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냐?” 허명행 ‘범죄도시4’

범죄도시4

개봉 첫 날 82만 명. 5일째에 4백만 돌파. ‘범죄도시4’는 보통의 영화라면 상상하기 힘든 성적으로 문을 열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극장 관객이 전반적으로 줄어든 상황에 거둔 성적인지라 그 성적은 더욱 놀랍다. 5월 근로자의 날과 어린이날, 부처님 오신날 같은 연휴가 대목으로 이어질 걸 기대한다며 벌써부터 천만이 보인다는 섣부른 이야기까지 나온다. 

 

벌써 4편이나 나왔으니 더 할 게 남았을까 싶지만 마동석은 이 시리즈를 8편까지 이미 기획해놨다고 한다. 그럼 4편은 과연 새로울까. 사실 ‘범죄도시’는 첫 회가 새로웠고 그 후로는 크게 다를 바 없는 서사의 반복에 가깝다. 마석도라는 엄청난 괴력을 가진 형사가 극강의 빌런들을 때려잡는 이야기.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범죄도시’는 이토록 연달아 성공을 거뒀을까.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냐?” ‘범죄도시4’에서 완력으로 떼버린 철창 앞에서 마약범이 “왜 철창이 떨어져 있지?”하고 의아해할 때 마석도가 툭 던지는 이 말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해준다. 극악한 범죄자들을 완력으로 시원하게 제압하는 마석도라는 캐릭터의 판타지가 그것이다. 무식하지만 약자를 위하고 빌런 앞에서는 무자비한 독보적인 캐릭터. 관객들은 곰같은 덩치에 걸맞는 웃음과 액션의 핵펀치를 날리는 이 서민영웅 앞에서 간만에 시원해진다. 

 

하지만 잇따른 흥행의 이유에는 천만 관객 영화 같은 엄청난 숫자가 주는 막연한 기대도 한 몫을 차지한다. 그렇게 많이 봤을 때는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며 영화를 선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볼만한 영화를 선택해 수치가 올라가는 게 아니고, 높은 수치가 볼만한 영화를 만드는 전도된 흐름이랄까. 화려한 숫자들이 압도하는 세상 속에서 숫자 너머의 진가를 보는 눈이 더욱 필요해졌다.(글:동아일보, 사진:영화'범죄도시4')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협력과 숙론  (0) 2024.05.26
승패보다 명승부  (0) 2024.05.13
독립영화의 가치  (0) 2024.04.29
변화를 받아들이는 마음  (0) 2024.04.22
자격과 권리  (0) 2024.04.15

‘황야’로 돌아온 ‘범죄도시’의 서민 영웅

황야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한 침대 광고의 문구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마동석이다. 그가 내놓는 영화들은 이제 업계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으로 성공을 보장한다는 신뢰가 생겼다. 그건 한 특정 작품의 성공이 아니라, 마동석이라는 하나의 브랜드가 보장하는 성공이라는 점에서 흔들림 없이 편안하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범죄도시> 시리즈를 떠올려보라. 시즌3까지 했던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잘 떠오르는가. 그 이름은 마석도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기억되는 건 마석도가 아닌 그 역할을 연기한 마동석이다. 그래서 <범죄도시>가 68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을 거둔 후, 코로나19의 터널을 통과해 초토화됐던 극장가에 엔데믹 분위기와 함께 <범죄도시2>가 무려 1천2백만 관객을 끌어모았을 때 나온 ‘신드롬’은 <범죄도시> 신드롬이 아니라 ‘마동석 신드롬’이었다. 바로 1년 후 연달아 <범죄도시3>가 나왔을 때도 ‘설마’는 ‘역시’가 됐다. 이미 이 시리즈의 스토리라인이 관객들에게 익숙해졌고 그래서 단물이 이미 쪽 빠진 껌처럼 여겨진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려 1천만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그것이 말해주는 건 영화가 아니라 마동석을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만이 가진 확실한 ‘한 방’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한 방’의 공식은 간단하다. 너무나 악랄해 보기 불편하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한 빌런들이 등장해 관객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고 나면, 그 긴장에도 흔들림 없이 등장해 관객들을 편안한 사이다의 세계로 이끄는 마동석의 모습이 이어진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 간단한 ‘한 방’의 공식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범죄도시>가 마약과 연결된 강력사건들이 벌어지며 갈수록 살벌해지는 살풍경한 현실 사회를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와 공포에 떠는 소시민들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빌런들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마동석의 모습을 그렸다면, <부산행>에서는 좀비가 창궐한 부산행 KTX에서 맨주먹으로 저들을 때려잡는 마동석을 그렸고, <동네사람들>에서는 한 동네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악의 카르텔과 상대하는 체육교사 마동석을 그렸다. 하나 같이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는 적들이고, 거기서 마동석은 그들 앞에 벌벌 떨고 있는 소시민들을 보호하거나 구해주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이런 서사 구조가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마동석은 그 서사의 경험을 공포와 편안함이라는 체감의 차원으로 전해주고 있다는 게 다르다.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는 실감에서 오는 공포가 관객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어놓았을 때, 등장과 함께 보이는 거대하고 단단해보이는 체구만으로도 어딘가 ‘안전함’이 느껴지는 그 외적 이미지가 그렇다. 그 단단해 보이는 몸은 웬만한 칼도 뚫지 못할 것 같고, 심지어 총 한 방 맞아도 그리 큰 타격이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약자들의 든든한 보호막 같은 느낌을 준다. 게다가 그가 날리는 한 방에 마치 펀치볼처럼 날아가는 빌런들의 모습은 카타르시스도 안기지만 동시에 도무지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공포 또한 한 방에 날려버리는 효과를 준다. 이러니 마동석을 따라가며 관객들은 공포의 세계 속에서 안전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건 마치 롤러코스터의 작동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액면으로 보면 소름이 돋는 스릴이지만 안전함이 동반되어 그걸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그런 그가 돌아왔다. 이번엔 폐허가 되어버린 디스토피아 세상이다. 이제 당연히 사람들은 상상한다. 모든 게 무너져내린 폐허 속, 무법천지가 된 세상에서의 마동석은 어떨까. 그 세계에서도 여전히 핵주먹을 날리며 빌런들 때려잡는 든든한 서민 영웅의 모습일까. 예상대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황야>에서 마동석은 무법천지 세상에 유일하게 우뚝 선 비빌언덕 같은 인물(극중 인물의 이름조차 남산이다)로 등장해, 생체실험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겠다는 위험하고도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박사(이희준)와 대결한다. 그 결론은? 우린 이미 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궁금하다. 그가 어떻게 저들과 맞서 나가고, 저들에게 시원시원한 주먹을 날릴 것인지가.

 

이미 <부산행>이 칸느영화제에서 소개됐을 때부터 “저 친구는 누구냐?”는 이야기가 외국 관객들로부터 나온 바 있고, <이터널스> 같은 마블 작품의 슈퍼히어로로도 등장한 바 있으니 그가 출연하는 <황야>라는 작품에 대한 기대감 역시 글로벌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OTT 스트리밍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서 <황야>는 넷플릭스 영화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29일 현재). 한국은 물론이고 대만, 일본, 홍콩 같은 아시아국가 나아가 프랑스 같은 유럽에서도 글로벌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사실 <황야>는 평가도 낮고 평점도 낮은 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마동석이 나오는 작품에서 작품성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대신 관객들이 기대하는 건 이미 정해진 코스를 달리는 걸 반복해도 그 때마다 확실한 쾌감을 안겨주는 롤러코스터 같은 효능감이다. <황야>의 상당 부분이 마동석표 롤러코스터에 기대고 있다는 건, 이 작품과 세계관을 같이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비교해 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이병헌의 호연이 돋보였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속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을 통해 이른바 ‘아파트 공화국’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진지하게 담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황야>는 그 세계관만 가져왔을 뿐, 사실상 마동석이 디스토피아에서 펼치는 <범죄도시> 같은 작품에 가깝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마동석의 세계에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는 걸까.

 

그건 불안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사회가 만들어낸 페르소나로서의 마동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벌해진 사건들을 매일 같이 접하게 된 대중들로서는 마동석 같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잠시나마 곁에 두고픈 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심지어 세상이 무너져도 그 옆에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든든함에 대한 희구. 편안함을 넘어서 심지어 그 공포를 스릴로 바꿔 즐길 수도 있게 해주는 그런 존재에 대한 갈망이 마동석 신드롬에는 어른거린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범죄도시3’의 액션과 웃음은 극장에 최적화되어 있다

범죄도시3

마동석이 돌아왔다.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된 마동석이다. <범죄도시2>가 지난해 엔데믹 분위기에서 천만 관객을 넘어선 작품이 됐을 때, 이미 마동석이라는 브랜드는 어느 정도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범죄도시>는 마동석에게 관객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캐릭터로 풀어낸 작품이 됐으니 말이다. 

 

마동석에게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시원시원한’ 사이다 액션과 덩치와는 상반되게 귀엽게 느껴지는 캐릭터에서 나오는 빵빵 터지는 웃음이다. <범죄도시3>도 바로 이 관전 포인트들을 정확히 겨냥했다. 광수대에서 신종 마약 범죄를 추적하면서 그 배후인물인 주성철(이준혁)과 야쿠자 리키(아오키 무네타카)와 대결하게 되는 것이 <범죄도시3>의 스토리다. 

 

마동석에게 관객이 원하는 건 굉장히 복잡한 서사도 아니고, 따라서 뒤통수를 치는 반전은 더더욱 아니다. 첫 등장에 떡 벌어진 등판만 보고도 어딘가 기대감을 갖게 되는 액션이 가장 중요하다. 척봐도 뒷목을 잡게 만드는 확실한 빌런들이 등장해야 하고, 그들이 괴물형사 마석도(마동석)를 못 알아보고 깝죽대는 모습이 나오면 벌써부터 관객들은 기대한다. 주먹 한 방으로 단박에 기절할 거라는 걸. 

 

마동석의 주먹 액션을 극대화하기 위해 <범죄도시>는 사운드에 공을 들였다. 주먹으로 내려치는데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폭발적인 굉음이 터져 나온다. 이런 사운드는 극장에서 봐야 더 피부에 느껴진다. 특히 돌비 사운드로 보면 주먹이 날아가고 작렬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날아가는 광경에 의자가 진동할 정도의 실감나는 사운드가 겹쳐진다. 귀가 시원한 정도가 아니라 몸이 짜릿짜릿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인물이나 그가 상대할 빌런들이 시종일관 등장하는 영화는 관객들을 긴장시킬 수밖에 없다. 마치 공포영화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튀어나올 때 사운드 효과가 더해지면 공포감을 극대화되기 마련이고, 그래서 무언가 튀어나오기 전의 긴장감 역시 최고조로 커지는 그런 불안감이 <범죄도시>에는 깔려 있다. 

 

마동석은 관객이 느끼는 이 불편한 긴장감을 두 가지 차원에서 시원한 카타르시스로 바꾼다. 하나는 앞서 말했던 시원한 액션이고, 다른 하나는 툭 던지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로 긴장을 이완시키는 빵빵 터지는 웃음이다. ‘마블리’라고 불릴 정도로 캐릭터가 생겨난 이 인물은 산만한 덩치지만 때론 귀요미의 모습으로 때론 무식하게 보일 정도로 일단 몸부터 움직이는 모습으로 웃음을 만들고, 전작들에서 나왔던 ‘미워할 수 없는 악역들’인 장이수(박지환) 같은 초롱이(고규필), 양호(전석호) 같은 인물들과의 티키타카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긴장감을 카타르시스로 바꾸는 마석도라는 괴물형사는 잔혹한 사건사고들이 넘쳐나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조차 불안해지는 현실에 ‘안전한 판타지’를 주는 인물이다. 살벌한 빌런들이 넘쳐나도 어딘가 마석도가 등장하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영화 속에서 “경찰은 민중의 몽둥이”라고 툭 던지는 마석도의 말에 관객이 빵빵 터지는 건, 그 표현이 우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영화 속에서나마 몽둥이 역할을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해져서일 게다. 

 

사실 스토리는 별 거 없다. 하지만 <범죄도시3>에서 놀라운 스토리를 보기 위해 보는 관객은 별로 없지 않을까. 그보다는 105분 간 펼쳐지는 액션과 웃음의 사이다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클 게다. 그런 점에서 <범죄도시3>는 사운드 확실하고 함께 웃어 더 즐거울 수 있는 극장에 더 어울리는 영화다. 집에서 TV로 본다면 어딘가 허전할 수밖에 없는.(사진:영화 '범죄도시3')

‘시동’, 한 발 뒤로 물러선 마동석이어서 더 좋았던 건

 

마동석은 마동석을 연기한다는 말이 있다. 또 마동석은 하나의 장르라는 얘기도 있다. 그만큼 마동석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그의 존재감이 작품 전체를 장악한다는 뜻일 게다. 물론 그건 좋은 의미지만 마동석에게도 또 작품에도 반드시 좋을 수만은 없다. 결국 작품이란 여러 배우들이 골고루 보여야 그 울림이 커질 수 있고 마동석 자신도 자신이 아닌 다양한 캐릭터를 만나야 배우로서도 더 확장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화 <시동>은 마동석을 대단히 현명하게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관객들이 ‘마동석 영화’라고 부르는 작품에는 늘 기대하는 것들이 있다. 손바닥 하나에 붕붕 날아가는 악당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물론 <시동>에도 그런 장면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시동>은 그런 요소들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는다.

 

대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들, 이를테면 학교도 중퇴하고 공부보다는 돈을 벌겠다며 가출한 택일(박정민)이나 어쩌다 사채업 일에 빠져들게 된 그의 친구 상필(정해인), 만만찮은 복싱 실력으로 걸 크러시를 보여주는 경주(최성은) 또 주방장을 꿈꾸는 배달원 배구만(김경덕) 같은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입체적으로 들려준다.

 

물론 마동석이 연기하는 거석이라는 인물은 가출한 택일이 찾아가게 된 장풍반점의 주방장이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포스가 저절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풍반점을 두고 벌어지는 깡패들의 폭력 앞에 그는 전면에 좀체 나서질 않는다. 대신 거석이 초반 내내 보여주는 건 이 캐릭터가 주는 유쾌한 코미디적인 요소들이다.

 

<시동>은 그래서 이 만만찮은 포스를 숨기고 있는 거석이 언제 폭발할 것인가를 계속 기대하게 만들며 영화에 몰입시킨다. 그러면서 장풍반점에 오게 된 사람들과 그 반점을 운영하는 공사장(김종수) 그리고 택일의 친구인 상필과 택일의 엄마 정혜(염정아)가 처한 녹록찮은 현실들을 찬찬히 담아낸다.

 

코미디적 요소로 웃음을 계속 유발하지만 그 뒤에 남겨지는 짠한 현실들이 어떤 페이소스 같은 걸 그려낸다. 그것은 청춘들의 막막한 삶이고 또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이 점점 더 밑바닥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우리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래서 웃음은 조금씩 짠한 연민과 공감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마동석 영화들이 이런 현실에 대한 통쾌한 주먹질로 사이다 판타지를 제공해왔다면, <시동>은 그보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선택한다. 결국 제목에 담긴 것처럼 영화는 어떻게 삶의 새로운 시동을 걸 수 있는가에 대한 단순하지만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누군가가 주는 판타지를 기대하기보다는 “소중한 건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

 

마동석이 한 발 뒤로 물러나 있어서 <시동>은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다. 뻔한 마동석 영화가 아니라 여러 인물들이 살아나 그 이야기를 통해 어떤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가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동석이라는 배우에게도 새로운 시동을 걸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보인다. 작품을 자신의 존재감으로 끌고 가기보다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작품을 살리는 배우 본연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니 말이다.(사진:영화'시동')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