 캐릭터가 재미있기 때문에 드라마는 성공하고 가수는 안전하게 드라마라는 새로운 처녀지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다.

영화판에서 드라마로 U턴하는 영화배우들
하지만 앞으로 연기자 기근 같은 드라마 PD들의 고민은 상당수 줄어들 전망이다. 최근 충무로의 불황이 도래하면서 잇따라 영화판을 고집하던 연기자들이 속속 드라마로 귀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KBS 2TV 월화드라마 ‘꽃 찾으러 왔단다’로 9년 만에 드라마로 돌아오는 강혜정은 ‘올드보이’, ‘웰컴 투 동막골’ 등으로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넓혀왔으나, 최근 ‘도마뱀’, ‘허브’ 등의 잇따른 부진으로 드라마 복귀가 예상되었던 연기자이다.

이런 상황은 SBS 드라마 ‘푸른 물고기’로 역시 9년 만에 복귀 예정인 고소영도 마찬가지. 최근 개봉했던 ‘아파트’, ‘언니가 간다’가 흥행 참패를 하면서 고배를 마셨다. 또한 이정재가 MBC 특별기획 드라마 ‘에어시티’로 9년 만에 드라마 복귀를 준비하고 있고, ‘그 해 여름’으로 확실한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만든 수애 역시 2년 만에 ‘9회말 2아웃’을 통해 TV로 돌아올 예정이다. ‘청연’으로 역시 아픈 부진의 기억을 갖고 있는 장진영 역시 블록버스터 드라마 ‘엔젤’로 6년만의 드라마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물론 충무로의 불황이 가져온 여파가 크다. 투자 분위기가 위축되면서 제작편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어 출연할 작품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무엇보다 영화배우들에게 더 어려운 상황은, 작년 굵직한 연기자들을 내세워 쉽게 투자 받아 방만하게 만들어진 작품들의 잇따른 흥행실패이다. 그것은 실패를 맛본 영화배우 당사자에게도 치명타가 되지만 영화계 전체의 영화배우를 보는 시각을 돌려놓았을 거라는 예측이다.

드라마, 침체된 문화 살릴까
이처럼 가수와 영화배우들이 드라마 앞으로 정렬하는 것은 자체적인 불황을 넘어서기 위한 자구책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더 궁금한 것이 있다. 도대체 드라마라는 장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모든 불황의 돌파구로서 자리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에는 드라마 자체의 특성이 갖는 경쟁력과, 최근 드라마가 겪고 있는 변화의 조짐, 두 측면이 있을 것이다.

드라마는 우리 대중문화에 있어 늘 든든한 허리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TV가 영화와 달리 돈을 내지 않고 누구나 손쉽게 틀어 볼 수 있는 대중성을 확보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끌어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넓고 가능성을 찾기도 쉬운 매체인 TV에서 그 꽃은 단연 드라마이다. 두 시간 남짓하고 끝나는 영화와 달리, 작게는 서너 달에서부터 길게는 1년에 걸쳐 연속적으로 방영되는 드라마는 중독성에서 영화를 압도한다. 최근에는 인터넷 환경과 만나면서 이 중독성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그 중독성의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주인공 캐릭터. 장기간에 걸쳐 노출된 캐릭터를 통해 연기자는 그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영화나 음반보다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된다.

이러한 드라마 자체가 갖고 있는 매력과 함께 최근 변화되는 우리네 드라마의 양상도 연예인들의 드라마 러쉬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해외의 드라마들과 비교되면서 좀더 높은 완성도와 스케일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 우리는 거의 영화와 같은 수준의 드라마를 꿈꾸는 단계에 와 있다. 전문직 드라마들과 블록버스터 드라마들이 기획되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영화적인 노하우를 이제는 드라마에서도 써먹어야 할 상황이 도래했다는 걸 말해준다.

드라마 한 편에는 실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문화적 자산들이 들어있다. 거기에는 영상이 있고 스토리가 있으며 연기자들이 있고 노래가 있다. 괜찮은 드라마 한 편의 성공이 갖는 의미는 이제 드라마에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 문화계 전반의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연예의 중심에 선 드라마. 모두 드라마 앞으로 정렬하기 시작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건 이 풍부한 자원들을 제대로 활용해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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