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의 대비를 아는 배우, 주지훈의 여러 가지 얼굴

조명가게

“그 아저씨가 세상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지.” 디즈니+ 드라마 ‘조명가게’에서 간호사 영지(박보영)는 원영(주지훈)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원영은 암흑뿐인 사후세계에 유일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조명가게 주인이다. 빛이 너무 눈부시다는 핑계로 늘 선그라스를 끼고 있지만 사실 그건 의식을 잃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배회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고양이 같은 눈빛을 가졌다)을 숨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선글라스의 용도는 정체를 숨기는 것만이 아니다. 눈빛으로 드러날 수 있는 속내를 숨기는 것도 그 중요한 용도다. 원영은 그 곳이 사후세계인지도 모른 채 조명가게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도 또 속내도 숨기려 한다. 그런데 그건 그들을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 곳에 대한 기억을 갖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다. 의식을 잃고 사후세계에 발을 디뎠지만 다시 의식을 되찾고 돌아갔을 때 기억의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영지가 원영에 대해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하다고 말한 건 그런 이유다. 

 

무뚝뚝한데 은근 따뜻한 이 배역에 주지훈만한 연기자는 없어 보인다. 주지훈은 지금껏 해왔던 연기들 속에서 무표정을 통해 표정을 극대화하는 연기를 줄곧 선보여온 배우다. 예를 들어 ‘마왕’ 같은 작품에서는 복수를 꿈꾸는 오승하라는 인물이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등장하는데, 그래서 그가 가끔 살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을 때면 마치 악마 같은 섬뜩한 느낌을 자아낸다. ‘킹덤’에서도 왕세자지만 후궁에서 난 서자로서 계비의 위협을 받으며 각성하는 그 변화 과정을 주지훈은 무표정에서 시작해 생존하기 위해 점점 일그러져가는 얼굴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준 바 있다. ‘지배종’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폭발사고로 병사들을 잃고 사건을 추적하는 우채운이라는 인물을 속내를 알 수 없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연기해냄으로써 그 속내가 드러날 때의 반전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런 면모는 멜로 연기에도 똑같이 드러난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 같은 설정을 가진 드라마다. 석지원(주지훈)과 윤지원(정유미)은 그 집안이 원수지간이다. 두 사람 역시 학창시절부터 티격태격하며 자라왔고 그러다 서로 좋아하게 됐지만 사소한 오해로 관계가 틀어지면서 애증이 싹텄다. 그리고 18년이란 세월이 흘러 다시 이사장과 체육교사의 관계로 다시 만나면서 그 관계가 이어진다. 어찌 보면 뻔한 구도지만, 이를 흥미롭게 만드는 건 석지원과 윤지원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다. “나랑 연애합시다. 라일락 꽃 피면.” 이런 내기를 석지원이 툭 던지는 내면에는 진짜 다시 윤지원과 연애 하고픈 마음이 숨겨져 있지만, 그는 겉으로는 마치 내기에서 윤지원을 이기고픈 마음이 앞서고 있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렇게 속내를 숨기다가 결국 석지원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을 윤지원에게 고백한다. “우리 그만합시다. 난 안되겠어. 그러니까 이딴 내기 집어치우고 나랑 진짜 연애하자. 윤지원.” 반듯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무표정을 하고 있던 이가 어느 순간 감정을 툭 드러내며 표정을 보여줄 때 전해지는 효과를 주지훈만큼 잘 알고 있는 배우는 없다. 

 

‘하이에나’ 같은 법정물에서도 주지훈은 윤희재라는 변호사 역할로 경쟁 관계에 있는 변호사 정금자(김혜수)와 대립 구도를 만들며 매번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스펙 없이 맨몸으로 부딪쳐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정금자에게 서서히 마음이 움직이고 그래서 그녀의 편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무표정에서 시작해 으르렁거리다가 멜로의 눈으로 바뀌어가는 주지훈의 얼굴이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무표정이 오히려 효과를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의 반전은 여러모로 모델로 시작한 그의 필모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옷을 강조해야 하는 모델들의 경우, 얼굴 표정은 최대한 절제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간간히 드러내는 표정은 오히려 그 전달하는 감정을 더 극대화시킨다는 걸 모델에서 연기자로 넘어오며 그는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주지훈의 이런 연기적 면모는 한 작품 안에서만 보이는 게 아니다. 일련의 작품 선택 과정을 보면 익숙한 얼굴이 전혀 다른 배역을 차기작으로 선택함으로써 그 반전효과를 내곤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궁’으로 주목받으며 주로 멜로 연기를 해왔던 주지훈은 ‘마왕’ 같은 스릴러로 진지하고 무거운 얼굴을 보여줬다. 또 ‘신과 함께’ 같은 영화를 통해서 너무나 가볍게 여겨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여주더니 ‘암수살인’에서는 살벌한 희대의 살인마를 연기했다. 선과 악,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가는 배역 선택은 그래서 매번 ‘같은 배우 맞아’라는 반응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조명가게’는 그래서 주지훈이라는 배우의 특징을 가장 잘 담아낸 작품으로 보인다. 그건 어둠과 빛의 대비를 세계관으로 갖고 있는 ‘조명가게’에서 원영 역시 어둠 같은 무뚝뚝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빛의 따뜻함을 숨기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아파트 붕괴 사고로 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던 이 인물은 딸을 살리는 대가로 사후세계의 조명가게를 맡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조명가게를 찾아온 딸을 우연히 만나는 순간, 드디어 선글라스로 가렸던 그의 감정이 폭발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배회하는 이들을 위해 조명가게를 맡아온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마치 그 곳을 찾는 이들을 딸처럼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숨겨져 있었다는 게 그 순간 드러난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게 무표정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마치 기계처럼 단조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감정이 밖으로 드러날 때 생겨나는 인간의 증명. 그건 어쩌면 건조한 현대사회를 촉촉하게 해주는 희망 같은 것이 아닐까. 주지훈의 연기는 바로 그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 오히려 더 빛나는 백열전구가 주는 희망을.(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홍천기’, 청춘들을 통해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

홍천기

앞을 보지 못한다는 건 어떤 고통일까. 아마도 누구나 당연한 듯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진 채 태어난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고통일 게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청춘들은 번갈아가며 앞을 못 보는 저주를 입은 채 살아간다. 마왕을 그림 속에 봉인하기 위해 영종어용을 그린 아버지 홍은오(최광일)로 인해 홍천기(아역 이남경)는 앞을 못 보는 마왕의 저주를 받은 채 태어난다. 한편 마왕의 봉인식을 주관했던 하성진(한상진)은 토사구팽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그로부터 9년 후 마왕의 저주로 인해 오랜 가뭄이 찾아오고 그래서 기우제를 올리는 날 홍천기와 하성진의 아들 하람(아역 최승훈)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성주청 국무당 미수(채국희)가 하람을 인신공양의 제물로 쓰려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마침 주향대군(곽시양)이 봉인을 열어버린 마왕이 튀어나와 하람의 몸에 깃들면서 살아남게 된다. 대신 그 순간 삼신(문숙)이 등장해 하람의 몸에 마왕을 봉인하기 위해 눈을 가져가고, 대신 그 눈을 홍천기에게 맡긴다. 이로써 앞을 못 보던 홍천기는 눈을 뜨게 되고 하람은 앞을 못 보게 된다. 

 

마왕이 등장하고 그로 인한 저주를 막기 위한 삼신이 등장한다. 그러니 판타지라도 사극의 배경을 가져온 <홍천기>의 시작은 그 장면 자체가 낯설기 그지없다. 사극에 마왕을 CG로 표현해 넣는다는 건 제아무리 잘 표현해도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밖에 없어서다. 하지만 장태유 감독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앞부분에 대놓고 다소 황당하고 이질적인 이 판타지의 면면들을 과감하게 채워놓는다. 마치 한 편의 설화처럼 전제해 놓고, 그 이질적인 판타지 이후에 차근차근 사극 특유의 색깔을 덧칠해 시청자들을 몰입시키겠다는 연출의도다. 

 

기우제 날의 엇갈린 운명이 있던 날로부터 19년 후, 성인이 된 홍천기(김유정)와 하람(안효섭)은 저마다의 매력으로 이 사극의 시청자들을 다시금 몰입시킨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남다른 그림의 재주를 가진 홍천기는 모작을 그려 번 돈으로 마왕의 저주로 광증이 생긴 아버지를 어떻게든 고쳐보려 하고, 눈이 먼 하람은 그 와중에도 서문과 주부이자 신비로운 인물 일월성이란 이름으로 가족을 잃게 만든 왕실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그들은 저마다 아픔이 있고 그래서 그걸 넘어서기 위한 욕망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욕망에 눈이 머는 인물들은 아니다. 청춘이 마주한 만만찮은 고통 속에서 이를 벗어나려 애쓸 뿐. 

 

이 판타지 사극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앞을 못 본다’는 설정이나 눈이 갖고 있는 은유다. <홍천기>가 담고 있는 그림이라는 소재에서 ‘눈’은 우리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용 그림에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라 말했다는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장승요라는 화공의 이야기에서 나온 고사성어다. 그 고사성어를 <홍천기>는 정반대의 이야기로 끌어들인다. 눈을 그려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고, 눈을 그려 넣은 영종어용에 마왕을 깃들여 봉인하는 방식으로. 

 

<홍천기>에서 하람이 겪게 된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은 마왕을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봉인의 의미를 갖는다. 그건 그가 원해 벌어진 일이 아니고 고통스런 형벌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세상은 구원받는다. 청춘에게 내려진 고통이 세상을 구원하는 희생의 의미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람에게 봉인된 마왕은 홍천기를 다시 만나게 됨으로써 깨어난다. 그런데 하람의 봉인에서 빠져나온 마왕이 노리는 건 홍천기의 눈이다. 삼신이 옮겨 놓은 그 눈을 가져와야 자신이 진짜 깨어날 수 있어서다. 

 

여기서 하람은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마왕과 본래 자신 사이를 오가며 치열하게 갈등하는 존재가 된다. 홍천기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하람과, 그의 눈을 빼앗아야 하는 마왕이 그 한 몸에서 싸우게 되는 격이다. 과연 하람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 사랑일까. 욕망일까. 결말을 섣부르게 예단할 순 없지만 그 이야기에 화공인 홍천기의 그림이 한 역할을 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사람의 몸에 깃든 마왕을 그림으로 봉인해내는 것. 그 과정에서 하람과 홍천기는 어떤 운명적인 사랑을 그려내게 될까. 

 

판타지 사극이지만, <홍천기>의 이야기는 묘하게 현재의 청춘들을 위로하는 목소리가 얹어져 있다. ‘앞을 못 본다’는 그 설정의 은유가 그렇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청춘들은 그들 앞에 놓여진 어려움이 마치 자신들의 탓인 양 한탄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드라마는 시작부터 어린 하람(최승훈)과 홍천기(이남경)의 대화 속에 풀어놓는다. 

 

“너도 똑같애. 내가 앞을 보지 못해서, 아버지가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어머니가 날 낳자마자 돌아가셔서 난 친구가 없다.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 해 저주 받은 아이라고... 난 그냥 복숭아를 같이 먹고 싶었어.” 같이 복숭아 서리를 해 도망친 후 이를 질책하는 하람에게 홍천기가 그렇게 말하자 하람은 그것이 모두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미안해. 헌데 니 어머니가 널 낳고 돌아가신 것도, 네가 앞이 보이지 않게 태어난 것도, 아버지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도 네 탓이 아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너에게 벌어진 일이 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라구. 네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허니 어쩔 수 없는 일로 너를 탓하지 말아라.”

 

이 짧은 대사의 주고받음 속에 <홍천기>가 앞으로 펼쳐나갈 청춘들의 이야기에 머금은 위로의 정체가 숨겨져 있다. 그 현실 앞에 분노가 끓어오르지만(그것이 마왕이 튀어나오는 순간이 아닐까), 서로를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사랑이 있어(홍천기와의 로맨스가 그것일 게다) 해법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하람과 홍천기의 희생을 통해, 세상이 어려워도 그나마 살 수 있게 해주는 존재들이 바로 청춘이라는 걸 그려내는 것만으로 이 드라마가 주는 위로는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눈을 그려 넣어주지 못해 훨훨 날지 못하는 청춘이라는 용을 깨워낼 수 있기를.(사진:SBS)

작가의 역량은 어떻게 최대치로 발휘되는가

 

종영한 tvN 금토드라마 <기억>은 아마도 박찬홍 감독-김지우 작가 콤비의 인생작이 아니었을까. 이토록 시작부터 끝까지 얼개가 갖춰지고 완성도도 높은데다 대중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은 결코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콤비가 만들어낸 <부활>, <마왕>, <상어> 3부작의 총아가 모두 결집되어 있는 듯한 작품이 <기억>이다. <기억>은 복수극의 틀에서조차 벗어나 사회에 현실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사회극이면서도 동시에 한 가장의 인생을 깊이 들여다보는 휴먼드라마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인생작을 작가들이라고 늘 내놓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기억(사진출처:tvN)'

사실 <시그널>이라는 작품이 tvN에서 방영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을 때도 이것이 김은희 작가의 인생작이 아닐까 여겨진 면이 있었다. 장르물의 대가라는 건 이미 지상파에서 그녀가 해온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는 감지된 바 있다. 하지만 지상파에서 했던 그녀의 작품들이 좋은 기획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구성에 빈틈이 많이 보이거나 일관된 메시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하나의 완성도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에 반해 <시그널>은 마치 억눌렸던 예술혼이 터져버린 듯 거침이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완성도와 통일성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장르물이 갖는 재미를 소화하면서도 그 안에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이러니 <시그널>을 보며 시청자들이 인생의 작품이라고 얘기했던 것일 게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김은희 작가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물론 인생작이라고 해서 그걸로 작품의 성장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거기서부터 어떤 터닝포인트를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시그널>에 이어 <기억>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갖게 되는 건 그래서 tvN이라는 채널의 무언가가 이들 작가들로 하여금 인생작을 뽑아내게 하는 힘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도대체 이토록 역량 있는 작가들에게 tvN은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율성이다. 자신이 애초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끝까지 다 밀어 붙일 수 있게 하는 자유. 물론 그렇다고 기획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기획의 방향성이 갖춰지면 역량을 최대치로 뽑아낼 수 있게 하는 자율성은 작가들이 흔들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는 작품을 그려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은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지상파의 드라마들이 상당히 기획에 휘둘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최근 들어서 중국의 영향으로 많은 드라마들이 사전 제작되고 있지만, 우리네 드라마들은 지금껏 실시간 제작이 그 현실이었다. 그러니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대본이 수정되거나 심지어 새로운 작가가 투입되고 나아가 작가가 교체되는 경우까지 비일비재하게 생겨났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KBS <동네변호사 조들호>의 경우 메인작가인 이향희 작가를 제외하고 무려 5명의 작가가 교체되었다고 한다. 과거 개연성 없는 전개로 호화캐스팅에도 초라한 성적을 냈던 SBS <너를 사랑한 시간>은 작가가 교체된 후 기획PD가 작가로 참여하는 파행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작품에 시청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 시청률을 만들기 위한 간섭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면 작품은 사라지고 상품만 남겨지게 될 것이다. 작가가 애초에 생각했던 작품이 이리저리 휘둘리다 엉뚱하게 끝나버리는 결과가 생기는 것. 이것은 작가에게도 또 시청자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최근 tvN에서 방영된 일련의 드라마들, 이를테면 <시그널>이나 <기억> 같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건 작가의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영화 제작 인력이 투입되어 대본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연출의 공적이 있지만, 그래도 작품의 근간이 되는 작가 역량이 100% 발휘되는 드라마 제작 환경이 주효한 면이 있다.

 

시청자들도 달라졌다. 그저 시청률이 높다고 시청자들이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또 상업적인 선택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결과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시청자들은 좀 더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언제부턴가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이제는 지상파 드라마에서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지상파 드라마에서도 인생작을 내는 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기를.

<휴먼다큐 사랑>, 고인이 된 그가 가족을 위로하는 법

 

마왕 신해철. 그는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갑작스레 떠난 신해철을 위해 마련된 콘서트에서 선후배들의 입을 통해 불려지는 노래 속에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는 후배의 목소리를 빌어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하고 여전히 소리쳤고, 그의 아들 동원이는 화답하듯 난 아빠를 원해!”라고 외쳤다.

 

'휴먼다큐 사랑(사진출처:MBC)'

그는 떠났지만 가족들의 곁에 그는 여전히 자그마한 밥 그릇 앞에 앉아 있었다. 또 집 한 구석에 놓여진 그의 사진 속에 있었다. 가족들은 밥을 먹을 때나 아니면 사진 앞을 지날 때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 특별한 맛이라며 젤리를 아빠의 사진 앞에 놓고는 이제 마음껏 드시라는 딸 지우의 마음 속에, 또 그녀가 차를 타고 가면서 따라 부르는 재즈카페슬픈 표정하지 말아요같은 노래 속에 살아있었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가족을 향한 걱정이자 위로이자 격려였다. 가족에게 그 노래는 다정다감했던 아빠의 목소리이고 그가 여전히 전하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냄새로도 오래도록 느끼고 싶은 아내는 그의 베개 솜을 꺼내 아이들과 자신의 베개에 넣었다. 사라져가는 냄새를 통해서라도 그녀는 계속 그를 붙잡고 싶었다.

 

아내는 둘이 같이 웃었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특별히 어딜 갔던 일도, 특별히 함께 무언가를 했던 일도 아닌 함께 웃었던 일’.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행복했던 기억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그 아내의 행복한 기억 속에서 신해철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49제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 하지만 신해철의 그날 아내는 그가 좋아했던 문어와 갈비찜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문어를 아이들이 챙기며 하나씩 빼먹는다. 그 문어의 추억 속에서, 그걸 먹는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그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다. 마지막을 떠나보내며 팬들이 부르는 민물장어의 꿈속에서도.

 

그의 가장 좋은 옷을 챙겨 태우며 아내는 가족들 몰래 눈물을 삼킨다. 그녀는 그의 평안함을 기원하다가 아이들 잘 챙길께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떠나는 그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가 떠나고 난 그 빈 자리가 얼마나 클 것이라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의 빈 자리는 가족들이 하나씩 채워가고 있었다. 아내는 가장이 되어 더 일을 많이 하고 있었고, 아이들의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더 성장할 때까지 자신이 대신 버티겠다고 담배도 끊었다. 할아버지는 밤이면 그가 해왔던 문단속을 대신 한다. 그래도 동원이는 여전히 아이다. 누가가 잠시 자리를 비울라치면 견디지 못하는 그 아이를 이제 할머니가 맡는다. 그들은 서로가 조금씩 떠나간 그의 빈 자리를 채워간다. 위안 받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렇게 서로 똘똘 뭉쳐있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MBC <휴먼다큐 사랑>이 기록한 고 신해철의 다큐멘터리에 정작 신해철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예쁜 아내의 착한 마음 속에, 아빠를 진정으로 원하는 동원이의 마음 속에, 아빠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한다는 지우의 마음 속에, 아프게 가슴에 묻어두고 그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는 부모님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의 마음 속에.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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