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가정부>, 설마 일본 시청자만 겨냥한건가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다시 리메이크한 것이니 최소한 우리식의 정서 변환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SBS 드라마 <수상한 가정부>는 도무지 우리 정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설정과 상황들이 난무하는 드라마가 되어가고 있다. 원작인 일본드라마 <가정부 미타>를 보지 않았다고 해도 <수상한 가정부>에 등장하는 장면들 곳곳에서 일본식의 정서를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수상한 가정부(사진출처:SBS)'

먼저 이 드라마의 은상철(이성재)이라는 아빠 캐릭터는 우리에게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이다. 자신의 불륜으로 아내가 자살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에 대해 순정에 가까운 연정을 보여주는 캐릭터. 심지어 이 사실을 아이들이 알게 되어 집밖으로 쫓겨나다시피 했지만(이런 설정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다.

 

이런 캐릭터라면 응당 우리네 정서로 보면 악역(가정을 파괴하는)으로 그려져야 공감이 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와중에도 아이들을 살뜰히 챙기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여자와 아이들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하는 캐릭터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네 정서에서 이런 가장의 모습이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에 은상철이라는 캐릭터에 공감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물론 더 극단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박복녀(최지우)다. 분명 과거에 엄청난 사건을 겪고 그 후유증으로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시키면 뭐든지 한다’는 것이 캐릭터지만 그래도 어떤 정서적인 선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죽은 엄마를 잊지 못하는 혜결(강지우)이 엄마한테 가자고 하자 엄마가 자살한 강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간다거나, 이제 성에 눈을 뜬 두결(채상우)이 “그것도 할 수 있냐”고 하자 아이 앞에서 옷을 벗는다거나, 한결(김소현)이 망가지겠다며 가출을 할 때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얘기한다는 건 우리네 정서로서는 공감하기가 힘들다.

 

감초 같은 캐릭터로 말 많은 옆집 아줌마인 어진 엄마(방은희) 역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 억지스럽게 여겨진다. 망원경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 집 분위기도 이상하고 지나치게 상철의 집에 관심을 보이고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것도 정상적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문제는 캐릭터만이 아니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하는 행동들 역시 우리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정상적인 부모나 할아버지가 아이의 뺨을 때린다거나,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지만 우연히 이제 열다섯인 두결이 가정부 박복녀의 가슴을 만지게 된다거나, 한결이 망가지겠다며 가출해서 혼자 살고 있는 수혁(서강준)의 집을 찾아간다거나 하는 설정들은 우리 정서에서는 그다지 공감가지 않는 부분들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 드라마의 원작인 <가정부 미타>에서 상당 부분 그대로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왜 우리나라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에 우리 정서에 맞는 리메이크 과정이 없이 일본 정서에나 받아들여질 내용들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걸까. 이것은 일본에서도 성공했으니 국내에서도 성공할 거라는 안이한 기획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가정부 미타>가 갖고 있는 자극적인 설정들을 과감히 버리지 못한 데서 생겨난 문제일 수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수상한 가정부>가 일본식 정서를 그대로 담은 채 국내에서 방영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수상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최지우를 굳이 캐스팅한 것에서 느껴지듯이 혹 이 드라마는 우리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일본을 겨냥한 건 아니었을까. 과거 일본에 한류 드라마들이 퍼져나갔을 때 적당한 한류스타를 세워 마구 만들어짐으로써 한류에 오히려 먹물을 뒤집어쓰게 했던 그런 식의 드라마제작이, 최근 들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일드 리메이크의 역수출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식의 접근은 성공하기도 어렵고 심지어 한류 드라마의 위상마저 깎아먹을 수 있다.

재미있는 드라마는 리메이크 아니면 표절(?)

작년 완성도 높은 ‘웰 메이드 드라마’를 꼽으라면 누구나 ‘연애시대’를 얘기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올 들어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하얀거탑’은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웰 메이드 드라마’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모두 그 원작을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연애시대’는 노자와 히사시의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하얀거탑’역시 야마자키 도 요코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다.

일본에서 ‘하얀거탑(원제 白い巨塔)’은 이 소설로 1978년에 드라마화 되었고 2003년 다시 리메이크되었다. 게다가 다시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30여 년에 걸쳐 3번이나 드라마화된 셈이다. 원작의 힘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좋은 원작은 시공을 뛰어넘어 사랑 받는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시장은 점점 글로벌화되고 리메이크는 하나의 세계적 조류가 된 상황에서 원작이 갖는 부가가치는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아마 재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한류’는 어디에나 있었고 뭐든 한국인이 만들면 세계가 좋아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모든 걸 낙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드라마의 수출은 뚝 끊긴지 오래고 국내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성공을 일궈낸 영화들은 거의 모두 해외에서 고배를 마셨다. 여기에 최근 국내 드라마들의 경향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어둡게만 보인다.

작금의 사극 붐은 그 자체의 재미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지만, 또한 사극 이외의 현대물들이 전혀 새로운 재미를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한 반사이익도 크다.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재미가 시도되는 동안, 현대물들은 여전히 과거 멜로와 스타를 적절히 버무리는 ‘한류의 공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치열한 창작의 소산물이라기보다는 기획물에 가까웠다. 당연히 문화소비자들은 외면했다. 최근의 일본 원작들이 대거 국내에서 리메이크 붐을 타고 있는 것은 이제 적당한 기획물로는 어렵다는 자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메이크는 물론 베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창작이다. 제대로 된 해석과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리메이크는 성공할 수 없다. 일본 원작을 영화화했으나 실패한  ‘사랑따윈 필요없어’와 성공한 ‘미녀는 괴로워’는 그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리메이크는 이제 세계적인 조류이다. 좋은 리메이크는 오히려 그 원작을 수입해온 나라로 역수출도 가능해진다. 다만 그것이 탐탁잖게 보이는 것은 어려운 원작 생산보다 성공이 쉬워 보이는 리메이크에 올인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로또식으로 너도나도 뛰어들어 만들어내는 리메이크는 자칫 문화계의 지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 국내 순수 창작물로 만들어진 작품들에 대해 계속되는 표절 시비는 상황을 더 어둡게 보게 만든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그레이 아나토미’에 대한 표절 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달자의 봄’ 역시 일본 드라마 ‘아네고’에 대한 표절 논란이 불거졌다. 인물 설정은 물론이고 드라마 소재까지 따왔다는 것. 이 정도 되면 뭔가 새롭고 재밌는 드라마는 ‘리메이크 아니면 표절’이란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리메이크 붐과 일련의 표절시비는 드라마 제작자들이 앞선 문화소비자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문화소비자들은 인터넷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이제 일본드라마, 미국시즌드라마를 이미 섭렵하고 있다. 그러니 과거처럼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은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상황이니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에 익숙해진 그들이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우리네 드라마가 시시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리메이크된 작품을 놓고 원작과 비교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건 그만큼 외국드라마의 저변이 넓다는 말도 된다.

이제 ‘국경 없는 컨텐츠 제작’이 하나의 조류로 자리 잡아가는 시대다. 일련의 합작영화들이 나오는 상황에 합작 드라마 역시 하나의 가능성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여기서 명심해야할 것은 ‘국경이 없다’는 말이 단지 ‘자유로운 제작 풍토’같은 장밋빛 뉘앙스의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그것은 그만큼 ‘전장의 구분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 저기 얽히고 설키면서 앞으로는 더더욱 그 국경이 희미해질 상황이기에 원작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상품의 기반이 되어줄 소설이나 연극, 만화 같은 기초분야에 대한 발굴과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작년 우리 원작의 가능성을 보여준 연극 ‘이(爾)’ 원작의 ‘왕의 남자’, 허영만 만화 원작 ‘타짜’의 성공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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