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녀석들>, 순간 <미생>보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이에겐 정규직 채용의 기회와 대폭 연봉 인상을 약속드립니다.” <나쁜 녀석들>의 이 대사를 들으며 순간 <미생>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대사는 나쁜 놈들 잡는 나쁜 놈들이라는 기발한 설정의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 나오는 것이다. 이 대사를 던지는 황여사(이용녀)라는 인물은 인신매매는 물론이고 멀쩡한 사람의 장기를 빼내 팔아먹는 이른바 회사의 대표 정도 되는 인물이다.

 

'나쁜 녀석들(사진출처:OCN)'

이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비리 형사를 가장해 들어온 나쁜 녀석들은 그러나 정체가 들통 나면서 수십 명의 칼든 이 회사의 사원들에 둘러싸인다. 출입구는 통제되고 인터넷 사내전화 핸드폰을 비롯한 모든 통신기구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이들을 도와줘야할 후위의 타격대들 역시 황여사에 월급(?) 받는 나쁜 놈들이다.

 

오구탁(김상중)은 황여사를 인질로 해서 회사를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칼든 회사원들은 끝없이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좀비물의 새로운 해석처럼 보인다. 밀폐된 공간은 공포감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멀쩡한 사람의 장기를 빼내는 수술대는 좀비 영화가 갖고 있는 컬트적인 느낌마저 준다. 게다가 이 회사에는 아이들마저 그 끔찍한 현장 속에 붙잡혀 있다.

 

나쁜 놈들의 끝장. 이것이 좀비물과 유사하게 여겨지는 건, 좀비라는 제거해야할 당위성을 두고 가장 잔인하게 그들을 제거하는 이 드라마의 방식이 좀비물을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들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해도 사람이 날아가는 박웅철(마동석)의 폭력은 시원시원한 액션으로 돌변한다. 이정문(박해진)의 사이코패스적인 치밀함은 그 괴물들을 제거하는데 맞춤이고 마치 칼날 같은 날카로움을 보여주는 정태수(조동혁) 역시 저들 편이 아닌 우리 편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돈이면 사람 장기든 뭐든 빼내는 이 괴물 같은 집단을 황여사의 회사로 비유해내는 장면은 <나쁜 녀석들>이 왜 그토록 대중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회사의 비정규직 문제와 사람 등골 빼먹는 노동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지시 하나면 좀비처럼 달려드는 회사원들의 이야기와 맞아 떨어지며 이 만화 같은 드라마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사실 이 이야기가 어떤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그저 보여주기 위한 폭력으로만 흘러갔다면 이런 대중들의 열광을 가져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녀석들>은 그 안에 샐러리맨이 봐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현실적인 상징들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조직폭력배에 연쇄살인범과 살인청부업자로 구성된 나쁜 녀석들에 자꾸만 동조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동조 끝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쩌다 우리는 이토록 <나쁜 녀석들>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번뜻 떠오르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괴물처럼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쁜 녀석들에게 갖게 되는 정서적인 지지와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살풍경한 현실. <나쁜 녀석들>을 보며 느껴지는 마음 한 구석의 시원스러움과 끔찍함의 정체다.

 

<군도>, 민란을 웨스턴처럼 보는 즐거움 혹은 불편함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갈아치우며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는 제목이 주는 선입견이 있다. ‘군도민란이라는 단어는 분명 우리가 처한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이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이라고 해도 그것이 상영되는 건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이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지금의 막막한 현실이 투영된 것으로 군도민란이라는 단어를 읽게 된다.

 

사진출처: 영화 <군도:민란의시대>

실제로 영화가 갖고 있는 이야기 설정 또한 지금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탐관오리가 등장하고 정경유착이 나온다. 그리고 지리산 추설이라는 의적들이 내뿜는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에도 현실의 울림이 들어가 있다.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이라는 반복되는 대사만을 생각해보면 영화는 심지어 민중봉기의 의미를 담은 영화처럼 오인된다.

 

하지만 제목과 이런 이야기 설정들이 주는 선입견을 갖고 <군도>를 보게 되면 100%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군도>의 소재일 뿐, 이 영화가 하려는 스토리텔링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군도>는 철저히 오락영화를 지향했다. 그래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말을 타고 떼 지어 달리며 한 사람 한 사람 스틸 컷으로 캐릭터가 설명되는 장면에서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를 그리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바로 이 부분에서 호불호는 갈라진다. 만일 <군도>를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웨스턴 오락영화로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 펼쳐지는 활극의 묘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민란이 상기시키는 핍박받는 백성들의 무게감을 떨쳐낼 수 없다면 이런 소재를 이렇게 오락으로 그려도 되나 하는 불편함까지 가질 수 있다.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는 인물이 가진 아픔이나 고통에 집중시키지 않는다. 대신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로 어떤 재미를 보여줄 것인가에 집착한다. <황야의 무법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가 왜 그렇게 떠돌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심지어 그는 영화 속에서 이름 없는 자로 불린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총을 쏘고 머리를 써 상대방을 속이는가 하는 트릭의 재미를 보여줄 뿐이다.

 

이런 사정은 <군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찌 어찌 해 지리산 추설이라는 의적 집단에 들어오게 된 인물들은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가를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해주기보다는 짧게 캐릭터를 설명하듯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 공감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각자 가진 능력으로 대변되는 캐릭터다. 천보(마동석)는 힘을 대변하고, 금산(김재영)은 빠른 속공을 대변하며, 땡추(이경영)는 전략가를 대변하는 식이다.

 

이처럼 가볍게 캐릭터화된 인물들이 조윤(강동원)이라는 절대 악인이자 고수와 대결하는 과정은 그래서 절절함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액션 활극이 보여주는 재미에 더 치중되어 있다. 심지어 인물의 죽음조차 그다지 슬프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카로니 웨스턴을 보면서 인물의 죽음에 감정이입이 과도하게 되지 않듯이 <군도> 역시 액션 활극으로 그려지면서 인물의 감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든다.

 

사실 핍박받는 민중의 봉기를 소재로 한다고 해서 모두 절절한 드라마를 깔아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핍박받는 민중들의 죽음이 절절하게 다가오지 못하고 액션 활극의 소재처럼 활용되는 부분은 지금의 대중들의 정서에는 상당부분 부딪치는 면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군도>는 그래서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액션 활극이거나 혹은 불편한 민중 봉기 소재의 영화거나.

 

작가, 배우, 연출자, 삼박자를 이룬 '닥터챔프'

이토록 건강한 드라마가 있을까. 독기서린 대사와 과장된 설정이 난무하는 요즘 드라마들 사이에서 '닥터챔프'는 이례적인 드라마였다. 잔잔하지만 보는 이를 충분히 매료시키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노지설 작가는 이 작품의 첫 번째 발견이다. SBS특집극 '깜근이 엄마'로 일찌감치 그 가능성을 선보였던 노지설 작가는 '닥터챔프'를 통해 드라마가 자극적인 설정이나 대사 없이도 충분히 우리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노지설 작가가 6개월 간 밀착취재한 태릉선수촌의 갖가지 소재들은 김연우(김소연)와 이도욱(엄태웅)이 만나는 수많은 선수들의 이야기로 드라마를 풍부하게 했다. '닥터챔프'는 김연우와 이도욱, 그리고 박지헌(정겨운)과 강희영(차예련)이 엮어가는 4각 멜로를 틀로 갖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갖고 있는 직업의 두 세계, 즉 태릉선수촌 주치의와 국가대표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드라마였다. 두 개의 전문분야를 한 작품 속에서 풀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노지설 작가는 그러나 이를 훌륭하게 봉합해냈다.

무엇보다 노지설 작가가 보여준 군더더기 없는 상황 전개와 대사는, 엉성하게 짜여진 구성과 사족처럼 덕지덕지 붙여진 대사들이 난무하는 작금의 이른바 막장드라마들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단 한 마디를 던져도 충분히 감정이 이입되게 만드는 그 집중력은 드라마에 어떤 여운의 미학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또한 마음을 설레게 하는 멜로가 가능하고, 그 속에 따뜻한 인간의 체온을 넣을 줄 알며, 또 사회적인 이야기까지 그 속에 담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노지설 작가의 다음 작품을 벌써부터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물론 이런 작가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연기를 통해 보여준 배우들이 없었다면 '닥터챔프'는 그렇게 빛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닥터챔프'가 발견한 두 번째는 주연에서부터 조연까지 아우르는 배우들의 재발견이다. 정겨운은 그간 타 작품에서 일관되게 보여졌던 '도련님 이미지'를 단번에 지워버렸고, 대신 그 위에 때론 귀엽고 때론 엉뚱하며 때론 강인하면서도 때론 부드러운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면모를 세웠다. 박지헌은 정겨운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부여했다.

이미 '아이리스'의 여전사에서 '검사 프린세스'의 엉뚱 발랄녀를 연기하며 그 연기 영역을 넓혀왔던 김소연은 이 작품을 통해 확실한 연기자로서의 면모를 재확인시켜주었다. 조금은 무신경하지만 따뜻한 가슴을 가진 김연우라는 캐릭터는 김소연을 통해 100% 소화되었다. 이것은 '선덕여왕'을 통해 일찍이 강인한 이미지를 보였던 엄태웅에게도 마찬가지다. 엄태웅은 어딘지 비뚤어진 듯 보이지만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이도욱을 입술을 약간 비트는 얼굴만으로도 표현해냈다. 또 이도욱의 상대역으로서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인 차예련도 빼놓을 수 없다.

'닥터챔프'는 무엇보다 조연들의 발견이 많은 드라마다. 유도팀 감독인 오정대 역할을 소화한 마동석은 최근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듯 이제 외면적인 연기를 넘어서 내면 연기가 물이 올랐다. 유도선수로서 박지헌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유상봉을 연기한 정석원이나 신예이지만 강인한 인상을 남긴 고범 역할의 임성규, 아이돌 가수지만 연기를 잘 소화해낸 강우람 역할의 신동 등등, '닥터챔프'는 짧은 연기에도 굵직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들을 발견해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노지설 작가가 만들어낸 공감 가는 캐릭터들 덕분이지만, 이를 깔끔한 영상으로 만들어낸 박형기 PD의 공이기도 하다. 전작인 '칼잡이 오수정'으로 섬세한 연출력을 선보인 박형기 PD는 '닥터챔프'를 통해 스포츠의 세계와 의학의 세계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그 속에 따뜻한 사람들이 보이는 드라마를 그려냈다. 담담하면서도 감정의 밀도를 프레임 속에 잡아넣는 힘은 박형기 PD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작품의 편성 시간대로 인해 그다지 큰 시청률을 얻지 못했지만 '닥터챔프' 만큼 '발견'을 많이 하게 만든 작품도 드물다. 차기작이 기대되는 노지설 작가와 정겨운, 김소연, 엄태웅, 차예련, 마동석, 정석원, 임성규 같은 배우들, 그리고 무엇보다 박형기 PD 같은 건강한 감독의 발견은 그 어떤 시청률보다 더 값진 성과라고 생각된다. '닥터챔프'는 우리에게 하나의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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